백두대간 22차 21구간 :  죽령에서 고치령까지   

 

 

언제 :  을미년(15년) 물오름달 3월  스물이레 쇠날 밤  ~  스물여드레 흙날 (무박2일) 

 

누구랑 : 대간5기 산우님들         

 

어딜 :  죽령 ~ 제2연화봉 ~ 제1연화봉 ~ 비로봉(소백산정상) ~ 국망봉 ~ 고치령

                     (대간25.0km)           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후미기준)

 

 

이제 겨울은 추억의 길고 긴 그림자를 남기고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사계절 중 유일하게 붙여준 동장군이라는 이름답게 그의 품은 넓고 길고 높았다 마음까지도

서울에도 이제 움이 트기 시작하고 있는 생명을 위해 역시 장군답게 물러날 줄도 안다

조물주가 세상을 열 때 겨울과 여름 큰 산을 잘 넘기라고 봄.가을을 길게 주었을 텐데

갈수록 짧아져 봄의 기운을 느낄새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어찌됐던 인간 욕심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이재 대간팀도 이제 힘들지만 큰산 태백(백두)로 가는 과정에 작은 소백이 주는 의미를 생각하며

움트고 있는 생명에 대한 박수를 보내면서 소백의 정기를 받으면서 걷기 위해 길을 떠나본다

 

 

 

백두대간 소백산 구간 등로 

 

불 밝혀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촛대봉을 지나 참선을 통해 삼매경에 든 후 도솔천을 지나 욕계의 얼음밭을 성불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밟았다면

이번 구간은 사바세계에 내려오신 부처님을 상징하는 연화봉을 지나 부처의 완성이니 진신을 뜻하는 비로봉에 올라

부석사로 대표되는 불국토와 20개의 서원이 있는 유교문화의 모태인 영주문화의 중심무대가 되었던 소백산의 정기를 받고 

왕자인 마의태자가 신라의 국권을 회복하려다가 실패하자 엄동설한에도 베옷 한 벌만 걸치고 망국의 한을 달래며 바라 보았다는 국망봉을 지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조카와 삼촌사이에 넘을 수 없었던 금성대군과 단종의 한이 살아 있는 고치령에서 마무리를 하게 되는 구간이다

또한 단양과 이어졌던 인연도 고치령 직전 형재봉 갈림봉(1032봉)에서 다시 도계를 벗어나 영주시 속살로 들어가게 된다

 

 

 

 

너무도 빨리 도착한 죽령

죽령

경상도에서 충청과 경기 그리도 호남으로 넘나드는 고개는  죽령, 조령, 추풍령이 있는데 가장 높고 많이 이용하였던 고개가 죽령이였다고 한다.

『죽령옛길』은 <삼국사기>에 ‘신라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길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있다‘고 전해지는 오랜 역사의 옛길이다.

옛날 어느 도승이 짚고가던 대지팡이를 꽂은 것이 살아났다하여 죽령이라 했다 한다.

하지만 그 근방의 터박이들은 ‘죽을 똥을 싸야 오를 수 있는 고개’라 해서 ‘주글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천문대까지 잘 닦여진 포장도로를 따라 계속 오름을 시작하고 - 자세히 보니 차량통제 안내문...

1943년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 까지는 서울로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이길 뿐이었다고 한다.

1940년 무렵 영주사람들이 서울로 갈 때 죽령을 넘어 걷고 걸어서 꼬박 6일 걸렸다고 하니 바로 70 여년 전 일이다. 교통의 발달이 곧 소통인 것이다 

현재는국내에서 가장긴 죽령터널(4.6km)이 개통돼 충북단양과 경북영주를 연결한다.

 

 

계속 포장도로를 따르다 제2연화봉의 정상에있는 중계소(산상전망대) 갈림길을 지나면

 

석가모니가 마야부인의 겨드랑이에서 태어나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을 때 그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이는 바로 연꽃이 화생의 상징물이며  '세속에 드러난 진리'이며 우주 창조와 생성의 의미를 지닌 꽃이다

그러기에 사바세계의 번뇌와 집착을 벗고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불자들의 공통된 소망까지 담은 연꽃

부처님의 진신인 소백산 비로봉을 만나기 위한 길에 두개의 연화봉을 만들어 진리를 세속에 드러넨 것이리라

 

 

바로 사바세계에 내려오신 부처님을 상징하는 제2 연화봉(蓮花峰, 1357m)

 

 

석가모니 부처님은 희말리아산 기슭의 작운 왕국 카필라에의 룸비니동산에서 태어나 궁정에서 화려한 생활을 누리며 성장했다.

그러나 왕위도 버리고 사랑하는 아내 야소다라와 아들 라훌라마저 뒤로한 채 깨달음의 길로 나와 29세에 출가했다

6년간의 혹독하고 긴 죽음직전까지 이어진 고행은 또 다른 깨달음을 요구했고

35세에 깨달음을 얻고 45년 동안 부처님은 인도 곳곳을 맨발로 다니시며 숱한 사람들을 만나 자비의 마음으로 가르침을 펼치셨다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름 피지말고 정진하라'는 말을 남기고 80세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오로지 길 위에서 삶을 살다가셨다

 

 

관측소 모퉁이를 돌아 나오면 풍기읍의 야간 전망을 배경으로 다라실님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던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고뇌를 하고 길에서 묻고 수행하며 길에서 깨달음을 이루고,

길에서 사람의 갈 길을 열어주고, 제자들과 함께 길에서 주무시다 길에서 열반에 들었던 것이다

부처님의 생애는 한 인간이 태어나 출가하여 진리를 깨치고 부처가 되는 과정을 진솔하게 보여준 것이다

부처님은 언제나 어리석은 중생에게 길에서 길을 인도하며  바른 길을 가르쳐서 깨닫는 경지에 들어가게 하는 도사(導師)였던 것이다.

 

 

나도

 

 

부처님은 정신적인 깊이와 도덕적 위대성을 지니시고, 지혜와 자비를 갖추신 분으로서 인류에게 인간의 위대성을 보여준 것이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종교를 초월하여 부처님을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할 때마다 부처님을 닮아가다 보면 우리가 부처가 되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부처가 그랬듯 길에서 길을 찾고 산속에서 길을 찾고 있는 어렵지만 그래도 가야하는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인지도 모를 일이다

 

 

별바라기 봉우리가 많은데 왜 소백산에 천문대가 있을까? 생각하며 걷다 보니 천문대도 지나고

 

연꽃은 해가 뜨면서 서서히 피어나서 해가 지면서 서서히 오므리는 천의 색을 가진 우아한 꽃이다.

진흙수렁에서 자라면서도 세속에 드러낸 진리는 진흙수렁에 물들지 않고 더렵혀 지지 않은 깨끗함을 지닌 것이다

아침에 피어나서 세속의 모든 영욕탐욕을 모두 받아주고 따뜻한 햇살을 향해 구원하며 모두어주기에 향기로운 것이며

해가지면 언제그랬냐는 듯 모든 것을 덮어 주며 진흙속으로 삼키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제1연화봉 (아직 디카가 서툴러서  보기 힘들더라고 이해하세용)

 

희방사를 품고 있어 희방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기도 하다

희방계곡와喜方寺

소백산 영봉들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주변의 경관과 어울려 계곡의 운치를 더해주는 희방계곡은

풍기로부터 죽령에 이르러 희방사로 오르는 절경들이 위치한 계곡이다.

서거정(徐居正)은 꿈속에서 노니는 천혜의 곳 은 희방폭포가 있는 뛰어나게 아름다운 희방계곡이라고 격찬하였다.

신라현강왕  9년(883) 두운조사가 창건한 1500년이넘는 신라고찰로 소백산줄기의 남쪽계곡 깊숙히 자리하고 있다.

희방사는 두운조사가 호랑이 목에 걸린 비녀를 빼주어 살려주는데서 유래가 시작된다

 

 

제1연화봉도 지나고

 

비로봉으로 가는길 이제 여명과 함께 오늘 함께 해 주신 푸르나 총무님이 열어 준다

 

서서히 날이 밝아왔으니 왔던 길의 연꽂봉우리들이 아침이슬 머금도 피어나는 모습을 담아보기 위해 되돌아 보고

 

비로봉 직전 천동리 갈림길

천동리 갈림길

다리안 관광지는 다리안 폭포 주변에 조성한 관광지를 일컫는 명칭이다.

천동다리의 밑으로 아름다운 폭포가 흐르는데,

다리안(橋內)폭포라 하여 이곳에 들어오려면 꼭 구름다리를 건너야만 들어올 수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이다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초원지대 - 이곳이 소백산 주목군락지로 감시초소도 보인다

 

소백산 정상인 비로봉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과 경상북도 영풍군 순흥면 사이에 있는 산인 소백산은 1987년 우리나라에서 18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우아한 곡선 능선을 따라 남천ㆍ죽령 등 아름다운 계곡을 품고 있으며 소백산 능선에서 뻗어내린 깊은 골은 단양팔경을 빚어냈다

북서쪽으로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여 이른바 고위평탄면을 이루며, 그 위를 국망천이 흘러 남한강에 유입된다

낙동강 상류의 지류인 죽계천이 발원한다.

 

 

'몸의빛, 지혜의빛이 법계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비로봉의 의미를 담아 때 맞춰 떠오른 태양이 세상을 비추기 위해 떠오르고 있었다

 

소백산의 ‘백산白山’은 ‘희다’, ‘높다’, ‘거룩하다’ 등의 뜻에서 유래한 것인데, 소백산은 여러 백산 가운데 작은 백산이라는 의미다.

예로부터 신성시되어온 산으로 삼국시대에는 신라ㆍ백제ㆍ고구려 3국의 국경을 이루어 수많은 역사적 애환과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

겨울이면 항상 머리에 서리꽃을 이고 있어 小白山이라 불린다. 또한 소백산은 '작은 백두산이라는 의미도 품고 있다.

부드럽지만 백두산의 기상을 품고 있는 산이 바로 소백산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둘째 가라하면 서러울 소백의 찬바람을 맞으며 후미를 기다리며 함꼐하신 대간 산우님들 감솨

 

비로(毘盧)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줄임말로 '몸의빛, 지혜의빛이법계에두루비치어가득하다'는뜻으로 '부처의진신(眞身)'을일컫는말이다.

우리가 저수령에서소백산 비로봉까지 오는 과정에 만난 봉우리들은 결국 부처님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로자나불은 종파마다각각달리불리는데, 화엄종에서는석가모니불, 진언종에서는대일여래, 천태종과법상종에서는법신불등으로부르는부처다

 

 

단체사진(잡스님 작품)

 

절에서 대웅전이란 석가모니를 모신 전각이니 그 큰영웅[大雄]이 바로 불교에서 으뜸이신 부처, 석가모니를 뜻한다.

그래서 산 중에서도 가장 높고 의미있는 봉우리에만 비로봉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노고단의 지리산이 민족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다면 비로봉의 소백산은 불교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겨울이면 눈꽃과 상고대 초겨울에 피는 서리꽃, 또 곧 다시 철쭉이 피어나며 천상의 화원을 만들면 비로의 완성이다

 

 

 

아침새벽 햇살을 받고 있는 삼가동으로 내려가는 오른쪽 금계호를 품고있는 금선계곡을 담아 본다

100대명산팀이 소백의 겨울산행으로 이 능선을 따라 올라왔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금선계곡과 錦仙臺(정)

소백산의 영봉 비로봉에서 남으로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풍기의 삼가동, 욱금동, 金鷄洞에 이르는데, 이 절승의 골짜기가 금선계곡으로 북천이라고도 한다.

소백산의 실개울이 모여서 심산유곡을 흘러 내려오는 동안 거울처럼 맑은 시내가 되어 기화요초의 숲을 스치고 괴암절벽의 기슭을 돌아 정감록의 마을 금계동에 이른다.

조선 인조 때의 학자이며 퇴계의 문하생인 황준양이 큰 바위가 이룬 대를 금선대라 명명했다 하며,

당시의 풍기군수인 이 징계의 친필인 금선대란 서각이있고

그 금선대 위엔 황 준양의 후손들의 정자인 금선정이 있어 금선계곡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한다.

 

 

이제 다시 우리가 가야할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길게 병풍을 늘인 듯 한 능선을 잡아보고

 

어의곡 갈림길 직전 되돌아 본 고위평탄면인 초원지대로 이루어진 비로봉으로 향하는 목가적 풍경이 언제봐도 편안함을 준다

 

'소백산은 수많은 바위가 골짜기 낮은 곳에 있고, 산허리 위로는 돌이 없으므로 비록 산이 웅장하여도 살기(殺氣)가 적다.

멀리서 바라보면 봉우리가 첩첩이 솟아나지 않고 엉기어 있는 듯 하다.

떠가는 구름과 같고 흐르는 물과 같아서 아무런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형상이라서 많은 사람을 살릴 산이다'라고 했고

옛날 술사(예언가) 남사고는 소백산을 보고 문득 말에서 내려 절하면서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라고 했고,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피란에 첫째 가는 땅이다”고  했을 정도로 옛 선조들의 사랑까지받아 왔던 소백산을 실감한다

 

 

어의곡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이제 국망봉이 가까워지고 있다

 

우측 비로사와 좌측 초암사를 양옆에 거느리고 있는 가운데 오뚝 솟아 있는 원적봉도 담아보고

 

죽계구곡을 품고 있는 초암골로 내려가는 갈림길

초암골계곡

초암골 계곡에는 퇴계 선생이 죽계구곡이라 명명한 9개소의 명소가 있다.

소백산자락의 영봉과 국망봉으로부터 흘러나온 개울이 순흥 땅을 감돌아 백운동으로 흘러 사천으로 이어지는 계곡이 바로 죽계천이다.

이 황은 이 계곡의 아홉구비에 1곡은 백운동 취한대, 2곡은 금성반석, 3곡은 백우담, 4곡은 이화동, 5곡은 목욕담, 6곡은 청련동애,

7곡은 용추비폭, 8곡은 금당반석, 그리고 9곡은 중봉합류라 하여 죽계구곡이라 명명하였다.

또한 景畿體歌의대표적 작품인 안축(安軸)선생이 남긴 竹溪別曲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도 이름이 높다

 

 

초암사로 내려가는 갈림길 방향에서 소백의 철쭉군락지를 배경삼아 원적봉을 담아본다

 

국망봉

국망봉(1421m)

선조 때, 수철장(水鐵匠) = 무쇠로 주물 따위를 만들던 장인(匠人) = 배순(裴純)이 왕이 승하하자

이 곳에 올라와서 왕성을 바라보며 3년 동안 통곡하였다 하여 이 산을 국망봉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국망봉과 선달산에서 발원한 내성천 영주와 안동,문경을 거쳐 예천에서 태극모양의 회룡포를 만들고 

이 물길은 다시 황장산에서 발원한 금천을 문경  영순면에서 받아들인뒤 풍양면 삼거리에서 낙동강과 삼강을 이룬다.

 

 

국망봉에서 단체사진 - 잡스님 작품

 

국망봉에는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 온다.그 전설은 다음과 같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나라를 왕건에게 빼앗기고 나서

천년사직과 백성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명산대찰을 찾아 제천 백운면 방학리 궁뜰에 동경저[東京邸]라는 궁을 짓고 머물러 있었다.

왕자인 마의태자는 신라의 국권을 회복하려다가 실패하자 엄동설한에도 베옷 한 벌만 걸치고 망국의 한을 달래며

이 곳에 올라 멀리 옛 도읍 경주를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그 이후 이 곳을 국망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철쭉 군락지와 상월봉 - 상월봉의 부처를 닮고자 하는 바위의 고개가 부석사를 행해 뭔가를 구원하고 있는 듯하다

 

상월봉 직전 삼거리에서 모두 우회하고 나홀로 부처를 닮고자 하는 느낌이 드는 저 바위를 보기 위해 정상으로 올라간 까닭은?

 

우측상단에 上月佛이라는 각자刻字가 되어 있는데 심한 풍화로 눈으로만 겨우 확인이 된다. 잘보세요? 보이나요?  3기 때 확인하지 못했던 각자인데...

상월봉

上月佛!"  이 刻字는 1945년 구인사를 창건한 상월 원각대조사가 구봉팔봉을 거쳐 이 암봉에 올라 새겼다고 전해진다.

역시 좌측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바위로 접근이 어려워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 바위에는 보기에도 범접하기 어려운 기를 가지고 있어 그 외에도 많은 각자가 세겨져 있다(3기때 확인)

앞으로 계속 만나게 될 마의태자와 덕성공주도 국망봉에서 이 바위를 보며 망국의 한을 달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름이 세겨진 각자

  

상월봉에서 내려오며 신선봉 갈림봉과 우측으로 길게 늘여진 우리가 가야할 길

 

저번 구간과는 달리 밑에 얼음이 없어 걷는데는 불편이 없으나 밟힌만큼 굳건히 단단해짐을 느껴본다

 

을전 갈림길인 소백산에서 가장 낮은 늦은맥이제 - 을전은 충북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애 있는 마을로 지도상 새밭으로 표기되어 있다

 

신선들의 바둑판이 있고, 일반사람은 산을 오르기가 힘들고  신선들이나 다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신선봉갈리봉인데 우회한다

 

바로 헬기장이 나오고 이런 이정표도

 

이름이 아름다운 좌석리 연화동 마을로 내려가는 연화동 삼거리

 

헬기장을 지나면서 1032봉이 보이지만 역시 우회한다

 

이제 멀리 형제봉 갈림봉인 마지막 희망 또 다른 지도상 1032봉이 가운데 약간 솟아 있어 갈길이 만만치 않음을 예기하는 듯하다

 

날머리의 희망 좌석리에 있는  우리가 차를 타고 내려가다 보게 될 옥대(단산)저수지도 담아 보고

 

지도상 마당치인 듯 넓은 안부도 지나고

 

 

 

우리의 마지막 희망 단양과의 이별을 하고 영주시로 들어가는 형제봉갈림봉인 1032봉에 왔는데 여우를 방사했다고 줄입금지란다

 

영주시 속살로 들어와 우회하면 헬기장이 나타나며 마지막 863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863봉과 다음에 이어갈 950봉사이에 좌석리로 내려가는 도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우리곁에 다가와 있는 봄의 기운을 저번주에 전국에 내린 비가 얘길하려는 듯 일부지방은 봄가뭄의 해소까지 더해 주었다

그렇게 기다리뎐 봄이 언제부턴가 와 있는 듯한 착각속에 살다가도 겨울의 속내를 보고는 자주 놀라지 않던가

맘은 벌써 봄인데 지금도 아침져녘에 맞이하는 추위, 과연 계절과 계절사이에 있는 경계를 우리는 알 수 있을까?

있다면 있음과 없음의 계절의 경계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금 속리산의 3월이 실감을 선사한다

 

 

800고지에서 만나는 봄에 제일 먼저 꽃이 피는 나무인 생강나무가 봄이 이미 왔음을 알려주고

 

두꺼운 옷을 훌훌 털고 일어나 조금은 추워도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함에도 버리지 못하고

언제나 곁에 있을줄만 알았던 훌쩍 가버리려 하는 겨울에 채우지 못한 아쉬움

환절기로 얘기 되는 계절과 계절사이에 경계에 남겨진 우리 삶의 얘기들인 것이다

계절이 바뀌는 골목에서 이렇게 우린 저마다 타는 갈증으로 목말라 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정상에 무덤이 있는  863봉도 우회한다

 

벌써 3월 말 우리곁에 이렇게 봄이 이미 와있는데도 자꾸 가는 겨울을 얘기하게 하는 계절

짧다면 짧은 겨울에 잠시 채웠다는 만족감에 비었을 때의 일을 망각한 자의 자만과 욕심

채우지 못한 자의 채울 수 없었던 먼 나라의 얘기 같은 일들을 한탄하고 있지 않을까?

이래저래 환절기에 느껴보는 우리 세상사는 얘기이다.

이래서 세상이라는 이름으로 재미도 있고 재미도 없기다 한 것이다. 계절이라는 경계가 모호한 것처럼

 

 

드디어 오늘의 날머리 고치령, 오랜만에 날머리에 일찍 도착하여 여우로운 귀경길을 도와 준다

고치령(古峙嶺`770m)

고치령은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와 마락리를 잇는 고개이며. 태백산과 소백산의 경계이기도 하다

문경과 영주를 잇는 죽령, 영월 하동과 영주 부석을 잇는 마구령과 함께 소백산을 넘는 세개의 고갯길 중 하나 였다            

하늘이 점지해 준 명당이 존재한다는 양백지간(兩白之間) 고갯길. 소백산맥을 넘는 3개 고갯길 중 가장 가운데 위치한 고갯길이다.

 

 

마구령 방향에 있는 장승

이 고개는 또 영주(옛 순흥) 일대 상인들이 소금·생선·생필품 따위를 지게에 지고 마락리·의풍리·영월 등에 팔기 위해 넘나들던 옛길이기도 하다

신라시대에  '절터고개'라 불렸으나 세월이 흐르며 옛고개라는 뜻의 '고치'가 되었다. '대동여지도'엔  '곶적령(串赤嶺)'으로 적고 있다.

이는 고치령의 소리 옮김 표기로 같은 이름이다. 串의 음 ‘곶’과 赤의 일음(一音) ‘치’로 소리 옮김한 곶치령이 고치령으로 바뀐 것이다

 

 

금성대군과 단종대왕을 모신 산신각(산령각)

태백산신과 소백산신을 모시던 산신각이 함께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주민들에 따르면 남쪽 순흥으로 유배되었다가 안동에서 죽은 금성대군은 소백산신으로,

북쪽 영월에서 죽은 단종대왕은 태백산신으로 생각하여,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조카와 삼촌사이에 넘을 수 없었던,  고치령에 서려있는 한을 달래려 정월 열나흘이면 산신제를 지낸다고 한다.

금성대군과 단종의 밀사들이 오갔던 비운의 통로였기에 죽령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고치령(760m)은 그만큼 숨기고 싶은 길이다

 

고치령은 비운의 역사와 함께 옛 보부상들의 애환, 선조들의 생활상이 그런대로 잘 보존되고 있는 영남의 옛길인 것이다

 

 

우리가 내려온 반대방향으로 가면 마락리 방향이다

마락리 馬落里 영주시 단산면

말굴이(말굽이)라 부르는 절벽이 있는데, 옛날 짐 실은 말들이 여기서 자주 굴러 떨어졌다고 하여 지명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마을 앞 골짜기 바위에서 영월과 순흥을 오가던 단종과 금성대군의 밀사가 탄 말이 떨어져 죽었다 하여 붙여졌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행정구역상 영주시에 속하면서도 형제봉에서 도계가 단양땅으로 들어가기 떄문에 고치령고개가 가로막고 있어

마락리는 '영남의 외로움 섬'이라  불리우고 있다. 다시 한번 도계(행정구역)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오늘의 구간을 마치고 좌석리로 내려 온다

좌석리(坐石里)  영주시 순흥면

사과밭에 앉은 집채만한 바위가 있는데 그 이름이 앉은바위다. ‘좌석리’라는 마을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3기 백두대간 당시에 좌석리 주민의 트럭으로 이동했던 기억이 있는데 사과밭이 많았던 기억이 있다

만약에 이번에도 주민의 차를 이용했으면 확인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을 달래며

힘들게 삶의 고개를 넘기 위해 타고 넘었을 민초들과 단종복위를 위해 야간을 틈타 넘었을 혼들을 생각하며 마감한다

 

 

좌석리에 있는 옥대저수지를 지나

 

오늘의 뒤풀이 장소로 저번 구간에 이어 다시 한번 더... 대장님의 배려로 능이백숙과 오리고기로 오랜만에 만찬

 

이렇게 하루를 정리한다. 수고했습니다

 

 

부석사로 대표되는 불국토와 20개의 서원이 있는 유교문화의 모태인 영주문화의 중심무대가 되었던 소백산

고치령에서 좌석리로 내려와 풍기읍으로 들어오는 길목 순흥면에서 보게 된 순흥향교와 영주 소수서원, 순흥면 내리 벽화고분

그리고 곳곳에 숨어 있는 사찰들이 우리가 걸었던 소백산을 등지고 우릴 향해 있기에

피곤한 몸인데도 차창밖을 외면하지 못하고 계속 볼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일찍 도착한 만큼 일찍 시작된 산행

그런데 이번 처럼 시멘트 포장길을 걸으면서 어둠을 고마워한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그만큼 포장길이 길었던 탓도 있지만 넓은 만큼 자주 렌턴을 끄고 바라 본 소백의 하늘

왜 그많은 별바라기 산들이 많은데도 이 곳에 천문대를 세웠는지 조금이라도 느끼기 위해서이다

내 맘을 아는지 유난히 많은 별들이 동원되어 호응해 주었고

청명한 날씨까지 도와주어 쏟아지는 별들의 홍수속에 파묻혀 본 밤이었다

거기에 풍기읍에서 멀리서 보내오는 불빛까지 축하해 주고 있었으니...

거기에 다라실님도 똑 같은 마음으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고 하니

이제 낙동의 여전사의 이미지를 벗고 길에서의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진정한 산꾼으로 거듭나고 있읍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어둠속 진흙속에 묻혀진 연꽃봉들을 지나 비로봉에서 다시 되돌아 본 연화봉

새색시 단장하 듯 아침 이슬을 머금고 피어난 연꽃의 모습은 왜 소백인지를 알려 주는 듯 했다

 

풍부한 적설량을 자랑하며 대설원의 웅장함과 신비로움을 선사하는 겨울 눈꽃산 소백산

여름마저 서리꽃이 핀 듯 하얗게 보여 '한국의 히말라야'라는 별명을 얻고 있는 소백산

그만큼 소백산에 불어왔을 칼바람을 견더내며 인고의 겨울을 보내며 우릴 기다리고 있던 소백산에

이미 봄이 왔음을 외치며 호기있게 들었지만 처음부터 반기는 것은 찬바람과 눈길이었다

우리곁에 이미 와버린 봄의 소식을 비웃듯 소백은 아직도 끝나지 않는 겨울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맘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봄기운이 강한 탓인지 차가운 바람도 이젠 즐길만 했고

그래서 오히려 낭만적인 눈꽃 산행보다 소백산에서 조금은 맛봤던 봄의 기운을 받으면서 걸었던 이번 구간이

어쩜 힐링산행에 실속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닌지

더욱 더 강하게 다가오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거기에 마지막 고치령에서 숨기고픈 역사적 얘기까지 발견했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차만 타면 졸기에 바빴는데 졸지도 못하게 할만큼

차창으로 펼쳐지는 영주의 속살이 아직도 살아있음을 느낀 하루였던 것 같다

 

이제 소백산과 태백산을 모두 아우르는 양백지간이 우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늘(태백천장)과 땅(소백지장)을 품고 있는 땅의 기운 탓인지 수많은 인제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선달산만이 유일하게 태백을 연결하는 오작교 역할을 해주지만

김삿갓과 단종을 만나게 됨이 벌써 기다리게 하는 다음구간이 기대 됩니다

 

정말 이제는 마지막 추위이기를 바라며 걸었을 소백산 구간에 함꼐 하신

대간 산우님들 고생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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