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정맥 20 :  마지막 구간 -  개금고개에서 몰운대까지 

 

 

 

언제 : 갑오년(14년) 열매달 스무날 흙날 ~  스물하루 해날(무박)

 

누구랑 : 한돌대장님과 낙동정맥 식구들

 

어딜 : 개금고개 ~ 엄광산 ~ 구덕산 ~ 대티고개 ~ 아미산 ~ 응봉봉수대 ~ 몰운대 

                 

               산행거리 18.9km  낙동정맥 18.9km   한돌대장님 공지내용

 

 

이제 우리 곁에 바싹 붙어 수확의 기쁨도 누렸겄다 이제는 즐길 일 만 남았다는 듯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대하는 자연의 인사는 사뭇 적극적인 표현으로 바뀌었다

벌써 아침공기부터가 쌀쌀함을 넘어 반팔이 무색할 정도로 빨리 가을을 준비하라 재촉하고

잎새마다 남겨진 상처들의 골도 깊어감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에서 가을의 힘도 느껴보고

우연히 바라본 하늘은 그간 우중충했던 시절이 언제였나는 듯 가을하늘로 변해 있음에

가을 끝자락을 붙잡고 시작했던 낙동정맥길, 다시 찾아 온 오늘 가을 초입을 붙잡고

마지막 구간이라는 상징성까지 더하며 축하사절단까지 오신다고 하고 언제나 그렇듯 사당으로 달려 간다   

 

         주자료 : 사상구 홈피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2020에 있습니다

 

 

 

낙동정맥 마지막 구간 등로

 

 

 

 

낙동정맥의 마지막 구간의 출발점인 개금역에 도착하고

개금고개(13:55)-

개금이라는 명칭은 마을 모습이 거문고와 같이 길게 늘어져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붙여졌다.

또 임진왜란 때 피난민들이 이곳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정착하기로 결심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가던 사람들이 산이 우거지고 맑은 냇물이 흐르는 이곳을 지나다가 은은한 가야금 소리를 들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외로운 마음을 달래며 거문고를 한 곡조 타고나서 이곳에 정착했다고 해서 개금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마지막 여정을 위한 부산에서의 단체사진을 남긴다 - 한돌대장님 작품

부산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402년(태종 2년) 1월 28일 태종실록에 富山이라는 명칭이 보이며,

그후 1470년(성종 1년) 12월 15일자의 성종실록에 釜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

동국여지승람(1481년)이 완성된 15세기 말엽부터는 부산이라는 지명이 일반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성약국 골목으로 진입하여 고원아파트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주차장이 나오면 좌측으로 산행은 시작된다

 

정자를 지나 돌탑봉에 올라 함박웃음님과 후반에 함께 해주신 청유, 단애님 고생했습니다

 

부산 야경 넘 멋있습니다

 

헬기장이 있는 엄광산 정상석의 낙동의 모든 아름다움을 잘 담아주신 강산애 사진 작가님, 남겨준 추억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엄광산(嚴光山, 508m)(15:33)-  부산광 서구 동대신동과 부산진구 개금동 사이

대마도를 조망하는 산 ‘엄광산(嚴光山)’

1740년 편찬된 東萊府誌에 동래부 남쪽 30리에 위치한 지명유래에 대한 것은 없고 嚴光山으로 분명히 표기돼 있으나

1995년 이전까지는 일제강점기부터 ‘산이 높아 멀리까지 볼 수 있다’는 뜻의 고원견산(高遠見山)으로 불렸다....

 

 

이제 가야할 구덕산과 부산 사상구 방면이 조망된다

엄궁동

엄광산의 서쪽 강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엄궁동의 원 지명은 산 이름따라 엄광리였다.

엄광산은 <엄비치산>으로서 해가 오랫동안 비치는 산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며 그 아래 마을이 엄광리가 된 것이다.

엄광이란 지명에는 옛날 이곳이 신을 섬기고 받들던 성스러운 마을이라는 뜻이 담겨 있있으며,

1914년 일제시대 산이 활처럼 생겼다고 엄궁리로 개칭하였다는 말이 있다   사상구 홈피

 

 

구덕꽃마을 장미농원 입구에 도착

 

낙동정맥 산행 후 처음으로 근처에 있는  함매집에서 시락국으로 식후경을 한다. 막걸리 한사발과 함께

 

다시 공원 앞으로 나와 길을 따라 내려오면 내원정사 사거리인 구덕령 - 좌측 대각선으로 구덕산 들머리가 보인다

구덕령

학장동의 지명은 옛 성터였던 <학성>과 옛 장터였던 <장문평>에서 유래한다.

<학성>이란 지명은 사상팔경의 <평사낙안>처럼 이곳 강변의 모래펄에 학처럼 귀한 새들이 찾아오는 풍경을 보고 붙여 졌을 것으로 보이며

<장문평>이란 지명은 옛날 <장시, 장터>란 뜻으로 이 마을에서는 <장문안> 으로 부르고 있다.

이곳에는 구덕고개로 사람의 내왕이 있었고 고갯배도 들어왔을 것이며 목축을 하던 동네라서 농 ·수산물과 가축의 유통을 위한 조석시로서 장터가 열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 구덕 골짜기에는 옛날 숲이 많이 우거져 여우가 많이 나와서 야시골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구덕 냇거랑>이다.

 

 

구덕산 들머리에서 한장의 추억

 

임도와 친구하며 올라오면 부산 항공무선표지소"가 자리하고 있는 관계로 일반인 출입금지구역인 봉우리에 오르고

 

가을,  억새가 많지 않지만  한폭의 가을여심을 담기엔 충분하다.  다라실님 진정한 산꾼으로 거듭나심에 축하드립니다

 

승학산을 보면서 우회하기 위해 하산을 시작한다

승학산(乘鶴山, 496m)

승학산은 어쩌면 낙동강를 가장 폭넓게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승학산은 부산의 가장 서쪽에 있는 산이다. 해발 496m. 고려 말 무학대사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산세를 살폈는데,

이 곳에 오니 산세가 준엄하고 기세가 높아 마치 학이 나는 승학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도로가 나오면 승학산 갈림길 - 도로따라 올라가야 한다

 

기상 관측소 갈림길에서 구덕산으로 계속 올라간다

 

 

구덕산에서의 드래곤, 상큼님, 산속에 들면 배려란 이런 것이다를 몸소 실천해 주어 넘 많을 것을 배웠습니다. 함께하는 동안 행복했습니다

구덕산(九德山, 565m)

서구를 감싸고 있는 산중의 산이다. 서구의 서대신동과 북구 학장동, 사하구 당리동의 경계에 솟아 있다. 남동쪽 산록에서는 보수천이 발원한다.

구덕산의 산명은 근래에 붙여진 이름으로 ‘九’나 ‘德’이 불교와 관계 깊은 글자이므로 불교계통에서 나온 이름인 듯하며,

여기에서 시작된 하천에도 구덕천, 보수천 등의 불교적인 이름이 붙은 듯 하다. 또한 구덕산에는 구덕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니 이를 미루어 볼 만하다. 

19세기말 경에 사병산이라고 하였음을 일본인들이 쓴 조선부호여록(朝鮮婦好余錄)의 기록으로 알 수 있으니 구덕산이라는 산명은 그 훨씬 뒤에 나온 것이다

사병산이란 병풍처럼 둘러진 산이라는 데서 나온 이름인 듯하다

 

 

 

후미팀 단체사진 - 강철대장님 나름대로 임도대장이라는 별칭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다시 관측소 방향으로 돌아와 차단기를 지나 관측소 바로 앞에서 좌틀한다. 시약산정상에 있는 관측소

시약산

시약정은 거대한 바위 벼랑 위에 지어진 정자로 실질적인 시약산의 정상을 대신하고 있는 만큼 뛰어난 조망을 보여준다

일명 승학산(乘鶴山)이라고 하는 시약산은 구덕산 남서쪽에 연이어 있는 산으로 사하구(괴정동)와 경계를 하고 있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낙동강하구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이 산 밑으로는 우리 구와 사하구를 연결하는 대티터널이 뚫려있고, 사하구로 흐르는 괴정천은 이 시약산에서 발원하고 있다.

시약산의 산명의 뜻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蒔」자가 ‘모종낼 시’로 약초를 심거나 채취한 곳으로 추측된다.

 

 

 

산불감시초소를 지나면 대티고개와 까치고개가 보이기 시작한다

 

대티고개 도로가 나오면 횡단보도를 건너 바로 골목으로 진입

대티大峙고개  - 부산진~하단장 연결    - 낙동강 재첩 이동로     - 장꾼들 모인 뒤 넘어

대티고개는 대티터널이 생기기 전까지는 옛 부산과 하단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고  예전에 소나무가 울창하여 솔티(松峙),

또는 고갯길이 험해 산짐승과 도적의 출몰이 심해 부산장으로 하단재첩을 팔러 가는 아낙네들이

괴정3거리에 모여 다 함께 이 고개를 넘었다 하여 재첩고개라는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이번 구간은 부산시내를 통과 하는 관계로 여기서도 맥주한잔으로 목마름을 해결하고 - 바로 골목으로 진입

대티고개’란 이름은 당시 고개 위에 있었던 대티마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현재의 대신동을 옛날 대치벌이라 부른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각각 있다.

한자로 나타내면 大峙(대치)이나 峙의 원음이 「디」라 해도 「지」와 「치」로 구개음화 된지 오래 전이다.

구개음화에 쉽게 습관 드는 영남지방의 지역특성에 비추어볼 때 구개음화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특이한 부분이라 하겠다.

큰 고개라는 말에서 「한」과 峙의 원음인 「디」가 「티」로 소리나서 「한티」였는데 「한」은 다시 「大」로 쓰게 되면서

 ‘대티고개’가 되었다는 것을 국어학자 박지홍 교수는 실제답사활동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고 한다. 

 

 

다시 도로가 나오면 까치고개

까치고개    중구ㆍ서구와 사하구를 연결해 주는 주요 통행로

외로운 할아버지와 까치의 전설같은 얘기도 전해지고, 일제시대 때 화장장이 생기면서 까치들이 들끊었다고 해서 생겼다고도 하고...

그 당시에는 지금의 대티고개가 없었을 때여서,  까치고개는 일제 강점기 당시 구덕령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이동로의 요지였다..

 

 

공영주차장을 지나고 무덤군을 지나 우정텁에서의 주유천하님 - 이제 대간까지 함께 한다니 힘이 더 납니다. 낙동 졸업 축하합니다  

부민동

부민동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로는 경상남도청의 이전 과 6.25 혼란 당시의 임시 중앙청이 이 곳에 있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부산이 큰 시가지로 발전함에 따라 1924년 12월 8일 총독부령 제76호로써 1913년의 총독부령 제111호를 개정하여 도청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1950년 6.25 동란이 일어나자 정부는 대전과 대구를 거쳐 8월 18일 부산에 도착하여 경남도청에 임시 중앙청을 설치하였다.

또, 경남도지사 관사는 임시수도 시절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다.

 환도 후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다시 도지사 관사로 사용되다가 1984년 6월 25일 임시수도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
이후 임시수도기념관은 2002년 5월 9일 부산시 기념물 제53호로 지정 운영 중이다.

그리고, 악명 높은 1952년의 5.26 정치파동 일어났던 곳 역시 부민동이다. 이 때 사법기관은 부산지방법원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정탑을 지나 바로 우틀해야 하지만 바로 앞에  삼각점이 있고 246.9봉 시그널이 붙어 있는 정상

 

우틀하여 내려오면 체육공원이 나오고 우틀하여 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차단기가 나오면 우정탑에서 내려오는 마루금과 만나게 되고 좌틀

 

봉을 넘어 벽산아파트를 보면서 내려오면 아파트 쪽문이 나오는데 아파트가 가로막고 있어 빙 돌아 가야한다 - 우틀

 

삼경슈퍼에서 좌틀 후 골목길을 빠저 나오면 도로가 나오면서 멀리 육교가 보인다

 

횡단보도를 건너 육교가 있고 주유소가 있는 괴정(감천)고개에 도착

괴정(감천)고개

괴정동(槐亭洞)이란 마을 이름은 회화나무의 정자목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감천동(甘川洞)의 옛 이름은 감내(甘內)로, 감(甘)은 “검”에서 온 것이며, 검은 “신(神)”이란 뜻이다. 천(川)은 “내”를 한자로 적은 것인데,

그 이전에는 “內”로 적혀 감내래리(甘內來里)이며, 지금도 지역의 노인들은 감천이라고 하지 않고, 감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감천이란 말의 뜻은 신읍(新邑)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을 갖는 지방에서는 대체적으로 지석묘(支石墓)가 발견되고 마제석기(磨製石器)를 볼 수 있으며,

소도(蘇塗)와 같은 신성시되는 곳이나 부족사회의 권력자가 살았던 것으로 짐작되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곳 감천동에서는 검내의 마을 이름에 걸맞게 지석묘 6기가 발견되어 청동기시대에 사람들이 살았으며, 부족사회의 어떤 권력자가 이곳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주유소를 끼고 바로 올라가던지 더 진행하든 만나게 되는 해동고 울타리

 

임도를 만나면서 예비군 훈련장이 나오고 잠시 휴식

 

 

임도를 따라 내려가는 우회로를 버리고 예비군 훈련장을 계속 올라가면 철탑이 있는 215봉

 

 

우틀하여 내려오면 체육공원을 만나고 앞에 있는 153봉은 포기하고 임도 따라 부대입구로 이동

 

부대입구를 만나 철망을 따라 좌틀

 

끝부분에서 좌틀해야 한다

 

운동시설이 나오면 자유아파트로 좌틀하여 내려 온다

 

도로가 나오면 우틀하여 대동고를 지나 주유소가 있는 장림고개 - 건너 좌측으로 이어진다

 

장림동(長林洞)   사하경찰서에서 구평동 한보철강으로 넘어가는 고개

신평동과 마주보고 있으며, 안장림(內長林), 바깥장림(外長林), 보덕포(補德浦 : 보득포, 부득포, 버득포) 등의 3개 지역이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숲이 우거지고 지형적으로 길게 늘어선 동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공사현장을 끼고 산속으로 진입하여 올라오면 운동시설이 있고 마루금을 지나 좀 더 진행하면 봉화산(157) 정상 - 삼각점이 있다

 

 

조금 내려오면 149.8봉 시그널이 붙어 있는 지점을 통과하고

 

통나무의자에서 좌틀하여 도로를 건너 봉하나를 넘으면 가구단지 삼거리가 나온다 - 구평가구단지 방향으로 우틀

구평동 (舊平洞)  부산광역시 사하구

구평동(舊平洞)은 구서평(舊西平), 구시평, 구평이라 불렀으며, 조선(朝鮮) 초부터 만호영(萬戶營) 즉 서평포(西平浦)가 설치되어 군사상의 요충지였고,

독지장(禿旨場)이 섰던 교역의 중심지였다.
구평동은 동북으로 감내포(甘內浦 : 大浦灣)와 마주보고 있으며, 북으로는 금티산(金峙山)이 우뚝 솟아 괴정, 신평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두송반도(頭松半島)가 남쪽 바닷가로 돌출하여 다대동과 이웃하고 있어서 해륙(海陸)의 요충지(要衝地)이다

 

 

멀리서도 보이는 산마트를 보면서 진행 - 산마트에서 좌틀

 

김은희 우리옷 연구실에서 좌틀하여 계속 도로따라 내려오면 삼환아파트가 보이면서 도로가 나오면 우틀

 

버스 정류장을 지나면 육교가 나오고 육교를 건너야 한다 - 육교가 있는 고개가 다대고개

다대포 (해수욕장)

부산의 서남쪽에 있는 다대포 해수욕장. 다대포라는 이름은 크고 넓은 포구라는 뜻이다.
이 곳 해수욕장은 특이하게 낙동강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하구 부근에 있다. 따라서 수온이 따뜻하고 수심이 얕다. 가족 단위의 피서지로 적합하다.
낙동강 상류에서 실려 온 양질의 모래밭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나  낙동강 상류에 축조된 댐으로 차츰 갯벌화가 진행되고 있다.

 

 

육교를 지나 오르면 서림사 가림길이 나온다. 띠지가 잘 붙어 있어 잰행에 어려움은 없다

 

응봉봉수대가 있는 아미산

아미산(峨嵋山)(233.7m)( 응봉봉수대

천마산의 연맥에 해당되는 아미산은 아미동 일대에 넓게 자리 잡고 있는 구릉성 산지로 아미동과 사하구(감천동)와 경계를 이룬다.

아미산이란 이름은 본래 이곳의 마을을 '아미골' 이라 부른데서 비롯되나 아미골의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다.

속설에 의하면 아미골은 움막집이란 의미의 옛말인 애막이 바뀐 것으로 이를 한자식 峨眉로 표기한데서 비롯된다.

또, 이 산의 모습이 마치 미인의 아름다운 눈썹과 같다하여 아미산으로 표기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아미산은 부산항 개항 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설치된 공동묘지의 산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아미산은 전부터 잘 알려져 있는 산이기는 하나 문헌에 기록된 바가 없는 작은 산이라서 한자로 어떻게 표기해야 할지 몰라

峨媚山, 峨眉山 혹은 娥眉山, 娥媚山, 蛾眉山 등으로 혼기되어 왔는데, 요즈음은 峨嵋山으로 통일되어 사용되고 있다

 

 

 

응봉봉수대에서의 단체사진 - 한돌대장님 작품

응봉 (鷹峰)  봉수대

고목(古木)이 서 있는 안장림 일대는 대부분 사빈(砂濱)지대로 모래와 자갈이 쌓여 이룩된 땅이다.
땅속에서 패각(貝殼)도 많이 나오며, 신라의 토기편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미산에서 보덕포에 이르는 강안(江岸)의 능선을 응봉(鷹峰)이라고 부르며 봉수대가 있었고, 독수리(鷹)의 서식처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도 독수리가 살고 있으며, 낙동강 하구의 철새들을 먹이로 하고 있다

 

 

초기설치는 미상이지만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전국에 봉수가 다니는 다섯 갈래 길 중에서 두 번째의 직봉 출발지로서 상징성이 매우 큰 유적이다.

낙동강하구 일대와 다대포진 해상으로 출몰하는 적선을 감시하면서 서남쪽에서 오는 횃불을 받아 동쪽 석성봉수와 서쪽 성화예산봉수로 전달했다.

조선시대 때부터 다대포는 적의 출몰이 잦았다.

응봉봉수와 함께 군사정보를 주고받는 진영이 설치돼 압록강변의 만포진과 함께 국방의 요충지를 이뤘던 유명한 곳이었다.

세종은 이곳에 수군만호영을 설치했으며, 성종 때는 높이 4m, 둘레 560m의 다대포진을 축성했다. 충무공 이순신도 선봉장에 섰던 곳이다.
http://www.dailian.co.kr/news/view/388939/?sc=naver

 

 

 

조금 내려오면 롯데캐슬 아파트로 좌틀한다

 

롯데캐슬 아파트가 나오면 홍티고개

홍티고개(14:15)-

홍 티 굴 : 안장림과 다대포 사이의 해안에 자리잡고 있었던 해식동굴

홍티는 을숙도와 다대포 중간짬에 있는 포구다. 그러니까 산에서 난 물과 바다에서 난 물이 만나는 포구다.

산물은 낙동강을 거쳐 홍티에 이르고 바닷물은 다대포를 거쳐 홍티에 이른다.

높은 곳에 있던 물이 낮은 곳에 있던 물과 합치는 포구. 얕은 곳에 있던 물이 깊은 곳에 있던 물과 합치는 포구.

높음과 낮음이 만나서 하나가 되고 얕음과 깊음이 만나서 하나가 되는 포구가 홍티다.

홍티 홍은 무지개 홍(虹).전에 있던 세 마을 생김새가 타원형이라서 무지개꼴이라서 홍티라는 얘기다.

세 마을 중 두 마을은 철거되고 윗동네만 남았다고 한다.
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8/0920/060020080920.1015163955.html

 

 

 

어차피 마루금이 사라진 길, 의미없다 판단하고 택시로 몰운대로 이동 - 낙동완주의 기쁨을 미리 맛보고

 

드디어 몰운대에 도착하고

몰운대(沒雲臺)

다대포에 위치한 몰운대는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제 27호 이다.
낙동강 하구와 바다가 만나는 지형적 특징으로 안개가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안개와 구름 속에 잠겨 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몰운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16세기 까지는 몰운도 라는 섬이었으나 그 뒤에 낙동강에서 내려오는 흙과 모래가 쌓이면서 육지와 연결 되었다.

남단에는 파도의 침식으로 만들어진 해식동이 발달되어 있다.
몰운대에는 다대포 객사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 해전에서 승전을 거둘 때 큰 공을 세우고 순절한 정운공 순의비가 있다

 

 

 

몰운대 전망대 가는 길

 

처음 출발할 때 긴 산줄기만큼이나 지금까지 오지중에 오지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는 낙동줄기에 대한 두러움

선답자들이 무용담이 더해지면서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나름대로 위안을 삼으며 출발했던 길이기에 천리길을 발품을 팔았던 보람을 이제야 찾는 것 같은 기쁨이 있다

기쁨 뒤에 있는 아쉬움까지도 이 곳에서 남해로 모두 흘러 보낼 수 있을 수 있기 떄문이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변해가는 세상살이 만큼이나 변했던 낙동의 모습은

내가 출발하면서 느낀 낙동에 대한 신비감, 경외감은 어느덧 사라지고

이곳에도 역시 우리 따뜻한 이웃들이 살고 있음을 느끼고 또 느끼며 걸었던 낙동길

황석영작가님이 북한에 다녀오신 후 쓰씬 책에서 '어! 북한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하던 말씀이 왜이렇게 생각나던지?

 

 

다시 되돌아 와 종산제 장소인 부대방향으로 내려와

 

우리 어릴적만 해도 북한에는 뿔달린 이상한 귀신들만 살고 있다고 우린 굳게 믿고 있었다

도대체 갈 수도 볼 수도 없는 북한에 대해 박정권이 떠들어대는 반공교육이 주는 학습효과는

북한땅을 우리가 함께 보듬어야 할 상대가 아니라고 믿을 만큼 그것은 단절이 가저온 효과였었다.

그래도 세상이 조금씩 변한만큼 북한에도 똑 같은 우리 동포이고 남북이 서로 오가는 바뀐 세상이 왔듯

이제 낙동도 오지도 그렇다고 단절도 없는 오히려 자연이 주는 혜택을 마음껏 누리는 다른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마지막을 멋있게 장식하고 있는 주유천하님

 

낙동정맥을 처음 시작하며 나름대로 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며 무엇을 보았을까?

차곡차곡 쌓여가는 내가 걸었던 산줄기에 많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지금 살고 있는 우리 이웃들이기에

지나온 낙동길을 반추하며 느끼는 가장 큰 수확은 이제 오지는 없다는 것이다

마음의 오지는 있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드디어 종산제는 시작되고...  한돌대장님 고맙습니다. 대장님의 뚝심에 여기까지 왔네요

 

길은 소통이다

우리가 걸었던 낙동정맥길은 백두산에서 몰운대까지 길게 이어지며 소통을 이루었지만

아래에 살고 있는 우리 이웃들에게 낙동 산줄기는 오희려 커다란 소통을 방해하는 차단막이었음에

소통은 커녕 문화도 생활모습도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고  그래서 또 오지가 생겨났던 것이다

 

 

없는 살림 혼쾌히 맡아 여기까지 온 것 모두 푸르나 총무님의 덕분입니다. 감사했습니다

 

이제는 세상이 변해 모든 길을 터널을 뚫어 마음의 벽까지 없에버리는 소통으로 오지가 없어졌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구름도 넘다 지처 쉬고 간다는 가사는 소통의 한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하물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몸뚱이 하나로 넘고 또 넘어야 했을 고개이고 보면

바람따라 움직이는 구름도 지칠정도인데 무슨놈의 소통?  살기 위해 넘었을 뿐이다

그래서 터널이 주는 역효과도 있지만 소통의 측면에서 보면 빨라질 수록 맘도 빨리 통할 수 있으니...

 

 

 

종산제 후 단체사진 - 언제 또 우리 만날 수 있을까요? 낙동정맥 식구님들 고했했습니다  한돌대장님 작품 - 이태백님 감사합니다

 

나를 따라 와 차곡차곡 맥산행을 계속 이어가시는 님들 고맙습니다 - 한돌대장님 작품

 

종산제는 끝나고 다대횟집에서 마지막 뒷풀이로 낙동의 긴 여정을 마친다

 

니고나오님 낙동정맥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 표정으로...  무사완주 축하합니다

 

이렇게 모든 낙동정맥의 여정을 마친다

 

 

 

낙동정맥을 마치며

 

태백 삼수령에서 백두대간의 척추를 든든히 받처주며 남으로 남으로

1300리(약 513.5km)의 낙동강 물길의 근간을 이루며 부산까지 달려와

이젠 마지막 한구간만 남기고 달려온 낙동정맥

몰운대에서 드디어 함께 손을 맞잡고 낙동강과 낙동정맥 산줄기가 함께 남해로 조용히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흐르는 것은 강물만이 아니라 산줄기도 함께 흘러 왔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산줄기는 이제 바다라는 넓은 품속에 잠시 몸을 숨기지만

남해 먼 또 다른 곳에 다시 솟아 계속 이어가고 있을 것이고

강물은 물만난 고기처럼 고향인 바다로 들어가 잠시 해후를 즐긴 후

다시 윤회의 세상으로 떠나기 위해 하늘로 솟아 다시 비가 되어 강물이 될 것이다

이미 고향으로 여겼던 낙동강물이 될지 낯선 섬진강물이 될지 아님 일본 어딘가에 이름모를 강물이 되어 있을지...

 

우리 선조들이 생각했던 흐름의 미학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일본 식민사관에 의해 우리 산줄기가 "산맥"이라는 이름으로 어릴적부터 수없이 배워 왔었지만

사람의 혈액순환의 흐름에 맞추어 대간 정맥으로 나뉜 흐름을 중시한 산줄기 개념이 얼마나 소중하게 다가 오던지

아마 일본이 만든 산맥을 따라 걷다 보면 강도 건너야 하고 계곡도 건너야 하고

흐름의 미학은 완전 무시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물론 알면서도 그렇게 꼼수를 두었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가 낙동정맥을 시작하며 만났던 매봉(천의봉) 동봉이 얼마나 고마운지

백두산에서 시작된 산줄기 흐름을 이어받은 태백산 매봉산 동봉에서 갈라진 삼파수의 흐름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호남금북정맥에 이어 땅끝지맥으로 계속 이어저 온 산줄기 서사면은 서해(황해)로 흘러들고

그 반대편인 동사면은 또 한줄기인 우리가 함께 했던  낙동정맥을 따라 서사면을 흘러 낙동강을 따라 흘러내린 물이 남해이고

또 한 축인 낙동정맥 동사면을 따라 계속 흘러나갔던 물이 바로 동해로 흘러 들어 갔던 것이다

 

農者(之)天下之大本이라 했던가?

그만큼 우리 민족에게는 물이 필요했고 필요한 만큼 물을 얻을 수 있도록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산줄기를 따라 수많은 싯핏줄 같은 계곡들이 부지런히 삼면 바다로 흘러 보내고

이 물을 받아 감사하며 성실히 살아낸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있었기에 더욱 값지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주어진 환경에서 환경에 맞게 슬기롭게 삶을 이어온 이웃들의 얘기가 오롯이 담겨 있는

강에 기대어 사는 이웃들의 얘기가 곧 우리가 걸었던 산줄기에 있었음에

힘들게 지금까지 달려온 마지막에 보는 낙동강의 흐름이 그래서 더욱 가슴이 벅찬 것이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하며 올린 이 초보산꾼의 낙동정맥 출정가가 그래서 더욱 그립기도 하다

 

오늘도 낙동강의 물을 받아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몰운대 바닷가 - 물의 끝은 바다의 시작

 

 

이제 우리는 더 갈래야 갈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달려온 낙동길의 마지막 몰운대낙동강과의 만남이 주는 기쁨 못지않게 이별의 슬픔도 어쩔 수 없나 봅니다물이 다해야 비로소 바다가 시작된다는 끝의 시작이라는 이치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저 낙동강의 물은 유유히 우리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정하게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있는데...

 

또 바다는 강물을 환영한다는 맘을 담아 저렇게 잔잔한 파도로 낙동강 물을 맞이하기 위해 춤추고 있는데강물이 끝나면서 비로소 시작되는 바다의 시작점에 서서 바다와 함께 시작할 수 없음에그래도 정든 낙동강물에 우리가 힘들게 이어온 거리만큼 아쉬움을 담아 흘러 보내 봅니다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낙동강물과 낙동정맥에 묻어온 인연들에 대한 최선의 방법인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희망의 시작은 언제나 끝에서 다시 시작됨도 이 초보산꾼은 잘 알고 있습니다구름도 반해 떠나지 못해 항상 곁에 지키고 있었다는 몰운대의 멋진  모습에서 품어저 나오는 기운에더 갈 수 없는 물러설 수 없는 곳에서  느끼는 우리의 마지막 결의의 맘까지 합하면결국 우리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첫 발걸음이 지금 이순간부터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정말 함께 고생하며 함께 완주하신 낙동정맥 식구님들이나멀리서 가까이서 언제나 응원해주시고 많은 댓글로 함께 해주신 3450온누리 산악회 산우님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이제 아쉽지만 이별의 시간은 왔습니다이렇게 아쉬운 이별로 기억되게 처음부터 끝까지 뚝심 하나로 밀고 진행해주신 한돌 대장님정말 무리숙여 감사를 드리고 존경의 맘을 전하고 싶습니다어디에 계시더라고 건강하시고 빠른 시일안에 다시 돌아와 멋진 산행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합니다그리고 없는 살림살이를 처음부터 강단있게 슬기롭게 넘기시고 최선을 다해주고마지막엔 선물까지 안겨주신 푸르나 총무님 넘 고생했습니다

 

거기에 이 초보산꾼도 원없이 글 쓸 수 있게 해주신 많은 산우님들에게 깊은 감사의 절을 올립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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