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100대명산 : 월악산(月岳山 1097m 제천 )  

 

 

 

일시 : 병신년(16년) 누리달 06월 열하루 흙날   

 

인원 : 광명로얄산악회 산우님들과 함께

 

어딜 : 신륵사 주차장 ~ 신륵사 삼거리 ~ 영봉(월악산) ~ 동창교갈림길 ~ 덕주사 마애불 ~ 덕주사 주차장  

                               (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후미기준)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3129  에 있습니다

 

 

 

메스컴에서 떠들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갈 수 밖에 없는 민족최대명절중의 하나였다는 단오절이 그제였고

전두한의 87년 4·13호헌조치로 촉발된 민주화운동에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안타까운 죽음까지 전해지면서

그들의 뜻까지 잊지 말자하며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육십항쟁 기념일이 어제였고

애국선열과 국군장병들의 충절(忠節)을 추모하는 날 이였던 현충일까지 있었던 6월 둘째 주에 떠나는 월악산

7,8월의 더위를  맞이하기 위해 자연도 바쁘게 돌아가는 올여름달에 광명로얄산악회 정기산행을 떠나본다 

 

 

 

월악산(제천) 등로 : 신륵사 영봉 덕주사 - 로얄산악회 산우님들 등로 - 참고용 

 

충청북도 제천시·단양군·충주시와 경상북도 문경시에 걸쳐 있는 월악산은 넓이만큼이나 산자수려를 자랑한다

서사면의 달천(達川)과 동사면이 광천廣川이 월악산을 에워싸고 돌아 북쪽의 광천과 만나 충주호로 흘러들고

우리가 들머리로 잡고 있는 억수리에 있는 용하계곡에 수렴선대등 용하구곡用夏九曲을 만들어 놓고

날머리를 잡고 있는 송계계곡엔 덕주골의 학소대, 수경대등 송계8경을 만들어 놓아 절경을 자랑한다

비록 백두대간의 한축을 담당하지는 못했지만 대간의 물을 받아 만들어낸 충주호의 흐름을 따라가 본다

 

 

 

신륵사주차장에 도착 오늘도 월궁항아님의 체조로 월악산 여정의 출발을 알린다

 

잠시 주차장에 있는 월악산 노래비를 담아보고

 

단체사진 후 출발  -  만재 수석대장님 작품

 

그렇게 신륵사주차장을 출발 - 신륵사로 향하는 깨달음의 길에서 노을총무님

 

신륵사 갈림길에서 신륵사神勒寺 로...  6.25때 폐사되고 다시 중건했다고 하는데 건물은 고풍스럽다

 

 

월악산 아래에 있는 사찰치고는 너무 소박함을 느끼며... 본격적인 영봉을 향한 산행이 시작되고

 

신륵사에서 500m쯤 오면 용하구곡用夏九曲 중의 하나인 수렴선대가 좌측 계곡에 있다고 하는 자료가 있는데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지도에는 신륵사 스님들이 참선했다는 수렴선대의 위치가 다르게 표시 되어 있다

 

넓은 길을 따라 계속 올라오면 삼거리에서 출입금지인  좌측으로 들어가면 지도에 나와 있는 수렴선대 가는 길

 

 

제천의 10경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용하구곡의 동쪽코스인 월악산 영봉으로 향하는 길에 유일하게 수렴선대가 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자료로만 전해져 오는지 용하구곡중 유일하게 수렴선대에 관한 자료가 없다. 잠시 출입금지로 들어가 본다

용하구곡用夏九曲

제천의 10경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제천시 덕산면 억수리 용하계곡에서 널리 알려진 아홉 군데의 명승지.
옛날 어는선비가 이곳을 돌아보고” 하늘과 땅도 비밀로 남겨둔 명소”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주자학을 집대성한 주자(주희)가 자주 찾아가던 [무의산]이 너무도 아름다워 9개의 계곡을 무의계곡 이라 이름지은것에 유래한다

1895년 일제시대의 단발령을 피하여 의당 박세화 선생이 이곳으로 들어와 은거하면서 아홉개의 바위에 세겨 놓았다

 

 

 

지도가 잘못된건지 자료가 잘못된건지... 이제 절골을 벗어나 본격적인 산행은 시작되고...

월악산 영봉은 나라의 큰 스님이 나온 곳 혹은 나올 곳이라 하여 국사봉이라 불렸는데 국사당이 있다

 

드뎌 시원한 능선에 올라서다. 지도상 안부

 

시원한 바람과 함께 힘들 때마다 소나무가 나타나 산행의 힘듬을 잠시 잊게 하고...

 

이제 영봉의 위용도 서서히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기 시작하고...누가 알았으랴... 암봉뒤로 여성스런 모습을 감추고 있을 줄...

 

영봉 아래 덕주사 갈림길이 있는 신륵사 삼거리 - 덕주사로 가기위해서는 영봉에 올라 다시 되돌아 와야 한다

 

출렁다리가 아니라서 약간은 아쉬움??  영봉으로 오를 수 있게 만들어 준 다리라 고맙기만 하다

 

올라오면서 본 영봉의 모습과 달리 우회하여 올라와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말 그대로 음양의 조화로다

 

이제 본격적인 영봉을 향한 오름길

 

월악산 정상인 영봉의 모습이 보이고

 

월악산 정상인 영봉 - 오늘은 사람이 적어 눈치 볼 일 없어 호사로구나. 정상은 적은데 사람은 많고...일상의 모습인데...

월악산(月岳山 1097m)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과 덕산면 경계  제천10경 중 3변째

1984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월악산 국립공원은 설악산, 치악산과 더불어 3대 악산으로 부른다

위로는 충주호반과 청풍호반이 월악산을 휘감고, 동으로 단양8경과 소백산국립공원,

남녘으로는 문경새재와 속리산국립공원과 같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달의 바위산으로 해석되는 월악산은 우리나라 말 ‘달앗뫼’의 차음이라는게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북쪽 중봉과 하봉으로 이어지는 장엄한 암봉의 행진이 이어지고 그리고 육안으로는 희미하게 보이지만... 충주호를 배경으로

충주호에서 영봉을 보면 여인이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누워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우두산에서 본 미인봉이 생각난다

 

월악산의 정상인 영봉(靈峰)은 영기(靈氣)를 내뿜는 산으로 백두산과 함께 단 두 곳 뿐이다

신령스런 봉우리인 만큼 나라의 큰 스님이 나온 곳 혹은 나올 곳이라 하여 국사봉이라 불렸고

아주 옛날에는 영봉 위로 떠오른 달이 너무 아름다워 월형산 月兄山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도읍을 정할 때 개성의 송악산과 중원의 월형산이 경쟁하다 탈락하자

도읍의 꿈이 와락 무너졌다 하여 고려초기부터 와락산이라 불렸다고 하는 전설을 안고 있다

 

 

하산하게 될 동창교 갈림길이 있는 헬기장이 조망되고

 

서쪽 박달산 방향인데... 백두대간의 준령을 오늘은 보여주지 않을 심사인가 보다

 

북동쪽 금수산 방향도 역시 육안으로만 살짝 보여주고...

 

하산을 시작하며 식후경

 

가스가 조금 거치면서 백두대간이 모습을 조금씩 들어 낸다. 운달산은 보일 듯 말 듯

 

 

여기서 월악산 족보 :

백두대간 포함산을 지나 만수봉 갈림봉에서 북쪽으로 능선 하나를 분기시키는데 만수봉, 월악산를 지나 충주호에서 마감한다

 

 

올랐던 길 다시 내림길이 시작되고... 오름만큼이나 힘든 계단과의 사투가 시작되고...언제 또 만나랴... 사진은 남겨야지...

 

 

다시 신륵사 갈림길 삼거리에서 이제 덕주사로

 

영봉공원 지킴터가 있는 동창교 갈림길 - 송계삼거리

동창東倉교 갈림길(송계리)

동창터(東倉) : 창말에 있는 터로 옛 충주군에 딸린 동창(東倉)과 서창(西倉)중 동창이 있었던 자리

고려시대에 이곳에 황강원(黃江院)과 역(驛) 및 동창(東倉)과 서창(西倉)을 두었다고 한다

 

 

바로 헬기장이 나오면서 되돌아 본 영봉

 

북한산 인수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국내에서 단일 바위로는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드세어서

양기가 충만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여성신이 머물만한 곳이어서 음기가 강한 산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충주호 끝자락인 수산리에서 올려다 보면 여인이 누워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래서 음양의 조화를 위해 덕주사 입구에 남근석 3기를 세운 이유이며

그래서 월악산(月岳山)도 음(陰)을 의미하는 한자 달 월(月)이 들어 있다.

 

 

철망과 삼각점이 있는 960봉에서 우측으로 우회를 시작하고  

 

덕주사를 품고 있는 덕주골이 보이면서 앞에 있는 봉이 덕주봉인 듯... 그 뒤로 운달산도 희미하게 조망된다

 

조금 내려오면 충주호 전망대에서 바라본 영봉과 중봉, 하봉 그리고 충주호

 

역시 내림길 계단

 

만수리지를 배경으로

 

6봉으로 유명한 문경의 부봉도 조망된다

 

당겨보면

 

이제 마애여래입상이 있는 윗덕주사가 보이기 시작하고

 

왠 굴?

 

신라의 마지막 공주 덕주와 동생 마의태자의 나라 잃은 사연을 담고 있는 재천덕주사마애여래입상 堤川德周寺磨崖如來立像 

 

거대한 수직암반 벽면에 새겨져 있는 마애여래입상

재천덕주사마애여래입상 堤川德周寺磨崖如來立像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1, 덕주사  보물 제406호 (1964년 9월 3일)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덕주사는 덕주공주(德周公主)가 건립한 절이라고 하는데, 한국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마애불은 남쪽 화강암 벽면 가득히 부조되었는데, 얼굴과 어깨는 도드라지게 조각되었고 그 아래는 선각으로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법의의 옷주름도 도식화되어 그 규모에 비하여 조형 수법은 졸렬한 편이다.

고려 초기의 거불 조성의 추세에 힘입어 조성된 불상으로 보인다.

자료 : http://encykorea.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음백과사전

 

 

 

망국 亡國 은 나라도 없어지지만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고통이니...

거기에 天命을 지키지 못한 한을 달래기 위해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  금강산으로 가는 길

그래도 누이 덕주 공주와 함께 이니 조금은 서로 위로가 되었을까?

문경 어디쯤에 하룻밤을 묵어가는데 범상치 않은 꿈을 동시에 꾸었다고 한다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곳에 절을 지으면 억조창생의 자비를 베풀 수 있다고

관세음보살이 꿈속에 나타나 이렇게 알려주어 덕주 공주가 세운 석불이 바로 이 마애불이다

그리고 태자는 하늘재 기슭에 미륵석불(미륵리 석불입상)을 세웠다

그래서 월악산 영봉은 공주의 산이요 하늘재 아래 미륵석불은 태자의 혼이 살이 있는 골이다.

 

 

머리 부분 좌우에 난 4개의 구멍은 과거 목조전실을 만들기 위해 파낸 것이다고 한다

 

역사는 흐르고...

지금도 덕주 공주를 닮은 이 마애불은 남쪽 하늘재 아래 동생 마의태자인 미륵석불을 바라보고

미륵석불은 북쪽 월악산 영봉 아래 암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남매의 정을 나누고 있다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두 부처 사이에 오색무지개가 펼쳐진다는 전설이 내려온 이유일까?

끝내 신라의 재건을 보지 못하고 덕주 공주는 덕주사에서 생을 마감했고

문경을 떠난 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 초막을 짓고 삼베옷에 풀을 뜯어 먹으며 살았다 해서

이름도 마의태자(麻衣太子 912년~?), 풀뿌리로 연명하다 생을 마감했다는 말도 있고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에 합류했다는 전설까지... 잘되고 볼 일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신라 마지막 임금  56대 경순왕(?∼978)의 장남인 마의태자의 이름은  김일(金鎰) 혹은 김부(金富)이다

마의태자는 천년의 왕국을 지키지 못하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국권을 넘기려 하자 앞장서 반대했다 

천명이 준 천년의 역사를 가진 신라의 소중함을 지키려 했던 마의태자의 뜻과 달리 국권은 고려로 넘어가고...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서라벌을 세운지 992년 만의 일이다

누이 덕주 공주와 함께 망한 조국을 떠나 개골산(금강산)으로 가면서 신라의 부흥을 꿈꾸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월악산을 품고 있는 충주땅은 이미 왕건의 지지 세력이었던 호족 유씨가 장악하고 있었다

뭐가 아쉬워 망한 나라의 태자를 받아 주었겠는가.

오히려 덕주사를 지어 덕주 공주를 감시하고 미륵사를 세워 마의태자를 감시하고...

 

 

 

마의태자가 경주를 떠나 금강산으로 가기 위해 쉬운 길인 동해안을 따라 가지 않고

험하고 험한 내륙산길을 따라 올라오면서 영주 부석사를 거쳐 월악산을 지나

여주 신륵사의 은행나무 가지를 꺾어 지팡이로 삼아  양평 용문산 용문사에 들려 

그 지팡이를 땅에 꽂아 신라 천년사직을 대신할 수 있도록 뿌리를 내려 달라고 했는데

 

 

감로수 약수터에서

 

그 지팡이가 자라 오늘날까지 용문사에 천년 은행나무로 남아 있다

홍천을 지나 인제를 지나면서 인제산악 지대에 신라 부흥운동을 하던 흔적을 많이 남긴다

마의태자가 옥새를 숨겼다는 ‘옥새바위’ , 마의태자가 수레타고 넘었다는 ‘수거너머’

신라부흥운동의 중심지였다는 ‘김부리(金富里)’, 마의태자 휘하 맹장군 이름을 땄다는 ‘맹개골’

마의태자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강산에 麻衣太子의 전설을 남겼다

 

자료 : http://www.medworld.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200

 

 

 

다시 내림길.... 덕주공주는 이 길을 오르내리면서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덕주산성의 성문 흔적이 남아 있는 석문을 통과하고

 

여닫는 성문의 흔적이 바닥에 남아 있다. 성문을 복원하면 어떨까?  성문을 여시요... 하면 열었을 것인데...

 

덕주사가 보이고

덕주사   http://www.dailian.co.kr/news/view/534831

신라 진평왕 9년 서기 586년에 창건된 덕주사 창건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진평왕 시절에 세워졌다고 전한다.

신라의 마지막 공주인 덕주공주(德周公主)가 동생인 마의태자(麻衣太子) 일행과 이곳에 들렀을 때 이 절을 세워 절 이름을 덕주사라 하고,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가 이곳에 머물며‘덕주사’란 절을 세웠다한다.

그때 지은 절은 보물 제406호로 지정된 ‘덕주사 마애불’ 앞에 있었는데 6·25전쟁 때 소실됐다.

 

 

먼저 우측으로 가보니 남근석 3기가 눈에 띈다 - 영봉이 여성산이라 양기인 남근석으로 음기와 조화를 위해 세웠다고 한다

 

 

충주호의 건설로 이곳으로 모셔온 석조약사여래입상

 

남한 유일의 범자비인 ‘대불정주범자비’가 보존돼 있다 - 덕주봉을 배경으로

 

 

 

산신각을 들러보고 덕주사 연혁을 보면서 다시 하산 시작

 

신륵사와 덕주사의 천년고찰의 향기에 신라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슬픈전설까지 더해지면서

백봉 작사 작곡 주현미 노래 ‘월악산’ 의 노랫소리가 지금도 애틋하게 들려 올 것 같은 월악산에서의 하루

금강산 천리 먼 길 흘러가는 저 구름아 / 마의태자 덕주공주 한 많은 사연 너는 아느냐 
'월악산아 월악산아 말 좀 해다오 그 님의 소식을'    가 애틋하다

 

 

덕주산성문인 덕주루를 통과하면서 바라본 학소대... 화양구곡의 학소대에 비해 왜소하지만...

 

덕주산성

월악산의 남쪽 마애불주변에 있는 상덕주사를 중심으로 외곽을 여러 겹 둘러 쌓은 석축산성이다.

고려 항몽지였고 임진왜란때는 왜군을 막아내는 중요한 요충지 역할을 했고

조선말에는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과 권력다툼에서 폐할 것을 예감하고 은신처로 축조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 월악루, 동문 덕주루, 북문 북정문의 3개 성문이 남아있다고 한다

 

 

학소대와 학소대 위에 망월대

 

조금 더 내려오면 덕주골에서 올라오면 첫 번째 만나는 경승 수경대

 

 

바로 앞의 반석위에 수경대라고 암각되어 있다

송계계곡

월악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있는 '송계계곡'은 기암괴석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곳으로 약 7km에 달한다
전체가 국립공원으로 계곡내에 월광폭포, 자연대, 수경대학소대, 망폭대, 와룡대, 팔랑소,만수폭포 등 '송계8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덕주탐방지원센터를 지나 상가를 지나면서 덕주봉을 보면서 월악산의 정기산행을 종료한다

 

차로 조금 이동 뒤풀이 장소

 

마지막으로 식당에서 보이는 월악산 정상 영봉과 중봉 하봉을 담아 본다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임에도 많은 산우님들이 함께한 광명로얄산악회의 6월 정기산행 월악산

다행이 비가 오지 않고 조망을 주지 않는 가스속에 따뜻한 햇볕은 피했지만

백두대간이 펼치는 준령들의 하늘거림을 볼 수 없었고

충주호가 펼치는 산수화도 그리다 만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 왔지만

바로 눈앞에 펼쳐졌던 월악의 속살만으로도 행복했던 하루로 기억된다

 

 

조용한 산길을 걷다보면 금방 자연이 일부가 되어 버린 나를 발견하고 

내가 뒤집어 쓴 세상의 찌꺼기들이 안개처럼 사라짐을 느낀다

아직 정제되지 않은 나의 혼미한 정신 속에 살포시 안기는 산의 정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기하게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 넣고 있었던 것이다

높은 하늘을 잠시 바라보며 시원한 공기를 한모금하고

푸른 자연 속에 잠시 몸을 맡겼을 뿐인데...

인간은 자연을 멀리 할수록 전에 없던 새로운 정신병이나 문명의 질환에 걸린다고 하지 않던가

현대인이 스스로 만든 문명의 이기에 스스로를 얽매이게 하면서 살아가고 있기에

이렇게 대자연이 품어주는 숲길이 옆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게 다가오는지...

인간은 대지 같은 엄마 품속에서 나서 갈 때는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현대문명의 질환에 스스로 빠져 지쳐가는 우리가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서 산만큼 좋은 곳이 있을까? 

 

어머니 품 같은 산에 안기어 흙에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대자연의 섭리를 따라가고 있는 낙엽을 밟으며 천천히 걷다 보면

맘은 맑아지고 정신의 때는 자연스럽게 씻어지고 자연이 품어내는 맑은 공기 속에

내가 품고 있는 오염도 저절로 정화되어

그 만큼 근본적인 자연에 가깝게 다가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래서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악인이 없다고 말 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 본연의 착한 심성으로 돌아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의 품속인 어머니 품속에 안긴 아기가 가장 행복한 것은

아기에게는 어머니 품속이 의사이지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배에 청진기를 대고서야 속병을 알 수 있는 의사가 따로 필요 없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질서를 간직하고 있는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 산

특히 오늘 함께 한 월악산 영봉을 비롯한 암벽과 숲이 펼치는 

음양의 조화속에 충주호와 어우려졌던 자연속에 함께했던 하루

광명로얄산악회 산우님들도 똑 같은 생각으로

영기(靈氣)를 내뿜는 산속에 들어 힐링의 하루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산 철학이 별거던가?

산에 들어 열심히 걷다 보면 자연이 주는 철학이 들어오는 것을...

 

나는 오늘도 그렇게 초보 철학자가 되어 산을 내려 온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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