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발길 닿는 곳 : 마대산(영월) - 김삿갓( 김병연) 흔적들.. 

   

             

 

 

일시 : 을미년(15년) 견우직녀달 열여드레 흙날          

 

인원 : 3450온누리 산악회 산우님들

 

어딜 : 노루목 주차장 ~ 김삿갓생가 ~ 마대산 ~ 처녀봉 ~ 선낙골 ~ 노루목 주차장

 

 

 

7월은 이미 지난 초복과 중복 그리고 소서와 대서의 절기가 말해주 듯 더위와의 말없는 전쟁을 위해

옛부터 몸보양식으로 삼계탕과 개장국으로 원기를 회복하고 질병을 예방한다는 속설(俗說)에 따라

복날이면 어김없이 우린 삼계탕을 위주로 형편에 따라 몸보양식을 하게 된다

농작물도 뜨거운 태양아래 자라고 들에 더욱 풍성해진 풀을 베어 농사거름으로 퇴비를 만들었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조금은 한가한 철이라 산으로 계곡으로 떠나 산천을 즐기면서 보양을 했던 것이다

우리도 시원한 계곡물소리에 방랑시인의 노랫소리가 들릴 것 같은 김삿갓계곡으로 보양을 떠나본다

거기에 짱아 총무님이 우릴 위해 직접 닭죽을 끊여주신다고 하니 이래저래 보양의 산행이 될것 같다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2605에 있습니다

 

 

 

마대산 등로

 

 

영월은 2009년 한반도 지형중 제일로 치는 선암마을 한반도 지형이 있는 서면을 한반도면으로 바뀌고

김삿갓의 유적지가 몰려있는 마대산과 김삿갓계굑이 있던 하동면을 김삿갓면으로 바꾸었다

지명의 중요성은 요즘 같은 힐링시대에는 더욱 중요성이 더해가면서 유래깊은 지명도 바꾸어 놓고 있는 것이다

역사성을 지닌 이름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은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묻혀버린 것이다

실제로 칠갑산 대장님과 태마로 갔던 포항 대보면은 몰라도 호미곶은 알기에 아예 호미곶면으로 바꾸어 재미를 보고 있다 

그럼 이름까지 바뀌게 한 김삿갓계곡과 마대산은 어떤 모습으로 우릴 반길지 초보산꾼과 함께 들어가 본다

 

 

 

 

 

영월땅 감삿갓문학관이 있는 노루목 주차장에 도착하고

 

마대산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정기산행 단체사진을 남기고 - 우달대장님 작품

 

노루목이골 안내판에서  - 가속님 작품 ; 겨우 사진으로 산우님들의 모습을 대한다

 

노루목

싸리골에서 곡골, 대밭나드리를 지나 와석리와 충북 단양군 영춘면의풍리(義豊里)와 경계가 되는 마을이다.

노루목에서 의풍 노루목으로 넘어가는 산마루 정상에 바위 두 개가 노루뿔처럼 솟아 있으므로 이 마을의 이름을 '노루목'이라고 한다.

 

 

엊그제 비로 한결 많아진 맑은 물소리가 넘치는 김삿갓계곡의 노루목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김삿갓계곡 (마포천)

마대산 일대는 선달산(1,236m)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와 단양군 영춘면의 풍기를 지나 영월군 와석리로 흘러들어 맑은 계류를 형성하고 있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그 계곡을 일컬어 "무릉계"라며 크게 감탕하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흔히들 김삿갓계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와석리 김삿갓계곡과 김삿갓유적지 입구의 조형물이 보인다

와석리(臥石里)   영월군 하동면  어래산 끝나락에 자리한 농촌

사람이 편안히 누워서 자연을 벗삼아 어질게 살수 있는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와인리(臥人里)'라 하였으며 후에 와석리가 되었다.

자연부락으로는 두릉골, 와인리, 골어구, 든돌, 싸릿골, 노루목, 미사리, 골말, 젖동개, 조촌 등이 있다.

해발 1,063.6m의 어래산(御來山) 줄기로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의 삼도가 접하는 접경 지역인 삼도봉이 있다.

 

 

김삿갓유적지 입구에서 좌틀하며 본격적인 김삿갓과 마대산의 산행이 시작되고 - 앞에 보이는 산이 이곳에서 시작하는 곰봉능선이다

 

입구에서 부터 낭만으로 만 생각했던 김삿갓의 생애가 얼마나 처절했는지 일꺠워준다

삿갓위에 쓰여진게  ‘스무나무 아래二十樹下’란 시인데 함경도 어느 부잣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질 때 우리나라의 풍습이나 주인의 경제력으로 봤을 때

식사랍시고 내놓는 밥이 쉬어서(五十食) 사람이 먹기 어려운 밥이었을 정도로 참기 어려운 냉대를 받고 설움과 분노를 표현한 시이다

 

 

 

二十樹下三十客 四十村中五十食 /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초입에 향토사학자로 평생을 김삿갓유적지를 찾아 오늘의 이곳을 만들게 하신 분인 정암 박영국 공덕비 - 감사합니다

 

계속되는 김삿갓의 시비와 조형물들 그리고 시선 김삿갓 난고 김병연 선행 유적비

김삿갓의 생애 
평생 산하를 시와 술로 떠돌며 조선제일의 방랑자로 살아온 그를 우리는 시선(詩仙)  방랑시인 김삿갓이라 부른다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회암리에서 1807년(순조7) 3월 13일 안동 김씨 시조 김선평(金宣平)의 23세손 안근(安根)과

함평 이씨(咸平李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호는 난고이며 김삿갓(김립金笠)은 별호이다

순조12년인  6세때 홍경래의 난에 선천부사로 있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구걸 하였는데

이듬해 난이 평정된 후 김 익순은 그 죄로 처형당하고 삼족에 멸하는 처지에 놓이자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 하였다가 후에 모친과 함께 강원도 영월로 이주하여 살았다. 

 

 

 

가장 눈에 띄는 환갑조형물앞에 산우님들 - 가속님 작품 : 시내용으로 보아 손에 든 것이 복숭아 인 듯

 

 

한번 역적으로 몰리면 삼족이 멸하는 시대라 같은 가족이라고 해도 숨기고 또 숨기고 했을 터이고 보면

그런 가족의 내력을 알려줄 리 없었을 것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입장에서  20세때 황씨와 결혼하여

그해 영월 동헌에서 실시한 백일장에서 그는 김익순 자신의 할아버지 인줄도 모르고,

백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마고의  비겁자라고, 경멸하는 詩를 써서 장원급재하게 되니

조부를 욕 하였다는 죄책감에 처자식마저 내팽게치고 22세부터 방랑을 시작하여

가슴에 맺혀 평생 삿갓을 쓰고  평생 하늘을  보지 않으며  40여년간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1863년 3월 29일에 전라도 동복 구암리에서 5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 하였고 3년 후 아들 김익균이 영월로 이장하였다.

 

 

 

이제 산행은 김삿갓 무덤 직전 좌틀하면서 성황당을 끼고 단양군 영춘면과 영월 김삿갓면의 경계를 따르게 된다

 

이 분이 없었다면 깁삿갓도 없었다고 할 정도로 일제강점기에 전국방방곡곡을 돌며 찾아내어 시집을 정리하신 이응수 선생 공적비를 지나

 

역적의 자손으로 이곳에 들어와 살아야만 했던 김삿갓 가족의 고달픈 11번의 구비를 건너야 했던 삶의 길을 걷고 있다

 

읽기 편하게 해설을 담아 김삿갓의 시를 걸어 놓았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남긴 시는 양반 귀족들의 부패상과 죄악상 비인도성을 폭로하고 풍자하는 경우가 많다

한 시대의 천재는 운명을 결정하는 신을 잘 못 만나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살다 갔다

바람의 신의 명령에 따라 바람부는데로 강을 만나면 강물 흐르는데로 방랑땟목에 몸을 실려 흘러갔다

아무리 태생이 그래도 사람인데 어찌 방랑의 길이 힘들지 않았겠는가?

 

 

이미 고인이 되신 최헌의 오동잎 노래가 오늘만큼 크게 와 닿는 경우가 있었을까?

 

 

지금이나 옛날이나 유일하게 고독한 방랑자에 손을 내민 것은 술이었을 것이고 여자 이었을 것이다

술이나 여자로도 채워지지 않는 맘속 한 구석을 채워주는 반려자는 바로 그의 천재적 시심詩心이었다

천재적 시심이 없었다면 과연 스물두살에 가출하여 쉰 일곱에 죽기까지 평생을 방랑하면서 살아 갈 수 있었을까?

비록 삿갓으로 하늘을 볼 수는 없었지만 시로써 자신과 세상을 건지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김삿갓이 평생을 함께 했을 술과 여자, 그 긴세월을 방랑하면서도 이런 절제된 생각이 바로 시선으로 불리게 하는 힘이 아니었을까?

 

 

서편재의 소리를 얻기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해야만 했던 한의 소리가 살아 있는 자에게 심금을 울리 듯

노숙자와 다름없는 황량한 방랑속에서 나왔던 그의 시혼詩魂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이유이며

비록 그의 육신은 이미 한 줌 거름으로 돌아 갔지만 우리가 다시 김삿갓의 유적지를 찾아 가는 이유이다

김삿갓이 남긴 시 몇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천재적 詩仙이 전국을 방랑하며

그가 하늘을 가리면서까지 남기려 했던 얘기들이 지금까지 영월땅에 살아 있기에 우리는 이곳을 찾은 것이다

 

 

좋은 일만 있으면 어떻게 방랑시선이 될 수 있었겠는가.

 

 

19세기에 조정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안동 김씨의 피를 이어받고 태어났음에도

천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현실이 아마도 더욱 그를 힘들게 하였을 것이고

조부를 욕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자신의 처지와같은 사회적 모순을 시로써 승화시키지 않았나 하는 생각

요즘 정치적 분위기에서 과연 김삿갓같은 천재가 다시 나타났다면?

과연 이 사회는 맘꺽 자신의 뜻을 펼수 있도록 도와줄까?

 

 

 

우리가 하산하면서 만나게 될 합수점 ; 우측이 처녀봉으로 오르는 선낙골 우리는 김삿갓 생가가 있는 좌측 어둔이골로

 

좌측이 어둔이골 계곡 우측이 선낙골 계곡의 합수점

 

이제 강원도와의 도경계였던 충북 단양 영춘면과 헤어져 영월땅 김삿갓면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에서 김삿갓생가가 있는 우측으로

어둔(於屯)

김삿갓의 묘가 있는 노루목 성황당에서 서북쪽으로 30분쯤 들어가면 김삿갓이 살던 집터가 있었던 곳이다.

어둔은 태백산(太白山)과 소백산(小白山)의 양백간(兩白間)으로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의 3도 접경 지역이다.

조선 명종 때 풍수가인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는 의풍(儀豊)을 가리켜 피장처(避藏處)로서 천하에 둘도 없는 명당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좁은 골짜기로 해가 일찍 지고 어두운 곳이므로 '어둔'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이야 마을이 개발되고 포장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어떠했을지 상상하면서 걸어 올라온 김삿갓 생가

 

오랜만의 정기산행 합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후미에서 고생했습니다. 백두대간 3기 여전사였던 앵두님

대개 화전민들은 통나무를 이용해 주거지를 얼퀴설퀴 짓는 게 관례이지만, 이 집은 도끼로 짜서 정교하게 놓아 양반가문의 규수였던 김삿갓 어머니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원래 엄운석 씨가 이곳에서 살다 떠난 후 빈집으로 방치되었다가 지난 2002년 복원했다. 현재 뜻있는 문화해설사가 이곳에서 거주하며 방문객들의 관광을 돕고 있다.

주거지 왼쪽으로 김삿갓 영정을 모신 2007년에 만든 난고당 사당이 보인다.  - 영월군청 -

 

 

이제 뜨거웠던 7월의 임도 산행을 끝이나고 삿갓대신 녹음이 대신했던 별 특징없는 오름길, 이런 즐거움이라도 - 가속님 작품

 

선두와 너무 많은 차이로 중간에서 후미 3인만 식후경 후 마대산에서 처녀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에 오르고

 

마대산 정상에서 함께 하지 못한 단체사진의 아쉬움을 우달대장님의 사진으로 대신하여 달래 본다

마대산 馬垈山 1,052m 인기순위 250위

김삿갓유적지로 알려진 영월군 동쪽의 마대산은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과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에 걸쳐 있는 산.

마대산은 1,032m봉에서 북쪽으로 가지쳐 형제봉을 지나 능선상의 끝머리에 솟은 산이다.

남쪽 사면을 흐르는 수계(水系)는 노루메기와 말등바위 사이의 베틀재를 분수계로 하여 북쪽으로 흘러 남한강의 지류인 옥동천(玉洞川)으로 합류한다.

서쪽 사면으로 흐르는 수계는 동대천(東大川)을 이루며 동대리일대에 비교적 넓은 하곡을 형성하고 용진리 부근에서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피안의 땅으로 소문난 소백산자락 지역이니 말과 관련이 있을 법하지만 정확한 유래는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자료를 준비했는데...  마대산과 주위의 산과 강 - 다음지도 : 동강의 푸른 물결을 볼 수가 없었으니...

 

 

전망바위로 가는 길, 강원도와 충북의 경계답게 울창한 숲이 7월의 뜨거운 햇살을 자양분 삼는 가운데 우리 산우님들도 - 보물상자 대장님 작품

 

 

전망대에서 본 가운데 의풍을 좌우로 가운데 가장 멀리 보이는 갈곶산과 좌측의 선달산 그리고 가운데 늦은목이의 백두대간 준령

좌측으로 선달산에서 어래산과 충북 강원 경북의 삼도봉에서  곰봉삼거리까지 이어지는 외씨버선길이기도 하다 - 언제 이길을 걷나?

 

자료 : 백두대간길에서 선달산에 찍은 사진

 

 

우측으로 마대산에서 형제봉을 이어주는 배틀제와 멀리 백두대간 1,032봉에서 북쪽으로 계속 이어져 온 줄기가 마대산까지 연결된다

베틀재(651m)     백두대간에서 동으로 뻗은 형제봉(1177m)과 마대산(1050m)사이

베틀재라는 말은 기현령 배틀을 고정시키는 자리라는 의미에서 유래한다.

옛날 운송수단으로 발달했던  뱃길로 한양 왕래를 위해 경상도, 강원도 사람들이 넘어야 했던 우리나라 3대 소금길로

마포에서 온 소금을 옹진나루에서 내려 지게 짐을 지고 베틀재를 넘어 강원도와 경상도를 왕래하였다.

정감록에 구곡종어 삼풍(三豊), 구인종어 양백(兩白)인 십승지로 오르막길 30리, 내리막길 30리다. 삼도의 문물이 오고간 역사속의 대로이다.

 

 

 

좀 더 진행하면 처녀봉이 나오는데 이곳에 빗대 전망대봉을 총각봉이라고 부른단다 - 가속님 작품으로 되살아난 처녀봉의 처녀들?

 

만만치 않은 내림길을 하면 선낙골 갈림길인 임도가 나오면 좌측으로 계속 임도를 따르게 된다

선락골(仙樂谷)
어둔 동쪽의 마대산(馬垈山) 밑에 있는 마을로 신선들이 놀았다는 신선바위(神仙岩)가 있다.

이곳에서는 마대산 줄기를 타고 맛대와 두릉골로 갈 수 있으며, 십승지를 찾아와 은둔 생활을 하며 도를 닦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무명폭포에서 강철 대장님 오늘 후미에서 고생했습니다.

 

다시 합수점으로 되돌아 와

 

김삿갓유적지 성황당 옆 다리를 건너면 - 정면에 보이는 곳에 김삿갓묘가 있다

 

현대판 김삿갓이 계시는 난고정을 지나면

 

김삿갓 묘역이 보인다 : 김삿갓 묘역의 왼쪽은 태백산 끝자락이고 오른쪽은 소백산 시발점이 되는데, 이는 천하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김삿갓의 묘에 있는 비문

생전 김삿갓은 "나 죽으면 여기 묻으라."고 유언했고 그의 유언대로 마대산 산자락   와석골 노루목의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평생 詩와 酒을 떠나지 않고 떠돌이로 일생을 보낸 김삿갓의 고단한 영혼이 잠든 곳이라 할 수 있다

네다리 소나무 소반에 죽이 한 그릇 / 하늘과 구름에 함께 떠도네 / 주인장 제발 무안해하지 마오 / 나는 물속의 청산을 사랑한다

 

 

다시 다리를 건너면서 바라본 김삿갓유적지의 모습

 

다시 김삿갓문학관 주차장으로 돌아와 -ㅡ후미기준

 

우달대장님 후미와 중간에서 고생했습니다

 

 

산에도 가지 못하고 산우님들을 위해 짱아 총무님이 손수 끊인 닭죽으로 하로의 피로를 풀어 본다

 

모두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선두에서 계속 고생하시는 까치대장님 아무리 봐도 멋있습니다 - 보물상자 대장님 작품

 

그리고 짱아 총무님 고생했습니다 - 우달대장님 작품

 

 

 

조선역사에서 기인을 꼽으라고 하면 대체적으로 김삿갓과 함께 세조시대의 김시습과 선조시대의 임제 정도를 꼽고 있다

그중에서도 김삿갓은 아예 직장생활을 하지 않고 방랑시인으로 살았기에 서민적 이미지가 강해

김시습이나 임재에 비해 정형화된 문화에서 자유로웠다는 측면에서 대중성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詩仙이 남겨놓은 방랑시인 김삿갓의 풍류만 전할 뿐 그의 그림자도 볼 수 없는게 현실이었다

그런 과거속 김삿갓을 현재 살아있는 그를 만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 바로 김삿갓 유적지이다

그래서 “서민의 애환을 노래하고 민중과 벗하며, 한문을 한국화하고 한시의 정형을 깨부순 시인”이라 평했던

역사학자 이이화의 평가가 김삿갓의 모든 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삿갓으로 하늘을 가린들 하늘이 바뀔리 없고

맘속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세상에 대한 원망과 한이 사라질 리 없었을 것이고 보면

천제만이 겪어야 하는 현실적 괴리감을 우리가 얼마나 이해하고 느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세상속으로 나와 제도권에서 맘꺽 내뜻을 펼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기에 삿갓으로 원망을 대신했지만

천제가 잘할 수 있었던 방랑시인으로써의 보인 파격적인 행보에

삐뚤어진 세상을 농락하고 기성 권위에 도전하고 민중 속에서 숨쉬며 살아냈던 삶이

홍길동, 장길산, 임꺽정등의 소설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읽어 내면서

대리만족할 수 있는 자유를 우리에게 주었기 떄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무리 해 본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일 뿐 잠시 우릴 되돌아 보자는 뜻에서 들린 김삿갓의 혼이 담겨있는 마대산

조선 최고의 갑부인 임상옥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상도를 드라마한 상도를 보면

마지막 부분에서 임상옥이 나이를 먹고 모든 富를 내려놓고 홍경래의 무덤을 찾는 장면이 나온다

임상옥도 한 때 철저히 숨기고 들어 왔기에 홍경래인줄 모르고 휘하에 두고 있었던 사실로 홍역을 치루고 난 뒤

세월이 많이 지났어도 역적의 무덤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지만 임상옥이 말년에 홍경래의 무덤을 찾은 것은

홍경래와 뜻은 함께 하지 못했지만 홍경래가 이루고자 했던 뜻만은 인정했기 떄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막 돌아서러고 할 때 홍경래의 아들이 삿갓을 쓰고 나타나면서 드라마는 끝난다

혹여 김삿갓의 일대를 돌아 보면서 김삿갓의 유래에 집착하다

홍경래의 이루지 못한 지금도 진행형인 역사를 폄하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남겨봅니다

 

함양 삼봉산의 오도재에서 깨달음의 길을 보았다면

오늘은 평생을 아마 깨달음의 심정으로 방랑의 길을 택했던 김삿갓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김삿갓이 김삿갓계곡에 남기고 가신 뜻을 상상의 나래를 펴보기도 하고

산을 산으로만 보지말고 산이 품고자하는 맘까지 읽을 수 있는

그런 3450온누리 산우님들이 되었으면 하는 맘으로 마지막으로 정리합니다

이제 몇번 남지 않은 초보산꾼과의 만남

계속 10년후에 갑자기 생각나는 그림자가 되었으면 하는 맘입니다

 

무더위의 한 복판 7월

계곡을 생각하다가 김삿갓계곡을 생각하며 올렸던 마대산의 산행에

약간은 지루할 수 도 있었던 산행길, 녹음이 우거진 신록의 잔치가 삿갓을 대신했고

볼려고 했던 영월의 동강을 비롯한 남한강의 시원한 강줄기를 볼 수 없는 아쉬움을

김삿갓계곡의 강원도 특유의 시원하고 맑은 물이 우리의 심신을 차분하게 했던 매력넘치는 마대산

그렇게 서로 아쉬울 것도 그렇다고 넘칠 것도 없는

세상사 생각나름인 하루의 여정을 함께 해 주신 산우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래도 아쉬울 것 같아 제가 드린 방랑시인 김삿갓의 노래악보를 보면서 흥얼거려 봅니다

10년후에도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까요?

 

수고했습니다.

 

 

 

         초보산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