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대장님과 함께 한 북한산 : 의상봉 능선 

 

 

 

일시 : 을미년(15년) 잎새달 4월  스물엿새 해날  

 

인원 : 3450온누리 산악회 산우님들

 

어딜 : 백화사 ㅡ 의상봉 ㅡ 용출봉 ㅡ 증취봉 ㅡ 부왕사지갈림길 - 중성문 ㅡ 산성매표소

 

 

그렇게 목말라 기다리던 봄도 서서히 익어가고 있음인지 곳곳에 꽃들이 경쟁하듯 고개를 내밀고 있고

아직은 아침저녘으로는 봄의 기운을 느끼지만 낮에는 이제 다시 오는 여름을 준비하고 있다

꽃은 제자리에서 제 뜻대로 펴고 나야 누구에게나 이쁨을 받는 이치인데 지금은 어디에나 인간의 손길로 만들어진

조금은 짜여진 각본에 의한 작품이 많은 탓인지 이제는 눈길마저 주지 않는게 도시속 꽃들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산에들면 오름길과 내림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꽃한송이가 나를 즐겁게 해 주고

거기에 바위와 나무와 인간이 함께 호흡하며 하늘을 지붕삼는 북한산 의상봉능선에 보는 꽃의 향기는 어떨까?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2437 에 있습니다

 

 

 

 

까치 대장님과 함께한 의상봉능선

 

의상봉능선은 원효봉능선과 함께 북한산성계곡을 만들고, 북한산성은 이 두 능선을 따라 시종을 이루고 있다.

문수봉에서 의상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의상능선(義湘稜線)이라 하며, 백운봉에서 원효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원효능선(元曉稜線)이라 한다. 

환경부에서 뽑은 북한산에 가면 이것만은 꼭 봐야지 10가지 풍경에 하나가  북한산의 공룡능선 ‘의상 8봉’ 대남문에서 북서방향으로 뻗은 능선으로,

문수봉, 715봉, 나한봉, 나월봉, 증취봉, 용혈봉, 용출봉, 의상봉 등 8개의 봉우리가 있어 의상 8봉 능선이라 한다

의상능선은 의상봉을 시작하여 북한산남쪽 최고봉인 문수봉까지 약 3km구간 7,8개의 봉우리와 3개의 성문이 있다.

통상의 산행은 서쪽 산성입구에서 의상봉을 올라 점점 고도를 높여가며 문수봉으로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는 백화사로 들머리를 잡기 위해 불광역2번 출구에서 나와 704번 버스로 이동 백화사 앞에서 하차하여

 

백화사에서 출발하는 코스에 유일하게 있는 마트에서 필요물품을 사고

 

우리가 가야할 우측으로 의상봉 능선과 좌측으로 원효봉 능선이 먼저 반긴다

 

뒤에 출발한 팀과 합류하여 출발 - 내시 묘역길이한다

 

조금 진행하여 출발하기 전 잠시 자기소개를 하고

 

 

의상봉 용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보면서 진행

 

백화사도 담넘어로 살짝 기웃거리고

 

백화사를 지나자마자 바로 본격적인 산행은 시작되고

 

초입 애기단풍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는데 사진에는 잡히지 않는다. 연초록잎으로 갈아 입고 있어 깊어가는 봄을 얘기하고 있다

 

단풍나무에 꽃이 핀다는 사실 아시나요?  자료: 이제 몇일이 지나면 이렇게 꽃이 필 것이다 (남양주 철마산에서)

 

단풍나무에 꽃이 피는 지도 모른 채 가을에만 활짝 미소 짓는 단풍으로만 생각했었는데...

단풍나무에 꽃이 달리는 시간도 짭고 꽃도 있는 둥 마는 둥 하니 누가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실

하지만 알고 보면 꽃이 피는 아주 짧은 이 시기의 단풍나무의 신록을 신록중의 제일로 친다고 한다

그래서 여름의 길목에서 내장산 신록을 전국 다섯 곳 중 제일로 추천하는 곳이기도 하다.

 

 

갈림길에서 우측 의상봉으로

 

의상봉 지나 만나게 될 가사당암문 우회길, 갈림길에서 의상봉으로 직진

 

산성탐방지원센터(0.8km) 갈림길 - 지도상 여기서 산성지원센터 방향으로 가면 대서문이 나올 듯

 

까치대장님표 과메기로 막걸리 한잔

 

의상봉 정상까지 계속 릿지구간이 이어진다 - 오랜만에 함께 한 숙달된 조교의 시범이 있고

 

사당은 넘 멀어 힘든데 오랜만에 일산에서 가까운 의상봉코스라 맘놓고 함께 해 주신 티티님

 

노아의 방주? 물이 차오르면...  대간길 지리산 구간에서 봤던 고리봉의 전설이 생각난다. 쌍토키 바위라고 하던가?

 

용출봉을 배경으로 역시 오랜만에 일본에서 돌아와 어렵게 시간을 함께 해 주신 상황봉 대장님

 

산성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하고

 

위험구간은 이렇게 안전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이젠 오르는데 수월하다

 

의상봉 정상

의상봉 湘峰  502m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명칭은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이 머물렀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가까운 지형이지만 정상은 평탄한 편이다.

북쪽으로 원효봉(元曉峰)과 마주하고 있으며, 이 봉우리에서 남쪽의 용출봉~용혈봉~증취봉~나월봉~나한봉~715봉~문수봉으로 의상능선이 이어진다.

 

 

의상봉 직전 우측바위에서 본 가야할 용출봉 방향

 

 

원효와 의상이 삼각산에 일찍 들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원효봉과 의상봉의 이름에 대해서도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일찍이 의상과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던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은 바가 있어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원효봉 중턱에 초암을 짓고 수행을 하고 있다가

원효는 모든 게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물론 의상은 당에 가서 화엄경에 푹 빠져 가지고 돌아와 부석사를 창건했다.

마침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의상에게 건너편 봉우리에 와서 함께 수행하자고 권했다고 하는데 원효와 의상이 머물러 수행했던 곳이라 그리 불렀다고 전해진다. 

 

 

 

의상봉 오르기 전에 보았던 반대편 원효봉과 삼각산의 삼각편대 봉우리들 그리고 앞에 노적봉

 

좀 더 낮은 자리에서 바보처럼 그렇게 낮은 자와 함께 하며 바보 성자(聖者)의 전통을 열게 해준

원효((元曉大師, 617~686)와 의상(義湘大師 625-702)은 신라시대 쌍벽을 이루는 불교의 큰 스님으로

한국 불교의 모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님을 스스로 전국 각지에 남기신 실천적 삶이 있었기에

걸었던 길이 다른 듯 하면서도 결국 지향점은 같아 전국의 많은 절들이 원효와 의상 두 대사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원효봉과 백운대

 

설총의 아버지인 원효가 태어난  617년는 진평왕 39년이었으니, 신라가 바야흐로 삼국의 주도권을 잡아가기 시작한 무렵이다

그러나 원효는 변방의 시골 출신이며 이웃 마을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 갑자기 태어났기 때문에 탄생부터가 극적인데다

평생을 기층 민중과 함께 살다간 실천적 수행자였던 그에게는 이미 탄생의 비밀부터 하늘에서 내려진 뜻은 아니었을까

이런 실천이 직관(直觀)을 중시하여  모든 중생은 성불할 수 있다는 법성종(해동종)의 창시자가 되었던 것이다

 

 

고개만 살짝 내민 인수봉과 백운대 망경대, 왜 삼각산인지 잘 볼 수 있는  의상봉능선

 

승복을 벗은 원효가 요석 공주와의 로맨스로 설총을 나았던 것은 또 다른 원효의 실천이다

단풍명소 소요산에는 원효대사가 수행하던 봉우리를 요석공주가 바라본다는 뜻에서 이름이 붙었다는 공주봉이 있고 

원효대사를 그리워 한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과 함께 찾아와 머물며 일일삼배의 치성을 드리던 요석별궁지가 있다 

원효와 요석공주는 소요산에 가면 만날 수 있다( http://blog.daum.net/kmhcshh/588 )

 

 

노적봉 아래 노적사가 보이는 북한산성 계곡

 

속명이 김한신(金韓信)인 의상은 625년생이니, 원효보다 여덟 살이 아래이고 알려진 것은 없으나 귀족집안 출신이라고 한다

석가가 도를 이룬 뒤 깨달은 대로 설법했다는 경문인 화엄경을 모태로 하고 있는 화엄종으로 

이 경전은 법계 (法界) 평등의 진리를 깨우친 석가의 만행 (萬行), 만덕 (萬德)을 칭송한 것이다.

직관보다는 통철(洞徹)을 중시한 길을 걸었던 의상은  융합적 사상을 바탕으로 기층민 출신의 제자들에게 활동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용출봉을 향하여 완산사진작가님

 

왼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좌상대불로 유명한 국녕사에서는 목탁소리가 더욱 가까이 들려오는 듯하다 

 

가사당암문을 통과하고

 

 

설유화 운영자님으로 부터의 점심봉사로 이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식후경이 시작되고

 

맛? 너무 맛있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네... 함께 하지 못한 산우님들을 위해 노코멘트...

 

조물주가 주신 선물 삼각산에 스스로 만족하신 듯 햇볕을 보내어 환하게 비춰주어 방점을 찍는다

 

의상봉과 용출봉사이의  '용의 심장'에 해당하는 국녕사와 의상봉 그리고 원효봉

 

용출봉으로 향하는 길, 용의 혈을 따라 진달래가 숨은 그림찾기를 하고 있다

 

용출봉

용출봉(龍出峰) 해발 571m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용이 나왔(온)다는 봉우리.

의상대사가 수행하던 천년도량 국녕사(國寧寺) 안내에 의하면 용출봉과 의상봉이 만나 강렬한 지기가 흐르는 곳으로

풍수지리학상 '용의 심장(龍心)'에 해당하는 곳에 절터를 잡았다고 한다.

또 용출봉은 의상봉능선에서 가장 뛰어난 봉우리로 전 구간에서 다 볼 수 있는데 보통 보는 위치에 따라 봉의 형태는 바뀌는데

용출봉은 어느 각도에서든 봉의 모양이 비슷한 뾰족한 삼각형을 이룬 원추형으로 보이는게 특징이다

 

 

산까치대장님과 함께한 기념으로 단체사진 - 산까치 대장님 공지 고맙습니다

 

초보산꾼이 이름 붙인 비봉하늘길에 사모바위를 배경으로 쇼울님

 

바로 산객들이 나름대로 붙인 작은사모바위의 설유화님

 

작은사모바위 틈새의 진달래꽃 하나가  삼각산의 비경을 바라보며 생명의 위대함을 뽐내고 있다

 

자연스런 지형을 이용해 만든 성곽의 석축을 따르기도 하고

 

되돌아 본 작은 사모바위

 

멀리 큰? 사모바위와 비봉을 향한 소나무의 구애...아님 의상의 설법에 따라 화엄을 실천하려는 것인가?

 

지나면

 

용혈봉

용혈봉(龍穴峰 581m)

용의 구멍 즉, 용의 집이 있다고 이름지어진 듯.

원거리 모양과는 다르게 커다란 바위가 겹겹 쌓여 있어 여러 혈을 보는 듯하다

 

 

앞에 증취봉이 보이고 원래 계획대로라면 계속 이어가야 했을 나월봉에서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나월봉 羅月峰 657m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활의모습으로 '초생달'을 연상할 정도로 드러난 바위가 날카로우면서 아름답다고 한다.

무엇보다 반대편의 원효봉에서 보아야 제대로 된 모습을 불 수 있다고 하니 언제 한번 원효능선도 가봐야 할 텐데...

이 봉우리의 정상은 의상능선에서 조망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추락위험지역이다

서쪽 바위는 도인이 지팡이를 메고 백운대를 응시한 것처럼 보인다고 하는데 담 기회에...

 

 

마지막 생명을 다하고 있는 산벚꽃에 삼각산을 투영해 본다

 

증취봉으로 향하는 길, 굳이 옆으로 우회길이 있는데도  - 사진 완산대장님

 

커다란 가마를 닮은 바위가 정상에 있는 증취봉, 가마솥을 아래에서 군불을 지피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증취봉 甑炊峰   (593m)

甑炊峰은 해석하면  '시루에 불을 땐다'는 뜻을 가진 특이한 이름이지만 시루를 얹여 놓은 듯한 바위를 뜻하는 듯하다

간단히 말하면 그 흔한 시루봉이고 시루바위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는 생각

동쪽 조망이 그만이다. 인수봉은 숨어 버렸고 노적봉이 주인공으로 전면에 떡 버티고 서 있다.

거대한 바위하나가 노적가리 처럼 높게 볏단을 쌓아올린 모습이다

 

 

좌측으로 멀리 대동문이 희미하게 보인다

 

 

부왕동여장지를 지나

 

부왕동 암문 (扶王洞暗門)

예전에 이곳 삼천사에서 가까운 신혈사에서 임금(고려 현종)을 구한 적이 있다고 하여 왕을 도운 계곡이란 뜻으로 부왕동(扶王洞)이라 명명했다

북한산성을 축성할 당시 남쪽은 대남문과 소남문, 암문을 하나씩 만들 계획이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소남문(현 대남문)과 암문 2개(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네이버 워키백과)

 

 

북한산성 발굴조사 안내판이 있는

북한산성은 숙종 37년(1711년)에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거친 산성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유사시를 대비해 마련한 ‘산 속 도성(都城)’이다.

북한산의 백운봉, 만경봉, 용암봉, 보현봉, 문수봉, 나월봉, 증취봉, 의상봉, 원효봉 등을 연결해 쌓은 산성으로 규모는 길이 12.7km이며

내부 면적은 여의도의 2배 이상인 6.2㎢(약 188만 평)에 달하며 행정구역상 성 내부 전체와 성벽의 절반 이상이 경기도 고양시에 속한다.

 

 

성랑지 안내판이 있는 곳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이제 완연한 봄이 왔음을 숲길은 얘기하고 있느데... 산우님들 잠시 이 봄이 가기전에 한번 나오시지요

 

부왕사지도 지나고

 

 

부왕사지터로 올라가 본다

 

비닐하우스 가건물에 지금도 스님이 거주하고 계시는 부왕사지터에서 본 노적봉

 

아직은 알탕하기에는... 잠시 쉬어가고

 

산벚꽃의 향기속에 남심도?  - 와세다님 다정님 함께혀서 즐거웠습니다  - 완산님 작품

 

중흥사重興寺지를 지나 - 잠시 후 중성문에서 만나게 된다

 

다리가 나오면서 구진국사로 불렀던 지금은 노적사 갈림길

 

중성문

중성문  (中城門)

서장대가 없는 것은 북한산성은 지형적으로 서쪽이 낮고  동, 남, 북이 높아  낮은 지형인 서쪽에는 장대를 설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고

동시에 지형이 평탄하여 방어에 취약한 대서문(大西門)이 있는 서쪽을 보완하기 위해 노적봉과 증취봉 사이에 있는 협곡을 가로질러 중성(中城)을 축조하여

행궁을 비롯한 여러 시설물들을 철저하게 지킬 수 있도록 하였는데 중성의 정문이 중성문(中城門)이다. 

숙종이 북한산성에 행차하여 '서문 가장자리가 가장 낮으니 중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며 중성문을 쌓도록 명했다고 한다

북한산성이 축성된 다음해(숙종 38년 1712년) 숙종은 친히 이 성을 살폈는데 대서문이 있는 서북 방향이 평지라서 적의 침략에 취약하므로

성 안에 겹쳐 성을 쌓았으니 중성(重城)이며, 이 성의 문 이름을 중성문이라 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고 한다

 

중성문 사이로 본 노적봉

노적봉과 중흥사

북한산성은 시대를 달리하며 역사의 중심에 섰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와서 비로소 지금과 같이 모습으로 자리잡았고 그 이전 시대에는 규모가 작았다.

최초로 산성을 쌓은 시기는 삼국시대로서 백제 개루왕(蓋婁王) 5년(132년)에 토성(土城)으로 축조하였다고 기록이 전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거란의 침입을 받은 현종이 태조 왕건의 재궁(梓宮)을 북한산 향림사(香林寺)로 옮기고 산성을 증축하였으며

우왕(禑王) 때는 최영(崔瑩) 장군을 보내 노적봉을 중심으로 중흥동 석성(重興洞 石城)을 수축하였으며

이런 연유로 노적봉을 장군봉이라고 달리 부르기도 하며  중흥동 석성은 조선 후기까지 중흥사(重興寺) 북쪽에 성문 터와 함께 남아 있었다고 한다

 

 

국녕사와 의상봉으로 올라가는 갈림길

 

 

북한산 역사관을 지나면서 인공호흡법도 배우고

 

전망대에서 바라본  삼각산

 

차례로 원효봉 염초봉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

 

포장길로 가는 길과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가는 갈림길

 

계곡길을 따르다 보면 북한산 서암사 복원공사 현장

 

역사 해설을 듣는 북한산 전망대를 지나 북한동 마을 터가 나온다

북한동 마을

최초로 산성을 쌓은 시기는 삼국시대로서 백제 개루왕(蓋婁王) 5년(132년)에 토성(土城)으로 축조하였다고 기록이 전하고

고려시대에는 노적봉을 장군봉이라 했다는 요동정별을 준비를 위한 최영장군과의 인연들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마을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하지만 옛날에 사람손으로 성을 쌓다보면 많은 처자권속들의 거처가 필요 했을 것이다

조선 숙종때 부터  군사들이 상주하면서  북한산성을 쌓는 역사가 시작되며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보아도 

고려를 제외하더라도 1711년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니 벌써 300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이다 

 

 

 

근대에 들어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의병의 근거지가 되었던 사찰들이 폐사되고 삼군영의 병사들까지 일제에 의해 쫓겨나고

일본 헌병까지 이곳에 주둔하면서 거의 모든 건물들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10년 단위로 계속 찾아온 대홍수까지 겹치면서 쓸만한 건물은 모두 파괴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끝나면 좋으련만 또 다시 6.25는 민족상잔의 무대로 1,000명이 넘는 인민군의 희생된 치열한 전투지역이었다고 한다

 

 

둘례교가 있는 곳을 지나면

 

그런데 북한동 마을은 이승만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이승만 어머니가 문수사에서 100일 기도후 이승만을 낳았다는 인연으로 이 곳을 방문하여 주민들을 위해 관광사업을 추진하기로 해

주민들의 부푼꿈이 이루어지나 했는데 이제는 4.19로 이승만이 하야하면서 그마저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대서문까지 도로도 이승만에 의해 만들어 지고 대서문(大西門) 편액도 이승만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현재의 북한동 마을을 지나

 

이제 국립공원 내의 환경보호를 위해 북한동 마을은 폐쇄되고 주민들은 아래 이곳 북한산성 입구로

2010년에 이주를 하여 오늘과 같은 현대식 상가를이루고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은 모두 잊은채...

자연을 지키기 위한 어쩔수 없는 선택,  300년 된 마을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것만은 진한 아쉬움으로 다가 온다

이런 살아 있는 역사적 사실들이 그나마 한번 더 되돌아 본 계기를 준 것 같다

 

 

탐방지원센터가 있는 곳에서 산행마무리

 

미리 연락한 '산가' 음식점의 차량으로 이동하여 뒤풀이가 시작되고

 

산까치 대장님 수고했습니다

 

정기산행과 100대명산에 집중하기 위해 백두대간을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던 아쉬움속에

이렇게 일반 산우님들과 함께 어울리며 걷다보니 짧은 하루로 기억되는

오랜만에 찾아온 북한산의 산행도 끝을 알리고 있었다

 

40여개의 봉우리 중에 다수가 불교적인 이름을 갖고 있는 연인원 1,000만명이 찾는 서울의 대표적 명산 북한산

경전상의 문수, 보현보살이 대남문이 있는 북한산의 등뼈를 튼튼히 지켜주고 있다면

실제 생존했던 원효 의상 두분의 대사는 북서쪽 산성 정문을 지키게 하여 등뼈를 받쳐주는 역활을 하고 있다

참으로 옛선조들의 봉우리 이름 하나에도 허투로 하지 않는 예지가 다시 한번 나를 흥분하게 만든다

이름을 붙이고 불러주는 행위는 존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의미에서 볼 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에 나오는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부모로부터 이름부터 부여 받는다. 그만큼 이름이 중요하기 떄문이다

오름길에서 보았던 의상봉은 정갈하게 치솟은 학승의 모습으로 빈틈 없이 살았던 의상을 닮았다고 한다.

원효봉은? 둥그스러운 바위 하나로 되어 후덕한게 원효의 선(禪)을 통한 깊고 넓은 맛이 있어보인다고 한다

실제로 의상봉에서 본 원효봉은 둥글고 원만하게 생겨 원융무애한 삶을 살았던 원효를 닮은 모습이었다

 

도봉산의 오봉이 바위로 이루어져 이름을 얻을 수가 없었지만

의상능선의 봉우리들은 모두 오봉못지 않은 생김새를 하고 있으면서도 산의 형태를 갖추고 있기에 이름을 얻을 수 있었고

삼각산의 거의 가운데를 지나는 의상봉 능선을 걸으며 보았던 삼각산의 모습은 설악못지 않다는 얘기가 실감나는 하루였다

이는 주능선에서 보는 모습과 또 다른 차원의 삼각산의 깊은 내면속살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거기에 봉우리는 넘자 또 하나의 봉우리가 힘을 주며 솟아나 더 높게 튀어 올라 있고

계단을 밟듯 한 옥타브씩 올라갔던 의상봉 능선이 주는 힘을 느낄 수 있었던 하루

북한산 최대의 계곡인 북한산계곡의 반만 보았을 뿐인데도 전부를 본 듯한 뿌듯했던 하루

한국불교사에서 쌍벽을 이루는 두 선사의 위엄을 바위봉에 간직하면서도 바라보는 눈에는 불(佛)빛을 보내준

북한산성 계곡을 끼고 원효봉을 보면서 반쪽 의상봉과 함께 했던 길

원효와 의상 스님이 계곡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도 서로를 바라보며 참선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하루를 살더라도 닮고 싶은 맘하나를 건진 하루였다

 

대서문에서 출발하는 '12성문'종주는 언제 하지?

 

까치대장님과 그리고 함께 해 주신 산우님들 모두 수고했습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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