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0온누리 산악회  백두대간 21차 20구간 :  저수령에서 죽령까지   

 

 

 

언제 :  을미년(15년) 물오름달 3월  열사흘 쇠날 밤  ~  열나흘 흙날 (무박2일) 


누구랑 : 대간5기 산우님들        

 

어딜 :  저수령 ~ 촛대봉 ~ 흙목정상 ~ 묘적봉 ~ 도솔봉 ~ 죽령 (대간22.0km)

                                                             

 

우리는 너무 앞서 감을 경계하자며 수많은 다짐을 하고 또 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렇게 기다리던 봄기운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되면 금새 잊어버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덩달아 맘까지 앞서간다

3월 초순이 그렇다 기다림에 지친 우리에게 봄자랑하듯 준비안된 봄바람을 보내놓고 꽃샘추위에 속절 없다

'2월(음력) 바람에 김칫독이 깨진다’는 속담도 있듯이 대간을 기다리는 시간속에 담겨진 날씨 얘기이다

봄으로 가는 골목의 꽃샘추위속에서도 대간산우님들의 봄을 기다리는 소식도 들어 볼 겸 대간길을 떠나본다

 

 

 

백두대간 21차 20구간 저수령에서 죽령까지 등로

 

이번구간은 저수령에서 고개를 숙여 합장하고 오르는 길을 어둠속에서도 촛대봉이 불을 밝혀 길을 인도하고,

참선하여 삼매경의 오묘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묘적"의 묘적봉까지

어느듯 밝아 온 아침해를 맞이하며 구도의 발걸음으로 참선의 가르침을 세기며 오르다 보면,

장차 부처가 될 보살이 사는 곳을 의미하는 "도솔"의 도솔봉에 이르게 될 것이다.

불 밝혀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촛대봉을 지나 참선을 통해 삼매경에 든 후 도솔천에 들어가는 대간길이 되는 것이다.

이번 구간은 산길은 그저 산을 오르는 나그네의 걷는 길이 아니라 수행길이 열려 있는 것이다

 

저수령에서 문경과 이별하고 예천과 단양이 손을 잡고 이어가다

묘적령에서 예천과 짧은 만남 긴 이별을 하는 구간이며 

풍기를 품고있는 영주시와 만나 소백산까지 이어가는 구간이다

 

 

 

저수령에 도착하니 아직인가 봄소식은.. 세찬 바람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저수령은 아직도 한겨울 (02:52)

저수재   문경과의 이별

저수재 유래비 내용 “이 곳은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와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를 경계로 한 도계(道界) 지점으로

경북과 충북을 넘나드는 이 고개 이름은 옛부터 저수령(해발 850m)이라고 불리워 왔다.
저수령이라는 이름은 지금의 도로를 개설하기 이전에는 험난한 산속의 오솔길로 경사가 급하며 지나다니는 길손들이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는 뜻이란다

 

 

단양에서 설치한 저수령 이정석

한편으로는 저수령에서 은풍곡(殷豊谷)까지 피난길(避難路)로 많이 이용되어 왔는데 이 고개를 넘는 외적(外敵)들은 모두 목이 잘려 죽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도로는 지방도 927으로 1994년도에 개설 완료하여 충북과 서울 강원지방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관광 및 산업도로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남쪽 예천방향 1.6㎞ 아래 지점에는 멀리 학가산이 바라보이는 아늑한 산자락에 경상북도의 예천군에서 쾌적한 휴게공원을 조성하여

이곳을 지나는 많은 길손들의 쉼터로 제공되고 있다. 1997년 10월 29일 건립 : 경상북도지사. 예천군수

 

 

분지지형의 마을로 마을 뒷산의 형상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인 예천 상리면 용두휴게공원 갈림길(03:17)

 

참선하여 삼매경의 오묘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묘적"에 오르기 위해 촛대봉에 불을 밖히고(03:26)

 

바로 투구봉이 나온다(03:40)

 

시루봉(04:08)  - 촛대, 투구, 시루, 두루봉...  도토리 키제기 이름만 다를뿐

 

둘산악회에서 시그널을  붙여 놓은 1084봉(04:42)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也자 모양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인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 야목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공터인 배재(05:04)

 

단양 대강 남조리 샘골에서 경북 예천군 상리면 용두동으로 가는 고개인 싸리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 싸리재(05:38) - 잡스님 작품

 

단양 유황온천 갈림길이기도 하다

 

이제 서서히 여명은 밝아오고(05:56)

 

초입부터 아이젠을 착용하게 했던 길었던 겨울의 잔상으로 남아 있는 바람과 봅기운이 만든 雪蓄斷崖

 

유연하면서도 가볍게 내려와 온 대지에 백지를 깔아 놓은 듯 눈 덮인 세상을 만들면서 굳건히 지켜온 겨울의 전설

밟힐수록 더욱 단단해지고 찬바람이 불 수록 더욱 끈끈한 정으로 뭉쳐 살아낸 결코 쉽지 않았던 세월

거기에 순백의 설원, 설원에 남겼던 나의 자화상이 숨쉬고 있는 마지막 가는 겨울이 아췹기만 하지만

그간에 숨겨놓았던 속내를 훤히 드러내며 마지막 가는 길을 소중하게 만들고자 하는 노력일 것이다

떠날 때를 알고 어떻게 떠나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지금 이 눈이 남기고 픈 얘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전망이 좋은 흙목정상(06:24)에서 처음 함께 해 주신 청다솔님 - 후미에서 고생했습니다

흙목정상(1033M)

예천군 상리면의 흙목부락이 우측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흙목정상'이라 부르는 것 같다.  흙목은 토항(土項)이라고도 한다.

약500년전 중국의 명풍수 박 상이씨가  산천을 구경할 때 백봉암이라는 암자를 향하여 분향배례하였다는 곳으로서 지명을 吐香이라고 적기도 한다.

吐香이 土項ㆍ흙목이라 와전되었다고 한다.

 

 

흙목정상에서 고려 원종 때 역동 우탁선생이 경사와 역학등의 학문과 도를 닦던 곳인 도촌리를 품고 있는 가재봉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능선

 

조금 내려오니 오늘은 왠지 그간 수없이 보아왔던 어느때와 달리 일출을 위한 산고의 진통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붉게 더욱 붉게...

 

이것이 기다린 보람? 차가운 바람을 견디며 기다리게 했던 일출을 보는 순간, 중산제를 마친 첫 구간에 대한 선물로 생각된다 (06:39) 

 

감사의 일출에 이어 바로 옆에 누군가 묘적에 들기 위한 마음을 담아 놓은 듯 절벽위에 탑을 쌓아 놓았다(06:48)

 

송전탑을 지나고(07:03) - 헨편으로 찍은 사진 - 새로 산 삼성 디카, 밧데리가 맘에 안드네...  니콘은 아무리 추워도 방전이 안되든데...

 

즐거운 식후경 (07:30) - 삼성잔자가 서서히 중국에 밀리고 있다는 현실, 별것도 아닌 추위에 방전된 새로 산 디카의 밧데리  ㅉㅉ

 

초항 갈림길이 있는 헬기장 뱀재이다 (07:59)

뱀재(헬기장 사티, 배음재, 배읍티) : 샘골에서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초항동 새목이로 가는 고개. 뱀이 많음.

옛날 겸암선생이 이 고개를 왕래하실 적에 이 고개위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 항상 절을 하셨다하여 배암재 또는 뱀재라 한다

예천 상리면 초항(草項)은 새목ㆍ새묵ㆍ봉항(鳳項)이라고도 한다.

백봉산 정상에 봉황 한 쌍이 목을 길게 늘이고 쉴 터를 찾아가 이 마을 앞산에 날아 와서 앉았다고 하여 鳳項의 뜻인 새목이라고 한다.

외부세계와의 인연을 끊고 마을 어귀에 풀이 우거져 있어서 초항 또는 새목이라고도 한다.

 

 

삼각점이 있는 솔봉(08:30)

 

조금 오르면 드디어 멀리 우측으로 도솔봉과 좌측으로 흰봉산 사이로 소백산 연화봉의 시설과 줄기가 멀리서 고개를 내민다(08:35)

 

전설에 의하면 모시강우리라는 지명이 있다 해서 모시골이라 했다는 모시골 마을 갈림길(08:53)

 

묘적봉과 도솔봉이 바로 앞에서 눈을 유혹하지만 급한 맘 잠시 돌아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아직 갈길이 멀다(09:08)

 

거기에 묘적과 도솔천으로 가는 길에 아직은 겨울의 힘든 수행을 요구하고 있다(09:19)

 

수행하며 걸어 온 길 솔봉 방향도 되돌아 보며 성불을 위한 나의 길을 반추해 본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소백산국립공원의 기점으로, 저수령에서 경북 예천과의 짧은 인연... 긴 이별을 해야 하는 묘적령, 이제 단양과 영주와 함께 한다(09:32)

 

우측으로 예천과 영주의 경계를 이루며 고항치로 내랴가는 갈림길- 모래재는 예천에 있다

 

 

부처가 삼매의 경지에 든다는 묘적봉에  눈길에 숨겨진 얼음길을 참선의 수행길을 삼아 올라가고 있는데 단체사진은 남겨야지 - 잡스님 작품

 

조금 내려오면 초보산꾼이 올린 묘적사가 있던 사동리 절골로 내려가는 묘적령(09:45)

대강면 사동리

본래 단양군 남면의 지역으로 예선에 묘적사가 있어 절골이라한다.화전민이 많았던 1940년 무렵에 100여 호가 넘게 살아 소위 마을의 전성기를 누렸다.

구한말때 관군에 쫓긴 동학군이 들어와 살았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묘적재 가는 길 부근이 화전민촌으로 성황을 이루었는데 1936년 폭우로 산사태가 있어 화전민촌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현재 곳곳에 남아있는 낙엽송 군락은 후에 조림된 것으로 당시 화전의 흔적을 말하고 있다

 

 

사동리는 흰봉산, 삼형제봉, 도솔봉, 묘적봉 등이 품은 마을로 예전에 단양에서는 이곳을 하늘아래 첫 동네라고 불렀다고 한다

 

 

묘적사에 언젠가부터 빈대가 생기기 시작하여 스님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최후로 2,3명의스님이 남아 기거하였는데

어느 날 스님들이 인근 마을에 공양을 하러 갔다 오니 빈대가 갑자기 성하여 법당 요사채에 우글거려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어지자

바랑과 장삼을 벗어 마루에 놓고 나뭇단에 불을 붙여 방에 던져서 불을 지르고 스님들도 도망갔다.

건물을 타 없어지고 절터만 남았다.

 

 

묘적봉으로 오르다 전망바위에서 되돌아 본 솔봉방향(09:53)

 

그런데 이러한 빈대 때문에 폐사 됐다는 전설이  전국 곳곳에 남아 있다 

스님은 오계를 지켜야 하는데 그중에 첫째가 일불살생이다. 살아있는 생물은 개미 한마리라도 죽이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빈대도 살아있는 생명이니 죽이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게 되었을 것인데...

그래서 할 수 없이 중이 떠나거나 살생을 할 수 없으니 손으로 직접 잡을 수는 없고 불을 질렀던 모양이다

 

 

사동리 절골 방향

 

그런데 경북 칠곡에 유학산遊鶴山에 전해지는 ‘빈대 절 터,는 좀 특이한 경우이다

노스님의 불공이 가련했던지 꿈속에서 절 뒤편의 바위 절벽 밑에 뚫어져 있는 작은 구멍에서 쌀이 나온다는 얘길 듣고

다음날 가보니 정확하게 한 사람 몫의 쌀이 나오고는 딱 멈추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신도들이 하나 둘 늘어나니 더 많은 쌀이 필요했고 더 많이 나오게 할 욕심으로

지팡이로 바위 구멍을 후비고 쌀이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기다리던 쌀은 나오지 않고 흰 빈대만 나오더라

 

 

풍기방향

 

그래 결국 빈대 소굴속으로 변한 절은 불타 없어지고 절터만 쓸쓸히 남았다는 전설속의 얘기이다

쌀이 나오는 구멍에 욕심이 생긴 노스님이 더 많은 쌀을 얻기 위해 구멍에 손을 대는 바람에

더 이상 쌀도 얻지 못하고 절까지 폐찰(廢札)당했다는 다소 씁쓸한 얘기

욕심을 너무 부리면 끝내 자연물에 의해 파괴된다는 우리 조상들의 소박한 가치관이 돋보이는 전설이다

 

 

부처가 삼매의 경지에 맞이하는 세계라는 도솔봉을 배경으로 묘적봉(10:23)

묘적봉(妙積峰) 암봉

묘적봉은 충북 단양군과 경북 영풍군의 경계를 이루는 소백산국립공원 최남단에 위치한 산이다.

죽령 남쪽 약 10km거리인 묘적봉 일원까지가 소백산 국립공원에 속한다. 묘적령에 안내판이 되어 있다

도솔봉을 포함한 묘적봉 일대에는 취나물군락과 철쭉군락이 주능선에 형성되어 있다

묘적봉은 옛날 사동리에 묘적사란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묘적사는 여지도서와 호서읍지에 기록되는 오랜 사찰이다.

 

 

참선하여 삼매경의 오묘한 경지에 들었으니 우리가 꿈꾸는 미륵정토를 위해 도솔봉으로 향하는 길, 오늘은 하늘도 무심치 않다

 

조금 오르다 보면 옆모습이 부처를 닮았다(11:20)

 

드디어 도솔봉

도솔봉(兜率峰)

도솔봉은 죽령을 사이에 두고 소백산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이 마주 보이는 산이다.

백두대간상의 한 봉우리인 이곳 도솔봉은 소백연봉을 조망하기에 절호의 위치에 솟아있다.

도솔봉은 소백산국립공원에 속해있지만 소백산 국립공원 중에서 동쪽의 형제봉과 더불어 가장 한적한 산이라고 할 수 있다.

북쪽으로 죽령, 남으로 뾰쪽 솟은 묘적봉, 동으로 풍기읍과 전구동, 서로는 단양군 사동리가 조망된다.

 

 

도솔봉에서 본 소백산

도솔천의 도는 투구 두(兜)자를 쓰고 솔은 우두머리 혹은 거느릴 솔(率)을 쓴다.

「兜率山」으로 쓰지 않고 「兜率峰」이 된 것은 소백산 때문에 산보다 한 단계 아래인「峰」을 붙였다.

도솔봉과 묘적봉 사이로 뻗어 내린 갈래골과 안성금마을은 鄭鑑錄에서 전쟁과 역병과 기근을 피할 수 있는 천혜의 명당터인 십승지후보 중에 하나로도 알려져 한때 정감록 비결을 믿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여들기도 했으며,남천 계곡 상류에는 온천이 발견되기도 했다. 

 

 

묘적봉과 고항치로 내려가는 능선이 좌측으로 이어지고 있다

 

 

불교에는 세계를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로 구분한다. 인간이 사는 세계는 욕계인데 여기에는 6개의 하늘이 있다.

도솔은 그중 네 번째 세계로 장차 부처가 될 미륵보살들이 머무는 미륵정토다.

인간의 삶이 질기고도 질긴데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100살을 살아남는게 쉽지 않은데 400년을 살아야 겨우 도솔천의 하루란다

게다가 도솔천의 보살의 수명이 4,000세라고 하니 인간세계로 따지면 어떻게 계산을 해야 하나? 

 

 

도솔봉에서 단체사진

 

 

도솔천에는 일곱 보석으로 지은 궁전에 하늘 사람들이 산다.

이곳에서는 자기가 받는 5욕락에 스스로 만족한 마음을 내 안정되어 있어 부족함이 없는 삶을 꾸린다.

도솔천에는 내외의 두개의 원(院)이 있는데 외원은 천인들의 욕락처가 되고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토(淨土)로서 미래에 올 부처인 미륵은 내원에서 설법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태양계인 남염부주(南閻浮州)인 인간세상에 하강하여 성불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이제 도솔봉 아래 눈이 수북히 쌓인 하산길(12:05)

 

미륵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스스로 부처되기를 미룬 보살이다.

미륵이 도솔천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차고 넘침이 없어도 부족함을 모르는 하늘 사람들 때문이다.

끝없는 욕심에서 생긴 번뇌와 망상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중생들을 구제키위해

도솔천에서 내려와 세상을구제한다는 미륵불이 있어 어렵지만 그래도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이다

 

 

삼형제봉으로 가는 첫 봉에서 바라본 2번째 봉이 보인다 - 한참을 우회하여 3번쨰 봉으로 올라야 한다(13:15)

 

이곳에 설치된 이정표는 거리표시가 한결같다. 세계는 최첨단, 국립공원은 철밥통 밥충이(13:37)

 

흰봉산으로는 더 이상 오르지 못한다는  안내판에서 우틀 하산 시작(14:06)

 

중산제를 마치고 대간길 반환점을 돌아서 처음 시작한 남은 반쪽을 향한 발걸음

미륵세상을 꿈꾸며 촛대봉에서 불을 밝히였으니 이제 진부령까지 가는 길은

그야말로 우리가 지금걷고 있는 도솔천으로 가는 과정을 밟으며 갈 것이다

눈속에 숨겨져 있는 얼어 붙은 어려움도 조금씩 극복해 가면서...

 

 

아직도 여기는 순백의 겨울을 오래 간직하고픈 모양이다

 

이제 우리는 소백산구간을 시작으로 최고의 불교 성지로 불리는 오대산까지 이어지는

대간길에서 수많은 불교에 관한 얘기를 들을 것이다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신으로 모신 도교가 있었다

대간길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성황당이나 산령각에서 볼 수 있다

 

 

어찌됐든 소백산 국립공원관리는 잠자는 잠충이. 여전히 똑 같은 거리표시의 이정표(14:07)

 

이중환은  ‘ 옛 말에 이르기를“천하의 명산을 중이 많이 차지하였다.”고 할 정도로 불교가 퍼지면서

명산이란 명산은 모두 사찰이 차지하게 되면서 부터 우리나라는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불교도 이 땅에 뿌리내리기 위한 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산신을 모시는 도교의 전통을 배척하지 않고 지금도 사찰마다 꼭 있는 산신각에 품었기에

도교와의 마찰을 최소화 하면서 함께 융화되었다는 생각이다

 

 

선두팀이 먼저 내려가면서 남긴 아름다운 흔적, 보이지 않은 서로에 대한 배려를 배웁니다. 참 쉽죠? 배려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번 구간 절묘하게 성불에 이르는 길이 되도록 이어졌던 산이름들이

도솔천에 이르기 위한 미륵의 세상을 꿈꾸었던 것은 아닌지..

성불이 별거이던가? 맘편안히 살면 그게 성불이고 내맘이 부처면 성불이지

신선이 따로 있는가? 아무데나 맘편이 않아 명상에 잠기면 그게 신선이고

내가 가는 길에 놓여진 자연과의 어울림이 신선놀음이지

 

 

헬기장인 듯(15:03)

 

거리표시가 바뀐 이정표가 나타난다 - 여기서 다행이 산을 오르지 않고 한참을 우회(15:17)

 

드디어 오늘의 날머리 죽령옛길 이정표가 나타나며 죽령(16:03)

죽령

경상도에서 충청과 경기 그리도 호남으로 넘나드는 고개 중 가장 많이 이용하였던 죽령, 조령, 추풍령이 있지만 가장 높고 많이 이용하였던 고개가 죽령이라고 한다.

『죽령옛길』은 <삼국사기>에 ‘신라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고 기록되어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길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했고 고개 마루에는 죽죽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있다‘고 전해지는 오랜 역사의 옛길이다.

옛날 어느 도승이 짚고 가던 대지팡이를 꽂은 것이 살아났다 하여 죽령이라 했다 한다.

 

 

도로 직전 죽령옛길 이정표

현재는 국내에서 가장 긴 죽령터널(4.6km)이 개통돼 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를 연결한다.

죽령지역은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역으로 오랜기간 고구려와 신라의 영토분쟁지역이었는데,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 말년(서기470년경)이었고,

신라진흥왕 12년(서기 551년)에 거칠부 등 여덟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와 연합하여 죽령 이북 열고을을 탈취했다는 기록과,

그 40년뒤인 영양왕 1년(서기 590년)에고구려명장온달(溫達)장군이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이북의 잃은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한 기록 등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 의자왕은 당나라군이 고구려로 처들어 갔을 때인 645년에 윤충을 불러 당나라 남쪽 정벌에 보냈다. 그리고 계백은 죽령의 신라 일곱성을 공격했다.

계백은 죽령전투에서 승리했고 윤충 또한 월주를 점령해 그곳을 기점으로 영토를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고구려가 당나라와 싸우는 동안 백제는 계속 신라를 공격해서 계속 승전 했다.

그러자 김유신은 조미곤을 불러 백제 좌평임자 (佐平 任子)에게 백제는 지는 해 신라는 뜨는 해라고 계속 유혹을 하게 했다.

그러자 백제 좌평임자는그 꾀에 넘어가서 성충이  백제의 큰 병이라면서 죽이라고 했다. 의자왕은 이에 넘어가서 성충을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성충을 따르는 충신들을 모두 제거했다 좌평흥수(興首)를 장흥으로 귀양 보냈다. 그리고 성충의 동생 윤충은 을분을 참지 못해 스스로 당나라에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이후 의자왕은 항락에 빠져 삼천궁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하고 있던 성충은 유언의 상소를 쓰고 있었다

 

 

오늘의 뒷풀이 장소로 이동하고 - 맛있어 다음 구간에 다시 들르기로

 

여기서 한잔술로 하루 여정의  피로를 풀면서 마무리 한다

 

저수령에 내리자 마자 우리를 환영하는 것은 차가운 바람에 전해저 오는

마지막 가는 겨울이 남긴 맘만 앞서감을 나에게 경고하는 거친 숨소리였다

몹시 높고 길어서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고 했던 저수령에서

우린 어쩔수 없는 선택,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자연의 가르침에 감사하며...

어쩌면 가야할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미리 알려주고

쉬운 길은 어디에도 없음을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바람이 전하는 경고였던 것이다

성불의 마음으로 시작한 오늘, 역시 시작부터 난관은 시작되고

정상을 향한 길은 우리의 노력으로 누구나 이룰 수 있지만

정상을 지키기 위한 조금은 수월할 것 같은 내림길에서 만나는 위험들

조심 또 조심 하면서 내려오는데도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고도를 낮춘만큼 죽령에 가까울 수록 조금은 편안한 길을 원했지만

오히려 미끄러움에 아이젠에 눈의 무게까지 덤으로 안겨주는

결코 세상사 쉽지 않음을 또 배우고 배운 하루였던 것 같다

 

앞으로 남은 대간 길 반쪽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길이 남아 있음을 압니디

겨울이 지났다고 방심하지 말고

계절은 언제나 거기에 맞는 위험요소를 우리에게 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 우리를 힘들게 했던 눈길만큼이나 얻은 기쁨도 있음을 느껴 봅니다

 

우리가 대간길을 함께 하고 있지만 목적도 다 다르고 생각도 모두 다릅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알고 가면 그만큼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 볼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생각됩니다 

남은 반쪽을 위한 대간길에 어울리는 글이 있어 소개하며 산행기를 가름합니다 

 

 

루소의 <에밀> 중에서 ‘여행에 대하여’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지식을 얻으려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행의 방법을 터득하고 있어야 한다.

관찰을 하려면 보는 눈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알고 싶어 하는 대상으로 그 눈을 돌려야 한다.

여행이 책보다 가르쳐 주는 것이 더 적은사람도 많다. 그들은 생각하는 기술을 모르기 때문이다.

책을 읽을 때 그들의 정신은 적어도 저자에 의해서 인도 되지만,

여행을 할 때는 그들은 스스로 볼 수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떤 때는 알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알게 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의 목적은 전혀 다른 데 있으므로 안다는 데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정확히 보이는 일은 좀처럼 없다"

 

이제 진부령까지 너무도 많은 얘기들이 살아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역사적 퍼즐도 맞추지 않으면 흩어지는 낙옆과 같은 것

좀 더 재밌고 알찬 대간길 마무리를 위한 제안

대간길을 걷는 산행이 아니라 여행이 되기 위한

맘의 준비를 하기 위한 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어찌됐든 봄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봄기운을 충만하게 받을 준비를 위한 하루였다고 생각하면서

힘든 여정을 함께 마치신 대간 산우님들 고생했습니다

 

특히 새로 함께 해 주신 청다솔님, 테니스님

만나서 반가웠고 진부령까지 함께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대간 산우님들의 관심과 응원이 필요합니다

감사합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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