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100대 명산 - 명성산(鳴聲山:923m 철원) 3 - 석천계곡, 궁예능선

 

 

 

일시 : 병신년(16년) 매듭달 12월 사흘 흙날 

        

인원 : 혼자서

 

어딜 :  신철원 A코스 들머리 ~ 석천계곡 ~ 명성산 ~ 궁예능선 ~ 강포리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3479 에 있습니다

 

 

집을 나서는 순간 옷 속을 파고드는 매서운 겨울바람보다 더 잔인한 마지막 잎새가 남겨주는 쓸쓸함

돌아올 희망을 기약해야 하기에 남김없이 버리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자연 앞에 아직도 맘만은 만추이지만 

내 맘을 비웃듯 어느새 달력도 올 한해 고생했다며 마지막 한 장 만을 남기니 이래저래 맘만 맘이다...

그래도 한 달이라는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 것도 희망이라면 희망일까?

 

 

 

참고지도 : 석천계곡 답사기 - 석천계곡 하류 부분은 군부대 출입 통제구간이라 지도에는 표시 안 한 듯...

 

 

서울 출신으로 조선후기 성리학자였던 삼연(三淵) 김창흡(1653~1722년) 선생이 27세에 철원 용화동에 은둔하면서

삼부연폭포에 매료되어 호를 三淵이라 짓고 저서 三淵集에 인근 석천사를 답사하며 남긴 글이 石泉谷記이다

철원군에서 석천곡기에 근거하여 명성산 석천계곡 옛 숲길 복원사업을 추진하면서 서서히 알려지고 있다

2014년에 강원일보에 실린 기사인데 지금 얼마나 복원이 되어 있는지 확인도 하고

삼연이 그림이 아닌 글로 만 남겼기에 계곡의 특성상 세월이 흐른 만큼 변화도 있을 터... 어떻게 변해 있을까? 

 

 

 

 

동서울터미널에서 07:00분 3000번 버스를 9,300원을 지불 31번 홈에서 출발 신철원 터미널까지

 

터미널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다 우체국을 넘어 우측으로 보이는 명성산 궁예능선을 담아 본다

 

저번에 삼부연폭포로 내려올 때는 비가 내려 담아 보지 못한 철원군청... 석천계곡 꾸미느라 수고했습니다

 

계속 직진하면 삼부연폭포로 가는 길과 용화천이 나오고... 계속 직진

 

앞에 보이는 능선따라 석천계곡에 들렸다가 제일 뒤에 보이는 궁예능선으로 하산한다

 

여기서 다리를 건너도 되고

 

조금 더 진행하여 돌다리를 넘어 와도 된다. 신철원 출발 등산로 입구

 

 

새롭게 만든 안내도... 그런데 석천계곡의 표기가 잘 못되어 답사에 애를 먹음. 출입통제구간이라 표기를 안 한듯하다.

답사 결과 사실 많은 석천계곡의 지명들이 하류쪽에 몰려 있었다. 위 참고지도 참조 

 

초반부터 오름길... 국기봉도 지나고... 삼부연폭포는 여기서 보일 것 같은데 꼭꼭 숨어 보이지 않는다

 

삼각점봉에서 담은 삼부연폭포 방향

 

자료 : 삼부연폭포에서 신철원 시내로 내림길

 

삼각점봉에서 진행해야 할 방향. 앞에 보이는 봉 앞에서 우측으로 해서 등로가 바뀌며 진행하게 된다

 

앞 봉 앞의 이정표... 석천사 이정표가 처음 보인다. 이제 오름내림을 반복하게 된다

 

삼부연폭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남.  이 코스는 새롭게 떨어진 낙엽과 기존의 낙엽이 높게 쌓여 밟을 때마다 소리가 경쾌하다

 

석천사 절터 0.9km지점 지나면서 이름이 생각 날 듯 말 듯... 조림지... 요즘 이 나무를 많이 심던데...

 

석천사 절터 0.6km 이정표를 지나 갈림길... 갈림길 3방향은 증현으로 넘어가는 능선인 듯

 

 

김창흡의 석천곡기는 '용화산(龍華山)을 넘어 서쪽으로 향하면 산세가 막혀 깊숙하게 골짜기를 이룬다.

그 가운데에 작은 절인 석천사(石泉寺)가 있다. 절의 위아래를 둘러싸고 유람할 수 있는 바위로 이루어진 골짜기와 시내와 못이 6~7리에 펼쳐져 있다.

그 사이에 절이 있는데, 계곡의 1/4은 절 위쪽에 있다' 로 시작된다 

 

석천사를 중심으로 느치계곡까지 6~7리 정도 되는 계곡을 석천계곡이라 하는 듯하다

그런데 용화산이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지 또 삼연이 어디서 출발을 했는지는 나의 능력 밖이다

여러 선답자들의 답사기와 철원군에서 설치한 이정표를 근거로 답사를 출발해 본다

 

 

 

석천사 절터 내려오는 길...나무 계단이 있으나 낙옆으로 보이지 않아 조심 또 조심... 그만큼 사람 발길이 적은 듯...

 

석천사 절터 - 한쪾에 기와파편이 남아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지금도 첩첩산중인 이곳까지 와서 암자를 세웠을까?

 

안내판에 상세히 잘 나와 있다

 

조금 계단따라 내려오면 석천사 유래가 된 생명수 石泉... 지금도 조금씩 흐르고 있다. 부처님 맘을 닮았다

 

 

"절에 도착했다.석천(石泉)은 바위틈에서 흘러나와 졸졸 흐르며 끊이지 않는 것이 마치 뽑아 당기는 것 같다.

스님이 말하길 이 물은 홍수와 가뭄 때에도 넘치거나 준 적이 없어서, 예로부터감로(甘露)라 불렀다고 한다.

시험 삼아 따라 마셔보니 무척 차가우면서도 맑다. 비록 제대(帝臺)라는 신선의 음료라고 하더라도 이것보다 낫지 않을 것이다.

 " (김창흡(金昌翕), 「석천곡기(石泉谷記)」, 『삼연집(三淵集)』)  자료 : http://cafe.daum.net/ganghanyeon/9kLF/155?q=%F1%F7%D6%BA

 

 

 

이제 이정표가 나타나며 석천계곡 속으로,,, 우선 하류 방향으로... 소운폭포가 기다리고 있다. 다시 되돌아 와야 한다

사실 자료가 너무 빈약해 답사에 애를 먹었는데... 후답자를 위해 상세히 기록을 남긴다

 

소운폭포 상단... 여기부터 출입금지 구간이다.

 

비래폭포와 자운데 안내판에서 이렇게 진행한다. 지금부터 사진 속 시간은 무의미...

 

비례飛來폭포 - 안내판이 하도 잘 되어 있어 부연 설명이 필요 없다

 

 

소운폭포素雲瀑와 좌측 자운대紫雲臺

 

 

소운폭포

 

 

소운폭포와 비래폭포를 구경하고 계속 계곡따라 내려오면 구첩병 상류

 

 

 

구첩병九疊屛이 가을 하늘을 벗삼으니 번접할 수 없는 위용을 느낄 수 있다. 눈으로 다 담을 수 없음이니...이렇게 당당한데...

구중궁궐안 청와대... 구첩병과 구중궁궐 똑 같은 단어 같은데...하나는 꼭꼭 숨고...구첩병과 같은 주군이 빨리 나오시기를...

 

사실 이 내용은 올라오면서 쓴 글이기 때문에 방향 등 느낌이 다를 수 있다.

 

구첩병 아래 소

 

조금 더 내려오면 미화석

 

 

이상한 향기가 나는 것 같다. 마음을 취하게 하기 때문에, 그 돌을 미화석(迷花石)이라 부른다...

어떤 느낌일까... 돗자리라도 펴고 앉아 놀아야 보이는 느낌... 역시 풍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통현곡(通玄橋)  - 너무 심오한 단어 같아서... 계곡을 따라서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세계...즉 道의 세계를 뜻하는 듯...

 

사전에 통현은 사물의 깊고 묘한 이치를 깨달음이라 되어 있다. 어찌보면 여기부터 소운폭포로 이어지는 석천계곡이 깨달음의 길이다

 

 

 

북 같은 돌이 있어 돌을 밟고 바라보니, 돌 하나가 북쪽 언덕에 있다. 산 짐승이 물을 마시는 것 같아서 가까이 가니 바로 못 가운데로 숙이고 있다.

나는 못 색깔을 취해서 금벽담(金碧潭)이라고 이름 붙였다. (김창흡(金昌翕), 「석천곡기(石泉谷記)」, 『삼연집(三淵集)』)

 

 

출입통제 구간 중에서도 더 이상은 허락하지 못한다고 철책까지...

 

여기에 유주담流珠潭이 있다

 

 

 

계곡따라 계속 내려가면 석천곡기에 나오는 첫번째 비경 창포담菖蒲潭도 있고 부대도 있고...

그런데 이곳에서 여기에 사시고 이번 석천계곡 가꾸기 사업을 직접하셨다는 분을 만나는 행운...

이렇게 관심 가져 줘 고답단다. 오히려 내가 고마운데... 사실 청정지역 보호를 위해 개방을 많이 망설였다는 말씀까지...

 

생각보다 길어진 답사... 식후경까지... 다시 되돌아 올라오기에 제대로 석천곡기를 느껴야 함에도 시간이... 금벽담을 지나고

 

게곡과 계곡 옆길을 계속 이리저리 넘고 또 계곡을 건너고...

 

그렇게 다시 되돌아 온 석천사 절터 아래 계곡... 계속 계곡 따라 올라간다. 느치계곡과 만나기 위해...

 

 

절을 왼쪽으로 두고 동쪽으로 가다가 깊은 곳으로 꺾어 들어가면 입을 벌릴 정도로 두 계곡이 갈라진다. 

남쪽에 있는 것은 소회곡(小檜谷)이고 북쪽에 있는 것은 대회곡(大檜谷)이다. 계곡은 시내물이 합쳐져 쏟아지며 두 길 높이의 폭포를 만들고

맑은 못이 이어져 있다. 뛰어난 경치가 더욱 단정하며 좋다. 양 옆에 서 있는 돌이 마주하여 우뚝 서 있는데 계곡의 문을 만든 것 같다.

물은 그 사이를 뚫고 흐르며, 사람은 그림처럼 그 가운데서 노닌다.    "(김창흡(金昌翕), 「석천곡기(石泉谷記)」, 『삼연집(三淵集)』)

 

 

 

한참을 오르면 하수렴 下水簾 - 하수렴 위에서 계곡이 갈라지는데 대회곡은 직진

 

 

하수렴 상단 - 이정표의 진입금지 방향이 소회곡

 

발걸음 내키는 대로 대회곡(大檜谷)으로 갔다. 잡목이 무성하고 담쟁이 넝쿨이 있어 앞에 길이 없는 것 같았으나,

홀연히 폭포와 입석(立石)을 만났다. 크기는 하수렴과 비슷했다.     (김창흡(金昌翕), 「석천곡기(石泉谷記)」, 『삼연집(三淵集)』)

 

 

하수렴과 비슷했다는 상수렴上水簾

 

 

 

두 폭포를 상수렴(上水簾)과 하수렴(下水簾)으로 부르고, 또 입석(立石)을 문암(門巖)이라고 이름 붙였다.

석천곡기에 나와 있는 입석 문암과 안내판에 나와 있는 상수렴 상단위 두개의 얕은 못을 되돌아 본다

 

 

(상수렴)에서 앞으로 더 가려고 했지만 수원(水源)은 점점 얕아져서 위쪽에 더 이상 아름다운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삼연이 계곡 올라 왔다면....하는 아쉬움... 티나지 많으면서 계속되는 폭포들... 첫번째

 

계속 이어지는 작은 폭포와 여울들...

 

두번째

 

명성산 2지점 안내판 지나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심연이 다 담을 수 없어 이름을 지을 수 없다 했는데 이 계속 이어지는 폭포들을 봤다면... 하는 하쉬움

왜냐하면 같은 풍경을 보고도 우리는 와! 로 끝나지만 시인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세계를 볼 수 있음이니...

그렇게 이제 느치계곡과 접속 후 되돌아 본 석천계곡... 사실 지금도 석천계곡이 아니라 느치계곡이다. 용화동 입구와 접속

 

이제 느치계곡 헤어져 명성산 오름길 최단 코스로...명성산 1.8km

 

올 3월달에 느치계곡

 

오름길에 만난 안내판

 

계속 오름길... 능선에 올라 한북명성지맥과 멀리 광덕산까지...

 

용화저수지

 

암릉도 지나고

 

명성산 정상

 

 

제일 뒤에가 궁예봉

 

약물계곡 갈림길 네거리... 여기서 약물계곡으로 내려가는 것 같은데... 이정표가 이상하다.. 침전바위를 보기 위해 궁예봉으로

 

침전바위 직전 궁예성터

 

3월달에 왔을 때 비가 내리고 바람이 거세 오르지 못했던 침전바위... 그런데 오를 수는 있겠는데 내려올 자신이 없다

 

우회하여 되돌아 본 침전바위... 궁예는 매일 맨손으로 저 꼭데기 올라 세상를 바라 봣을 것인데...

 

약물계곡.... 하류에 석천계곡과 만나 강포저수지로...

 

궁예봉

 

내려가야 할 강포저수지

 

내림길... 역시 얼었다 놓았는지 길이 미끄럽다

 

 

오늘 들리지 못한 약물폭포가 있는 약물폭포 갈림길

 

 

궁예능선과 약물계곡 코스의 입구

 

강포3교를 지나

 

좌측으로 마을길을 피해서

 

여시서 부터 우측으로 보이는 강포저수지를 보면서 진행하면 된다

 

자일교를 지나 강포저수지

 

구제역 때문에 여기도 계속 소독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큰길로 나와 우측으로,..

 

여기서 길을 건너 동서울로... 벌써 어두워지고...

 

 

사실 글로만 표현된 장소를 찾아 답사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

작가가 아무리 사실대로 표현했다고 해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깊은 산속에 있는 계곡이라면 더욱 그렇다

큰 홍수 한 번 휩쓸고 지나가면 계곡 자체의 지형이 바뀌기 때문이다

거기에 하류 쪽이라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다는 것이 어쩜 불가능하다

그래서 창포담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다

그런 중에도 김창흡의 석천곡기의 내용을 따라 답사하신 선답자 들이 계시고

또한 철원군에서도 늦게나마 기록에 따라 복원하려 애쓴 보람으로

누구나 찾을 수 있는 답사지로 변해있어 그나마 수고를 덜했던 답사였다

 

이번 답사에서 느꼈던 단상하나...

수많은 곳을 답사하다보면 겸재 같은 분들이 남기신 그림들이 얼마나 소중하게 다가오던지

아무리 지형이 바뀌어도 조금이라도 흔적이 남아 있으면

그림을 보고 추정이 가능하다는 예기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진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있어 그림의 홍수 속에 살지만

그래도 이런 작업들이 있어야 흔적이 사라졌다고 해도

옛 모습을 추억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다시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요즘 갑자기 많아진 초보산꾼의 암각자를 찾아가는 답사여행

같은 돌에 세긴 각자라고 해도 옛 사람들이 남기신 각자와

현대인들이 남긴 각자는 분명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은 이미 얘기했고

현대인은 사진이라는 물건에 의해 사진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때론 홍수 속에서 남은 사진 한 장이

역사 속 소중한 보물이 되어 있을 수 있음이니

사진 한 장도 소중히 했으면 하는 단상이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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