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 15-1(거인20회차) : 청화산 구간 - 늘재에서 밀재(용추계곡하산, 접속)

 

 

언제 :  정유년(17년) 푸른달 5월 엿새 흙날

 

누구랑 : 거인산악회 대간 17기 산우님들         

 

어딜 :  늘재 ~ 청화산 ~ 갓바위재 ~ 조항산 ~ 고모재 ~ 밀재 ~ 용추계곡(접속) ~ 계곡입구

                     (대간 10.2 km 접속 3.8km , 14.0km )           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초보산꾼 사진 산행기는 http://blog.daum.net/kmhcshh/3698 에 있습니다

 

 

어린 생명이 세상에 나와 이제 맘껏 세상을 즐길 수 있는 여름으로 들어가는 5월은 그래서 들여름달이라고도 한다

여리디 여린 생명이 어느새 연초록으로 갈아입고 녹색 세상으로 바꾸어 놓았지만 짙은 색깔로 갈아입기 위해서 

뜨거운 햇살을 견딜 수 있는 시간이 더 필요하기에 5월은 새생명이 성인이 되기 위한 마지막 힘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방정환 선생님은 자연의 이런 섭리를 이용해 5월 초입에 어린이날로 지정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봄 햇살을 받은 크기만큼 신록의 색깔이 결정되 듯 어린시절을 어떻게 보냈냐에 따라 인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백두대간 늘재에서 밀재까지 그리고 용추계곡 접속 (참조용)

 

이제 백두대간도 북진을 거듭하여 말만 들어도 가슴뛰는 문경새재로 대표되는 영남대로 옛길들이 기다리고 있는 

문경 땅으로 들어서는 이 번 구간은 또한 후삼국시대의 또 한명의 영웅 견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위로는 내,외 선유동 계곡을 거느리고 아래로는 십승지 중 최고로 치는 우복동천을 만들어 내는

청화산에서 조항산을 지나 문경의 큰아버지산의 뜻을 담은 대야산으로 이어주는 구간을 걷게 된다

또한 날머리 접속 구간에는 두 마리의 용이 놀다가 승천한  자국이 남아 있는 용추폭포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고갯길이 제법 너르다 하는 뜻도 되고 고갯마루가 눌러 앉은 것 같은 형국이라 해서 붙여졌다는 늘재에 도착 준비하고...

늘재 

늘재 북쪽으로 화양천을 따라 전개되는 화양구곡과 다시 그 상류지역인 삼송천을 따라 전개되는 선유동 구곡으로해서 한강으로 흘러간다.

화양구곡은 우암송시열이 은거하던 곳으로 그의 필적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9곡은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청운대, 와룡대, 학소대, 파곳을 말한다.

선유동구곡은 청천면과 송면리와 삼송리에 걸치는 삼송천 계곡에 펼쳐진다.

9곡은 선유동문, 경천벽, 학소암, 연단로, 와룡폭, 난가대, 기국암, 귀암, 은선암을 말한다.

늘재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문장대 오송폭포와 천왕봉 정각폭포의 물과 화북면에서 만나 농암천을 이루고,

갓바위재에서 만날 궁터마을에서 시작되는 궁기천과 농암면에서 만나 영강을 이루며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반대편 속리산 방향은 출입금지이다

 

늘재에는 성황당 유래비가 있는 성황당을 시작으로 출발한다

 

성황당( 城隍堂) 늘재 성황당 유래비

성곽을 지키는 수호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중국에서 들어와 우리나라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는데

마을 수호신의 성격을 가지면서 서낭신을 모시는 서낭당 등의 용어와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다

 

 

임도도 한반도를 닮고 싶은 것일까?

 

청화산까지 오름길... 잠시 전망이 열리면서 되돌아 본 속리산의 문장대에서 천왕봉까지 한눈에 들어 온다

 

속리산을 바라보고 차려져 있는 제단인 靖國祈願壇

 

정국기원단이란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단이란 뜻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國泰民安이란 말을 사용한다고 한다

여기 靖國이라는 표현은 일본 야스쿠니신사를 한자로 쓰면 정국신사(靖国神社 : 야스구니신사) 라고 한다는데...

의도는 잘 모르겠으나 하필이면 속리산이 다 보이는 이곳에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이 아닌

일본 전범들이 있는 곳을 생각하게 하는 단어를 이런 신성한 제단에 사용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고

의도가 순수하기를 바라지만 아직도 우리 곳곳에 남아 있는 친일의 잔재가 얼마나 무서운지 세삼 느껴본다

 

 

미세먼지가 심하지만 가운데 조금 우측 백악산에서 대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조망된다

 

“흙봉우리에 돌린 돌이 모두 수려하고 삼기가 적고 모양이 단정하고 평평하여 빼어난 기운이 흩어지지 않아 자못 복지다”

청화산을 사랑하신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청화산인(靑華山人) 이중환(李重煥)이 남기신 청화산에 대한 평가이다

 

 

가야할 좌측 청화산과 우측 570봉에 있는 지도상 선바위가 조망되는데 이 후로는 보여주지 않았다. 역시 신선이 놀다 가는 곳이라서 그런가?

 

헬기장

 

헬기장에서 담아 본 시루봉과 가운데 연엽산... 시루봉 아래 '동천'이라는 각자가 세겨져 있다는데...

 

시루봉 아래 우복동천과 속리산 천왕봉과 도장산, 청화산이 만들어 낸 용유리 화산마을...

용유리 화산마을(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우복동으로 추정되는 마을) 牛腹洞

용유리는 서쪽으로 늘재, 남쪽은 갈령(적색 화살표)이, 고개가 없는 동쪽은 가파른 산세가 막고 있어 병화가 침범하기 어려운 고을이다.

그래서  마치 소의 배안 처럼 생겨 사람살기에 더없이 좋다 하여 牛腹洞이라 하고 청화산과 연결되는 시루봉 아래 함부로 밝힐 수 없어

우복은 빼고 동천이라고 만 쓴 양사언의 글씨로 알려진 '동천'이라는 큰 각자가 있어 우복동천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 시루봉 밑에 있는 마을이 용유리 화산마을로 구한말 전라도등지에서 정감록을 신봉하여

십승지(三災를 피할 수 있는 福地 10곳)로 거처를 옮긴 사람들인 秘訣派들이 몰려와 옮겨 살았다 한다

한국전쟁때는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았으며, 마을에서 50명이 군대 갔는데 한명도 죽지 않았다 하니 이만하면 우복동이 아닐련지.

 

 

가운데가 용유리, 그리고 좌측으로 도장산과 청계산 우측으로 문장대, 천왕봉과 형제봉이 용유龍遊를 만들어 내고 있다

풍수가들은 이렇듯 `속리산 천왕봉청화산도장산을 잇는 삼각형 산줄기의 형세가 마치 속세를 떠난 유불선의 대가들이 모여 앉아

담론하는 형국`이라 한다. 그 삼각형 한가운데 자리한 화북의 龍遊洞은 민초들의 질박한 꿈을 모아 이뤄낸 이상향이다.

 

우복동 얘기는 초보산꾼 속리산 산행기 http://blog.daum.net/kmhcshh/3374   '용도 춤추게 한 우복동천에서 하루를 보내다'  참조

 

 

청화산 정상... 이헌승 대장님 후미에서 고생했습니다. 서로 알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靑華山 

청화산은 늘재의 潛龍이 승천하는 형국이라는 명산으로 십리밖 어디에서 바라봐도 항시 화려하고 푸르게 빛나고 있으며

문경 농암면에 있는 시루봉도 장엄한 자세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시루봉과 시루봉 아래 화산마을... 우복동천의 시작점... 정확한 위치가 나와 있지 않아 서로 자기 땅이 우복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땅의 산하를 사랑한 조선의 지리학자로 새로운 지리서의 효시라 할 수 있는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 역시

청화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하는데... 이중환 스스로 호를 靑華山人이라 칭할 정도였다니...

청화산은 위로는 내선유동과 외선유동을 백두대간 대야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날개를 펴고 

아래로는 십승지 중 최고로 치는 용유동천을 가까이 두고 있으니 이중환이 이를 모를 리 없을 터... 

 

 

좀 더 진행하면 시루봉 연엽산 우복산으로 이어가는 능선 갈림봉인 976봉 -

상주시와 이별하고 문경의 시작점이며 괴산과 함께 다시 도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네이버지도를 살펴보면 도저히 우리같은 사람은 이해 불가?? - 적색선이 괴산땅. 마루금에서 벗어난 자투리땅은 무슨 의미?

잠시 후 만나게 될 의상저수지의 경우 괴산과 상주가 서로 함께 공유하게 선을 그어놓아 탁상행정의 표본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화지구에 들어서면서 도의 경계가 백두대간을 넘어서까지 정하는 바람에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고 했는데...

속리산 문장대에서 대간을 넘어 깊숙히 상주땅이 충북땅을 침범했다가 다시 되돌아 온 곳이 바로 청화산이다.

즉 문장대에서 청화산까지는 엄연한 한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인 백두대간임에도 도 경계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청화산 바로 아래에 있는 의상저수지(다음 지도에는 송면저수지)의 정가운데가 상주와 괴산의 도 경계이다.

 

이런 문제점이 충청일보 기사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조...   http://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388251

 

 

갓바위재 직전 담아 본 송암(의상)저수지... 저수지 70%는 괴산땅이고 30%는 상주땅... 도 경계가 저수지까지 갈라 놓았다

 

이제 마루금은 좌측으로 이어지면서 견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궁기리가 보이기 시작하고

 

의상 저수지로 탈출할 수 있는 안부도 지나고

 

말 많고 탈 많은 의상저수지가 바로 앞에 보인다

 

되돌아 본 청화산과 삼시(문경, 상주, 괴산) 경계봉인 976봉

 

가야 할 조항산도 보이기 시작하고...좌로 대야산 그리고 우로는 둔덕산이 내.외 선유동계곡을 만들어 낸다

 

조항산이 가까워지면서 이제 궁기리의 모습이 제대로 보여 준다. 아래 지도를 참조... 언제 견훤의 흔적을 찾아 답사하지?

 

문경땅에 남겨진 견훤의 흔적들...다음 지도로 정리해 봤다. 견훤의 고향 아차마을에서 영강을 거슬러 올라오게 된다

 

농암면 궁기리(궁터마을) 

조항산~청화산~마귀할미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분수령 동쪽에 깃든 궁터마을은 견훤이 군사훈련을 하며 호연지기를 기르던 곳으로

견훤이 완산주로 떠나기 전까지 말바위에서 활을 쏘며 야망을 키웠다는 깊은 산골 궁터라는 지명도 견훤의 왕궁 터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절골에 절터라고도 하고 궁터라고도 하는 축대가 남아 있고, 부근의 폭포와 약수는 인근에서는 알아주는 명소라고 한다.

 

古基마을은 견훤이 이곳에서 많은 군병을 모집하여 훈련한 곳으로 본궁을 설치하였던 `옛터`이며  그 후 속칭 이터골 혹은 옛터골로 불리워지고 있다.

 

 

당겨본 바로 갓바위재 아래 고기(옛터)인 이터골

佛堂谷

옛터골과 상궁기 사이에서 오른쪽 500M지점의 조항산 줄기 자연봉 중턱의 폭포가 있는 계곡에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한 조그마한 절이

조선 중엽까지 있었는데 그 절에 빈대가 너무 많아 절을 태워 버렸다는 전설이 있어 이 계곡을 불당곡, 절이 있던 곳이라 절골이라고도 한다.

또 바로 아래 이웃하는 연천리의 말바위(馬岩)란 곳이 있어 견훤이 이곳에서 어디선가 나타난 말과 활쏘리로 빠르기 내기를 하여

아차라는 마을까지 달려 갔을때 말은 도착했으나 화살은 보이지 않아 화살보다 말이 늦게 도착한 것으로 착각하여

말의 목을 베는 순간 화살이 견훤의 앞에 떨어져, 아차 준마를 잃었구나 후회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의상저수지로 내려 갈 수 있는 갓바위재

갓바위재

갓바위재는 백두대간의 청화산과 조항산 사이에, 고모치는 조항산과 대야산 사이에 걸려 있는 고개이다.

이 두고개는 높게 가로막힌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에서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를 오가던 고개들이다.

충북 지역인 삼송리는 원래는 경북 문경군 가은면에 속했던 마을이였다는데... 상상이 되지 않는다 

삼송리에서 농암면 소재지까지 험준한 백두대간을 넘어 오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1962년 민원에 의하여 충북 괴산군 청천면으로 편입되었다는 기록을 보니 할 말이 없다...

 

 

바로 헬기장을 지나면

 

우측으로 궁기리로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지도상 암봉과 그 뒤로 조항산

 

이제 좌측으로 고모리도 보이기 시작하고...우측은 고기리

 

암봉에서...

 

암봉답게 전망은 좋은데... 시계가 없어 아쉽다. 지나온 마루금. 속리산 우측은 백악산 라인

 

가련산은 가까운데도 멀리만 느껴지고...그 뒤로 낙영산도 보일텐데...

 

 

옛날 천지 개벽때 산봉우리가 황새 목 만큼 남았다고 하는 전설이 있어 조항산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이제 다시 가야할 둔덕산 갈림봉과 좌측 대야산 우측으로 멀리 담에 가야 할 희양산이 하얀 머리를 하고 있다

 

후미로 진행하는 바람에 시간상....둔덕산 갈림봉인 889봉 옆에 있는 마귀할미 바위를 들려 볼 수 없을 것 같아 당겨 담아 봤다... 이런 모습?

 

그럼 손녀는?

 

 

학천정과 선유계곡을 품고 있는 둔덕산이 후덕한 인심을 가진 둔덕의 모습으로 서있다

‘문경석’이란 이름때문에 중국산 석재에 비해 비싸게 거래되었던 대리석을 채굴하던 현장인 고모치 광산 채석현장이 맘을 아프게 하지만...

 

여기서도 의상저수지를 내려 갈  수 있다

 

왕송마을 갈림길을 지나 고모치. 10m만 내려가면 고모샘이 있어 산객들에게 생명수를 공급한다. 여름에는 모르겠지만...

고모재(치)

옛날에 주로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던 통행로는 고모치였다고 하나 지금은 갓바위재가  등산로로 바뀌어 그나마 옛길의 형태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옛날 궁기리에 살던 고모가 삼송리에 사는 조카한테 갔다가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가다 고모와 조카가 엄청난 폭설로 얼어 죽었다는 전설...

고치, 고치령, 고모령, 곰치, 고무치, 고미재 등이 있으며, 이중에 고치나 고치령은 높고 험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高峙의 개념이고,

기타는 `곰고개`라는 개념으로 때로 熊峙로 변천하기도 하였다고 하니 곰고개 였다고 해석해야 하나?

 

 

둔덕산 갈림봉인 889봉에서 마루금은 좌측으로...

 

이제 밀재로 내려오다 당겨 본 마귀할멈 바위군...

 

이제 멀어져 가고 있는 조항산과 청화산 그리고 멀리 속리산까지...

 

가운데 속사지맥 묘봉에서 속리산 문장대,  천왕봉까지 조망되는 속리산 그리고 우측 백악산 라인

 

집채바위

 

자세히 보면 도봉산의 여성봉을 닮았다

 

집채바위 아래 기암... 거북이 같기도 하고... 물을 떠 먹는 표주박 같기도 하고...

 

이제 계속 이어가야 할 대야산 줄기 - 우측이 대간 마루금

 

밀재 - 그런데 이제 대야산 구간은 통제에서 풀린 듯,,, 통제 안내판이 없어졌다

밀  재

밀림이 우거졌던 곳으로 이 고개을 지나 가려면 밀림을 헤치고 지나가야 한다하여 밀재라 한다.

밀재는 버리미기재화 그 어원이 같은 이름으로 `벌의 목 고개`라는 뜻으로 밀치, 밀재,밀목치, 밀목재, 밀항 등과 같은 말이다.

일반적으로 고갯길의 경우에는 벌, 노루, 소, 도지, 닭 같은 짐승의 목 부분에 빗대어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또 소나 말의 등에 얹은 안장을 일컫는 질마(길마)의 생김이 비슷하다 하여 `질마재`로부르는 경우도 흔하다

 

 

이제 대간 마루금을 벗어나 용추계곡으로 하산을 시작하고... 누군가 키스바위라고...

 

월영대 상단

 

달그림자에 어리면서 정든배는 떠나간다 보내는 내마음이 야속하더냐 멀어져가네 사라져가네 쌍고동 울리면서 떠나간다

낭만적으로 다가오는 이노래는 정든배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옛노래의 한귀절이다

이런 낭만적인 달그림자(月影)가 하늘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밤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휘영청 밝을 달이 아니면 비출 수 없는 이곳 산속에도 찰나가 주는 달그림자가 있다. 바로 월영대이다

 

 

월영대 하단에서 올려다 본 모습

 

휘영청 밝은 달이 중천(中天)에 높이 뜨는 밤이면 희디 힌 바위와 계곡을 흐르는 맑디맑은 물위에 어린

달 그림자가 더할나위 없이 낭만적이라 하여 월영대(月影臺)라 했다는 유래가 전해지는 곳이다

달은 물 위에 떠 있어도 사실은 어둠속 하늘에 걸려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이백이 물 위에 뜬 달그림자를 잡으려다 죽었다는 변산반도 채석강의 전설이 세삼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여울물이 아무리 급히 흘러도 그 물 위에 떠 있는 달그림자는 흘려 보낼 수가 없기에

나뭇가지 사이로 비추기를 반복했을 달 그림자에 나를 투영하며

산그림자는 밀어도 나아가지 않고 달빛은 쓸어도 다시 생긴다는 도연명(陶淵明) 의 시를 생각하며

숲이 우거져 있는데도 강물이 너무 맑아 항상 사람 가까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부른 이름인 것 같다는 생각

 

          초보산꾼 100대명산 대야산 산행기 중에서....

 

 

월영대에서 조금 내려오면 피아골 갈림길이다

 

이제 망속대 상단 - 퇴계 이황 선생님도 옹추계곡의 풍광에 빠져 무려 아홉 달이나 머물렸다고 하니

 

망속대 하단에서 올려다 본  忘俗臺  -  이황선생이 정말 속세를 잊을만큼 좋은 경치다는 생각... 여름이면 더 좋았겠지만...

 

물품보관소를 지나면

 

 

KBS 드라마 <태조 왕건>의 촬영장이였던 용추 상단에서 본 모습

도선선사가 태조 왕건에게 도선비기를 전수하던 장면과 궁예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곳이란다

 

 

 

하단에서 담아 본 모습 - 용추의 양쪽 옆 바위에는 신라시대 최치원이 쓴 세심대·활청담·옥하대·영차석 등의 음각 글씨가 새겨져 있다는데...

 

용이 하늘로 승천하면 남긴 자국을 당겨보면...양쪽으로 자국이 선명하다

 

내려오다 용소바위도 담아 보고 - 용이 승천하다 남긴 발자국이라고...

 

 

 

날머리에 무당소가 있다 - 100여 년 전 물 긷던 새댁이 빠져 죽은 후 그를 위해 굿을 하던 무당마저 빠져 죽었다고 한다

 

 

 

용추계곡 입구에 있는 식당에서 뒤풀이로 하루를 정리한다

 

오랜만에 몸보신과 함께 했던 대간길을 정리한다

 

 

牛腹洞...  소의 배안처럼 생겼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생긴 지형이기에 소의 뱃속 같다는 얘기인지...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속리산 용유리 산행을 하면서 글을 남겼음에도 궁금하기만 했였는데...

소의 뱃속의 형태가 아니라 농경이 근본이였던 조선에서 소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할 때

소의 뱃속같은 지형이라면 십승지로서 손색이 없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오늘 청화산에서 확인 한 우복동이라고 자처하는 화산마을이나 용유리 마을

두 곳 모두 위치만 조금 다를뿐 병화가 침범하기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지형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용이 춤을 추며 즐길정도로 복받은 땅 용유리 속살을 걸어 봤고

멀리서 지형까지 확인할 수 있었던 백두대간길이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다가 왔던 하루

거기에 산줄기 하나인 시루봉을 사이에 두고 다른 한편에서는

후삼국시대의 영웅 견훤이 꿐을 키웠던 곳이였다니...

 

우리가 걷고 있는 백두대간길이 주는 힘을 아닐까?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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