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정맥 09 : 왕거암(주왕산상봉) -  피나무재에서 황장재까지 (북진)                  

                                                             

                    

언제 갑오년  푸른달 열이레 흙날 ~ 열여드레 해날 (무박)

 

누구랑 : 한돌대장님과 낙동정맥 식구들

 

어딜 : 피나무재 ~ 별바위봉 ~ 주산제 ~ 대관령 ~ 먹구등 ~ 대둔산 ~ 황장재

 

               산행거리  : 낙동정맥 24.1km (한돌 대장님 공지내용 )

                                                    ( 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1719에 있습니다

 

        주자료 : http://san.80port.net/nakdong/nak09.htm

                     청송군, 영덕군 홈피

 

 

역시 5월은 가정의 달인가? 대장님의 배려?로 낙동정맥길을 맘껏 쉬고 나니

중산제까지 지냈는데!!  낙동식구들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괜히 궁금해진다.

새식구들도 늘어나면서 낙동정맥길을 계속 이어가는데 큰 힘이 될 것 같고

약간은 아직도 날씨가 조석으로 일교차를 보이고 있지만

산에는 이제 본격적으로 신록이 아름다움을 준비하고 있기에

여름이 다가오는 길목에 낙동의 모습은 어떤지 궁금해진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그리운 길... 

 

 

 

낙동정맥 주왕산 구간

 

 

단속구간이라고 하여 잠시 비워두었던 주왕산 구간을 오늘 이어가게 된다.

이번 구간은 석병산(石屛山), 주방산(周房山),대둔산(大遯山)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주왕산(周王山,720m)을 끼고서

주왕산 북동편 외각의 산줄기를 타고 이어가게 되나 주왕산 주능선과는 떨어져 있는 관계로 주왕산의 암름미를 제대로 조망할 수가 없는 것이 흠이다.

낙동의 꿏인 주왕산을 끼고서 두구간으로 나누어서 주방천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비경을 감상하는 추세라는데... 우리는?

청송과 영덕의 경계를 계속 이루면 걷게 된다. 북진으로...

8구간 마지막봉인 532봉에서 영양군과 이별하고 청송땅과 발을 맞춘뒤 청송과 영덕의 경계를 이루게 된다

 

 

 

10구간때 들머리었던 피나무재에 또 다시 이번구간에도 역시 북진을 위해 들머리로 잡은 피나무재

 

피나무재(우설령) 914지방도 내룡리를 지나 이전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우설령은 양설령이라고도 부르며 양설령은 兩雪嶺인데 兩 자가 雨 자로 오기 되어 우설령으로 표기된 것이라고 한다.

 

 

안내판이 있는 곳으로 진입 들머리

 

주왕산구간이라 그런지 암벽이 자주 나타나 약방에 감초 역활을 해준다'

 

엊그제 남산을 돌아 나오는데 우연히 보게된 아카시아꽃

아카시아 꽃이 반가우면서도 본격적인 여름의 서막을 알리는 무대라 생각하니

여름의 무대에서 땀의 잔치를 벌일 것을 생각하니 그렇게 반갑지 만은 않다

하지만 무대에만 오르면 프로정신으로 무장하는 낙동식구들이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

 

 

701봉에서 잠시 휴식

 

이제 중산제를 마치고 처음 맞이하는 낙동정맥길

걷고 또 걷다 보면 몰운대에 이르게 될 것이고

그 때 그 시간까지 내게 주어진 숙명 같은 임무

열심히 걷는 것, 그것뿐이지 않을까.

 

 

넓은 공터인 헬기장을 지나 도착한 통천문

 

통촌문 위로 여명은 밝아오고 -  통천문이 아니라 잘못 발을 디디면 황천문이 될 수 있으므로 접근하면 안된다

 

오늘의 최고 조망지 별바위봉

 

옛날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가 이 별바위 사이에 떠오른 별을 보고 소원을 빌었더니 장원급제했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걸어온 마루금과 멀리 보이는, 오늘도 여전히 안개와 상관없는 무장산인 듯

 

주산못으로 이어지는 계곡이 시원스럽게 이어진다 -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상큼님, 드레곤님 - 산우님 작품

 

注山池

주산지는 조선 경종 원년1720년 8월에 착공하여 이듬해에 완공한 농업용 저수지이다.

이 아름다운 호수는 오랜 역사 동안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바닥을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는 농민들이 믿고 의지하던 저수지 이었다.

주산지는 내(內)와 외(外)가 공존하는 듯한 공간이라는 느낌을 가져다주어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 이다.

 

 

주산지를 당겨본다

 

주산지의 가장 아름다운 배경은 바로 30여 그루의 왕버들 고목이 물에 잠긴 채 자생하고 있는 모습

국내 30여종의 버드나무 중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왕버들 숲속에서 다른 나무와 경쟁치 않고 아예 호숫가를 비롯한 물 많은 곳을 택해 자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다른 나무의 자생 속도 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한 뒤 수백 년간을 자연에 의지하는 듯 유유한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사람으로 치자면 약삭 빠르게 살아가는 사람과 비교될까?

 

 

가야할 정맥마루금이 우측으로 계속 이어지며 좌측으로 주왕산의 비경을 만든 줄기가 서쪽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별바위봉에서 조금 내려와 신술골로 내려가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한다. 도착한 주산재

 

주산재
주산재는 약간의 공터를 제공하는 삼거리 갈림길로 오른쪽으로 산허리를 타고 나가는 길은 우설령으로 내려서는 길이고,

정맥은 왼쪽(북)으로 크게 꺽는 내리막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별바위재라고 도 하는데 한자로 星岩으로 별이 손에 닿을 듯 높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바로 신술골안부

 

신술골안부

오른쪽은 굴바위가 있는 봉산저수지로 내려서는 길이지만 족적이 희미하고 누군가가 나무를 베어 길을 막아놓은 상태

청송군 이전리 신술리

상이전마을 : 배밭이 많아 梨田이라 하며 이전리 위에 새로 마을이 생겨 상이전이라 함

신술리 :  새로 마을이 생겼다 하여신술리라 함. 

 

 

돌탑과 지금은 없어진  문관석이 자리했던 평지에서 식후경

 

신술골 최상단계류가 시작되는 곳으로 청송쪽 신술리에서 영덕쪽 덕산리를 연결하는 옛 고갯길로 여겨지는데

곳곳에 무너진 돌담과 집터의 흔적들이 있지만 지금은 넓은 초원지대를 이루고 있어 감탄을 자아낸다

 

 

식후 돌탑도 지나고

 

헬기장이 있는 798봉

 

 

사유지인 듯 줄로 처진 곳을 통과하면

 

산상분지인 대궐령이 나타난다

 

대궐령(740m)정상
대궐령일대는 정상부가 축구장만큼 넓은 평지에 마치 부드러운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넓은 풀밭을 이루고 있다.

대궐령은 임금이 계신 곳을 둘러서 이어진 산봉우리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며

일반적인 고개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산줄기의 높은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법하다.

옛 이야기 속에 나오는 중국 당나라때 진의 후손인 주도가 진의 회복을 도모코져 스스로 후주천왕을 자처하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패하여

이곳 주왕산으로 숨어 들었을 때 영덕지방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하였던 곳이 바로 이곳 산상분지인 대궐령이다.

이 곳에서 시장이 지금도 열려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면서 걷는 기쁨, 또 다른 즐거움이다

 

 

바로 갓바위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서 발라본 갓바위

 

"갓바위전망대"

갓바위는 사람이 갓을 쓴 모양이라고 하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보이며 위에서 내려다 볼 때는 흡사 남근의 형태를 닮았다고도 할 수 있다.

이 갓바위로 인해 대궐령 정상부는 갓바위산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위에서 볼 때 갓바위는 거대한 하나의 입석으로 보이는데 실제 가까이서 보면 각기 독립된 5개의 거대한 바위가 연이어져 있다고 한다  

거북바위라고도 불리는 바위아래에 있는 마을이 용전리 입암마을 이고 입암(笠岩)은 바로 갓바위에서 유래된 마을이름이고

갓바위는 옛날부터 신성하게 여겨져 동네지킴이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한다

 

 

갓바위골 용전리 방향과 동해

 

용전리 갓바위골

임진왜란 중국 명(明)나라에서 원병 왔던 이여송이 갓바위골 입구 보골양지라는 산등선에서 갓바위골까지 칼등같이 생긴 능선을 칼로 치자

그 곳에서 나온 용마(龍馬)가 하입암(下笠岩) 들로 내려 갔다 하여 그 들을 용두전(龍頭田)이라 하고 그 뒤 동명을 용전(龍田)이라 했다 한다

 

 

제단바위 - 오랫만에 낙동정맥에 합류한 드래곤님

 

이번 구간은 주왕산을 만들어낸 등줄기 답게 곳곳에 삼층바위를 만들어 놓았다

 

왕거암 갈림길

 

조금 벗어 나 있는 왕거암

 

왕거암(王居岩,907.4m) 주왕산 최고봉

예전 등산지도에는 "은장도봉"이라도 표기된 왕거암(王居岩,907.4m)은 왕이 기거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이지만 이름에 걸맞는 바위?

명색이 주왕산 국립공원의 최고봉인 왕거암인데 최고봉에 어울리는 이정석이 없어 좀 아쉽기도 하다

 

 

아쉬운데로 왕거암의 역활을 하고 있는 정상에 있는 바위  -  산우님 작품

 

산 정상부에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 자체를 왕거암이라고 하기도 한다. 왕거암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문헌은 잘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지형도』에서 유일하게 '왕거암'이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보다 서쪽 갈전 부근 약 800m 고지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명칭은 산정상에 있는 바위 형상을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지식

 

 

오늘 함께 해주신 칠갑산 고문님 - 대전사 가메봉 갈림길이기도 하다

 

오른쪽 계곡은 주왕산의 또다른 비경이라 할 수있는 절골계곡이 대문다리를 지나 우측으로 갈래친 갈전골의 최상단 지류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가메봉(882.7m·일명 석름봉) 정상 바위의 모양이 가마(가메)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주왕산의 최고봉인 왕거암의 바위에서 수련중인 삼수령님

 

주왕산

이중환의 <택리지>에 ‘청송 주방산(周房山)은 골이 모두 돌이어서 마음과 눈을 놀라게 하고, 샘과 폭포 또한 뛰어나게 기이하다’는 기록이 있다.

바위가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해서 ‘석병산(石屛山)’으로도 불렸다.

또 난을 피하여 혹은 도(道)를 닦고자 숨어든 사람이 숨어 살았다 해서 ‘대둔산(大遯山)’ 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설악산 및 영암 월출산과 더불어 남한의 3대 암산으로 꼽히기도 한다.

 

 

삼각점

 

해발 721미터 봉우리가 주왕산 상봉이라는 지위를 얻고 있으나 주왕산의 최고봉은 해발 907미터의 왕거암이며

가메봉(883미터), 명동재(875미터), 산지당(849미터), 먹구등(846미터), 금은광이 (812미터) 등도 상봉보다 높다

산 이름의 유래는 신라 말부터는 주왕이 은거하였던 산이라 하여 주왕산 으로 불리게 되었다.
주왕은 중국 당나라 때 주도가 진의 회복을 꿈꾸며 후주천왕을 자칭하고 반역을 일으켰으나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여 이곳 석병산(주왕산의 예전이름)까지 쫓기어 왔다.
이에 당나라 왕이 신라왕에게 주왕을 잡아달라 요청하여 주왕은 이곳에서 신라장군(마장군 형제들)에 의해 주왕굴에서 최후를 마쳤다고 전해온다.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와 한참을 내려오면 느지미재를 만난다 - 산우님 작품

 

느지미재    주왕산 오지마을인 내원동을 내려서는 길이 뚜렷한 넓은 안부

명동재와 왕거암 중간에 위치한 재로 영덕 송천과 지품으로 넘어가는 재인데

옛날에는 내원동 사람들과 부동면 일부 사람들은 영덕장을 보기 위하여 지름길인 이 재를 넘나 들었다.

내원동서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도 장을 보고 오면 항상 이재를 넘을 때는 저녁 늦게 넘어 오게 되므로 사람들은 이 재를 느즈미재라 불렀다.

 

 

묵은 헬기장 하나를 지나고 다시 나타난 헬기장 - 명동재

 

지도상 명동재   875봉 직전

고개 모양이 두리뭉실하면서도 밋밋하게 생겼다 하여 민둥재라 부르다가 명동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예전 주왕산 오지마을 내원동 사람들이 영덕쪽 지품으로 숯을 팔러 다닐 때 명동재를 넘었다고 한다.

이 높은 산봉을 넘어 다녔을 민초들의 삶의 무게가 느껴지기만 하다

 

 

명동재의 추억 - 산우님 작품

 

                                                                                 

다시 헬기장이 나타나면 먹구등

 

먹구등(846.4m) /폐핼기장   

경북 청송군 청송읍 월외리.  먹구름이 자주 낀다해서 붙여진 이름 ?

 

 

두고개에서 두수람 금은광이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갈라진다

 

두수람 :

날씨가 가물어도 산 정상에서 항상 샘솟는다고 하여 도시람이라고 부르고 있음. 

 

금은광이

내원동 마을에서 보면.. 아침엔 은빛, 저녁엔 금빛의 환상적인 광체가 난다 하여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옛날 이 산에서 금과 은이 생산되는 광산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

일제강점기에 봉우리 서쪽 골짜기 안에 금은광산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기도 하고,

 

 

두고개에서 우틀하지 않고 직진하는 바람에 두수람봉으로 진행하다가 알바 - 이번호는 두수람봉으로 가는 길에 있는 번호

 

다시 되돌아 온 두고개에서 우틀

 

두고개 넓은 안부

두고개엔 오른쪽으로 내기사마을로 내려서는 길이 뚜렷하고 왼쪽길은 주왕산일주능선인 장군봉~금은광이~먹구등으로 이어지는

고갯길 하나를 더 넘어 내원동으로 이어지는 길이 뚜렷하다.
두고개란 옛날 영덕쪽 기사리에서 청송쪽 내원동을 이었던 길로 두 개의 고갯길을 넘어야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낙타 등처럼 고개가 두개로 되어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왼쪽 바로 아래로 형성된 계곡은 달기약수가 있는 월외리 노루용추계곡의 최상단부인 대리골의 상류가 된다.

 

 

현재 이정표 공사를 위해 임시로 붙여놓은 번호인 듯 - 두고개에 있는 번호

 

우측으로 문바위? 도 만나고

 

방화선 같은 길이 계속 이어지면서 집터 혹은 절터의 흔적들을 만나게 된다

 

732.6봉이 바로 나타난다

 

732.6봉  집터의 흔적

저마다 애틋한 사연을 이고 이 깊은 산중 외진 곳에 둥지를 틀고 화전을 일구며 뼈를 묻었던 옛 민초들의 애환에

이 능선 오른쪽 아래가 달기 약수가 있는 노루용추계곡 최상단부인 너구동이고,

너구동에서 북동으로 올라 붙는 지류가에 "절골"이라 불리우는 옛 마을이 있었던 걸로 봐서 예전에 이 능선 어디엔가 절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풀속에 삼각점?도 보이고 - 849봉?

 

잠시 후 잔돌들이 촘촘히 박힌 안부

 

너구동 옛 독립투사들의 피신처였던 곳으로 4개의 골짜기에서 흘러 내리는 물이 모여진다 하여

넷귀마을(四耳洞), 너귀동, 사이동이라고도 불려지는 오지마을이다

 

 

대둔산 갈림길인 절등재

 

절등재
빈대가 많아 폐사되었다는 절터쯤으로 여겨지고 지형도의 기사마을과 갈평지 상단의 둔골을 넘나들던 옛 고개

 

 

잠시 대둔산에 올라 본다

 

대둔산(大遯山,905m) 갈림 삼거리봉

난을 피하여 혹은 도(道)를 닦고자 숨어든 사람이 숨어 살았다 해서 ‘대둔산(大遯山)’이라 불렀다 - 주왕산 유래

산경표에 따르면 주왕산의 옛 이름인 주방산(周房山) 직전 죽현(竹峴)에서 방광산(放光山)으로 이어지는 짧은 지맥이 표기되어 있는데

그 지맥 분기점이 바로 이곳 대둔산이 아닐런지?

주왕산의 옛 이름 중의 하나가 대둔산이며, 일부지형도에는 대돈산으로 표기되어있기도 하다.

 

 

백제 계백 장군이 죽은 곳으로도 전하는 논산 벌곡의 대둔산 석천암도 조금 전 주왕굴과 비슷한 곳에 있다.

그런 곳이 대개 신선이 산다고 알려진 동천(洞天)이다.

 

 

진행방향 정면인 남서쪽으로는 태행산(太行山,933m)-중태산(679m)-방광산(519m)으로 이어지는 길이 뚜렷하다

 

태행산(太行山,933m)-

『조선지지자료』에 '태행산(太行山)' 명칭이 나온다. 아울러 '댕댕이산'이라는 우리말 명칭도 적혀 있다. '댕댕이'는 본래 넝쿨식물의 한 종류이다.

이 넝쿨이 많아서 '댕댕이산'이라고 하였을 수도 있겠다. 한편 조선시대 자료에서는 '태행산'이라는 명칭이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대부분의 옛 지도에 월외산(月外山)이라는 산이 표시되어 있다.

태행산이 있는 '월외리(月外里)'라는 지명은 『호구총수』에도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오래된 지명이므로, 월외산은 지금의 태행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태행산 [太行山, Taehaengsan]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2011.12, 국토지리정보원)

 

 

다시 절등재로 내려와 단체사진

 

여기부터 출입금지 구역인 듯

 

이정표봉도 지나고

 

내려오다 우측으로 나있는 소로길인 모듬재를 지나면 나타나는 갈평리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갈평재

 

갈평재  옛 성황당터  진보쪽 갈평동과 지품쪽 학곡마을을 연결하는 옛길

경북 청송군 진보면 괴정리 소재  갈평저수지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 해발 300미터의 산중턱에 있는 평지로서

칡넝쿨이 많고 또 칡의 질이 좋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葛平 (갈평) 이라 한다

 

 

661.7봉 갈림능선

 

661.7 갈림능선

정점에서면 오른쪽(동쪽)으로 경유해 갈평동으로 내려서는 뚜렷한 능선길이 보이지만

길은 이 산봉을 올라서기 직전에서 왼쪽으로 빗겨가고 있다.

 

 

오늘의 날머리 황장재

 

황장재(黃腸里)  34번 국도   영덕군(盈德郡) 지품면(知品面) 황장리(黃腸里)

이 마을은 16세기 후기(1570년경)인 선조(宣祖) 연간에 남평문씨(南平文氏)가 들어와서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조선 초기에 이곳에서 나는 나무를 나라에서 재목으로 쓰기 위하여 황장봉산으로 봉하였으며, 황정(黃井)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황장재는 영덕과 안동을 연결하는 2차선 국도지만 고개마루는 4차선 오르막 차도이며 안동 간고등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고개다.

 

 

 

8구간에 황장재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숙제, 염장을 지를려면 소금이 필요한데 소금은?

지금은 육로운송수단이 하도 발달하여 피부로 느끼지 못하겠지만 일제시대 전까지도 우리나라의 교통수단이

육로보다 수로에 의존해 왔다는 것은 절대적이었다.

전라도의 염전에서 천일염을 실은 소금배가 남해 연안을 휘돌아 부산의 수영만에서 낙동강 하구와 만났다.

그곳에서 급한 물살을 억척같이 거슬러 올라 낙동강의 안동 포구에 당도했었다.

한편, 동해에서 잡힌 고등어는 부상들의 지게에 얹혀 영덕의 강구항에서 출발하여 황장재와 가랫재라는 두 개의 가파른 고개를 넘어

안동에 도착하면서 전라도에서 당도한 소금 배와 조우하게 되었다.

수로와 육로의 애환이 켜켜이 배어있는 이 절묘한 만남이 안동 고유의 염장문화(鹽藏文化)가 완성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소금을 관에서(주로 왕실) 주도했기때문에 생각보다 우리 역사에서는 소금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다.

3면이 바다이고 서해와 같은 천혜의 자연자원을 가지고도 소금을 중국에서 수입하면서 양반(관료)들의 배만 불렸다는 생각을 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세월은 흘러오고 있었다. 세월호의 근본적인 원인도 따저보면 다 그런 이유이다.

엉덩이에 뿔이 나도록 뛰어다니는 민초들은 돌보지 않고 저그들 끼리 쉬쉬하고

그러다 일 터지면 양반입네하고 손등짐지고 있어도 잠깐 세월이 가면 언제 그랬지?

누구하나 책임지는 놈 하나 없다. 말한마디 할려 하면 어디 쌍놈주제에...

지금이라고 뭐 다를게 있는가 생각해보면 세상이 다 그런것이다 생각되면서도

세월탓만 하지말고 잊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만으로도 조금씩 세상은 변하여 갈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뒷풀이 장소로 이동하고

 

약수가든 답게 약수탕에서 약수가 흘러 나오고 있다

 

하루의 피로를 풀고

 

오랫만에 함께한 낙동정맥길, 이가 빠저 항상 아쉬었는데 이제 제대로 능선을 이어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마음으로 하루를 정리한다

 

이 초보산꾼이 자주 글에서 했던 말이 정말 많이 생각나는 하루였던 것 같다

비가 오면 우산을 받쳐 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것이 동행의 의미를 좀 더 참되게 한다는 말

비를 맞고 걸어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산이 아니라

비를 맞으며 걷는 어려움도 때론 우중산행의 즐거움도 느낄 수 있는 동행이 필요한 것이다

 

대간길이나 정맥길이나 일정거리를 걸어야 하기 떄문에 빨리 걷고 빨리 끝나면 좋으련만

누군들 빨리 걷고 싶지 않겠는가?

빨리 걷고자 하는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분명 한계는 있다

또 마음을 다잡고 한번 힘내서 열심히 걷고자 하나 그런 노력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한계를 인정하고 보듬으려 노력할 때 비로소 우리는 동행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우리가 걷고 있는 산길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결혼을 했다고 모두가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식을 낳고 길러야 비로소 부모가 되는 것이다.

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산이 높아도 산줄기(자식)이 없으면 산(부모)가 되지 못하고 "봉"으로 밖에 남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리 낮아도 자식(산줄기)를 두고 있으면 산(부모)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산이나 부모나 함께하는 자식(산줄기)를 보듬고 함께 희노애락을 함께 하기에

 "봉"취급을 받지 않고 부모(산)으로써 당당히 우리앞에 서있는 것이다

"봉"취급을 받지 않는 방법은 함께 희노애락을 함께 하는 것이 자연이 주는 교훈이다

 

지금까지 산에서 배우며 느끼며 읽힌 실력을 자식 보듬 듯 옆에서 

함께 비를 맞으며 느낌을 공유하고 

굳이 배낭을 들어주지 않아도 마음으로 느끼는 따뜻함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행이 될 것이다 

강아지도 계속 보살펴 주어야 애완견이 되듯이

보살피지 않고 방치하면 들개가 되어 사람을 공격하는 무서운 들짐승으로 변하는 이치이다

 

그리고 우리 낙동팀 적은 인원으로 출발할 때 마음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렵게 출발한 만큼 10명이 안돼도 끝까지 갈려고 마음 먹고 있는 산우님들입니다.

여기에 숟가락 하나 얹어 놓았다고  생색을 내는 경우를 보고 너무 가슴이 아프기만 하다.

절대 와해될 이유 없으니 바깥에서 보이는 모습 하나로 판단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혹여 그런마음으로 함께 하고 계시다면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 주시길 바랍니다.

 

한방울의 물방울이 모여서 강을 이루기도 하지만

한방울의 오염된 물방울이 강 전체를 오염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언제나 함께 한다

시작만 함께 했지 얼굴 한번 보기 힘든 산친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태우며 세상을 밝히는 춧불같은 사람이 너무 그리워지는 이유이다

비를 맞으며 걸어갈 때 기꺼이 같이 비를 맞아 주며 동행할 수 있는 사람

얼마 남지 않은 구간...  그래서 더욱 그립기만 하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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