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0온누리 산악회  백두대간 20차 19구간 :  부리기재에서 저수령까지  

 

 

 

언제 :  을미년(15년) 시샘달 2월  스물이레 쇠날 밤  ~  스물여드레 흙날 (무박2일) 


누구랑 : 대간5기 산우님들         

 

어딜 :  부리기재 ~ 대미산 ~ 차갓재(중산제) ~ 황장산 ~ 벌재 ~ 문복대 ~저수령(대간22.0km)

             (박마을 접속 : 들머리)

                                                    

 

이제 눈이 내리면 이상하게 생각이 들만큼 봄을 재촉하는 따뜻한 날씨가 겨울의 시샘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

3월이 되면 이미 늦어지기 때문에 2월에 봄맞이 준비를 해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겨울 외투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이 또한 게으름이 주는 편안함일까?

더구나 3월 첫장을 하루 앞둔 대간길에서 만나게 될 봄을 맞이 하는 숲속의 생명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여 

벌써 집을 나서는 나의 맘을 끝과 시작이 교차하는 미묘함만큼이나  발걸음을 바쁘게 한다

우리가 가야할 문경땅 마지막 2월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로 기다리고 있을까?

 

 

 

대간 19구간 20차 등로

 

중산제가 있는 이번 구간은 문경의 시작점이자 마지막을 걷는 구간이다

문경처럼 백두대간에서 많은 사연들을 간직한 곳이 없는 데 이 초보산꾼이 마지막에야 함게 하게 되니 너무 아쉽다

문경과 제천의 도계를 따르다 대미산에서 조금 진행하면 문수봉 갈림봉에서 제천과 이별하고

또 다시 도계가 없는 백두대간길 문경땅 속살로 들어가게 된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의 문경땅 시작점인 문복대에서 단양팔경으로 유명한 단양 땅과의 새로운 만남을 이루고

저수령에서 삼강주막이 있는 예천군에게 인연을 끈을 놓고 문경과의 이별을 하는 구간이다

이렇게 마지막을 구하는 문경땅엔 어떤 사연들이 숨어 있는지 들어가 본다

 

 

 

부리기재로 접속하기 위해 박씨 가문의 30여 가구가 집단으로 거주하여 붙여진 이름인 박마을에 도착하고  (02:10)

 

출입금지 안내가 계속 되고 있다 (02:30)  ~ 2017년 2월28일까지

 

부리기재 도착 (03:30) - 사진 잡스님 작품

부리기재

문경읍 중평리 밖마을(1680년경 밀양박씨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에서 제천시 덕산면의 용하구곡을 연결하는 고개이다. 

물론 이 고개 역시 양쪽 지역을 오가던 인근 주민들의 소통의 고개이기보단 용하구곡과 대미산을 경유하는 등산로로 쓰이거나

주민들의 약초채취에 이용되므로 이요되는 듯 길은 양호한 편이다

 

 

요즘 서울에서는 보기힘든 눈길이 일찍 반긴다

 

중산제를 하기로 했던 대미산 정상, 그러나 너무 추워 차갓재에서 하기로 하고(04:15)

대미산  

대미산은 문경시를 지나는 백두대간상에 위치한 큰 산으로 문경지역 모든 산의 주맥(主脈)이다.

제천시 덕산면과의 인연은 대미산 지나 1051봉 에서 문수봉 방향으로 도계는 바뀌고 대간은 문경땅을 이어가 저수재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대미산은 발음은 같으나 뜻을 드러내는 한자표기는 자료에 따라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산경표나 조선 영.정조 때 발간된 문경현지에는 「黛眉山在縣東北三十里自小白山來爲本縣諸山之祖」'검은 눈썹의 산'이라는 의미의 '대미산'(黛眉山) 표기

대동여지도에는 '두루 크다'는 의미의 '대미산'(大彌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미산에서의 단체사진 - 잡스님 작품

오늘날 우리가 '크게 아름다운 산'이라는 의미로 부르는 '대미산'(大美山)과는 다른 의미의 이름들이다.

1936년 발간된 조선환여승람에 ‘黛眉山’‘在郡東北自順興小白山來爲本郡諸山主脈’ ‘退溪李滉 命名 大美山’의 기록이 말하듯이

퇴계 이황선생께서 명명하여 ‘大美山’이라고 쓴다고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 부터는 문경군에서 공식적으로 대미산(大美山)으로 쓰고 있고 지금 정상석도 대미산(大美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왜 대미산이 중간지점인지?

어디에서 보거나 크게 두드러진 모양이 아닌 그저 있는 둥 마는 둥 부드러운 육산의 능선이 흐르고 

정상부에 꼭 눈썹만큼의 봉우리를 돋아 놓은 모습으로 보였기 떄문에 黛眉山이라 했을 것인데

박마을901번 지방도로에서 대미산을 올려다보면 능선이 그린 눈썹과 같이 아름답게 보인다고 하는데

우리는 밤에 박마을에서 출발했으니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남진했다면 볼 수 있었을 것이지만

 

 

문수봉갈림길인 1051봉 - 여기에서 제천시와 이별하고 문경 동로면속으로 들어간다 : 이정표가 망가져 있다 (04:44)

광천과 용하구곡 

월악산의 달천은 송계계곡을 이루다가 충주호로 유입되고, 송계계곡 동쪽의 광천이 용하계곡을 이루고,

광천은 동달천과 북평리에서 합류하여 남한강의 지류로서 충주호로 유입하고 있다.

단양천은 선암계곡을 이루며 남한강에 합류한다.만수봉 동쪽에서 발원한 계곡은 문수산 서면을 흐르는 물과 만나

수문동폭포와 병풍폭포, 수곡용담의 비경을 만들면서 월악산 동쪽으로 흐르는 광천을 이룬다.

 

 

문수봉의 제천시 방향에는 부리기재로 이어지는 용하구곡을 품고 있다

용하계곡을 끼고 단양 8경중에 하나인 용하 구곡 분포되어 있다.

용하계곡은 월악산 동쪽을 흘러 청풍호로 나아가는 광천의 상류로 옛날 선인들이 하늘도 땅도 비밀로 할 명소로 극찬을 하면서 아홉 개의 명소를 정했다 하여 용하구곡으로 불려오고 있다.
제1곡-수문동 폭포, 제2곡-수곡용담, 제3곡-관폭대, 제4곡-청벽대, 제5곡-선미대, 제6곡-수룡담, 제7곡-활래담, 제8곡-강서대, 제9곡-수렴선대 이다.

그런데 수렴선대는 절골로 내려 오면서 볼 수가 있지만 지금은 출입 금지 지역이다.

 

 

차갓재 직전 백두대간 중간지점 이정석을 지나고 (06:05)

 

이제 황장산 방향으로 여명이 밝아오고(06:30)

 

철탑을 지나고(06:42)

 

바로 차갓재에서 중산재 (06:52)

차갓재     중간지점(남측)

차갓재는 작은차갓재에서 대미산 방향으로 15분 거리의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이 고개는 문경시 동로면 생달2리(안생달, 안산다리)와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를 잇는 이용도가 높은 고개다.

생달리쪽으로는 많이 이용을 하고 있으나 명전리쪽은 잘 이용하지 않지만 길은 잘 나 있다.

차갓재의 유래는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동로면 생달리 안생달 마을과 생달리 차갓마을을 이어주는 고개로서 차갓마을에서 유래된 고개이다.

차갓은 명전으로 넘어가는 험한 차갓재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차가동이라고도 부른다

 

 

추운데도 정성들여 준비하고

 

백두대간을 시작하고 산줄기를 따라 걷다 보니 가는 세월만큼에 비례하여 반을 넘기고

우리는 새로운 반쪽을 찾아 이렇게 중산제와 함께 진부령까지 탈없는 일정을 빌어본다 

아직 가슴 벅찬 환희를 느끼기에는 갈길이 멀지만 멀수록 희망의 끈은 더욱 가까이 있음을...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는데 중산제의 의미가 그래서 더 크게 다가온다

 

 

그래도 진부령에 가까워질 수록 남겨질 아쉬움 보다는 지금의 가장 왕성한 중간쯤 해서 맛보는

서로에 대한 믿음과 배려가 더욱 더 가까이 있는 지금

아직도 갈 길이 많이 있음에 거는 기대에 부응하여 다가오고 있는 남은 반쪽이

우리에게 더 많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더욱 많음에 행복하다 생각해 본다

  

 

이제 떠날 준비를 하고 (08:00)

 

첫 출발할 때의 초심을 잃어버리고 가슴뛰는 백두대간길이 아닌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다가 왔던 풋풋한 이름의 백두대간길이 아닌

날마다 새로움이 아닌 일상 반복되는 백두대간길이 되어 갈 수 있는 시기에

새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준 것 같아 고맙기만 하다

 

 

이제 황장산 방향에 중산제를 축하하 듯 해가 걸려 있다

 

덧 없는 반복이 일상을 더욱 의미없는 하루를 만들어 주는데

백두대간길 마저 일상속의 한 부분이 될 수 밖에 없는가 하는 아타까움이 있었는데

중산제를 기점으로 다시 한번 지리산에서 외쳤던 외침을 기억하며

남은 반쪽 끝나는 날 우리는 외칠 것이다

" 열심히 달려와서 나는 행복하다.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언제나 함께여서

    초보산꾼 낙동정맥 중산제 산행기 中  일부각색

 

 

중산제까지 지냈는데 단체사진은 남겨야지 - 잡스님 작품

 

 

참으로 하늘도 무심치 않았나 봅니다

지나간 과거는 잊고 새롭게 출발하라는 듯 설날이 지나고 중산제를 맞이하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서울에서 멀어진 만큼 또 다른 명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거기에 계절까지 따뜻한 봄이 기다리고 있으니 함 힘을 내보자고 외쳐봅니다

 

 

헬기장이 있는 작은차갓재 :  생달리로 빠지는 탈출로(08:25)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바로 이어받은 태백산이 소백산, 함백산의 호위를 받으며 우릴 기다리고 있고

그간의 끈끈한 정으로 싾아 온 5기 산우님들의 산행실력을 시험할 두타청옥

거기에 불교의 성지 오대산과 눈물없인 넘을 수 없는 한계령의 설악산이 어서 오라 손짓하고 있는데

거기에 그렇게 멀리만 느껴졌던 동해바다도 더욱 가까이에서 함께 할텐데...

 

 

생달리 마을이 조망된다 (08:43)

생달리 마을

생달리(生達里)는 '산달' 또는 '산다리' 로 불리웠는데 '안산다리'와 '바깥산다리'가 있다.

생달은 산과 달만 볼 수 있는 두메산골이라는 뜻으로 산(山)월(月), 산다리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고, 그 후 생달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마을 어귀에 다리가 있고 그 다리에서 사람이 떨어졌으나 죽지 않고 살았다 하여 산(生)다리라 해서 산다리라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는 속설도 있으며,

또한 마을 뒷산에 고불형(顧佛形)의 명당(名堂)이 있다는 풍수설(風水說)에서 안산다리 마을입구에 '고불목'이라는 자연부락이 위치하고 있다

 

 

황장산으로 이어지는 암릉길

 

눈길까지 이어진다 - 18차 대간길에서 초보산꾼의 눈에 대한 얘기가  끝인 줄 알았는데 ...

 

함박눈이 내리면 우린 피하기 보다는 고개를 들어 얼굴을 내민다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감촉이 주는 오묘한 느낌

거기에 녹으면서 순간 스치는 아쉬움에 잠시 눈을 감아 보지만 또 다시 내려 앉는 함박눈

손을 벌려 가슴까지 내밀고 아예 모두 받으려 하지만 거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내린다

 

 

 

 

그러나 눈은 결코 누구에나 편애하지 않고 누구에나 공평하게 내려준다

샐수 없는 많은 함박눈이 내리면서도 부드럽게 내려 싾아놓은 겨울풍경이 가능한 것은

가볍고 유연하기에 서로 다치지 않고 가볍게 내려올 수 있는 것이며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인간세상에서는 가능할까? 무질서하게 내려오는 함박눈들이 펼치는 생명속에 이치가 숨어 있는 것이다 

 

 

묏동바위로 오르는 길 (09:20) - 선두팀은 이렇게 올랐네요 : 잡스님 작품

 

 

물론 이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하지만 어떻게 아름답게 살다 갔는가는 남길 수 있다

잠시 피었다 지는 꽃이 아름답기에 지는 것을 안타까워 하듯이

그렇게 짧고 굵게 살고 아름답게 살기를 지금 이 산에 있는 설경은 말없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눈이 내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싾여있기에 더욱 빛나는 것이다. 그것도 그렇게 부드러운 함박눈이

 

 

봄의 길목, 아직도 우리가 절어온 대미산 방향엔 겨울 풍경을 주고 있다  

 

함박눈이 산을 하얀색으로 색칠하는 동안 잠시 보여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얀색칠이 끝나고 하얗게 덮여버린 산을 보면서 우린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함께여서 중요한게 아니고 함께 만들었기에 더욱 견고한 설국을 완성했음을 배웠기에

백두대간 5기팀에게 주는 마지막 대간길 아마 마지막이 될 설경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를..

 

 

때론 온몸이 바위와 하나여야 하는 위험한 구간도 지나고(09:33)

 

 

 

출입금지 마지막 구간인 황장산 정상 (09:41) - 대간팀의 여산우님들 대간팀이 많이 밝아졌네용 : 잡스님 작품

황장산(黃腸山)

본래 “대동지지”나 “예천군읍지”등에 그 기록으로 보아 조선말기까지 작성산(鵲城山 근의 고려때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성산성에서 비롯된 것)

왕실의 관곽(棺槨)재와 궁궐 건축에 쓰일 황장목(黃腸木)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 1680년(숙종6년) 때 대미산을 주령으로 하는 이 일대가

봉산(封山 나라에서 궁전·재궁·선박 등에 필요한 목재를 얻기 위하여 나무를 심고 가꾸기에 적당한 지역을 선정하여 국가가 직접 관리·보호하는 산 )제도가

도입되면서 벌목과 개간을 금하면서부터 황장봉산(黃腸封山)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표지석인 황장산 봉산표석(경북문화재자료227)이 인근의 명전리 입구에 있 대원군이 이 산의 황장목을 베어 경북궁을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황장목(黃腸木)은 줄기의 고갱이 부분에 송진이 적절히 베어들어 속살이 누런 소나무를 말하는 것으로,

그 모양이 마치 누런 창자와 같다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벌재 휴게소의 누런 나무기둥이 황장목임을 알리고 있다 - 동로면 홈피

 

 

황장산에서 단체사진 - 잡스님 작품

일제강점기에 일본천황의 정원이라 하여 황정산이라고도 하였고, 지금도 이 산을 황정산(皇庭山)으로 부르거나 표기한 지도를 가끔 볼 수가 있는데, 

이는 잘못 된 표기이며, 황정산은 단양 쪽 맞은편에 따로 있다.

골짜기가 깊어 원시림이 잘 보존되어 있고, 낙동강의 지루인 乃城川(내성천)의 지류인 錦천의 상류부가 산의 남쪽사면을 감돌아 흐른다

 

 

감투봉에서 황장재로 내림길이 진행에 어려움을 주고

 

문안골 갈림길이 있는 항장재, 이정목이 뽑혀져 있다 (10:42)

황장재

감투봉과 치마바위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 문경시 동로면 생달리와 동로면 명전리를 잇는 길이다.

이 고개는 생달리의 동로초등학교생달분교(폐교)와 명전리의 문안골로 이어지는 길로 등산로가 잘 나 있다.

문안골쪽으로는 오르는 길에 고려시대에 자연석으로 쌓았다는 작성이 남아 있다.

생달리 토사골쪽은 수리봉이 있으며 리지가 형성돼 암벽훈련 코스로 인기를 얻고 있다.

 

 

 

고려공민왕떄 왕실의 비빈과상궁들의 피신처가 되기도 하였다는 마을이 있는 문안골

 

985봉에서 바라본 우뚝솟은 천주산이 계속 우리와 우측에서 함께 발을 맞춘다(10:53)

 

헬기장 (10:54)

 

치마바위봉에 있는 통천문? (11:06)

 

아무리 봐도 자연석인데... 성곽 같기도 하고...작성산성이 있어 그런가? (11:14)

작성산성(鵲城山城)

문경군 동로면 황장산에서 충북 쪽으로 트인 험한 계곡의 물길 하류인 문안골에 자연의 험준함을 이용해 쌓은 성벽이다.

누가 쌓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고려 공민왕이 전란을 피해 대지국사의 안내를 받아 황장산 부근에 머물렀을 때,

작(鵲) 장군이 황장산에서 새 진지를 다듬고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올 뿐이다.

또한 그 보다 훨씬 앞서 927년 견훤이 이 성을 지키다 고려 태조 왕건의 공격을 받은 뒤 성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는 이야기도 아울러 전해진다.

어쩌면 천 년의 세월을 건너 온 유서 깊은 성일지도 모르는 성이다.

그러나 이제는 세월과 함께 잊힌 성이다.  세월의 흔적은 그렇게 산길에도 남아 제 이야기를 지나는 이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그땐 생명을 걸고 싸웠던 시절이었을 텐데...

 

 

여기는 양쪽으로 시설이 되어 있다. 여기도 성곽? 절터였던 것 같기도 하고...(11:48)

 

생각보다 긴 벌재를 향한 길, 벌재가 보이기 시작하고(13:00)

 

헬기장이 먼저 나온다 (13:06)

 

생태통로가 있는 벌재(13:21)

벌재  625m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

적성리의 적자가 '붉을적(赤)'이어서 '붉은재'가 된 것을 이 고장 말로 '벌재' 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명칭은 풍수지리의  벌목재, 버리미기재, 밀치, 밀재, 밀목치, 밀목재, 밀항 등과 마찬가지로 벌의 목을 형상화한 이름으로 볼 수도 있으나,

본래는 이 지역의 지명으로 남아있는 적성(赤城)과 관련된 옛이름일 가능성도 아주 높다는 얘기다

벌재부터 월악산 국립공원에 포함이 되는 구간이며  '증보문헌비고', '여지고'등의 옛 기록에 벌치(伐峙)로 기록되어 있다.

벌재는 문경시 동로면에서 충북 단양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현재 59번 국도로 2차선 포장도로로서 경북과 충북을 이어주는 해발 650m의 고개

 

 

잠시 휴식

 

6.25전쟁 때 제천과 단양지역을 점령한 중공군과 북한군은, 죽령을 넘을 수가 없게되자 벌재로 이어지는 적성로(赤城路)를 따라

1951년 1월 13일 미명에 동로면 적성리에 침입해 왔다. 16일까지 4일간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은 단양 쪽으로 패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은 적성로가 협소하여 군수지원이 불가능하였고 적성리에서 노고성과 간송리를 통과할 수 없음을 알게되자 후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6.25전쟁중 중공군이 만약에 여기를 돌파하여 산북면까지 가정한다면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적성리에서 중공군의 남진을 최후로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적성리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험준한 백두대간의 지형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동로천을 따라 내화리까지 오려면 심산협로(深山峽路)를 40리 이상 지나야 하는데 과연 가능했겠는가.

적성로상의 鵲城(19차 작성산성편 참조) 과 老姑城(문경시 동로면 간송리 성재 마을 뒷산에 있는 산성으로, 이 산은 성재라 불리고 있으며

이곳의 성은 속칭 할미성이라 한다)의 전략적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케 한다. (문경홈피)

 

 

 

들목재 (14:17)

들목재

돌목재 옆에 있는 경북 문경 적성리의 벌재의 이름이 저잣거리였단다.  들목재도 그만큼 번성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들목재는 순 우리나라 말로써 “들고 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바람과 구름이 들고 나고 사람이 들고 난다는 아주 운치 있는 이름이다.

소통이 이루어지는 고개라는 의미일 게다. 우리5기팀도 들목재에 잠시 쉬어 서로 소통할 기회를 가져 봤는지...

 

 

문경의 시작점인 문복대(15:43)

문복대 門福臺  (운봉산)   문경시 동로면  북진은 문경땅 끝점 남진은 문경 시작점   -  문경시와 단양과의 인연 시작

본래의 이름은 운봉산이었는데 2001년 표지석이 세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이름이 굳어져가고 있다.

지금의 문복대는 백두산을 기점으로 백두대간이 문경 땅에서 처음으로 올려 세운 봉우리라서 표지석을 그곳에 세웠다고 한다.

본래의 문복대는 북으로 더 올라가 수리봉, 황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시작되는 곳을 이르는 이름이었다.

 

 

문복대에서 바라본 천주산이 계속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이 산에서 한줄기가 북으로 뻗어 수리봉·신선봉과 단양팔경 중 유명한 상·중·하선암이 있는 도락산을 두고 있다

백두대간 산줄기가 소백산을 거쳐 예천군을 지나 문경 땅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지켜 서서 “복을 불러 오는 문” 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 밑에 배나무골, 호박골, 세작골, 성골을 두고 있으며, 이 골짜기들이 모두 동로면 석항리를 이루고 있다.

석항리를 ‘돌목’이라고도 하는데 아직까지 남아있는 아름다운 우리의 이름이다.

 

 

이제 멀리 좌측으로 촛대봉이 보이기 시작하지만...(15:47)

 

백두대간길을 지나다 보면 이곳 문복대는 능선길에 있어 문복대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가 일쑤였단다.  

2001년 가을 문경의 산들모임산악회에서 이곳에 정상표지석을 세워 지나는 산행객들에게 길잡이가 되도록 했다.

이 산악회는 매년 문경구간의 백두대간의 명산마다 1년에 하나씩 자연석으로 된 정상표지석을

회원들이 직접 목도로 정상까지 운반해 세우는 자체사업을 벌였다고한다

 

 

문경오미자길이란 안내판이 있는 장구재 옛고개

 

문경과 단양을 잇는 차량 두대 정도가 교차할 수 있는 임도로 옛저수령이다

 

국사지맥갈림봉인 무덤봉에서 좌틀(16:40)

 

해맞이 제단석이 나오면서 저수령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세운 이정석

저수재   문경과의 이별

저수재 유래비 내용 “이 곳은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와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를 경계로 한 도계(道界) 지점으로

경북과 충북을 넘나드는 이 고개 이름은 옛부터 저수령(해발 850m)이라고 불리워 왔다.
저수령이라는 이름은 지금의 도로를 개설하기 이전에는 험난한 산속의 오솔길로 경사가 급하며 지나다니는 길손들이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는 뜻으로 불리워졌다고도 하고

 

 

충천북도 단양의 저수령 이정석

한편으로는 저수령에서 은풍곡(殷豊谷)까지 피난길(避難路)로 많이 이용되어 왔는데 이 고개를 넘는 외적(外敵)들은 모두 목이 잘려 죽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도로는 지방도 927으로 1994년도에 개설 완료하여 충북과 서울 강원지방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관광 및 산업도로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남쪽 예천방향 1.6㎞ 아래 지점에는 멀리 학가산이 바라보이는 아늑한 산자락에 경상북도의 예천군에서 쾌적한 휴게공원을 조성하여

이곳을 지나는 많은 길손들의 쉼터로 제공되고 있다. 1997년 10월 29일 건립 : 경상북도지사. 예천군수

 

 

뒤풀이 식당으로 오는 길목에 있는 단양팔경중 제일로 치는 제5경 사인암에 잠시 들러 본다

고려 말의 학자 우탁(1263~1343년) 선생이 정4품 ‘사인재관(舍人在官)’ 벼슬에 있을 때 휴양하던 곳이라 해서 사인암이라 불리게 되었다

산악지대가 83%로 살기엔 가혹했던 땅이었던 단양땅에 있는 사인암은 수많은 암각자를 간직한 금석문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사인암으로 가는 계곡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이 힘든 대간길에 마지막을 위안을 주고 있었다

 

 

단양 대강면에 있는 온달과 평강 식당에서 삼겹살로 뒤풀이 - 잡스님 작품

 

 

이렇게 하여 백두대간 5기 팀은 문경 땅과 이별을 하고 예천과 단양의 손을 잡고 이어가게 된다

삼국시대부터 일제시대까지 대표적인 옛고개들을 안고 있던 문경 땅

삼국시대에 중요한 길이었던 하늘재,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과거길이었던 문경새재, 일제시대때 신작로를 만들었던 이화령(이유릿재)

말만 들어도 가슴 뛰는 이름들의 고개들이다

신라가 국력의 팽창에 따라 북진정책을 위해 이곳 백두대간에 처음으로 뚫은 하늘재(지릅재)요

또한 평강공주와의 로맨스로 삼국혈전사의 한 장을 빛낸 온달장군이 마지막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 보러 서울로 올라가던 그 유명한 큰형님격인 문경 새재 고갯길

진도아리랑 첫 대목에 “문경새재는 왠 고개인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라는 사설로부터 시작된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남도 끝 진도에서 문경새재를 부르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고단한 삶의 고개이고 이별의 아픔을 담은 고개이기에 사회적 역동성을 공유하고자 함은 아니였을까?

동학의 포교활동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얘기도 있고 진도읍 성문앞 고개인 '문전세재'의 와전이라는 설도 있고

이화령은 조선시대에는 통행량은 상대적으로 새재보다 훨씬 적었지만 일제시대에는 도로가 개척되면서 신작로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내었다

 

쓰임도 이렇게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되어 왔고 현재는 터널이 옛 영화를 앗아가기도 하지만

역사적 사실들만은 이렇게 남아 우리들에게 많은 얘기를 들러 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5기팀과 함께 문경에 있는 고개들을 함께 하진 못했지만 한번쯤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길마다 쌓여 있는 역사와의 인연의 끈이 질긴데

하물며 거기에 비하면 짧디 짧은 인연이라는 끈으로 이어가고 있는 백두대간길

결코 길지 않은 인연임을 생각해 보면

중산제를 지나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 서로에게 힘을 주는 믿음에 답하며

새로운 남은 반쪽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기 위한 새로운 여정에 첫발을 디딘

백두대간 5기팀에게 박수로 응원합니다 

 

신정일 우리땅 걷기 대표님이 보낸 메일 글 속에

“근 일에 내가 상자 속의 옛글들을 살펴보니, 풍상(1801년의 유배)을 겪기 전 옥당玉堂에서 노닐 적에 지은 시편들은

다 처량한 빛을 띠고 기운이 막혀 있었다. 장기에 유배되었을 때의 시에 이르러서는 더욱 어둡고 비통했다.

그러던 것이 강진 유배 이후의 작품들에 이르러서 탁 트이고 막힘이 없는 뜻을 담은 것이 많아졌다.

재난을 입기 이전에는 이러한 기상을 가지지 못했었다. 그리하여 이 뒤로는 거의 근심스러움이 없어졌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의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 중의 일부분입니다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나온 정약용의 지혜를 가지게 하는 편지속에 있는 글이

우리 대간 5기팀이 중간을 넘기고 새해를 맞이하며

새롭게 출발하는 마음가짐에 횃불같은 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만만치 않은 대간길, 거기에 접속구간까지 더하고

눈길에 곳곳에 얼어 붙은 숨겨진 위험요소들과 암벽으로 이어지는 오름내림길

중산제에 의미까지 더한 이번 대간길은 대간길에서 잊지 못할  구간중의 하나로 남을 듯 합니다

 

진부령까지 가는 길에

다시 한번 심기일전의 의미까지 더하길 바라며...

 

수고했습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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