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100대명산 -  강천산 (剛泉山548m) 순창

 

 

 

일시 : 을미년(15년) 마름달 11월 열나흘 흙날         

 

인원 : 광명로얄산악회 산우님들과 함께

 

어딜 : 연등사지주차장 ~ 연등사 ~ 대남문 ~ 산성산 ~ 강천제2호수 ~ 현수교 ~ 강천사

           (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후미기준)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2782 에 있습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치닫는 달이라 해서 미틈달이라고도 하고 겨울맞이 들겨울달 등으로 표현되고

하늬바람도 불어 올 것이고 잘하면 첫눈도 올 것이고 이래저래 맘까지 끼임 달 11월

만추의 유혹을 잠시 미루고 아직은 단풍으로 인해 계곡이 살아 있을 것 같고 거기에 역사적 내음까지

호남3대산성중 하나인 금성산성에서 剛泉이 아니라 더욱 높아진 가을하늘의 降天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곳으로

광명로얄산우님들이 함께 하는 역사와 조상들의 애환이 함께하는 순창 강천산으로 여행을 떠나본다

 

 

 

강천산 걸어간 길 - 참고용

 

 

아미산(蛾眉山)의 품속에 자리하고 있고 조선시대 궁중 진상품으로 알려진 지금도 고추장하면 생각나는 순창淳昌

아미산 뒤편으로 지금도 고추장 민속마을이 있고 담양의 면암정과 함께 조선시대 정자의 쌍벽을 이루는 귀래정(歸來亭)

대간꾼과 정맥 좀 탄다 하는 산꾼들이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는 산경표(山經表)를 편찬하신 여암 신경준의 생가가 있는 순창

서거정은 '호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했을 정도로 기차역 하나 변변히 없는 전라북도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지만

풍수지리에서 보면 명당자리가 100개소가 넘는다고 하니 왠지 복을 많이 받을 것 같은 순창으로 들어가 보자

 

 

 

순창 고추장 마을과 아미산 - 자료 :초보산꾼  http://blog.daum.net/kmhcshh/2660

 

 

이슬비가 오락가락 하는 가운데 연동사지 주차장에 도착하고

 

우측 주차장 관리 사무소 방향으로 올라가면

 

도로 우측으로 이정표가 나오면서 강천산 산행이 시작된다

 

초입부터 담양땅임을 알리려는 듯 대나무 밭이 우릴 반기고... 죽순채취금지 안내문과 함께...

 

임도 끝지점인 간이매점과 넓은 공터를 지나

 

간이매점 옆에 동학농민 혁명군 전적지 기념비도 보이고 -  전봉준 얘기는 금성산성에서 만나게 된다

 

간이매점 좀 지나 바로 나홀로 연동사지를 들르기 위해 우틀

 

바로 만나는 능선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면 221봉 산불감시초소가 나오고...   바로 좌틀하여 진행하면(연동사 100m 이정표)

 

먼저 석굴암속에 작은 석굴법당이 나온다

 

석굴법당

 

수렛길을 따르면 바로 세계 유일의 노천법당에 지장보살입상과 삼층석탑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천골(二千骨)과 연등사(煙洞寺)

명나라가 목표였던 임진왜란과 달리 전라도 점령이 목표였던 2차 전쟁으로 불리는 정유재란 때는

코를 베야만 전과로 인정할 정도로 일본군이 더욱 악랄했던 탓에 이곳도 피해가 막심했던 만큼 시체가 2,000구나 됐다고 한다

이 시신들을 바로 이 내남문 아래 골짜기에서 태웠기 때문에 이천골이라 하고 한자도 골(谷) 대신 骨자를 써서 二千骨로 쓰고 있다

이천구나 되는 시체에는 아군도 있었겠지만 적군도 있었을 것이고... 이 시신을 남문 아래 협곡에서 태웠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시체가 너무 많은 탓에 찾기를 포기하고 유족들이 하나 둘 향불을 피우기 시작하면서 연기 연(煙) 마을 동(洞) 자를 써서 연동사(煙洞寺)라 했다

 

 

 

정유재란때 불타버린 가족을 찾아 이곳으로 올라 왔을 것인데... 찾다 지쳐 이곳에 향이라도 올리고자 했던 가족의 아픔이 밀려 온다 

 

들머리에 그 흔한 일주문도 없고 법정스님의 길상사처럼 사천왕상도 없어 거창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지만

암벽 밑에 지장보살 입상과 삼층석탑만이 지키고 있어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 있는 소박한 절집으로 다가온다

소나무와 대나무 거기에 차나무가 함께 어우르는 풍경이 품어내는 소박함이 더욱 크게 다가오고 있는 것은

요즘 크기로만 경쟁하는 사찰들만 보다가 있는 그대로를 품어 줄수 있는 이게 진짜 불심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되돌아 본 노천법당과 삼층석탑

 

부처님을 보고 싶어도 닫혀 있는 법당의 문을 연다는 것은 우리 같은 비신도들은 그리 쉽지많은 않은데

이렇게 세계 유일이라는 자연석실 노천법당이 누구에게나 개방이 되어 있어 나도 모르게 부처님에게 합장을 한다

석가도 길에서 자고 길에서 깨달음을 얻었기에 길에서 설법을 했을 것이고 우리도 이렇게 길에서 설법을 듣고 있다는 생각

그래서 정유재란때 갈 곳 없는 영혼들이 좋은 곳을 갈 수 있도록 향불 연기를 담아낸 고마운 절 煙洞寺

 

 

 

삼층석탑

 

지장보살 입상

 

 

요사채가 보이는 갈림길에서 금선산성 방향으로 좌틀

 

간이매점에서 계속 동자암방향으로 직진하여 이곳에서 들어와도 될 듯

 

오름길을 재촉하니 外남문인 보국문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금성산성으로 들어 간다

외남문(보국문輔國門)

산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금성산성 외남문으로도 불리는 보국문輔國門이다

길목에 위치한 만큼 새의 부리처럼 생겨 언제라도 성밖을 살피고 적의 공격에 효율적으로 대처가 가능하게 앞으로 도드라져

좌.우로 연이어져 있는 봉우리들을 감싸고 있어 산성의 정찰기지로써 훌륭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곳이다

 

 

성안에서 본 외남문인 보국문에서... 늦은 식후경

 

내남문과 외남문 사이 이천골은  2천구의 시체를 태워 연기로 가득했을 역사의 현장 대신 구름이 대신하고 있다

 

식후경 후 본격적인 성곽길의 시작인 외남문으로 출발하기 위해 단체사진 - 행운아님 작품

 

내남문에서 조금만 이동하면 內남문인 충용문忠勇門

금성산성의 복원

복원을 시작했던 1994년 당시 담양군수가 동학혁명(1894년) 이후 폐성이 되어 오늘에 이른 金城山城의 역사성을 확인하여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산성을 복원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과감한 투자로 5개의 문중에서 서문을 먼저 복원하였다

남문의 경우 내남문과 외남문의 문루門樓를 복원하여 내남문을 충용문으로 외남문을 보국문으로 명명하여 성의 면모를 갖출 수가 있었다

오늘날 가장 아름다운 산성중의 하나로 다시 태어난 것이며 수많은 희생자의 넋을 달래주는 역사의 현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별장(別將)을 지낸 가선대부(嘉善大夫) 국문영(鞠文榮)의 비를 지나고

 

동문과 서문 갈림길에서 동자암이 있는 동문으로...  우리와 반대방향인 좌측 서문으로 가면 철마봉으로 오를 수 있다

철마봉鐵馬峰   쌍치면 시산리, 둔전리, 도고리 경계

철마봉 남쪽 아래에 있는 시산리는 말이 슬피 울어 나라의 재앙을 미리 막아 주었다 하여 시산(時山)으로 불렀으나, 행정 구역 개편으로 시산(詩山)으로 고쳤다.

그 뒤로 마을 뒷산을 철마봉(鐵馬峰)으로 부르고 있으며, 별칭으로 국시봉(國時峰) 또는 북시봉(北示峰)으로 부른다.
교통이 불편했던 옛날에는 쌍치면 주민들이 순창 보다 11.8㎞[30리]나 가까운 정읍으로 시장을 다니면서 지세와 텃세에 눌려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정읍 사람들의 기를 꺾기 위해서 하루에도 천리를 달리는 용맹한 천리마 한 쌍을 철로 만들어서 철마봉에 세웠다고 전한다

철마봉(鐵馬峰) 정상에는 철로 만든 한 쌍의 천리마가 세워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철마봉 [鐵馬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와 반대 방향인 서문으로 보국사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외남문을 보국문輔國門이라 한 듯... 

 

서문과 달리 동문 방향인 시루봉으로는 성곽길을 막아 놓아 동자암을 거쳐

 

남문과 같은 외성과 달리 성곽내부를 관리하는 내성 암문도 지나고

 

 

위에서 보면

 

전쟁중에는 성안에 이런 웅덩이는 훌륭한 우물로 이용 되였을 것이다

 

내성 동문을 지나면 - 농사꾼님 잠깐 같이 걸으면서 들었던 얘기 감사합니다.그리고 식후경 끝없던 음식까지...

 

아직 복원이 안돼 흔적만 남아 있는 외성 동문터 - 위에서 본 동문으로 들어오는 흔적

 

호남정맥길과 만남이 있는 동문터 안내문 - 여기서 남문 광덕산 방향 이정표로 우틀하면 호남정맥길이다

 

호남정맥길이며 담양과 순창의 경계인 산성산을 향해 출발... 안내판에 나와 있는 동문의 웅성 - 서울 동대문의 웅성과 비슷하다

 

강천사 갈림길에서 잠시 진행상 혼동이 있고... 북바위인 운대봉으로 진행하기로 결정

 

멀리서 보면 매의 부리를 닮은 북바위가 가로막고 있는 강천산의 최고봉 운대봉雲台峰623m)이  구름속에서도 위용을 자랑한다

 

계속되는 호남정맥길인 북문으로

 

자연을 최대한 이용한 금성산성의 성곽길을 따라 산성산까지 걷게 된다

금성산성(金城山城)     더 많은 자료 : http://blog.daum.net/kmhcshh/1230

전남 담양과 순창 팔덕면과의 경계에 있는 석축산성인 금성산성은 무주의 적성산성, 장성의 입압산성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산성으로 꼽힌다.

확실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고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성이 있었고 고려시대에 다시 쌓은 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주변에는 성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높은 산이 없고 산성 외곽이 30m가 넘는 수직 바위로 둘러싸여 있어 천연적이 요새를 형성하고 있다

거기에 마을을 형성하기 좋은 계곡이 있고 넓은 평야가 있어 성안에서 오랜동안 살아가는데 필요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성벽에 한반도 지형을 붙여 놓았다

 

배가 고파서 죽고, 병들어 죽고, 돌에 깔려 죽고, 한여름 무더위와 한겨울 추위에 얼어 죽고...

지금 보기에는 너무 잘 갖추어져 있어 평화롭기까지 하여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지만

이러한 백성들의 다섯 가지 목숨을 건 고통이 있었기에 이렇게 천혜의 요새가 가능했던 것이며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과 함께 하고 조상들의 한(恨)까지 함께 받아 준 곳이다

 

 

성곽길에 있는 삼각점에서...  증거만이 남는다... 무엇이고 눈에 띄면 증거를 남기시는 욕심쟁이 신통님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정묘호란등 난리난리 그런 난리도 없던 시절에도 요새로서의 기능을 발휘했다

정유재란 때 이천구의 시신을 받아 준 이천골의 향불의 연기가 연등사(煙洞寺)에 지금까지 피어오르고 있고

전봉준이 마지막 재기를 꿈꾸며 이 곳 금성산성에 들어 왔지만 친구의 배신으로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한이 서린 곳

지금도 들려오는 듯하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청포장수 울고 간다'

 

 

성곽과 성곽을 이어주는 성곽의  물결을 구름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런 중에도 추억은 얼마든지 남길 수 있슴이니...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금성산성은 동학군을 품어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웅대했던 군사시설을 대부분 잃어 버렸다

관군과 왜군에 의해 성내의 민가는 물론 관사 등 역사적 유물들이 성터만 흔적을 남기고... 아픔이 컸다

흔적들을 지우는 불길이 석 달 열흘 동안 계속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처절했던 역사가 담긴 현장이었다.

그나마 남은 것들도 한국전쟁 때 미처 북으로 후퇴하지 못한 빨치산들의 은거지로 이용되며 사라져 갔다

 

 

금성산성 산성산 이정석이 있는 산성산 정상 '산성산 연대봉 連臺峰 603m'

산성산 연대봉( 連臺峰 603m )

금성산성이 이곳에 위치해 산성산이라 부르는데 연대암터가 있어 연대암으로 불리우고 있다

산성산은 담양과 전북 순창의 경계를 이루며 강천산·회문산 등과 맞닿아 있고 날이 좋으면 지리산 노고단까지 보인다는데...

동으로는 추월산과 그 너머로 백암산 내장산 장군봉들 볼 수 있고 바로 담양호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서문으로 이어지는 철마봉과 동문을 지나 광덕산까지 이어지는 성곽까지...

 

 

구름에 가려 볼 수 없는 북문 방향으로 있는 송락바위 갈림길에서 구장군폭포 방향으로... 이제 호남정맥과 헤어지고..

송락바위 (북문갈림길)  여승의 모자와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송낙 : 예전에, 여승이 주로 쓰던 모자. 송라(松蘿)를 우산 모양으로 엮어 만든다

송낙’은 ‘송라(松蘿)’ 즉 ‘소나무겨우살이’라는 식물로 만든 우산 모양의 모자이다. 이 점을 근거로 ‘송낙’을 ‘송라(松蘿)’에서 온 말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말의 ‘송’이 한자 ‘松’일 가능성은 높다. 《조선어사전》(1920)에서는 이 말의 어원을 ‘숑낙(松-)’으로 제시하여 ‘송’이 ‘松’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나

 ‘낙’이 ‘蘿’에서 온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출처 : 다음 어학 사전

 

 

가파른 내림길에 내린 비로 바닥이 미끄럽지만 먼지는 나지 않아 그나마 다행...  드디어 강천사 계곡이 나타나며 현수교까지 보인다

 

 

제2강천호수를 지나면 형제봉 갈림길이 나오고... 진행상 강천사 계곡으로 하산 시작

 

구장군 폭포가 있는 성 태마공원에서 만추에 만나는 가을여심 - 행운아님 작품

 

 

세상 속으로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는 가을

몸은 이미 차가움을 느끼며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데

마음만은 아직 붙잡고 싶은 가을의 풍경을 즐기려는 우리에게

아직이라는 이름으로

농익는 만추라는 계절의 과정이 남아 있음을 알리려는 듯

나뭇잎들은 더욱 붉어지며 뜨거운 가을을 즐기고 있다

 

 

 

이미 떨어진 낙옆과 불타는 여심과의 만남   - 행운아님 작품

 

 

너무 뜨거웠던 탓일까 이미 떨어진 나뭇잎

살아서도 아름답더니 죽어가는 과정도 아름답다

붉은 생명의 끈을 간직하고서...

여 산우님들에게 선택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소소리 가을 바람에 몸을 일으킨다

 

초보산꾼

 

 

 

구장군 폭포을 배경으로 거북바위 전설을 담아 본다

 

 

마한시대 아홉장군의 전설이 남아 있는 구장군 폭포의 세줄기 물줄기를 모두 담아 본다 - 산수정에서 (여기도 천우폭포이다)

 

 

현수교가 보이기 시작하고

 

현수교에서 신선봉직전에 있는 '삼선대 정자 전망대'로 오르다 중간에서 바라본 현수교와 가운데 용머리 폭포의 웅덩이

 

비가오면 용의 눈물이 되어 흐른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 용머리 폭포를 당겨보면

 

우리가 걷게 될 강천사 계곡의 만추의 추경을 담아 본다

 

다시 내려와 현수교를 건넌다

현수교(구름다리)  剛泉山 懸垂橋

강천산 현수교는 강천사에서 서남쪽으로 400m 거리에 위치하며, 해발 250m의 능선을 양쪽으로 연결하고 있다.

강천산 계곡을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연결하고 있으며, 북동쪽에 위치하는 강천산[왕자봉, 584m]과 남서쪽에 위치하는 신선봉[425m] 능선을 연결하고 있다

강천산 현수교는 강천산 계곡을 연결하고 있으며, 동쪽에 강천사가 위치하고 상류인 서쪽에는 용머리 폭포가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강천산과 신선봉 전망대를 연결하는 다리로,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용머리 폭포의 모습이 장관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천산 현수교 [剛泉山 懸垂橋]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용머리폭포와 강천산 정상 왕자봉 갈림길인 현수교 갈림길 이정표

강천산(剛泉山548m 왕자봉) 순창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성의 하나로 알려진 금성 산성이 있어 많은 사람이 찾고 있는 548m의 높이에 불과한 안산(安山)이지만

국내 최초 군립공원 1호로 지정될 만큼 섬진강 상류인 적성강의 맑은 물이 흘러 산 좇고 물 맑은 산천을 지니고 있어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강천산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추장보다 더 붉다는 애기단풍이 붉은 빛을 자랑하는 산이다

거기에 산경표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여암 신경준 선생 집안의 원찰인 강천사를 품고 있다

 

 

전라북도 기념물인 모과나무 보호수를 지나 삼인대 - 호남정맥이 지나는 광덕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삼인대(三印臺) (삼인봉)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                  자료 : 네이버 지식 참조

조선 연산군 12년(1506) 훈구세력인 성희안과 박원종이 임사홍, 신수근 등과 결합하여 포악한 정치를 거듭하던 연산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공신들은 중종의 부인인 신씨를 역적의 딸이라 하여 왕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장경왕후 윤씨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군수인 김정과 담양부사 박상, 문안현감 유옥 등이 결의하여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난 단경왕후 신씨를 다시 왕비로 모시자는 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관직에서 쫓겨날 것과 죽음을 각오하고 관직을 표시하는 도장(직인)을 소나무가지에 걸었다. 그 후 이곳에 비각을 세워 삼인대라 하였다.

유래는 다르지만 광명 로얄산악회에서 오대산 선재길에서 만난 오대산의 세종과 관련된 '관대걸이'가 생각난다

 

 

강천사계곡을 계속 따르다 선운사의 말사인 천년고찰 강천사를 만나고 -  여암 신경준 선생 집안의 원찰로 도선국사가 세웠다 한다

 

고려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한 도선이 세웠고 순창의 대표적인 사찰인데도...너무 소박하다

 

작지만 강렬한 인상으로 남을 것 같은 메타세쿼이아 숲길도 지나고

 

 

만추의 단풍사이로 천우폭포와 솔솔바람 대장님 - 슬기롭게 어려운 맘의 애환 빨리 극복하시리라 믿습니다.

순창 강천사에서 만난 만추라는 계절이 많은 얘기를 해주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철은 오고 가는 것...

 

 

 

고추장의 고장답게 메주 모양의 송음교

 

입구에 큰 돌 세 개가 탑을 쌓아 놓은 것 같아 탑상골이라고도 불리는 금강계곡 갈림길

 

고추모양의 금강교 - 깃대봉과 천자봉으로 오르는 갈림길이기도 하다

 

항아리 모양의 도선교와 도선교에서 본 병풍폭포

 

 

매표소와 주차장이 있는 강천사 계곡이 단풍으로 불타고 있다

 

 

강천산의 산행 종료 후

 

오늘의 뒤풀이 산정가든으로 장소로 이동

 

음식정 앞으로 순창의 진산인 아미산이 이제는 어둠을 품고 있다

 

이렇게 와세다 회장님의 건배사로 하루의 여정을 정리 한다

 

 

겨울로 가는 길목 만추로 들어가는 길목을 붙잡고 떠난 광명 로얄산악회 정기산행 강천산 산행도

석축으로 이루어진 산성길과 강천사계곡으로 내림길이 비가 내려 결코 쉽지 않은 길상태에서도

안전사고 없이 마칠 수 있음에 감사를 하며 와세다 회장님의 건배로 하루의 피로를 풀어 본다

순창 강청산 하면 누구나 만추까지 단풍물결을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때문에

조금은 늦은 듯 하지만 그래도 가을 산행으로 희망을 주기에 늦가을 산행으로 많이 찾는 곳이다

거기에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이 있고 민초들의 혼이 서려있는 금성산성이 있어

강천사 계곡으로 이어지는 자연이 펼치는 비경과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 함께 하는 흔치 않은 산행지이기도 하다

 

담양땅 대나무 밭의 환영을 받으며 시작된 순창하면 떠오르는 고추장보다 더 붉다는 강천산 단풍산행

향초의 향대신 구름이 대신한 이천골의 역사현장을 담아보고

유일하게 문이 두개인 남문의 보국문을 시작으로 함꼐 걸어 보았던 금성산성

오리무중속의 성곽만을 보고 걸었지만 한치 앞을 볼 수 없었던 역사도 그렇게 살아 온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 강천사 계곡으로 내려 오면서 날씨도 풀리고 조망도 어느 정도 허락되면서

비록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만 폭포가 되는 천우 폭포일지언정

구장군 폭포를 시작으로 명경지수 계곡따라 단풍이 펼치는 채색화 풍경속에

메타세쿼이아를 시작으로 이어져온 힐링 숲길이 마지막을 함께 해주어

늦어질까봐 강천산 왕자봉에도 들리지 못했는데도 늦어진 것은

여산우님들의 단풍사랑으로 마지막 잎새를 담아내려는 맘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좀 늦어지면 어떠리 모두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마치면 되는 것을...

거기에 계곡을 건너는 다리 하나에도 허투로 하지 않은 도립공원의 노력이 돋보인다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찾아 순창의 안정사라는 절에 찾아 가는 도중에 한 농가에 들러

점심으로 먹은 고추장이 너무 맛있어 궁중으로 진상케 한데서 유래를 찾는

순창하면 떠오르는 고추장의 모든 것을 형상화해서

건너는 다리에서 보는 다리로 만들어 놓았다

 

날씨만 좋았다면 금성산성의 규모에 놀라고 자연지형을 이용한 성곽이 펼치는 조화에 또 한번 놀라고

놀랄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아 꼭 다시 한번 더 오고싶은 명산이지만

전국이 가뭄 떄문에 내년까지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는 비가 반가우면서도

앞길만을 허락하며 우리에게는 조금은 인색한 자연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하지만 강천사계곡에서 맘꺽 즐긴 앙증맞은 아기 손바닥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애기단풍이 들려주는 얘기

 

제 삶의 전부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을 전부 버리는 순간 나무는 절정에 선다는 것을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불탄다'고 했던

도종환님의 '단풍드는날'의 글속에 남겨진 의미와 함께 다시 살아나온 느낌이다

강풍에 폭우가 쏟아졌다면 아마 우린 가지도 못했을 강천산

내린 비도 그쳐주어 앞길만은 보고 걸을 수 있어 마냥 행복했던 하루였다는

이렇게 산행기를 쓸 수 있을만큼 크게 배려해준 자연에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하는 이유이다

혹시 오늘 그래도 100대 명산인 강천산 산행에 대한 아쉬움이 있는 산우님이 계시다면

조금은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맘입니다

 

오늘도 전체를 이끌어 주신 와세다 회장님과 고메 대장님

그리고 일일총무로 애쓰신 푸름님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도 끊이지 않았던 먹거리를 제공해 주신 산우님들

고맙습니다

 

비록 剛泉이 아니라 降天의 만추산행을 꿈꾸며 왔지만

가을 하늘 없이도 행복한 만추를 지낼 수 있슴을 보여주신 광명 로얄산악회 산우님들

 

모두 수고했습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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