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100대 명산 - 운악산(雲岳山 936m. 가평.포천)2 - 한북완주기념 태마산행

 

 

 

일시 : 병신년(16년) 시샘달 스물여드레 해날      

   

인원 : 월궁항아님과 함께

 

어딜 : 운악산 휴게소 ~ 무지게 폭포 ~ 서봉 ~ 면경대 ~ 운악산휴양림 ~ 대원사 ~ 귕소 ~ 회현리 갈림봉 ~ 동봉 ~ 현등사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2910 에 있습니다

 

 

입춘을 전후하여 봄에 잎이 나오기 전에 오는 봄을 시샘하며 찾아온다는 잎샘추위가 기웃거리더니

이제는 이른 봄꽃이 필 무렵 찾아온다는 꽃샘추위가 동장군을 대동하고 우리 곁은 배회하고 있는 시샘 달 2월

잎샘추위와 꽃샘추위가 번갈아 가며오며... 갈수록 어려운 살림살이까지 대동하고...

겨울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봄도 아닌 것이 매년 반복되는 이러한 2월이 더 힘든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겨울을 벗삼아 걸었던 한북정맥에 궁예의 전설들이 남아 있어 바람결에 들려오는 얘기들을 듣기만 했는데

겨울이 지났지만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궁예의 혼이 살아 있는 흔적을 찾아 4회에 걸쳐 속살로 들어가 본다

 

 

 

운악산 태마산행 등로 : 청색따라 걷기

 

 

궁예가 지금의 이북땅인 평강지역에서 최후를 맞이하기 전에 이 곳 포천땅은 왕건과의 마지막 최후의 전투를 벌인 곳이다

특히 한북정맥상의 원통산에서 운악산으로 이어지는 화평장터(화현리) 일대는 궁예와 왕건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였다

경기5악 중의 하나인 개성 송악산에 터를 잡은 왕건에게 배신을 당하고 이곳까지 숨어 들어와 마지막까지 항전을 했던 곳이며

그 중심에 바로 운악산이 자리하고 있고 운악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궁예성을 중심으로 마지막 미륵을 향한 꿈을 꾸지 않았을까?

인간 궁예는 사라지고 없지만 그가 남긴 뜻만은 그대로 살아 있고 전설이 아닌 희망으로 다가오는  운악산 속으로 들어가 본다

 

 

 

 

동서울터미널 7시00분 신철원행 3000번 버스  31번 창구 4,500원을 지불하고 내촌(포천)삼거리에 도착하고

 

버스에서 내리면 그 정류소(내1리 정류장)에서 7-2번 버스가 잠시 후 도착한다

 

운악산 휴게소에서 내려 일동방향으로 가다

 

운주사 직전 우틀하여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고

 

좀 진행하다 신선대 방향으로 좌틀

 

천사의 날개를 그려놓은 바위를 우측으로 보면서 진행

 

홍폭전망대가 보이기 시작하고

 

 

역사를 눈물로 쓸려고 그랬는지 그날따라 부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1,100여 년 전 전신은 이미 피투성이로 변해 있었고 머리는 깨어지고...

무릎에는 선혈이 낭자하여 이게 사람인가 싶은 남루한 사내 하나가 다리를 질질 끌고 이 산중으로 들어 왔었다

어둠과 부슬비만이 그를 감쌀 뿐 누구도 그를 반겨주지 않았고 그렇게 쓸쓸히 이곳에 들어 왔던 것이다

 

 

 

병풍을 두른 운악산을 배경으로 여근곡을 이룬 계곡 중턱에 홍폭포가 치마바위의 호위를 받고 있다

 

 

그가 바로 여기 운악산과 같이 경기도의 또 다른 오악중의 하나였던 송악에 901년 후고구려를 세우고

911년 철원을 기반으로 미륵세상을 꿈꾸며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세상인 대동방국의 뜻이 담긴 

태봉 泰封으로 국호까지 바꿔가며 전국의 2/3를 차지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하며

후삼국통일의 큰 꿈을 이루고자  했던 바로 그 궁예였던 것이다

 

 

 

홍폭(무지치폭포) 하단 갈림길에서 홍폭을 담아보고

 

 

부하였던 왕건에게 배신을 당하고 이곳에 들어와 또 다시 많은 사연들을 남겨 놓았으니...

그 큰 궁예의 손아귀에 다 들어 온 것 같았던 삼국의 통일의 꿈도 그가 바랐던 미륵의 세상도 잠시 접고

모든 권세와 영화를 뒤로 한 채 이렇게 이 곳 홍폭에 몸을 맡기니 붉디붉은 피는 모두 씻어 냈지만

그가 꿈꿨던 희망까지 폭포는 다 감싸주거나 씻어 줄 수가 없였다

 

 

 

조금 오르면 좌측으로 용굴이 보인다 - 여기 이 돌도 아마 성곽의 잔재들은 아닌지? 빨리 대대적인 조사가 필요할 듯...

 

 

용굴을 배경으로 오늘 함께 해주신 월궁항아님. 감솨 - 홍폭이 여근곡에 위치하고 있어 옛부터 무속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다시 나무계단이 나오고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무지치폭포 하단 이정표를 따르면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물보라로 인해 무지개가 걸린다고해서 무지치(개) 폭포라고 한다. 하단에서 본 홍폭

 

 

치욕으로 물들어버린 몸뚱이에서 한없는 피눈물이 되어 흐르고 또 흐르고...

이 홍폭에 몸을 맡기고 눈을 지긋이 감고 들었을 떨어지는 이 물소리

큰 뜻을 품은 사나이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왕건에 대한 원망의 소리보다는

미륵의 세상을 향한 민초들의 가슴에 남겨질 회환까지 함께 묻어야 했을 아쉬움의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오르면서 본 홍폭. 장마철에 들면 일곱색깔 물보라를 상상해 본다

 

 

큰만큼 아쉬움도 함께 컸던 탓에 지금까지 이렇게 전설로 살아 남아 있는 것이리라

물론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지만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 이곳에 궁예성을 쌓고 

겨울이 되면 다시 얼어붙어 있을 이 폭포수의 얼음조각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륵세상이 되어 민초들의 세상이 되어 차고 넘쳐 흘렸어야 했을 얼어붙은 이 폭포수를 보면서...

 

 

 

정말 바위색갈이 약간 붉은 빛을 띠고 있다

 

 

추우면 추울수록 더 단단해지는 이 얼음조각의 모습처럼 천년만년 가꾸고자 했던 미륵세상

하지만 2월이 되면 서서히 녹아 흘러내리며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폭포의 눈물을 보면서

해가 기울면 지고 세가 다하면 약해지듯이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이치에 눈물을 함께 흘렸을 것이다

그래서 죽음만은 당당하고자 했는데... 산자의 역사에 의해 추악한 군주로 지금까지 남아있으니...

 

여기 홍폭을 떠나는 맘이 아프고 무겁기만 한 이유일 것이리라...

 

 

 

2코스 합류점을 만나면 홍폭의 상단이 된다

 

이제 좌측으로 신선대가 불을 밝히기 시작하고

 

계속 오름길을 제촉하면 북문지로 추정되는 궁예의 성곽의 흔적이 나타난다

 

여장의 형태도 남아 있다

 

여장에서 본 홍폭 - 궁예는 이 험한 곳에 성곽을 지어놓고 여기 초소에서 무슨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여장에서 본 운악산성과 좌측 약수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이 대궐터로 추정되니 아마 절도 있었지 않았을까?

 

 

운악산 휴게소 입구에 있던 운악산성 안내문

 

 

현재 여러시대의 유물들이 나오고 있고 운악산성에 대한 문헌이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히 알수는 없다

태봉국의 왕이었던 궁예는 이 면경대(面鏡臺)에 성의 외곽 길이가 약 3km에 달하는 성을 쌇고 반년간이나 왕건군에 대항했다고 한다.

최후를 이곳 홍폭(무지개폭포)와 면경대까지 성(운악산성)을 쌓고 반년간이나 왕건의 군대에 대항하여 싸웠다고 한다. 

이 홍폭위에 남아 있는 성곽도 궁예가 입산 후 왕건군을 막기 위해 축조한 것이라는 설이 있으며

단지 조선 중기 발간된 포천읍지인 견성지(堅城郡誌)에 ‘운악산은 포천군 동쪽 25리에 있는데 곧 가평 현등산 서쪽의 산이다.

산꼭대기에 옛 나라의 궁궐터가 있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전설에는 산성을 지키던 장군들이 성이 함락되자 무기들을 우물에 묻고 도망갔다고 한다. 지금도 유물을 찾아?

대신 지금도 말없이 좌측의 약수터만이 세월을 지키고 있었다. 

 

대궐터로 추정되는 3단으로 구성된 성곽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신선대 갈림길이 나온다 - 신선대로 오름길

 

신선대로 오르면서 옆에 있는 치마바위를 담아 본다

 

포천일대에서 왕건군과 최후의 전투를 벌일 때 운악산 신선대에서 신선이 불을 비춰 궁예를 도왔다고 하는 신선대 상단부분

 

 

하단 부분을 자세히 보면 부처님 손같기도 하고... 옷고름같은 모습도 보이고.... 그런데 왜 궁예를 끝까지 지켜주지 않았는지...

 

다시 내려오면 편한 길로 갈 수 있지만 그대로 치고 올라가 능선에서 바라본 신선대

 

이제 눈으로 두터운 이불을 삼았던 낙옆들고 봄의 향기를 맡으려 이렇게 상큼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신선대 바위봉에 올라 이제 우측으로

 

한북정맥이 보이면서 정맥을  흐르고 있는 비단이 펼쳐진것 처럼 아름다운 바위라는 순수한 우리말이란 사라키바위가 조망되기 시작하고

 

이제 부터 암릉과 위험구간을 반복한다. 거기에 녹지 않은 눈길까지 덤으로... 서봉을 배경으로

 

한북정맥 수원산도 조맘되고

 

우측으로는 명성지맥 줄기인 명성산과 불무산으로 이어지는 능선도 조망되고

 

 

  

 

드디어 힘겹게 올라오니 잘 가꾸어진 등산로가 이어지며 한북정맥에 있는 애기바위를 만나고

 

애기바위에서 본 가평의 병풍바위의 뒷태

 

앞에 보이는 연인산과 좌측으로 명지산으로 이어지는 명지지맥 산군들

 

운악산 서봉

 

운악산 서봉에 본 동봉과 가평의 애기봉 능선

 

또 다시 만만치 않은 면경대 방향으로 내림길이 시작되고

 

 

두꺼비 바위를 내려와서 되돌아 봤다

 

바위는 셋인데 왜 사부자 바위?

 

위에 부모의 맘으로 세명의 자식을 물끄러미 처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사부자 바위?  어디까지나 초보산꾼의 추측

 

계속되는 내림길

 

이제 궁예산성터가 가 있었던  면경대 안내판이 보이기 시작한다

 

면경대에서 바라본 궁예산성 방향에는 하늘이 준 산성터로 안성맞춤이다

 

말 그대로 거울처럼 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면경대

 

이제 반대편에 있는 신선대가 왜 불을 밝혀주는 신선대인지 확실하게 보여준다. 중턱에 있는데도...포천 일대를 지켜주고 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성터를 조금도 발견 할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운악사를 담아 본다

 

운악사로 내려와 산신각 뒤로 소꼬리 폭포를 만날 수 있다

 

아무리 봐도 왜 소꼬리?  물이  흘러봐야 알 수 있을 듯하다

 

운악산 자연휴양림으로 내려와 계속 내려가야 대원사(대안사)로 갈 수 있다. 좀 편하게 갈려다 고생만하고... 식후경도 늦어지고...

 

숲속의 집으로 잠시 들어가면 분청사기 가마터가 보인다

 

 

도로로 내려와 대원사 방향으로 좌틀 계속 도로를 따라 간다

 

 

대원사 입구 - 지금은 이름을 바꿔 '대안사'라 한다. 오래된 지도에는 대원사로 나온다

 

대원사 옆길로

 

밧줄로 된 등산로가 나오는 지점에서 늦은 식후경... 그런데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눈머금은 식사

 

 

이정표가 있는 합수점 갈림길로 지도상 귕소(궁예소) - 여기서 계속 직진해야 하는데 정상 이정표를 따라 좌틀하는 바람에 절고개로 갈려 했는데...

 

절고개 방향 - 여기가 궁예의 군사들이 목욕을 하면서 잠시 쉬었다는 전설이 있는 지도상 귕소(궁예소)

 

 

우리는 그냥 이정표따라 정상방향으로 - 내가 가지고 간 지도에는 등로 표시가 없는 코스이다. 지도의 중요성?

 

결코 쉽지 않은 능선길, 거기에 눈까지 계속되고,,,  계속 이어지는 밧줄과의 싸움.

 

 

 

이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하지만 어떻게 아름답게 살다 갔는가는

남길 수 있다

 

잠시 피었다 지는 꽃이 아름답기에

지는 것을

안타까워 하듯이

 

 

 

 

 

그렇게 짧고 굵게 살고 아름답게 살기를

지금 이 산에 있는 설경은 

말없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어렵게 본 능선인 한북정맥길에 들어서고

 

 

눈이 내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싾여있기에 더욱 빛나는 것이다.

 

그것도

그렇게 부드러운

함박눈이

 

 

 

운악산 비로봉(동봉)에 올라 본다

 

 

운악산 서봉과 동봉을 모두 오른 후 절고개에서 현등사로 하산 - 이미 백대명산 운악산1 산행기에서 자세히 올렸기에 여기서는 생략

하판리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와 06시30분차로 서울로...(현등상에서 청량리 시간표 참조)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세상인 대동방국의 뜻이 담긴  태봉 泰封으로 국호까지 바꿔가며

미륵의 세상을 꿈꾸며 근거지로 삼았던 철원 땅과 포천 땅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궁예의 흔적들

궁예가 왕건에게 쫓기면서 찾아든 강가에서 모든 돌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보고

좀이 먹은 것으로 생각해 나의 운명이 다했음을 한탄해서 한탄강이라 했다는 전설이 흐르고 있고

왕건에게 쫓긴 궁예의 말년을 슬퍼하며 산새들이 울었다하여 붙여진 포천과의 경계에 있는 명성산에도

궁예가  왕건에게 패한 후 '패주골' '야전골' '항서받골'등의 전설을 남기고 이곳 운악산으로 들어와

폭포의 바위가 붉은색이어서 붙여진 무지개폭포(홍폭(虹瀑)에서

전투에서 패한 궁예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몸을 씻었다는 전설을 만나 봤고

산자의 역사가 아닌 패한자의 역사, 아니 민초들의 희망의 눈(目) 모여 빛을 이루니

바로 신선대에 신선이 불을 비춰주어 궁예를 도와 주었다는 전설이 나오지 않았을까?

신선대의 호위를 받으며 보았던 궁예산성으로 추정되는 대궐터와 성벽들

민초들의 미륵세상을 향한 열망을 대신했던 신선대의 호위를 받았기에

그 험한 운악산 서면에 마지막 희망의 끈으로 삼기 위해 성을 쌓았을 것이고

성을 병패삼아 마지막까지 항전을 할 수 있었던 힘이 아니었을까?

가평쪽에 남아 있는 미륵바위가 지금도 말없는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가평쪽 미륵바위 - 자료 : 초보산꾼

 

 

궁예가 이루고자 했던 두루 미(彌)에 다스릴 륵(勒),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

아직도 희망으로만 남아 있는 것 같아 맘만 아프지만

그가 남긴 흔적들이 이렇게 남아 있기에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이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아닐련지...

 

 

 

전날 월악산 산행에서도 비탐방구간이라 힘들었다고 했는데도 함께 해주시고 또

비탐방구간 못지 않은 어려움이 있는 코스임에도 함께 해 주신 월궁항아님

거기에 눈까지 내리는 악조건에서도 끝까지 함께 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원래 계획은 궁예가 왕건에게 쫒기면서 남하하는 길을 따르려 했는데

갑자기 토요행사로 일요일에 산행을 하는 바람에 교통편의를 위해 거꾸로 진행하게 된다

 

초보산꾼의 남은 '궁예의 흔적을 따라'  진행일정

1. 명성산의 궁예능선을 따라 삼부연폭포로 내려가고

2. 명성산의 망무봉 망봉산 지인사 그리고 산정호수 둘레길

3. 금학산의 마애불과 고대산을 거쳐 철마는 달리고 싶다의 경원선 종착점 신탄리역까지

 

 

감사합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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