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서울근교 삼각산 : 형제봉에서 진관사 계곡

               

 

 

일시 : 갑오년(14년) 미틈달 스물아흐레 흙날          

 

인원 : 강철님, 세석님, 썬학이님, 채화님, 주유천하님, 도덕산1님, 그리고 도덕산

 

어딜 : 국민대정문 ~ 형제봉 ~ 대성문 ~ 비봉사거리 ~ 진관사 ~ 숙용심씨 묘표

 

                    더 많은 사진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2177 에 있습니다

 

 

이미 성큼 다가온 초겨울의 찬바람과 가는 만추의 쓸쓸함이 함께 공존하는 요즘

오는 겨울을 재촉이라도 하려는 듯 연신 불어오는 바람마저 이제 겨울의 편에 서서

더욱 두터워진 옷소매를 다부지게 마무리해야만 하는 하루게 다르게 변해가는 계절속에서

형제가 서로 이끌어주며 힘든 세월을 이겨나갔던 형제봉과 진흥왕순수비가 살아 있는 비봉능선이 만들어 내는

암릉으로 이어가는 바람가는데로 하늘을 지붕삼아 곱게 뻗어내린 삼각산의 하늘길을 걸어 본다

내가 보기에는 비봉능선은 오름길 보다는 내림길에서 보는 모습이 더욱 아름답게 다가옴을 느낀다

 

 

 

초보산꾼과 함께한 삼각산 산행 등로

 

 

북한산은 최고봉인 해발 836m의 허연 병풍같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백운대를 비롯하여

가운데 인수봉, 한참 낮지만 백운대와 거의 같은 크기로 보이는 만경대 등

세 개의 걸출한 암봉을 중심으로 험준한 산세를 이뤄 예로부터 삼각산(三角山)이라 불렸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이러한 삼각산을 진산으로 삼아 한양에 도읍을 정했고, 지금의 서울에 이른다

 

 

 

 

길음역3번 출구로 나와 1213번 버스를 타고 국민대 정문앞에 내리면서 삼각산 형제봉 산행은 시작된다

 

지하도가 나오기 직전 북악공원지킴터 방향인 우측으로 접어들고

 

북악공원지킴터에서 오늘 초보산꾼과 함께 하신 산우님들과 단체사진

 

형제봉 삼거리 갈림길에서 평창동 방향 이정표가 있는 좌측 계단으로

 

북악산에서 올라오는 능선과 만나 형제봉 하늘길이 시작된다

 

평창동을 바라 볼 수 있는 전망대를 지나

 

형제봉에 올라 또다른 형제봉중 높이로 보아 더 높은 형봉을 배경으로 강철님 - 다음날이 정맥길인데도 함께 해 주시어 고맙습니다

 

망한 고려를 등지고 이성계를 찾아 나선 두 형제가 북한산 호랑이와 맞서 싸우다 죽었는데,

형이 높은 봉우리, 아우가 작은 봉우리가 되었단다. 고려를 배반하다 죽은겨? 이성계와 싸운겨?

서로 마주보고 있어 형 봉우리를 넘을 때는 형이 아우를 도와주고, 아우 봉우리를 넘을 때는 아우가 형을 도와주고....

유래야 어떻든 혼자보단 여럿이서 함께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이 형제봉 처럼 그자리를 그렇게 굳건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역시 신비한 모습으로 언제나 우릴 반기는 보현봉이 기적같이 구름사이로 촌각으로 나왔다 사라진다

 

이 보현봉은 갈 수가 없는데 보현봉을 꼭지점으로 국민대와 평창동의 삼각형지형이 일찍 등산금지 구역으로 정해졌다고 한다

우리가 북악하늘길을 걸으면서 많은 산우님들이 그높이에 보현봉을 삼각산의 정상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멀리서 본 보현봉은 말그대로 하늘을 향한 모습이 하늘의 한 축인 보현보살의 모습으로 확실한 꼭지점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다시 가까이서 본 모습은 더 접근하기 어려운 근엄함까지 묻어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높이는 높지만 바위가 없는 관계로 아우에게 주봉을 넘겨준 형봉

 

여전히 보현봉은 구름속에서 신비감을 간직한채 숨어 있어 아직은 볼 수가 없다

 

산세로 보아 위험하기도 했겠지만 바위가 있는 봉은 어디나 신앙인들이 기도처로 삼는 바람에 몸살을 치르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하지만 이 봉우리가 북악산 넘어 서울 4대문을 제일 가까이서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진자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될 수도...

여기서 보면 작은 점에 불과한 곳에 살면서 이래서 막고 저래서 막고...  서울 시민들도 걸을 자유가 있음을...

普賢峰(714)은 마주보고 있는 문수봉의 동남쪽에 있다 하여 4대보살(미륵·문수·관음·보현)의 위치에서

동남쪽에 있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한참 오름길을 제촉하여 일선사에 잠시 들러 가람위로 보현봉으로 이어지는 암릉의 모습을 담아본다

 

형제봉의 다른 모습도 그리고 북악산과 인왕산까지...

 

형제봉 능선의 마지막을 알리는 대성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병자호란의 중심에 서있던 서울의 또 다른 외성인 성남의 남한산성을 걸으면서 홍이포와 천자총통과의 준비안된 전쟁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이제는 이 험한 삼각산에 성을 만들었다는 북한산성길

 

 

대성문 앞에서 기념사진 썬학이님과 세석님 - 역시 오늘도 친구의 우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어 고맙습니다

 

우리는 이제 대남문으로 좌틀하고 반대편으로 가면 보국문, 대동문, 용암문, 위문을 거쳐 백운대로 가는 길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얘기하려 하고 있다, 적어도 이 산성을 걷고 있는 동안에는...

지도자 한사람에게 모든 것을 책임지게 하기보다 역사의 큰 흐름이 만들어낸 북한산성길에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동원되어

지금의 돈먹는 하마 국책사업이었을 것인데 그것도 돈이나 제대로 주었을까? 이래저래 북한산성에만 오면 생각나는 단상이다

그리고 북악산 하늘길에서 들러 보았던 탕춘대성을 따라 군량미를 날랐을 것인데...

 

 

인조는 이 문을 여닫는 소리를 들으면서 어떤 심정으로 들어가고 나왔을까

대성문(해발 620m)

임금께서 여차하면 경북궁에서 북악산을 거쳐 형제봉능선을 넘어와 북한산 행궁으로 통하는 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산성 12성 가운데 규모가 제일 크단다

특히 전란시에는 임금님만 빠져 나갈 수 있었다 하는 얘기도 전하는 것을 보면 매우 중요한 역활을 담당했으리라 짐작된다

 

 

민초의 한숨섞인 성곽을 따라 올라오다 보면 대남문이 보이기 시작하고

백제시대부터 산성을 쌓았다는 북한산성의 지금 모습은 조선 숙종 37년(1711년)에 완성됐다.

숙종·영조 때 인물로 북한산성을 쌓는 데 기여한 승려인 성능이 지은 ‘북한지(北漢誌)’에는 “성문은 14개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 중 유실된 수문지(文殊門)를 제외하고 현재 13개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 이 성곽을 모두 돌아보나?

 

 

이정목에 문수봉표시가 있는 문수봉에서 두꺼비바위가 있는 봉을 배경으로 

1109년(고려 예종 4) 묵암(默庵) 탄연(坦然)이 창건하였다는 이 절은,

이 곳 암굴에서 수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목격하고 문수암이라는 암자를 지었다고 한다.문수보살 3대성지중 하나이다

文殊菩薩은 부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역활을 했다는 지혜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위치한 봉으로 아래의 문수사란 절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봉우리 위의 두꺼비 모양의 바위 등에 걸터 않아, 아들갖기를 빌면 이루어 졌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함께 해주신 산우님 등산화가 너무 미끄러워 그 멋있는 비봉 하늘길의 내림긜을 포기하고 문수봉 앞에 있는 두꺼비바위봉을 우회

 

다섯 분은 비봉하늘길 내림길로 들어서고 우린 청수동 암문을 넘어 선다

 

문루가 없는 비상 출입구로 사용됐던 성곽길에 있는 암문을 만나게 된다

 

우회 덕분에 한가지 더 배웁니다 - 한마디로 너덜지대인데 역시 내려올 때 애추지형떄문에 고생했다

 

이제 비봉하늘길 능선과 조우 : 가장 스릴있는 내림길을 결국 포기하고 둘이서 점심을 먹는다

 

통천문 오름길을 위에서 담아 본다

 

양쪽 바위 틈 사이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돌계단처럼 형성된 모습이 범상치 않은 오름길이다

하늘을 오르는 길이 쉽지 않음을 알기에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 스스로 길을 연 듯한 바위에 감사하고...

올라 올 때의 마음은 모두 하나지만 이렇게 살아가면서 느끼는 여러 갈래의 뜻을 모아 다시 통천문에서 하나로 합쳐지고

이 통천문을 열면서 수 많은 사람들은 어떤 기원을 했을까?

 

 

오늘 함께한 산우님들은 어떤 소원을 빌면서 하늘길을 열었을까? 

 

문수봉을 배경으로 세석님의 멋지 포즈와 함께 비봉능선의 아름다움을 담아 본다

 

보현봉과 문수봉을 배경으로 승가봉으로 오르고 있는 채화님  - 저 아름다운 길을 우회했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승가사 사찰 위에 있는 승가봉 정상에서 사모바위와 비봉을 배경으로 썬학이님 - 묵묵하시더니 오늘의 분위기에 살짝 손도 들어보고

 

멋진 포즈로 승가봉에 있는 암벽을 오르시고 계시는 주유천하님

 

오후들어 구름이 많이 걷히면서 사진 삼매경에 빠지신 채화님

 

사모바위

조선시대 관리들이 쓰던 사모紗帽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정말 뭔가 사연이 기구하게 보이는 모습을 내려오는 내내 궁금하기만 하였다

멀리서 보면 뭔가 찾고 있는 듯 약간 기울어져 있었는데....

병자호란때 전쟁터로 나가게 된 청년은 전쟁이 끝난 후 고향에 왔지만 사랑하는 여인이 청나라에 끌려갔다는 소식에

매일매일 이곳 북한산에 올라 북을 바라보다가 결국 바위로 변했다고 한다

 

 

1주전에 걸었던 북악산이 인왕산과 안산을 거느리고 계속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 결국 조선시대의 흥망성쇠의 산증인일텐데...

 

나는 지금도 길상사에 들러 느껴보고자 했던 법정스님이 걸으시면서 바라 보았을 뜰안

과연 법정스님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 보았을까?

발자취를 하나 둘 주섬 주섬 잡으려 애쎳던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법정스님의 애틋했던 눈길을 받아서 인지 길상사의 秋景은 너무도 닮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제대로 필받은 주유천하님과 채화님 그리고 강철대장님 어떻게 저길 올라갔지?

 

천억원대의 대원각 부지를 사랑했던 연인의 시 한줄만한 가치도 없다고 하시며 길상사를 짓게 했다는 일화는

한사람의 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또 글을 읽고 느낌만이 아니고 실천을 위해 나를 내려 놓을 수 있는 용기 그 또한 필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얘기들이다

어쩜 큰사람은 타고 난다는 말이 사실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당겨보면 - 대단합니다. 다음 부터는 안전도 생각하시길...

 

분단의 아픔에 우리는 너무도 많은 가슴아픈 사연들을 듣고 보고 그렇게 살아 왔었지만

분단이 준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을 다시 이어갈 희망에 전쟁터와 같은 요정에서 악착같이 돈을 벌었지만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만나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것이 인간의 욕심임을 깨닫고

길상화의 법명처럼 꽃처럼 아름답게 사시다가 이 세상에 마지막 우리에게 꽃향기를 남기시지 않았던가

 

 

흔들바위라도 되는지 계속 흔들어 보고 있는 채화님 - 올라가기 힘든 곳이니 맘껏 즐기시길...

 

사랑은 채우는 것이 아니고 남을 위해 아낌없이 주어야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진리가

그만큼 사랑했던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아프고 간절하였기에

상상도 하지 못할 천억원대의 돈이 가지는 무게가 사랑했던 사람의 시 한귀절만 못했던 것이다

가진 것이 많아 내려 놓을게 많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내려 놓을 마음을 가진 것이 행복인 것이다

 

 

승가사 갈림길을 지나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비봉 - 출입금지를 무시하고 오른다

 

그러나 잠을 깨고 나면 다시 현실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우리가 꿈꿀 수 있는 행복이 많지 않음이 너무도 안타깝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를 내려놓을 게 없을 것 같은 우리같은 사람들도 어쩜 이렇게 살아가는게 어렵고 힘이 드는지

흔히 하는 말중에 사랑만 가지고는 살 수 없는게 세상이치이고 보면

똑 같은 연두색 잎사귀에서 떨어지는 낙엽은 각기 다른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 거기에 진리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역시 채화님 - 강철님의 강권으로 아찔한 경험을 즐기신 채화님, 그래도 안전이 최고입니다

 

우리가 산속을 오르다 보면 높을 수록 숨이 턱까지 차오르지만 오직 오른다는 일념으로 오르고 또 오른다

육체적으로 힘든 만큼 오르고 나면 새롭게 펼쳐지는 세상이 형형색색의 단풍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비봉능선이 앞에 그려놓은 하늘을 내려 놓은 듯한 신비함 속에서도 이 아름다운 하늘과의 조화가

이세상에 태어날때는 똑 같은 모습으로 태어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이렇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정상으로 오름길

碑峰 은 진흥왕 순수비가 있던 봉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이 비석이 기록에 나타난 것은 이중환(숙종~영조)선생의 택리지이다.

팔도총론 경기도편에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려고 백운대에서 산맥을 따라 만경대에 이르고 서남으로 비봉에 이르렀다.

 '무학오심차지(無學誤尋此地: 무학이 이곳에 잘못 찾아온다)’라고 도선이 세운 비를 보고 북악으로 가서 결국 도읍을 정했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 비를 '무학대사오심비’ 또는 글자가 없어졌다고 '몰자비(沒字碑)’라고 불렀다 한다

 

 

복재비석인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정상에서 강철님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이 비는 신라 진흥왕(540~576)이 새로이 확보한 영토의 국경을 직접 둘러본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것으로.... 이러한 비를 순수비(巡狩碑)라 부르는데,

진흥황 순수비가 세워진 곳은 현재 경상남도 창녕, 함경남도 이원(利原)의 마운령(磨蕓嶺)과 길주(吉州)의 황초령(黃草嶺) 그리고 경기도 북한산 비봉(碑峯) 등 4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1816년, 당대의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는 이 비를 직접 찾아보고 비문을 탁본하여 연구한 결과 모두 68자를 읽어 냈고 바로 이 비가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혔다.

이듬해 김정희는 다시 이 비를 찾아와 비석 옆면에 자신이 이 비를 찾은 날짜와 이 비가 바로 신라 진흥왕순수비임을 확인하였다는 사실을 새겨 놓았다.    자료 : http://uquehan.blogspot.kr/2012/09/20120909_11.html

비석은 풍화가 심하여 1972년 이곳으로 부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여 전시, 보존되어 오고 있으며

2006년 10월에는 원래의 자리에 현재의 복제비석을 세워 역사적 현장을 보존해 오고 있다.

 

 

 

인왕산을 배경으로 위험도 마다하지 않고 비봉의 비경에 심취해 있는 채화님 그리고 그걸 담아내려 애쓰시는 강철님

지금부터 2050년 전, 고구려 주몽의 왕비 소서노는 온조, 비류 두 아들을 데리고 믿을 수 없는 남자 주몽을 떠나 지금의 서울 지역으로 내려온다.

그러나 주인 없는 땅이 어디 있으랴? 이곳은 경기, 충청, 전라 지역의 맹주 마한의 땅이었다.

온조는 마한왕에게 허락을 받아 이 곳 서울에 삶의 터전을 구한다.

그러다가 힘을 키운 온조는 마한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마한을 점령해 버렸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첫 번째 배신이 서울 땅에서 일어난 것이다. 

 

 

다시 내려오다가 바라본 의상봉 능선 너머로 보이는 삼각산 정상이 멀리서라도 우리의 산행에 의미를 더해 주는 것 같다

그 후 600년이 지났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남하정책으로 백제를 쳐서 서울 땅(한수 이북)에 도읍한 개로왕을 사로잡아 처형했다.

이에 그 아들 문주왕은 도읍을 공주(웅진)로 옮긴다.
이후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맺고 힘을 합쳐 고구려를 쳐 551년 백제의 한강 이북(지금의 서울)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553년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의 뒤통수를 쳐 이 곳 서울 땅을 빼앗아 버린다. 또 배신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 후 신라 진흥왕이 세운 비석이 바로 비봉에 있는 비석이다. 이 비석의 이름은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로서, 비봉이란 이름도 이 비석에서 비롯되었다.

동물의 수컷들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듯이 자신의 영역임을 표시한 비석이다. 그 후 백제는 배신자를 응징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비봉사거리에서 진관사 계곡으로 하산은 시작되고

 

어제 비가 내린 탓인지 모처럼 계곡에 물소리가 들리고 이제 물을 만지기에는 차갑다는 느낌이 있는데..

 

진관사 계곡의 멋진 풍경이 계속 이어진다

 

역시 비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이렇게 생명감을 준다

 

동 불암사, 남 삼막사, 북 승가사와 함께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아 왔던 서쪾의 진관사에 잠시 들러 보고

 

진관사와 태극기의 비밀에 대한 설명석이 있다

 

전에 없던 공사중인 은평한옥마을로 들어서면

 

 

 

이 길로 오르면 숙용심씨 묘표를 만날 수 있다

 

숙요심씨 묘표가 삼각산을 배경으로 모셔저 있다

숙용심씨묘표(淑容沈氏墓表)

이 묘표(墓表)는 1999년 6월, 한일역사공동연구학회장인 최성규 씨가 일본 도쿄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기념공원에

‘ 숙용심씨지묘’라는 글씨가 새겨진 묘비를 발견하고 2001년 후손들이 국내로 반환해온 석비(石碑)이다

이 묘표(墓表)는 숙용심씨묘표는 이수의 이무기의 힘찬 움직임과 운문이 빼어나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숙용심씨는 죽은 후 서울 근교에 예장하였으나 묘가 실전되었다.

그래서 문중 대표가 수차 일본을 방문하여 증빙자료를 제시하고, 현지 관청 공무원과 협상을 한 결과

2000년 7월 3일 현지 지방 관청의 허락을 받아 유물을 해체하여 귀국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문에는 이와 같은 반환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대리석으로 된 묘표는 전면에 “숙용심씨지묘”라고 쓰여 있으며, 빼어난 조각미로 인해 왜병들에 의해 임진왜란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이며

우수한 조각 솜씨 등 예술성과 역사적인 유물로써의 가치가 있다.

 

 

묘표 상단

묘표는 비수(碑首)와 비신(碑身), 비대(碑臺)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수와 비신을 하나의 돌로 조성하여 2단의 비대에 세운 통비(通碑) 형태이다.

비수와 비신은 흰 대리석을, 비대는 화강암으로 제작하였다. 비수에는 뿔이 있는 숫룡을 구름무늬 속에 조각해 놓았는데, 조각이 뚜렷하면서도 섬세하다.

비수의 뒷면과 좌우옆면은 모두 구름무늬를 새겨넣었다. 비신 앞면에는 해서체로 ‘숙용심씨지묘(淑容沈氏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글자의 크기는 가로 4.7cm, 세로 4.5cm 정도이다. 비신 뒷면과 옆면에는 아무런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다. 비대는 2단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1층은 한 면에 3장씩의 연잎을 엎고, 2층에는 복련(覆蓮)을 둘렀다. 1층과 2층 사이 좌우 옆면과 앞뒤에는 안상(眼象) 문양이 있고,

연주문(聯珠紋)을 돋을새김으로 새겨넣었다.  비대가 2층으로 된 묘표는 발견된 것중 처음이라 한다.

자료 : 문화재청

 

 

 

숙용심씨의 묘는 없어졌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은 언제나 살아 있게 되어 후손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렇게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길을 건너 하나고등학교 앞 정류소에서 7211번 버스로 연신내역에서 내려 뒷풀이 장소로 이동

 

썬학이님의 소개로 들른 약간의 매콤함이 매력으로 다가온 찜닭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어 본다

 

가까운 근교에 있는 산이지만 너무 가까워서 그런지 맘처럼 접근이 쉽지만은 않았던 삼각산

 

그러나 이렇게 알고보면 조선의 태동부터 함께 유구한 역사의 한 축을 거뜬히 지켜온 산이지만

산줄기의 매력에 빠저 쉼없이 달려온 대간에 정맥에 기맥에 거기애 지맥까지...

 

이제 맥잇기 산행의 부담감을 내려 놓고 천천히 다시 되돌아 걸어 본 삼각산에서의 하루가 그래서 더 행복했다

북악산 하늘길에서 왜 세상은 돌고 도는지를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현재를 볼 수 있었다면

이 삼각산에서는 그 자리에서 묵묵히 한양도성의 삶의 질긴 이야기를 품어 주어

조선 역사를 써 내려간 옛 향기에 푹빠저 보낸 하루였다는 생각으로 마무리를 하게 된다

 

옆에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는 진리를 잠시 잊고 한눈을 판 격이랄까?

그래서 오랜만에 걸어 본 비봉 하늘길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던 하루였다는 생각이다

거기에 함께 해 주신 산우님들의 표정에서 만족에 만족을 더하는 즐건 산행이 어이졌으니...

이보다 더 행복한 산행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정리한다

 

아무리 인간이 똑똑해도 세상사 다 그렇지만 하늘이 도와 주지 않으면 그만큼 힘들다

이 것도 복이라면 복이랄까 자연이 만들어 내는 은은함과 청명함, 두 얼굴이 있어

지웠다 다시 그렀다를 반복하고 있는 내마음을 보고 걷는 기분 알까 모를까?

미리 맘속에 그려놓은 보현봉을 구름으로 지우고 다시 그리고 또 다시 지우고...

 

참으로 세상사 힘들다지만 오늘 처럼 내마음의 지우개를 가지고 내 맘대로 지우고 다시 쓰고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자연과 산우님들이 그래서 더 고맙다는 생각입니다

뒤돌아 보지 말자고 하면서도 뒤돌아 볼 수 밖에 없는 현실과 북한산의 자화상

거기에서 하루를 함께 할 수 있도록 함께 해주신 산우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특히 생일이신데도 제대로 대접을 못해드리고 헤어진 채화님

이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생일 축하드립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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