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 16-2(거인22회차) : 희양산 구간 - 사다리재 ~ 은티재(은티마을 접속) ( 남진 )

 

언제 :  정유년(17년) 누리달 6월 사흘 흙날

 

누구랑 : 거인산악회 대간 17기 산우님들         

 

어딜 :  분지리 ~ 접속 ~ 사다리재 ~ 희양산 ~ 이만봉 ~ 은티재 ~ 접속 ~ 은티마을

                     (대간 8.53 km 접속 2.4km , 10.93km )           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3719 에 있습니다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가 들어있어 길어진 만큼 맘껏 햇빛을 호흡하며 성장하기에 풀빛에 생기가 돋아나

뜨거운 여름을 넘기 위한 잎 새들의 생명의 소리가 온 누리에 가득 차 넘치고 넘친다는 의미의 누리달 6월 초입

농사철 같으면 모내기를 끝내고 잠시 일손을 놓고 쉬면서 창포에 멱을 감고 단오 명절을 즐기는 때 이지만

몇 년째 계속되는 가뭄은 농촌은 물론 도시에서도 때 이른 폭염에 고생 팔자 늘어나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마침 오늘 날머리인 은티고개에 있는 서낭당에 기우제라도 빌어볼까 하는 맘으로 대간길을 떠나본다

 

 

 

백두대간 사다리재~은티재까지 (참조용) 거인산악회 지도 제공 (남진)

 

 

백두대간의 단전丹田의 중심을 받치고 있는  봉암용곡(鳳巖龍谷)을 품고 있는 희양산을 지나는 구간으로

괴산과 문경의 경계룰 따라 곰틀봉을 시작으로 봉암사를 끼고 진행하다 시루봉 갈림길에서 은티마을을 끼고 돈다

이번 구간은 봉암사라는 사찰을 떠나서는 설명이 안 되는 구간으로 대간꾼들과 악연도 살펴보고

우리가 존경했던 성철스님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봉암사가 지금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생각해 보는 구간이다

 

 

 

북진의 계획이 갑자기 남진으로 바뀌는 바람에 괴산 연풍면 분지리 안말 마을 직전 마지막 넓은공터에 도착 

 

곰틀봉에서 백화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을 보면서 길따라 안말마을까지 걸어간다

 

안말마을에 도착 - 안내도에는 분지안말로 되어 있다

 

백화산 이만봉 안내도가 있는 곳에서 숲속으로... 사다리재 접속구간을 시작한다

 

6부 능선부터 시작된 너덜길이 오름길을 더욱 힘들게 한다. 대간 마루금인 사다리재에 도착 이만봉으로 대간 산행을 시작한다

薇田峙(미전치). 사다리재 고사리밭등

분지리 사다리골의 뒤편 고개로 오르내리는 경사가 급하여 마치 사다리를 타는 것과 같아서 붙여졌다고 하나 불분명하다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한밤미와 충북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분적골) 사람들이 오가던 고개로 가은방향은 흔적만 남았다고 한다

일대가 고사리밭등으로 불리고 있어 고비 미(薇)자를 써서 미전치(薇田峙)라고도 했다는데 고사리밥의 흔적도 만나지 못했다

 

 

700고지 이상으로 올라왔다고 안말 마을 방향 숲속사이로 가야할 백두대간의 부봉 라인의 암봉들이 먼저 인사를 한다

 

당겨보면

 

사다리재에서 구왕봉을 향해 조금 올라오니 우측으로 조망이 열리면서 좌 대간길 우 주흘산 능선이 시원스럽게 조망된다

 

곰을 잡기위해 곰틀을 놓았다해서 붙여졌다는 곰틀봉

 

곰틀봉 좌측으로 조망이 열리면서 누군가 나무에 곰틀봉 표시를 해 놓았다. 백화산 평전치 뇌정산을 담아 본다

 

좌측으로 가은읍 원북리에서 상괴리로 이어지는 방향을 계속 조망하면서 걷게 된다

 

곰틀봉 조망대에서 우측으로 조금 눈을 돌리면 가운데 대야산을 중심으로 좌로 둔덕산까지 조망된다

 

곰틀봉에서 조금 더 오르면 조망이 좋다

 

계속 이어가야할 대간길인 조령산과 이화령이 조망된다

 

이화령으로 넘어가는 도로를 당겨보면

 

조령산 좌측 어깨넘어로 신선암봉과 월악산을 당겨본다. 월악산 영봉과 중.하봉 모두 조망된다

 

되돌아 본 곰틀봉과 백화산

 

여러 설만 무성한 유래를 가지고 있지만 신빙성이 없는 이만봉

 

마당바위? 위치상 맞는 것 같기는 한데...

 

계속 이어질 밧줄구간의 서막을 알리는 암벽도 통과하고

 

지도상 용바위가 바닥에 엎드려 대가리를 봉암사를 향하고 있다. 용의 등이 너무 길어 사진 한 장에 담을 수가 없다

 

용 등의 중간부분... 보통 바위에 붙이는 것은 봤어도 바닥에 있는 바위에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처음 본다

 

 

끝에서 되돌아 본 용바위 - 지도에도 네이버에도... 

  자료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94718&cid=40942&categoryId=33157

 

구왕봉에서 본 희양산과는 또 다른 모습의 희양산의 위엄

 

조선조 선조때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북상을 막기 위하여 도원수 권율장군이 이곳에 군막을 첬던 곳이라는 도막 마을 갈림길

 

시루봉 갈림길에서 식후경

 

시루봉은 2011년에 다녀 왔기에 오늘은 패스.. 그 당시 배너미평전에서 길 찾기가 조금 애매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 잠시 시원한 조망은 잠시 접고 희양산으로 가기 위해 숨죽인 듯 고요한 숲속을 계속 내려온다. 주의 지점

 

좌측으로해서 들어오면 바로 넓은 공터가 나온다. 구왕봉 이정표따른다

 

또 다시 희양산으로 가는 길.. 차분한 분위기는 계속 이어지고... 구왕산 주치봉으로 이어지는 가야할 능선 조망

 

희양산성이 있는 은티마을 갈림길

희양산성

희양산성을 비롯 이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마고산성, 노고산성, 작성산성, 조령산성, 고모산성, 고부산성등 산성이 많은데

남북을 가로막고 있는  소백산줄기를 관통하는 유일한 지점으로 군사적 요충지이고 중요한 교통로 였기에

삼국시대 때부터  신라, 백제, 고구려의 접경 지역으로 잦은 충돌과 전투가 있어 왔기에 산성이 많았을 것이다

희양산성은 거의 무너지고 조금만 남아 있는데 928년 견훤이 군사를 보내 축성했다고도 하고 신라의 경순왕이 축성했다고도 한다.  

 

산성의 주된 방어 방향이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에서 축성한 것으로 보이며 방어적 籠城의 목적으로 추정된다

籠城은 조예병사들이 지키던 웅성이 무너지면 성안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잠그고 철저하게 성을 지킨다는 의미이고

지금의 농성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을 뜻한다

참조 자료 : 길위의 역사 고개의 문화/문경새재박물관

 

 

 

이제 희양산 정상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잠시 대간길에서 벗어나 있는 희양산으로 직진한다

 

조망이 열리기 시작하고.. 구왕봉을 중심으로 담아 본 대간길과 괴산의 산들...구왕봉 아래 좌측 계곡이 봉암용곡 시작점이다

 

봉암용곡(鳳巖龍谷)을 품고 있는 희양산의 봉암사 쪽이 통제되기 시작한 것은 1982년 부터라고 한다

1947년 현대불교사에서 큰스님 성철, 청담등이 모여 부처님의 뜻대로 수행을 하고자 봉암결사(鳳巖結社)를 한다

이 때부터 소위 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동안 먹지도 않는다)을 내걸고 수행에 들어갔고

1982년부터는 아예 수행에만 정진하고자 부처님오신 날 만 빼고 봉암사 일대를 모두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다

 

 

구왕봉 좌측으로 눈을 돌리면 대야산에서 이어 온 대간길이 조망된다.조항산 넘어 속리산까지 조망된다

 

덕분에 온갖 희귀 동식물의 낙원이 되어 생태계의 보고로 다시 태어나 2002년에 산림유전자원보호림 지정되고

주위의 산짐승들이 총소리를 들으면 모두 희양산으로 도망 온다는 이야기가 회자되는 짐승들의 낙원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뜻이 좋아도 속세를 떠나 성불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자연은 인간과 함께 호흡할 때 존재 이유이지 무조건 막는다고 자연이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대야산을 당겨보면

 

기록을 보면 초창기에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봉암사 일대는 물론 대간 길마저 막아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울타리가 막아버린 출입금지 구간에서 벌어지는 대간꾼들과의 상생은 사라지고

대간 길 표시는 물론 희양산 정상에 정상석도 없이 한동안 어디가 정상인지 모르고 지나가곤 했다고 한다

수양에 매진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스님들은 지나가는 산객들이나 막게 하고...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조항산 뒤 속리산 주능선이 모두 보인다. 당겨보면

 

중이 아니라 오히려 산객이 끓어오르는 적대감을 참으며 수양하는 마음으로 걸어야 헸던 주객이 전도됐던 길

이제라도 다행이 대간 길도 열리고 정상석도 세우고...나름대로 맘을 열려는 노력은 보이지만...

성철스님하면 떠오르는 수행 중 죽비소리... 거기에 한국 불교의 정신적인 스승이였기에 존경했었는데

봉암사만 떠올리면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나의 맘을 숨길 수가 없다

 

 

조금 더 진행하면 한때 3천명이 넘는 수도승이 거주했다는 봉암용곡을 품고 있는 봉암사를 희양산에서는 여기서만 완전히 볼 수 있다

 

이제는 좀 더 넓은 마음으로 봉암사도 활짝 열고 개방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람을 멀리 하는 사찰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내가 무종교라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조건 없이 사람과 함께 호흡하며 길에서 살다 길에서 돌아가신 붓다의 가르침은 어디로 갔는지...

 

 

신라 헌강왕 때 지증대사가 희양산이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라고 해서 창건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도적이 아니라 스님들만 득실?... 겨우 자기들 생일날만 개방한다고 하니...

 

여기서 조금 더 진행하다 선두팀과 조우... 고래등바위에 올라 처음으로 선두팀과 즐거운 시간

 

희양산 정상

희양산 曦陽山 998m

봉암사가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을 이룬 곳이라 여기서 유래를 찾기도 하는데

좋게 말하면 새로운 사상이고 희양산문이 있는 봉암사처럼 외골수로 나가면 뜻은 좋아도 사이비 종교와 뭐가 다르지? 

산 전체가 하나의 바위처럼 보이는 데다 바위 낭떨어지들이 하얗게 드러나 있어 화강암 바위들이 멀리서 보면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산이라고해서 햇빛 희(曦)자를 써서 희양산이라고도 했다는 유래에 한 표...

 

지금은 사라진 옛날에 있던 희양산 정상석(2011년)

 

 

우리가 걸어 온길이 잘 보인다. 곰틀봉은 이만봉 뒤에 숨어 있다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 와 이제 희양산 직벽 내림길이 시작되고...기다리는 시간으로 진행은 더디어만 가고...

 

 

 

미로바위도 지나고

 

은티마을로 내려 갈 수 있는 지름티재로 지금은 인간은 갈 수 없고 짐승들만 자유롭게 봉암사로 질러갈 수 있다는 뜻인데...

 

지금은 기름을 뜻하는 油峙의 의미로 변하여 사용되고 있다. 지름티재에는 지금도 서낭당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희양산의 최고의 작품은 구왕봉에 오르면서 감상할 수 있다. 우측으로는 봉암용곡을 계속 볼 수 있다. 구왕봉 오름길 첫번째 전망

 

희양산은 산을 조금 안다고 하는 산객들이 가장 안타깝고 씁쓸하게 생각하는 것이

봉암사가 있는 봉암용곡(鳳巖龍谷)을 걸을 수 없다는 점이다.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던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고뇌를 하고 길에서 묻고 수행하며

길에서 깨달음을 이루고 길에서 사람의 갈 길을 열어주고

제자들과 함께 길에서 주무시다 길에서 열반에 들었던 붓다의 가르침

 

 

두번 째 조망... 계속 우측으로 봉암사는 조망된다

 

그 길은 아닐지언정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마저 가로막고 있다는 것은

오직 수행에 매진하기 위한다는 미명아래 봉암사의 현재 취하고 있는 속세와의 불통은

분명 붓다의 가르침과 역행하고 있다는 짧은 소견이다.

길에서 나서 길에서 돌아가신 가르침...

 

 

은티마을 뒤산의 석회광산의 개발 흔적이 맘을 아프게 하는데... 지금은 개발이 끝난 듯...

 

내가 어찌 감히 큰 스님들의 큰 뜻을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나 같은 산객들이 산짐승만 자유롭게 드나 들 수 있다는 희양산의 봉암사쪽에 있는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모습을 하고 있는 봉암용곡을 걷고

또 봉암사에 들려 맘의 자유를 조금이라 느끼고 싶다는 생각

 

 

소나무와 희양산이 적당히 어울리는 전망대에서 순둥이님... 후반에 함께 할 수 있어 고맙습니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길이 열릴 때 분명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길이 막히면 바로 불통으로 서로의 불신만 쌓일 뿐...

희양산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전설들이 봉암사에서 시작되고 봉암사에서 마무리되는

희양산하면 봉암사이고 봉암사 하면 희양산을 떠나서는 얘기 할 수 없기에

다시 한 번 빨리 봉암사의 길이 열리기를 기다려 본다

 

         초보산꾼 100대명산 희양산 산행기 중에서...  http://blog.daum.net/kmhcshh/3324

 

 

봉암사와 봉암용곡도 마지막으로 담아 보고

 

구왕봉 정상 직전... 완이님도 이번 구간 막판 산행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방가웠습니다.

 

희양산의 최고의 조망터 구왕봉에서의 마지막 담아본 희양산의 위용은 고도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바로 구왕봉

九王峰 877m

봉암사 창건설화에 기인하는데 智證대사가 심층이란 자의 조언으로 지금의 봉암사터를 잡았을 당시 그터에 큰 못이 있었다.

그 연못에 살고 있던 아홉마리 용을 지증대사가 신통력을 발휘해서 내 쫒았는데, 쫒겨난 용들이 멀리 가지 않고

봉암사와 희양산이 잘 내려다 보이는 봉우리에 자리를 잡고서 지증대사를 향해 살게 해 달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 봉우리가 바로 구왕봉이며 또 봉암사에서는 이 산을 날개봉이라고도 하는 창건설화가 전해져 오며 매년 소금단지를 묻어 기를 눌러준다고 한다.

 

 

구왕봉을 지나 바로 마루금은 좌측으로 이어가야 한다. 직진은 구왕봉에서 은티마을로 내려가는 능선길

 

조망터가 나오면서 담아 본 고목과 주치봉... 어떻게 주치봉이 구슬(珠구슬주)처럼 동그랗게 생겼나요?

 

마당바위

 

무덤이 있는 오봉정고개 - 구암봉, 원평봉, 주치봉, 장성봉, 애기암봉등 다섯 개의 봉우리로 둘러 싸였다는 봉암용곡 최상단 마을

 

일부는 호리골재라도 하는 오봉정 고개 역시 봉암용곡 방향은 계속 통제중이고...

 

 

넓은 공터가 있는 아무런 표시가 없는 주치봉.. 여기서도 은티마을 방향으로 희미하게 길은 나 있다.

구슬(珠구슬주)처럼 동그랗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은티(치)마을의 뒷산이라고 하여 은치봉으로도 부른다.

 

봉암용곡의 마지막이 지나는 은티재(오봉정고개) 에서 하산을 시작한다

 

이곳부터 전 구간에서 자세히 다뤘기에 여기서는 생략 - 서낭당 흔적

 

은티마을 주차장으로 내려와

 

주차장에 있는 상가에서 뒤풀이

 

수고했습니다.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라는

신라 헌강왕 때 지증대사의 예언에 따라 창건된 천년고찰 봉암사(鳳巖寺)

세상이 바뀐 현대에 들어와 도적이 있을 만한 소굴은 다 사라졌는데

 

그 소굴에 스님들만 살고 있으니..

개방을 안하고 있으니 내가 가봤어야 소굴인지 아닌지 알지...

지금도 그들이 만든 울타리는

희양산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화강암보다 더 단단하기만 하다

어디까지나 산객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얘기이다.

 

봉암사 스님들의 얘기를 들어 본다

자료 : http://angangi.com/2741.htm

 

 

여러 산우님들과 함께 산행을 하다 보면 가끔 느끼는 단상이 있다

앞서 가는 산우님 위치가 앞에 보이는 풍경과  

내가 그리고자 하는 풍경과 일치할 때가 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곳에 있었던 나무나 바위처럼 자연스럽게...

다만 앞선 사람은 나의 생각과 관계없이 재 갈 길을 가고 있기에

앞서가는 산우님을 불러 사진을 남기는 경우일 것이다

아마 나도 걷고 있지만 나의 뒤를 따르던 산우님도 같은 생각 이였을 것이다

나도 내 갈 길을 가고 있을 뿐...

나도 결국 되돌아서 미소로 화답하며 풍경속의 자연이 되어 주기도 한다

 

각기 다른 생각으로 걸으면서도

우리가 하루라는 시간 속에 서로 함께 할 수 있었던 것도

백두대간이라는 거대한 자연이 우리에게 준 힘은 아닐까 하는 생각

수많은 다른 풍경들이 모여 하나의 조화로운 대간길이 되었듯이

거인산악회 17기 백두대간팀의 진부령까지 가는 길에

우리가 대간 길이 준 자연에서 배운 조화를 위한 작은 희생이 모여

웃는 모습을 남기고 마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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