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서울답사기  :   홍제천.. 비봉고개넘어 진관사로 :  

                          

 

언제 : 임진년(12년) 미틈달 스물닷세 해날

 

누구랑 : 우리부부

 

어딜 :   홍제천 - 세검정 - 구기터널 - 향로봉 - 진관사 - 연신내역

 

 

가을에서 겨울로 치닫는 달 미틈달, 11월 

한돌님의 왕방지맥을 같이 하고자 했으나 갑자기 연기되는 바람에 평소 꿈꾸던 강이야기를 시작하고자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가까운 홍제천부터 같이 하기로 하고 집사람과 함께 일찍 집을 나섰다.

 

 

 

홍제역에서 시작한 오늘의 등로

 

 

 

 

일요일 비가 온다는 예보가 오후 늦게 시작된다고 바뀌는 바람에

가벼운 마음으로 홍제역 1번 출구로 나와

 

조금 진행하다

전철역인데도 노점에 리어커에, 계속 이어지고 있어 읍내 시장터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여기가 인왕시장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우측으로 진입하면 꽤 크게 보이는 인왕시장이 나온다

 

시장을 지나면 홍제천이 나오고, 홍제교에서

弘濟川 은 종로구 구기동, 평창동에서 발원하여 홍제동, 남가좌동, 성산동을 거쳐 한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이다.

조선시대 이 하천 연안에 중국의 사신이나 관리가 묵어 가던 홍제원이 있었던 까닭으로 홍제원천이라고도 하며

정겨운 우리말 이름 '모래내'는 세검정의 맑은 냇물이 흐르면서 모래가 많아지고 물이 모래 밑으로 스며 내려간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천변으로 내려가 본격적인 천변길을 따르게 된다

인조 때 정묘, 병자호란 공녀로 청나라에 잡혀갔던 여자들이 돌아왔으나 어디에서도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다

피해자인 그녀들은 오히려 '환향녀'라고 손가락질을 받았을 뿐이다

인조는 궁여지책으로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된다는 명을 내렸다고 하니.....

 

 

내부순환로와 함께하는 홍제천

공녀들이 나라의 명을 받아 홍제천에서 몸을 씻지만, 결국은 도성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말도 안되는 보여주기 위한 정책은 결국 여자들을 두번 죽이는 꼴이 되어

이곳 주변에 눌러 앉아 살게 된 경우들이 많았다고 한다. 걸으면서도 마음이 무겁다. 옆지기가 옆에 함께하고 있는데....

 

 

홍전교도 지나고

 

시민 편의 시설이 계속 이어지는데

 

천둥오리도 한가롭기 그지 없다

 

포방교를 지나는데 저녘에 눈이 온 듯 눈길의 흔적이 남아 있고

 

포방교 직전 돌 다리를 건너야 홍제천을 계속 이어갈 수 가 있다

 

돌다리를 건너지 않고 다리를 건너 이름도 알 듯 모를 듯한 포방터 재례시장도 잠시 들러보고

홍제천의 상류지역은 옛부터 수도 방위의 중요한 지역으로 삼국시대부터 군량을 싾아두기 위해 만든 탕춘대성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포방터를 사격장 정도로 해석하면?

 

 

다시 내려와 계속 이어가면

 

옥천2교도 만나고

 

계속 진행할 수 없어 철계단을 오르면

 

공용주차장을 따르면

내부순환로를 차로 달릴 때는 몰랐는데 아래에서 본 모습은,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 이웃들이 살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흉물처럼 보인다. 주민들의 삶을 짓 누르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된다.

 

 

다시 홍제천을 따르면

 

옥천암이 보이는 곳에서 처음으로 인증 사진을 남기고

 

보도각 白佛이 우선 눈에 들어 온다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왜군과 힘든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왜군이 서대문을 넘어 한양 도성으로 쳐들어갈 기세여서 권율장군은 더 이상 밀리지 않기 위해 옥천암을 요새로 삼아 배수진을 치고

홍제천을 사이에 두고 야간 매복을 하였다.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물 줄기 옆 으로 올라

 

보도각 백불을 볼려 했으나 기도중이라 접근할 수 가 없다

깊은 밤 드디어 왜군이 밀려왔고 그때 왜군들 앞에 하얀 옷을 입은 장수(옥천암의 백불)가 나타났다.

조선의 장수로 생각한 왜군은 일제히 총을 쏘았는데 총알을 다 쓰도록 총을 쏘았는데도 장수는 쓰러질 줄을 몰랐다.

다음날 아침 총알이 다 떨어진 왜군들은 당황하여 허겁지겁 퇴각하기 시작했고 이때 권율장군의 군대가 일제히 반격하여 왜군들을 모두 전멸시켰다.

 

 

일주문을 지나면

 

옥천암 경내로 들어 간다

 

수덕전

 

옥천암 경내

신라시대 장의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수덕전, 설법전, 종각과 요사채만이 남아 있는 작은 절집이다

 

 

다시 옥천암 보도교 바로 아래로 진입하면

 

계속되는 홍제천

 

내부순환로 인왕산 줄기인 홍제터널입구가 보이고

 

드디어 홍지문이 보이고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을 직접 확인하고

 

 

다시 되돌아 와야 한다

 

다시 되 돌아 와 다리를 거너면 바로 홍지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인왕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탕춘대성이 보이고

탕춘대蕩春臺은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다. 서울의 북서쪽 방어를 위하여 세운 성곽으로 서성(西城)이라고도 한다.

인왕산 정상의 서울 성곽에서부터 북쪽의 능선을 따라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된 산성으로 길이가 약 5㎞에 이른다.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쪽 약 100여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다.

 

 

북한상 방향의 탕춘대성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군사훈련과 수도방위를 위하여 북한산성을 축성하였으나 북한산성이 높아서 군량 운반이 어렵자

세검정 부근에 있던 탕춘대 대에 군사를 배치하고 군량을 저장하기 위하여 이 성을 축성하기로 했다.

원래 홍지문, 세검정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한산주(漢山州)로서 군사상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홍지문

홍지문은 한성(漢城)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면서부터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방치되어 있던 것을 서울특별시에서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하였다.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고 한다.

 

 

홍지문을 지나서

 

세검정 삼거리가 보이고

 

 

홍제천에서 오르면 세검정삼거리

북악터널 방향 건널을 건너 북악터널 방향으로 조금 진행하면

 

세검정이 보인다

경치가 아름답기 때문에 인조반정이 있기 오래전부터 풍류를 즐기기 위해 세검정을 세웠을 텐데...

옛 모습은 어디가고, 도로에 치이고, 천변가꾸기에 치이고, 이제는 동네 어르신들의 건강지킴터 역활로 바뀌었다.

북한산과 인왕산과 홍제천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는 없는 걸까? 정선이 그릴 수 밖에 없게 만들 그런 풍경...

 

 

원래의 정자는 1941년 화재로 타 버렸으나, 1977년 옛 모습대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丁자형의 3칸 팔작지붕 건물이다.

세검정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궁궐지 宮闕志≫에 의하면, 인조반정 때 이귀(李貴)·김류(金瑬) 등의 반정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씻었던 자리라고 해서 세검정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동국여지비고 東國輿地備攷≫에는 “세검정은 열조(列朝)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반드시 이곳에서 세초(洗草 : 史草를 물에 씻어 흐려 버림)하였고, 장마가 지면 해마다 도성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물구경을 하였다.”고 적혀 있다        - 네이버 지식 -

 

 

세검정 뒷 모습

 

정선의 세검정도 안내판

1941년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으나, 겸재 정선이 그린 <세검정도>를 바탕으로 1977년에 복원하였단다. 

 

 

안내판

 

 

 

아담하게 가꾸어진 오솔길을 따라

 

조금 홍제천을 따르면 더 이상 진행이 어려워 도로를 따르는데 창의문의 다른 이름인 자하문이 생각나고

 

신영동 삼거리 직전 안내도

 

잠시 홍제천을 따르다

 

신영동 삼거리 육교를 건너

 

장의사지 당간지주가 있는 세검동 초등학교를 반대편에 바라보며

다음에 이곳을 들려 보고, 자하수퍼를 끼고 돌아 백사실계곡으로 해서 창의문으로 하는 코스를 생각해 본다.

오늘은 옆지기와 북한산 산행이 더 중요하니까...

 

 

 

평창동 주민센터 방향으로 계속 이어간다

 

계속 이어지는 음식점 거리를  지나면 구기터널이 보인다

 

계속 구기터널 방향인 북학산 둘레길 방향으로 건너

 

진행하면

 

구기터널 직전 둘레길 이정표가 잘 되어 있는 방향으로 진행하면

 

이북 5도청 입구 갈림길도 만나고

 

옛 성길 구간 문을 지나면서 둘레길이 시작된다

 

 

오르다 보면 탕춘대성 능선을 만나게 된다. -  북악산 방향

 

탕춘대성 암문

 

 

 

올라온 반대 방향이 장미공원, 성을 따라 내려가면 상명대학이 나온다

 

홍제천의 홍지문에서 봤던 그 탕춘대성 성곽과 옆길이, 나란히 같이 향로봉까지 이어진다

 

 

비봉과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시루봉

 

향로봉도 보이고

 

지나면

 

계속 소나무와 함께하는 산행... 거기에 암벽과 계속 이어지는데...

 

포금정 사지 갈림길을 지나고

 

인왕산 북악산 그사이로 남산까지 보이고... 안산까지...

 

이제 향로봉이 더욱 가까워지는데

 

잠시 쉬는 동안에 포착된 까마귀의 먹이를 먹는 모습

 

향로봉 입구에서 비봉 방향으로

 

암벽구간과

 

계단구간을 통과하면

 

비봉쪽 향로봉 삼거리를 지나면

 

비봉 직전 비봉사거리에서 진관공원지킴터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하고

 

진관사 계곡

 

비봉으로 바로 오르는 능선 갈림길을 지나면

 

암벽능선을 지나고

 

내려갈 수 없는 사진으로 보기에 안타까운 멋진 암벽 계곡이 보인다

 

진관사 이다

진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로 동쪽의 불암사, 서쪽의 진관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며 또한 수륙도량으로 유명하다

수륙재(水陸齋)는 수륙무차평등재(水陸無遮平等齋)를 줄인 말로, 수륙회(水陸會), 혹은 무차대회(無遮大會)라고도 불린다.

수륙재는 물이나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 등의 혼령들에게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평등하게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의식 중의 하나이다.

 

 

칠성각

칠성신은 옛날부터 우리나라 민간에서 재물과 재능을 주고 수명을 늘려주며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주는 신으로 믿어왔다.

이 칠성신이 불교에 흡수되면서 처음에는 사찰의 수호신으로 자리 잡았다가 점차 본래의 기능을 되찾아 별도의 전각인 칠성각에 모셔지게 되었다.

 

 

2009년 5월에 서울시 은평구 소재 진관사(津寬寺) 칠성각(七星閣) 해체 보수과정에서 내부 불단과 벽체사이에 있던 태극기와 독립신문류 등 6종 21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항일 독립운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보기 힘든 저녘 무렵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 - 한적한 산사의 퐁경이 아름답다

 

해탈문

 

사모바위로 오르는 갈림길도 보인다

 

진관공원지킴터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숙용심씨 묘표도 만난다

 

오르는 길

 

묘표

빼어난 조각미로 인해 왜병들에 의해 임진왜란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며

우수한 조각 솜씨 등 예술성과 역사적인 유물로써의 가치가 있어 한번 쯤 들러 볼만하다.

 

 

일본에 있던 것을 후손들의 노력으로 2001년에 국내로 반환해온 淑容沈氏之墓라 쓰여있는 석비다.

성종과의 사이에서 利城君과 寧山君, 경순옹주(慶順翁主)와 숙혜옹주(淑惠翁主)를 낳은 후궁 숙용(淑容) 심씨(沈氏)의 묘에 세워져 있던 묘표로 추정된다.

 

 

능에서 임금이 제사(祭祀)를 지내고 축문(祝文)을 태우던 곳 "망료위"

 

축문을 불사르는 곳 "료소"

 

제향(祭享) 때, 제관(祭官)이 손을 씻는 곳 "관세위"

처음보는 제단의 모습이다

역시 왕손답게 격식을 다 갖춘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운 기회가 된 것 같다

이 곳은 사유지로 되어있어, 아직 공사중에 있었다.

 

 

도로로 나와 건너 연신내 밯향 버스를 타고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 한다

 

사실 비가 오지 않으면 한탄강 한여울길을 따라 가보려 했는데

오후에 비가 온다 하고...

 

북한산  첫 산행기에서 알았던 홍제천의 아픈 삶의 무게도 느껴 볼 겸해서

초보산꾼 강이야기의 첫 글로는 부담이 가지 않을 것 같아 홍제천을 찾았는데

홍제천도 정형화된 도시 하천 정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물론 나름대로 노력도 보였다

기증 받은 자연석을 활용한 작품들이 나름대로 홍제천을 살려 주기도 했지만....

 

앞으로 가고자 하는 여주의 여강도 4대강 사업의 깊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고 하니....

모든 강에 생채기를 내고도 그 것을 치적이라 한다면...

참으로 안타깝지만 그래도 우리가 가야할 길이니...

 

앞으로 펼쳐질 강과 산과 여울이 어우러지는 풍경이 더욱 그리워진다

 

감사합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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