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100대 명산 - 명성산 2 (鳴聲山:923m 철원) - 한북정맥 완주기념 태마산행

 

 

 

일시 : 병신년(16년) 물오름달 열아흐레 흙날     

    

인원 : 혼자서

 

어딜 : 상동주차장 ~ 망봉산 ~ 망무봉 ~ 자인사 ~ 구삼각봉 ~ 등룡폭포 ~ 상동 주차장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3026 에 있습니다

 

 

봄이 벌써 왔다고 입춘대길 하면서 오시는 봄에게 복을 기원했건만 아직도 겨울의 시샘의 여운은 남아 있고

맘만 앞섬을 경계했지만 옷속을 파고드는 바람은 차갑지만 얼음속에서 피어난 봄의 생명들은 벌써 남녘을 꽃피우고

거기에 이제 내일(20일)이면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이니 따뜻한 햇볕을 받을 기회가 길어진 만큼

꽃들은 더욱 화사한 옷으로 갈아 입을 것이고 농부들은 씨앗을 심어야 하고 우리들은 그간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펴고

그렇게 계절은 오고 가고 또 오겠지만 한 번 흘러가버린 역사속 궁예의 흔적이 남이 있는 명성산의 봄은 어떨까?  

 

 

 

명성산 궁예의 흔적을 찾아서 세번째 등로 - 적색은 등산로, 청색은 수변길

 

 

오곡백과가 철드는 시절 가을에 또 하나의 설레임으로 다가 오는 억새의 축제에 꼭 초대되는 포천의 명성산

거기에 억새의 향기를 따라 명성산을 넘으면 펼쳐지는 산정호수의 늦가을 정취까지 살아 숨쉬고 있는 명성산

궁예가 왕건에게 배신을 당하고 철원의 명성산까지 쫒겨와 마지막 희망으로 성을 쌓고 항전했던 곳이라면

포천의 명성산은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궁예와 왕건의 애증의 그림자가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는 지역이다

이제는 영혼의 세상에서라도 악연을 끊고 화해하라는 염원을 담아 지었다는 자인사가 있는 산정호수로 길을 떠나 본다

 

 

 

오늘도 역시 동서울터미널에서 07:00출발 3000번 버스로 9200원을 지불하고 포천 08:08분 통과 후 운천터미널에 도착 

 

큰 삼거리로 나와 우측으로 가면

 

바로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 영북면 사무소

 

맞은편에 보면 영북면 사무소가 보이고 올 때는 그 곳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 운천 터미널에서 동서울로...

 

138.6번 버스를 타고 산정호수 상동 주차장에 내려 오늘 가야할 좌측의 망봉산과 망무봉을 동시에 조망

 

차가 들어 온 방향으로 나가 우측 도로를 따라 간다 - 좌측은 명성산 가는 길

 

평강식물원 방향 도로를 따라 가면

 

편의점이 나오고 바로 그 뒤로 눈썰매장 간판따라 우틀하면 망봉산에 오를 수 있다

 

 

망봉산 등산로 입구 - 그런데 관리가 전혀 안돼 안내판이 흔적만 남아 있다. 궁예의 전설처럼 씁쓸한 현실

 

임도따라 가면 유스타운 갈림길 첫 이정표도 지나고 - 먹고 노는 산정호수 유원지는 시끌벅적거리고

 

망봉산 반대 방향 봉우리가 망봉산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 궁예의 전설이 살아 있는 소중한 이 곳은 방치되고...

 

임도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오다 만나는 이정표 - 큰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간단한 소개라도 해 주었으면...

 

두번째 만나는 이정표 - 하산 할 때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 하동주차장으로 가야 망무봉으로 올라 갈 수 있다

 

그렇게 죽어서도 푸대접을 하니 궁예의 눈물로 착각된다

 

망봉산 정상과 가야 할 망무봉 - 궁예군이 올라 왕건 군사의 동태를 살피던 봉우리며 '망산'이라고도 한다

 

좌측의 명성산과 우측의 여우봉 -  왕건 군사들과 궁예 군사들이  여우처럼  서로 눈치를 봤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다시 삼거리로 내려오면 하동주차장 이정표따라 내려간다. 처음 길이 잘 보이지 않으니 주의

 

그래도 안전 시설은 있다

 

드디어 산정호수 둘레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 도로에서 좌측은 한화콘도, 우측으로 가야 산정호수가 나온다

 

우측으로 내려 와서 보니 가로등이 있다. 망무봉에서 거꾸로 올라 올 때 이 가로등 보고 올라가면 될 듯

 

산정호수가 나오면 구름다리로 좌틀

 

궁예가 능름한 모습으로 망무봉을 배경으로 먼저 반긴다

 

 

산정호수와 김일성 별장터가 보인다 - 6.25전에는 여기가 북한땅이라 김일성이 자주 머물면서 작전 구상을 했다는데...

다행인지 요행인지 앞에 보이는 망무봉이 고개를 돌리고 있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

산정호수(山井湖水)     주소: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산정호수로 411번 길 89

포천의 국민관광지로 자리 잡은 산정호수는 명성산 남서쪽 기슭에 자리한 7만8천 여평의 인공호수이다

25년 일제강점기에 포천지역 관개용수 공급을 위해 농업용저수지로 조성되어 70년대 군사시설이 철수되면서

주변의 높은 산봉우리와 기암괴석이 호수와 멋진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운 1977년 호반 국민관광지로 다시 태어났다

호반의 수변길을 따라 3km의 둘레길이 완성되면서 궁예의 흔적도 즐기고 명성산의 풍광까지 즐길 수 있다

 

더 많은 산정호수 얘기는 초보산꾼 여행기 http://blog.daum.net/kmhcshh/3022 참조

 

 

 

김일성 별장이였다는데...  물이 빠져나가는 곳에 별장이 있어 이 또한 김일성의 큰 실수?

큰 그림이 자꾸 옆으로 흘러갔다는 얘기이다.

김일성(1912~1994) 별장

6.25 한국전쟁 전에는 이 일대가 모두 북한 땅이어서 김일성이 유고 대통령이었던 티토의 초청으로 방문했다가

알프스에 둘러싸인 호숫가에 지어진 티토의 별장(슬로베니아의 블레드 호수)에 감동하여 이곳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더구나 호수의 모양이 한반도 모양과 비슷해 적화통일의 구상을 하기 위해 자주 방문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한반도를 뒤집어 놓은 모양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보이나요?

 

김일성별장터를 내려오면 바로 구름다리 - 구름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가면 수변데크길 좌측은 하동주차장으로 가는 길

 

하동주차장으로 잠시 내려와 구름다리와 산정폭포

 

산림욕장 방향으로 올라 망무봉으로... 잠시 산정호수길과 헤어진다

 

첫번째 전망대가 나오면 잘 기억해야 한다. 정상에서 하산 할 때 여기서 갈라지기 때문이다

 

거대한 바위가 나타나면 바위위가 망무봉 정상

 

망부봉 직전 좌측으로 계속 이어가면 산안고개로 가는 산정호수 일주코스이고 우측으로 오르면 망무봉(望武峰) 정상

 

망무봉은 궁예가 군사들의 훈련을 지켜보던 봉우리란 이름 유래를 갖고 있다.

궁예가 지금의 산정호수 좌우로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망원대를 올리고 봉화를 올렸다 하여 '망봉(望峰)'이라고도 한다

 

 

망무봉에서 가야 할 수변길 허브 야생화마을과 가운데 자인사가 보인다

 

잠시 휴식 후 다시 왔던 길을 내려와 아까 본 전망대 직전 좌측으로

 

산정호수 둘레길과 접속 좌측으로 진행

 

허브 야생화 마을도 지나고

 

비록 맑은 날씨는 아니지만 망봉산을 비롯한 산그림자를 품은 산정호수가 한폭의 산수화를 그려내고

 

망무봉도 호반에 기대어 분신을 담아 잔잔한 파도에 몸을 씻는다.

 

자인사 갈림길에서 자인사로

 

도로를 건너 자인사 입구

 

소나무가 인상적인 자인사로 올라 가는 길

 

전국에 있는 모든 사찰들은 진입로에 각 지방에 맞는 특색있는 수종을 심어 깨달음의 길로 안내하는데

역시 이곳 자인사도 명성산의 아름다운 산세를 뒤로하고 들어 앉아 10m가 넘는 키 큰 소나무 숲길이 우릴 안내한다

짧지만 긴 여운으로 남는 이 숲길도 깨달음의 길임과 동시에 힐링의 숲으로 다가 온다

거기에 궁예의 흔적들이 살아 나와 궁예가 꿈꿨던 미륵의 세계로 안내할 것 같은 곳이다

 

 

약수전과 그 뒤로 극락보전이 책바위를 배경으로 앉아 있다

 

명성산을 특별히 좋아했다는 고려 태조 왕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후삼국 패권의 자웅을 겨루던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궁예의 명으로 원정길에 나서 이 곳에 들렸는데

산의 붉은 기운이 좋고 맑은 물이 영험하여 산자수명 길지라 하여 산신제를 지냈는데

그날 밤 신령으로 부터 계시를 받아 출정하여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우측으로 두꺼비와 똑 같은 바위가 있고 우물을 만들어 두꺼비를 올려 놓았다

 

다시 훗날 세력을 키운 왕건에게 베신을 당하고 쫒기게 된 궁예도 이곳에 들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왕건이 산신제를 지낸 똑 같은 곳에서 복권을 기원하는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연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었는지 끝내 궁예의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며 통일을 이루었으니 산신제를 지낸 이 곳을 성역화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두꺼비 바위와 두꺼비

 

고려태조로 즉위하면서 개국신화의 일부가 된 이 곳에 왕건의 시호에서 따온 '신성암'이란 암자를 지었고

사찰의 면모를 갖춰나가는 중에 화재로 소실됐는데 충렬왕3년에 중건하여 왕건의 자호인 '약천암'이라 했다고 한다

그 뒤로도 전쟁과 화마로 모두 소실되고 터만 남았는데  서울 종로 명륜동에  자인사라는 절을 창건했던 김해공(김성수)스님이

현 위치에 석불인 미륵불을 조성하면서 1964년에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복원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산정호수에 들리면 꼭 이 곳 물을 마셔한 할 만큼 이름난 자인사의 약수터

 

왕건에게 쫒기어 이 곳으로 도망와 재기의 몸부림의 시작을 하기 위해 들렀던 이 곳

역사이래 계속 흘러나왔을 이 샘물에 물 한모금하고서 힘을 내보려 애쎠 보지만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어찌하랴

후회한들 뭐하랴만 아무리 천하 영웅이라도 믿었던 부하에게 배신당한 슬픔과 통한을 어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고 샘물은 흐르는 눈물이 되어 이 산정호수로 흘러 들어 갔으리라

못다 이룬 궁예의 꿈이 여운을 남기고 지금까지 이렇게 마를 틈도 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이유일까?

 

지금도 물이 좋기로 소문난 포천땅 산정호수를 보면서 대하는 샘물이 그래서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잿터바위

잿터바위 (자인사)

궁예의 명으로 나주까지 손에 넣으면서 잘나가던 후삼국시대의 또 다른 영웅 견훤과의 승산이 없을 것 같았던 일전을 앞두고

이 바위에서 기도를 하여 승전을 하였고 그 뒤로도 나가는 전쟁마다 기도를 하면 승리를 하였다고 한다

전쟁에 나갈 때마다 재를 올린 터라고 해서 '잿터바위'라 했다는데 궁예도 재를 올렸지만 역산는 왕건의 손을 들어 주엇다

그렇기에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국가의 태평과 국민의 안녕을 기원하며 이 바위를 중심으로 절을 세웠던 것이다

 

 

잿터바위를 위에서 본 모습 -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뱀의 모양이다.

 

왜소한 대웅전에 비해 다소 큰 규모의 석불 미륵불이 자리하고 있다

 

두루 미(彌)에 다스릴 륵(勒),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의 뜻을 가진 미륵불

김해공(김성수)스님이 현 위치에 석고 미륵불을 조성하면서 1964년에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하니 역사는 오래 되지 않았지만

 욕심에서 생긴 번뇌와 망상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중생들을 구제키위해 도솔천에서 내려와 세상을 구제한다는 미륵불을 보니

궁예가 꿈꿨던 미륵의 세계는 잘 모르겠지만 후세에 생긴 이 미륵불이 남기고자하는 세상만은 지켜주길 바라는 맘이다

 

 

극락보전

자인사  慈仁寺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산정리 71

자인사는 명성산과 망무봉, 망봉산등 사방으로 산이 둘려치고 전나무와 진입로의 소나무등 소나무 숲길이 운치있는 명성산의 대표 사찰로

궁예의 미륵세계를 상징하는 자(慈)와 영계에서나마 궁예(870~918)와 왕건의 화해를 기원하는 인(仁)을 합쳐 자인사(慈仁寺)라 하였다

궁예와 왕건이 전생에 풀지 못했던 악연이 있기에 그 악연을 후생에서나마 풀고  미륵세계의 구현을 기원하며 용서와 화해의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왕건이 통일 후 이 곳을 성역화 하면서 왕건의 시호에서 따온 신성암이란 암자 하나로 시작되어 자인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더 많은 자인사 얘기는 초보산꾼 여행이야기 http://blog.daum.net/kmhcshh/3021 참조

 

 

자인사 뒷편으로 계속 오르면 지도상으로는 분리되어 있는데 지금은 통제되고 있어 책바위와 사잇길인 계곡으로 이어진다

 

돌계단으로 명명된 계곡길을 올라가다 보면 좌.우로 암벽들이 계속 이어진다. 괴산 도명산에서 본 기차바위를 닮았다

 

 

풍경은 좋지만 너덜길이 계속 이어지면서 하산길도 만만치 않을 듯 

중간 쉼터에서 본 산정호수 - 여기서 보니 한반도 같기도 하고...별장을 여기에 지었다면?

 

책바위 갈림길이 있는 능선을 만나 억새가 있는 궁예능선을 가기 위해 나무계단으로 명명된 우측으로

 

책바위 방향으로 잠시 올랐다 명성산 억새를 담아 보고 다시 내려와 나무계단길

 

드디어 팔각정과 억새평전 그리고 삼각봉이 보이기 시작하고 - 궁예능선이 시작된다

 

억새평전과 팔각정

 

구삼각봉으로 오르면서 본 산정호수 - 이제 어느정도 한반도를 닮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앞에 산안고개와 멀리 강포리에서 궁예봉으로 오르면서 보았던 강포저수지 방향

 

이렇게 힘들게 구삼각봉까지 갈려는 목적은 날씨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한 궁예봉도 담아 보고

 

당겨보면

 

구삼각봉이 포천과 철원이 만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궁예봉과 명성산 그리고 신삼각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 명성산은 살짝 보일동 말똥

 

식후경 후 다시 팔각정으로 내려와 비선폭포 방향으로

 

등룡폭포로 바로 내려가는 길인데 위험한 길이라고...

 

잠시 억새평전 속으로 들어가 본다. 나무에 있었던 지도에 표시된 궁예약수를 보려고... 그러나 없다. 폐쇄된 듯...

 

위험하다고 하지만 위험하지 않았던 코스도 만만치 않았던 기억... 등룡폭포 지름길로 내려오다 첫번째 이정표

 

왜 위험한지 이제야 알겠다. 지금부터 계곡으로 길이 이어지니 특히 비올 때는 절대 출입금지

 

등룡폭포 - 비선폭포로 내려간다. 내가 내려 온 길을 험한길라고 한다

 

폭포수의 물안개를 따라  하늘로 올라 갔다해서 붙여진 전설이 있어 등룡폭포라 불리운다

 

폭포가 2중으로 되어 있어 이중폭포 또는 쌍용폭포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궁예의 울음이 폭포되어 흐르고... 이렇게 여운을 남기며 긴 꼬리를 만들지만... 왜 궁예약수가 폐쇄됐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세월은 타임머신을 타고... 칼대신 탱크부대의 폭탄이 만들어낸 혼탁한 물길... 손을 씻을 수도 없다. 몰론 다른 이유가 있기를 바라지만...

 

운동시설을 지나 책바위 갈림길을 만나고

 

지도상 책바위 갈림길 지점이 선녀의 전설이 담긴 비선폭포 같은데 아무런 표시가 없다

 

망봉산이 보이면 주차장이다

 

퇴적암이 횡압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습곡 구조로 책을 양쪽에서 밀어서 구부러진 모습과 비슷하여 책바위라 한다

 

산정호수를 더 들려 본 후 5시 5번 버스를 타고 운천에서 내려 동서울 터미널로...

 

이렇게 명성산에 남아 있는 궁예의 흔적들을 두번에 걸쳐 만나 봤다

 

궁예(弓裔)는 당나라에 망한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국호를 고려(901)라 했다가 

동방대제국을 뜻하는 마진(摩震 904)으로 바꾸고 905년에 도읍을 철원으로 옮겨 

911년에는 서로 뜻을 같이 해 화합하는 평등 세상을 뜻하는 ‘태봉(泰封)’으로 바꾼다

궁예는 자신이 꿈꾸었던 미륵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런 노력들 이면에

풍천원에 거대한 도성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했던 강제 노역으로 백성들로 원성을 사고

정교(政敎)일치적인 전제주의와 영웅주의에 빠져 자신을 과시하는 데 급급했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승자에 쓰여진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그렇게 점점 멀어져간 민심속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호족들을 등에업은 왕건의 군사에 쫓겨

진을 친 곳이 명성산이고  그래서 궁예의 전설이 명성산 곳곳에 남아 있는 이유이다

이 때 궁예가 철원쪽을 바라보며 울었다고 하여 '울음산'이라 했다고 하고

그래서 한자로 풀어 쓴 것이 鳴聲山

지금은 가을이면 억새가 울고

때떄로 탱크부대에서 품어대는 포탄이 울 뿐

어디도 궁예와 왕건이 펼치던 숨가빳던 역사를 느낄 수는 없다

이제 관광지로 변해 버린 산정호수와 억새의 물결만 있을 뿐

칼싸움을 대신해 지금은 탱크를 비롯한 화약냄새가 명성산을 뒤덮고 있어

등룡폭포길을 내려오면서 보았던 계곡물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고

이미 폐쇄되어 버린 천년수라 불리웠던 억새평젼의 궁예약수까지..

그렇게 세상은 변했고 찾는 사람들도 변했지만 

현재의 명성산을 잊고 잠시 과거로 돌려 돌아 본 궁예와 왕건의 흔적들

그래서 더욱 소중했던 하루로 기억될 것 같다

 

또 명성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고 산정호수의 또 다른 축을 담당하고 있는

여우봉에서 관음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에도 궁예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 여우봉(여우고개)과 파주골  초보산꾼 한북명성지맥 산행기 참조  http://blog.daum.net/kmhcshh/841

 

 

여우고개와 궁예가 패해서 도망갔다는 파주골(성동리) - 화살표 방향(초보산꾼 추측)

 

여우고개와 파주골

궁예의 군사가 왕건 군사에게 패하여 명성산에 피난하고 있을 때 왕건 군사들과 궁예 군사들이 이곳에서 서로 눈치를 보면서

여우처럼 엿보았다고 해서 '여우고개' 마을(狐峴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는 여우가 많이 서식하였는데 겨울에는 양지쪽에서 여름에는 응달쪽에서 살았다고 하여 여우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동리의 파주골은 궁예가 패주(敗走)가 변해서 된 것이고

또한 궁예가 항복문서를 전달했다는 ‘항서(降書)받골’ 있다고 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들르게 될 철원의 진산이며

궁예의 도성이 될 뼌 했던 금학산으로 가는 길이

더욱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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