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정맥 14 : 사룡산 구간 -  아하고개에서 땅고개까지   (대체산행 구간)                        

              

            

                                                       

언제 갑오년  시샘달 열닷새 흙날 ~ 열엿새 해날 (무박)

 

누구랑 : 한돌대장님과 낙동정맥 식구들

 

어딜 : 아화고개 - 사룡산갈림길 - 숲재 - 부산성 - 땅고개

 

            산행거리  : 낙동정맥 24.0 km   총거리 24.0 km (한돌 대장님 공지내용 )

                                                    ( 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1519 에 있습니다

 

 

잎샘추위와 꽃샘추위가 번갈아 가며오며 우리 일상까지도 힘들게 하는 시샘달 2월

봄에 잎이 나오기 전에 오는 봄을 시샘하며 찾아오는 잎샘추위가 한달 먼저 기웃거려

이거 겨울 맞아?  산행때마다 느끼게 하더니

이른 봄 꽃이 필 무렵 찾아 온다는 꽃샘추위가  예년과 같은 동장군을 대신하는 바람에

지금 어딜 가나 기침소리가 좀 일찍 찾아와 시샘달을 즐기고 있다

건강은 산에서 지킨다는 신념을 가진 산꾼들이 모여 있는 낙동정맥식구들을

정말 너무 오랫만에 만난다는 사실에 가슴을 진정시키며 사당으로 가볍게 발길을 재촉한다

 

 

 

낙동정맥 14구간 등로

 

 

경주시 서면과  영천시 북안면의 경계를 이루는 아화고개를 기점으로 우리나라 동맥의 중심길이었던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사룡산,구룡산등 많은 룡들을 비슬기맥으로 분가하여 낙동강의 물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모죽지량가의 탄생 배경지였고,  선덕여왕의 혜안으로 알려진 시대적 산물을  품고  있는 오봉산이 바라다 보이는 부산성을 들러보고

김유신의 전설이 남아 있는 단석산, OK그린 시설까지 들를 예정이었으나

산행의 악조건으로 당고개에서 다음을 기약한다 

 

 

 

아화고개에 도착했는데.. 엊그제 동해안 지방에 눈폭탄 맞은 것 맞아? 원인은 낙동정맥에서 가장 낮은 해발 100m밖에 안되는 고개이기 때문이다

 

아화고개(4번국도)  지경재

水利施設이 좋지 않아 農事를 짓지 못 하였으면 夏節期에 草木이 枯死될 정도로 旱害가 甚하여 언덕에 불을 지르면 불이 꺼지지 않고 繼續탔다하여 阿火라 稱하였다 함  - 서면 홈피 -

아화阿火里마을는 예전에 마을 앞에 언덕이 있어 답답하다고 하여 아울(阿鬱)이라 하였고 수리시설이 좋지 않아

하절기에 초목이 고사될 정도로 가뭄이 심하여 언덕에(阿) 불(火)을 지르면 계속 탓다고 하여 아화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화고개에서 영천시 북안면 방향으로 따르다 철길 직전 단체사진 - 한돌대장님 작품

 

마을의 원래 이름이 지화라는 설도 있는데,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지귀(志鬼)'라는 청년이 선덕여왕을 사모하던 끝에 그만 몸이 불덩이가 되어

마을 주변까지 옮겨붙게 되었고, 이 청년이 불이 된 고장이라고 해서 '지화'라고 부르다가 이후 '아화'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하나 흥미로운 건 아화역 뒤로 보이는 산이 여근곡이라는 유명한 골짜기인데,

어쩌면 '불덩이'의 이미지가 여근곡에서 유래되어 지귀의 설화로 전해지게 된 것일 수도 있겠다.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logId=1218774&userId=bhs4801

 

 

특별한 의미보다 경계를 뜻하는 지경재로서의 역사적 의미가 더 있어 보이는 고개이다

 

지경재 (약100여m)

합천을 통해 신라 땅을 넘봤던 백제나 후백제가 대구를 거쳐 접근하기 가장 좋던 길목이다

팔공산 기슭 대구 해안동 일대서 벌어졌을 ‘동수대전’(桐藪大戰·927년)을 통해 고려군을 초토화시켰던 후백제 견훤 군대가 서라벌을 유린하러 왕래했던 통로 또한 이것일 터이다.

한국전쟁 초기이던 1950년 9월에는 북한군도 지경재를 주요 통로로 주목했다

아군의 팔공기맥 최후 저지선을 뚫고 영천으로 침공해 다음 진격 목표를 경주로 택한 뒤의 일이다.

국운을 건 사투가 지경재 인접 임포리 일대서 펼쳐지고 재 남쪽 사룡산 지구가 치열한 전장이 된 연유가 이것이었다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272&yy=2010

 

 

아화역으로 달려가는 중앙선 철길을 건너고

 

과수원이 있는 옆길을 따라 보름달의 여운이 남아 있는 탓인지 철탑이 잘 보여 첫번째 철탑에 오르고

 

해발 100m밖에 안되는 고개인지 산이 거의 과수원밭으로 되어 있다. 첫 봉 정상의 철탑과 태양열 집열판 시설

 

시설이 있는 삼거리 시멘트 포장길에서 좌측으로

 

경부고속도로가 보이기 시작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142달러에 불과했던 1967년 당시 국가 예산의 23.6%인 429억 7,300만원을 쏟아 붓은 대형국책사업이었던 경부고속도로

당시만 해도 자동차가 5만대에 불과한데 다닐 차가 없는데 무슨 놈의 고속도로?

참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당시에는 정말 상상할 수 없었던 길이 2년 5개월만에 완공시켰다는 경부고속도로

어찌됐든 도로는 소통을 열고 소통은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묶어주면서 경제대동맥으로 역할을 너무도 충실히 해낸 고마운 고속도로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서울과 부산만 소통을 이룬 채 너무 많은 세월을 흘러 보낸 것이 아쉽지만…

 

 

굴다리를 건넌다

 

40년 넘게 역사를 간직한 만큼 지금 대동맥으로서의 역할도 많이 줄어 들었고 도로도 노쇠하여 옛 영화는 찾을 수 없지만

우리나이에게는 너무도 많은 추억과 애환을 안겨준 고속도로임에 틀림없다

도로가 우리가 살아가는데 얼마나 많은 필요성을 주는지 알게 해 준 제1번 고속도로를 건너며 생각해 본 단상이다

이왕이면 사통팔달로 만들 일이지… 눈물의 씨앗도 함께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균형발전, 그거 생각보다  쉽다. 소외지역을 향한 소통의 길을 만들면 된다.  

 

 

위험표시판이 있는 곳에서 계속 임도를 따른다

 

잠시 후 나오는 삼거리에서 우측길로 직진해야 한다 - 우측으로 사룡산이 어둠을 잔뜩 먹고서 보이기 시작한다

 

사룡산 안내판이 있는 909번 지방도

 

이제부터 사룡산까지 계속 올라야 한다. 영천시 북안면 孝里 갈림길

 

사룡산 오르는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샘촌마을갈림길 (泉村리) 

이 마을 개척당시 뒷산에 올라 마을 形態를 보니 마을 周圍가 흡사 井戶처럼 地型이 깊고 空谷에 물이 새어나온다 하여 샘촌(泉村)이라 名하여 왔음  서면 홈피

 

 

오랫만에 만난 푸르나 총무님 천상소녀이십니다.  자주 이렇게 얼굴을 보여주시니

 

사룡산 갈림길 - 비슬기맥, 밀양기맥 분기봉 (약 650m,안테나,전봇대) - 이제 영천시와 이별하고 경주시 산내면의 속으로 들어간다

 

909지방도에서 거의 2시간이 걸려 도착한 사룡산

 

비슬기맥은 이곳 사룡산 직전 약 650봉에서 남서방향으로 곁가지를 친 맥으로 사룡산을 지나 영천,청도의 경계를 가르며 구룡산(674m)을 거쳐 경산으로 접어든 후

대구, 청도의 경계를 따라 비슬산으로 뻗어나가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우진나루에서 그 맥을 다하는 약 174km의 산줄기로서 금호강의 남쪽수계를 형성하고 있다.
대구 생활권 중심에서는 금호강 수계를 따라 ‘비슬기맥’이란 개념을 정립하려는데 반해,

부산-경남 사람들은 밀양과 밀양강을 더 중시해 ‘밀양기맥’으로 설정하려는 모양이다.

 

 

무덤이 정상을 지키고 있는데 구룡산 방향으로 보름달의 여운을 가득안고 떠있다

 

밀양강 최상류인 동창천 가의 장륙산(686m)까지 이어달리며 경주와 청도를 갈라붙이는 중요한 지맥이다.

낮은 재조차 높이가 400여m에 달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고, 동창천을 만나 주행을 끝내는 순간까지 대체로 600m대를 지켜 나간다.

시작하는 사룡산이나 끝맺는 장륙산이나 공히 높이가 686m인 것도 이채롭다.

남 : 동창천東倉川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에서 시작되어 청도군 청도읍에서 밀양강에 합류하는 낙동강 수계의 하천이다

북 : 금호강琴湖江 경상북도 포항시 죽장면 상옥리 의 가사령(佳士嶺,500m)과 기북면 성법령(省法嶺, 709m)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강.

 

 

 

사룡산(683m, 영천시 북안면, 청도군 운문면,경주시 산내면의 경계로 3시3면봉

원곡마을에서는 사룡산을 ‘전방산’(戰防山)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다. 후삼국시대 혼란과 전쟁 전설이 깔려있다는 얘기였다.

그런 산이 사룡산이라 불리게 된 연유로 꼽히는 ‘네 마리 용’은 ‘지경재’서 거의 다 올라 정상에 가까워졌을 때 솟아오르는 600m 전후 네 봉우리다.

정맥은 지경재를 출발한 후에도 오랫동안 100m대 높이를 유지하다가 막바지에 급등해 597m봉-640m봉-659m봉-686m봉을 잇따라 올려 세우는 것이다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998&yy=2010

 

 

 

다시 분기봉인 4룡중 3룡(봉)에 되돌아 와 산불감시초소에서 본 도계리 방향

 

생식마을로 내려오면

 

생식마을(시루미기)

이 마을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널찍한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분기봉에서 남쪽으로 낙동정맥이 이어 가는 한편,

지도를 자세히 보변 불과 5분 거리로 붙어 있는 정상봉에서도 비슷한 방향으로 큰 산줄기가 하나 내려 뻗어 그 사이에 골이 형성되는 것이다

1970년 전후 한 신앙인이 들어가 생식마을을 일구기 시작하면서 면모가 달라져, 오늘날 40여 호 100여 명의 마을로 성장했다고 한다

그들은 세속과 달리 약초 캐고 벌 치고 해 자급자족하며 자연과 하나 돼 사는 종교시설의 마을로 보여진다

 

 

 

생식마을 입구인 듯 - 이 곳에서 임도를 따르는 것이 산속으로 오르는 것 보다 빨리 진행할 수 있다.

 

‘시루미기’라는 마을 이름 중 ‘미기’는 재나 잘록이를 의미하는 ‘목’으로 짐작된다. 거기에 발음하기 쉽게 ‘이’를 붙여 ‘목이’라 하다가 ‘미기’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산꼭대기에 펑퍼짐하게 퍼진 마을 자리가 떡시루 모습이어서 시루미기란 이름이 붙었는지 모를 일이다.

김유신 장군이 수련할 때 내리 친 칼에 맞아 그 마을 안 바위가 시루떡 모양으로 잘려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고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998&yy=2010

 

 

같은 사람인데 대단하다 김유신… 칼을 한번 휘두르면 시루도 되고 단석산도 되고.. ㅋㅋ 왜 하필 그바위는 화랑들의 놀이터에 있어 가지고...

 

 

 

숲재에서 식후경

 

숲재

2만5천 지형도와 예전의 5만 지도에는 숙제고개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경주시 산내면과 아화리를 연결하는 2차선 포장도로이다

현지 주민들은 경주 서면 천촌리와 산내면 우라리 등 재 양편을 다 다녀 봐도 틀림없이 ‘숙재’라 했다.

“고지대인 우라리서 낮은 아화 쪽으로 숙진다고 숙재라 했을지 모른다”는 짐작 정도였다. 어쨌든 그 이름은 숙재로 확인됐다.

한자로는 ‘淑嶺’(숙령)이라 쓴다고 했다. 그 재에서 천촌리 쪽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지나는 골 이름도 ‘숙골’이었다. 거기 있는 저수지는 ‘숙곡지’라 했다.

재 이름 혼란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경주시청이 속히 나서서 표지판을 만들어 세워야겠다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998&yy=2010

 

 

 

이보다 더 명당자리는 없을 듯 : 밥먹는데도 명당자리가 좋은 것이여

 

들머리에서 산속 마루금을 버리고 임도를 계속 따르면 건천농장 철문이 보인다

 

마루금은 버리고 조금 편한 임도를 계속 따르다 녹슬어 버린 문도 지나고

 

바로 오봉산으로 내려가는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마루금은 오봉산 반대편으로 치고 올라야 한다

 

오봉산 방향

 

오봉산(五峰山, 685m) 과 여근곡

주사산(朱沙山)으로도 불리우며 여근곡(女根谷) 옥문지(玉門池)로 더 알려진 곳이다.

신라 선덕여왕때 백제군이 이 산을 넘어 여근곡 옥문지에 잠입하자 선덕여왕의 혜안으로 이를 간파하여 옥문지에 숨어든 백제군사를 포위하여

섬멸한 이후로 신라도성의 방위를 위하여 축조한 성이 부산성, 즉 주사산성이고 축성후 주사산성으로 잠입한 백제 첩자에 의해 성문이 열리면서

신라군이 전멸당하는 뼈아픈 신라 백제의 항전이 있었던 곳이다.

자료 :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5625&yy=2010

 

 

 

고랭지채소 밭인 부산성 서문 방향으로 오르다 뒤돌아 본 오봉산

 

여근곡에 얽힌 얘기가 백두대간에서 만난 은티마을에 살이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은티는 女宮穴에 자리하고 있어 洞口에 남근을 상징하는 물체를 세워야 마을이 번창하고 주민들이 아들을 많이 낳을 수 있다고 하여 동구 송림안에 남근석을 세워 놓았다

여궁혈(여근곡)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나오는데, 신라 선덕여왕은 세가지 일을 미리 알아냈는데, 그중 하나가 여근곡에 숨어있는 백제 병사를 찾아낸 일이다.

즉 겨울인데도 영묘사(靈廟寺)( 경북경주 남천(南川) 옆에 있었던 절. 신라 선덕왕이 재위 4년(635)에 창건) 玉門池에서 개구리가 울었다고 한다.

이것을  들은 여왕이 군사를 여근곡에 보내, 그곳에서 경주를 습격하기 위해 백제 병사들이 숨어 있다가 전멸됐다.

개구리가 우는 것은 남자가 성냄을 뜻하는 것이요, 옥문은 여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근곡에 병사가 숨어 있음을 알아내고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선덕여왕은 `남자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로 들어가면 필경 죽는다.(男根入於女根則必死矣)라고 하는 설명을 대신했다.

초보산꾼 백두대간이야기 : http://blog.daum.net/kmhcshh/30

 

 

 

가을 걷이가 끝난 고냉지 채소밭이 이제는 눈을 풀어 雪田을 이루고 있다

 

부산성(富山城)     (오늘 성곽은 확인치 못함)

사적 25호로 지정된 곳으로 옛 신라군과 백제군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고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쌓은 신라 산성으로 주사산성이라고도 한다.

주사산·오봉산·오로봉산·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부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이다.
산성이 있는 곳은 대구에서 경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선덕여왕 때 백제군이 이 산을 넘어 옥문곡(일명 여근곡)까지 침입한 일이 있었다.

그 이후에 경주의 서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외곽산성으로, 조선시대 전기까지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성밖은 4면이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에 적합하다. 성안에는 넓고 평탄한 지형이 많으며, 물이 풍부하여 신라의 중요한 군사기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효소왕 때 화랑 득오가 죽지랑과의 우정을 그리워하며 ‘모죽지랑가’를 지은 곳으로도 유명한 곳으로,

현재는 남문터와 군의 창고터, 군사훈련을 시켰던 연병장터·우물터·못터, 그리고 비밀통로인 암문터 등이 남아 있다

부산성과 관련된 <삼국유사>의 설화엔 신라화랑 죽지랑의 낭도였던 득오가 이 부산성내에 창직으로 있을 때

친형제처럼 따르던 죽지랑을 사모하여 부른 향가노래인 "모죽지랑가(募竹知郞歌)"의 배경지가 되는 곳이 부산성이다.

 

 

나이에 관계없이 이렇게 놀면 童心이다  - 강철님 작품

 

눈이 보기 힘들다는 이 곳 경남 경주땅에도 모처럼 동해안 지방이라는 이유 하나로 설원이 만들어 졌다

유리알 처럼 맑은 은세계를 연상시키는 설원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산수화를 그려 놓았다

순백의 설산이 우리에게 주는 절제의 아름다움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이렇게 얼마든지 동심의 세계로 돌아 갈 수 있음이 우리 낙동식구들의 여심에서 나오고

 

얕은 햇살을 품은 순백의 설산 위로 남겨진 발자국 마다에 남겨진 추억들

언제나 이지만 곧 사라질 운명이라는 사실이 더욱 애잔함을 더해주어 안타깝고

한폭의 雪畵속 화폭에 여심의 마음까지 담아 수목화를 완성해 가지만

봄이면 새싹과 함께 함께 들어날 오늘 눈속에 숨겨 놓은 비밀까지 사라질 것이 안타까울 뿐...

그것이 女心이다

 

 

앞에 청천봉과 멀리 좌측으로 단석산도 보이는 산등성이의 설경

 

 

소나무에 삶의 무게를 짊어지게 하고 있는 눈꽃을 보면서 걸으면서 시 한구절을 생각했다

 

명위식님의 "雪景"중에서

 

나무들은 어깨마다   //    지구의 무게를 느낀다

조금씩 부서져 내리는    //  생활의 살점들

 

생활의 살점들을 어깨마다 지구의 무게만큼이나 짊어지고 있는 나무들을 배경으로 - 강철님 작품

 

 

 

엊그제 강원도에 내린 폭설은 강원도민들의 생사까지 넘나들게 하며 때아닌 이산가족을 만들고

부산성 산등성이에 싾인 雪城의 깊이 만큼이나 우리 마음까지 숨죽이게 했지만

명위식 시인의 雪景의 한 구절이 어쩌면 이렇게 마음에 와 닿는지...

머리위로 떨어지는 생활의 살점들이 우리 어깨에 삶의 무게까지 가볍게 하고 있음을

이제 봄을 기다려도 되겠다는 희망의 소리까지 담아 온 것 같다

 

 

오늘 처음 함께 해주신 반야님      - 강철님 작품 -

 

눈꽃을 벗삼고 설원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추억의 한장을 만들어 낸 낙동정맥 식구들에게

저마다의 가슴속에 순백의 설산이 주는 의미를 마음껏 즐기며

대자연에 동화되어 이제 마음껏 봄을 노래 할 수 있음을, 이렇게 돌와 왔음에 감사드리고

뜨거워진 심장의 박동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 함을 전하고 싶다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옛지도에는 없는 이름인 청천봉

 

독고불재(어두목장)이 보이고

 

어두목장 앞에서 잠시 휴식

 

어두목장(독고불재)

어머리는 신라때 전란으로 왕자가 피신하여 있던 곳으로 황자동이라 하다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지형이 물고기처럼 생겼다하여 "어머리" "어두(魚頭)"라고 불렀다 한다

 

 

 

역시 만만치 않은 651.2봉에 오르고

 

 

한참을 내려오다 뒤돌아 본 청천봉과 멀리 부산성봉이 아쉬운 듯 잠시 고개를 내밀어 준다

 

 

오리재 직전 다음 구간에 올라야 할 단석산과 652봉(단석산 갈림길 직전봉)사이 계곡에 국보 제199호인 마애석불이 있는  신선사가 보인다

 

 

임도인 유래를 알 수 없는 오리재를 지나고

 

 

대장님의 판단에 따라 계획보다 줄어든 정맥길.. 하지만 역시 마지막 봉에 오르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밤에 출발하여 언제나 뒷풀이도 하지 못하고 밤늦게 도착하는 것이 늘상이었는데... 반갑다 빨라서...  오늘의 날머리 당고개

 

땅고개 (당고개) 315m

건천과 청도를 연결하는 20번 국도인 땅고개는 2만5천 지형도엔 당고개로 표기되어 있기도 하고

‘당고개’는 부산(富山)을 거친 정맥이 경주 건천과 산내를 가르며 내려서는 곳이다

신라가 청도로 서진해 이서국을 먹고 가야권 초입 창녕으로 진격한 통로도 이것이었을 터다.

동편 첫 마을인 건천읍 송선2리 우중골마을 어르신은 “그 너머 산내 쪽에 옛날 당집이 있었다”며 “당고개란 이름이 맞을 것”이라고 했다.

산내면 지명유래지도 당집이 있었다는 증언을 싣고 있다. 당고개가 옳은 이름임을 암시하는 간접 증거들이다.

산내면 지명 유래지는 그러면서, 이 고개를 ‘우중골티’ 혹은 ‘우중곡치’(雨中谷峙)라고도 불렀다고 병기하고 있다.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272&yy=2010

 

 

 

오늘의 뒷풀이 장소 : 와서 보니 오봉산의 뒷 편에 있는 마을이다

 

주인장의 음식솜씨도 좋고 친절함까지... 모두 맛있게 오랫만에 하루의 피로를 풀어본다. 이게 언제였던가?

 

명절을 끼고 있는 바람에 좀 길어진 만남의 시간들

기다린 시간만큼이나 만남의 기쁨도 두배였고 거기에

몸은 힘들지만 설경에 흠뻑 젖어 버렸던 낙동정맥식구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언제 한번 크게 웃으면서

마음껏 눈길에 푹 빠져 동심의 세계로 돌아 갔던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이 질문에 누구도 답하지 못했음을

청천봉에서 본 강아지의 재룡에 그저 즐거웠음이 답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가 오늘 목표했던 끝까지 완주하지 못했다고 목적 달성하지 못함이 아쉽지 않다

주어진 환경에서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최선을 다하고 스스로 만족할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박수를 칠 수 있는 산행이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것이다

요즘 동계올림픽에서 보여주는 매달 색깔에 관계 없이 모든 선수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낼 수 있는 것도

최선을 다한 오늘이 있었고, 준비라는 과정이 있었음에 박수를 보내는 것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봄이 오는 소리까지 들으려 노력했던 낙동정맥 대체구간 14구간

그래도 명색이 동장군인데 마지막 힘은 언제든지 남길 수 있음을

이번 강원도의 눈폭탄에서 볼 수 있었고 거기에 동조한 경주의 설경까지

봄을 맞이하기 위한 마자막 올 겨울의 추억이었음을 간직하고

저마다의 마음속에 가득찬 봄소식을 가지고 올 3월이 벌써 기다려 집니다

 

감사합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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