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정맥 07 :  맹동산 상봉 구간 -   아랫삼승령에서 ok풍력단지 임도(하삼의)까지                        

             

                                                                    

언제 갑오년  물오름달 하루 흙날 ~ 이틀 해날 (무박)

 

누구랑 : 한돌대장님과 낙동정맥 식구들

 

어딜 : 아랫삼승령 - 학산봉 - 독경산 - 창수령 - 울치재 - 풍력단지 - 임도삼거리 - 하삼의        

     

         산행거리  : 낙동정맥 21.1 km   총거리 22.6 km (한돌 대장님 공지내용 )

                                                    ( 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1525 에 있습니다

 

 

산과 들에 물을 머금은 새싹들이 하나 둘 인동초의 겨울을 이기고 올라 온다는 물오름달 3월

지금 일본의 극우익화의 심화로 안하무인같은 행동과 독설을 퍼붓고 있고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을 꿈꾸고 있는 지금, 이렇게 서슬퍼렇던 역사가 살아 있는데

삼일절의 그 정신만은 어디에 있더라고 잊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낙동 7구간을 위하여 집은 나선다

혹 시간되시면 탑골공원에 한번 가시죠      초보산꾼 자료 : http://cafe.daum.net/salpemountain/F2fP/7

 

 

 

낙동정맥 7구간 등로

 

 

 

7구간의 들머리인 저시마을에 도착

 

기산리 저시마을은 KBS에서 강호동의 1박 2일팀이 쵤영했다고 한다.

이 곳은 골짜기가 깊으며 땅으로서 거름지지 않으므로 곡식이 잘 되지 않는다.

특히 서민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고기환(49) 제보) 글자로 보면 지대가 낮고 골이 깊어서 붙인 이름이 아닌가 한다 (영양읍)

 

 

약간 비가 내린다는 예보와 달리 다행히 약간의 눈발이 날리는대 - 아직도 눈이 그대로 쌓여 있다

 

겨울이면 우리는 언제나 등로에 수북이 쌓여 있을 눈을 걱정하며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인다

아무리 겨울의 끝자락이라고 하지만 눈 폭탄은 계절의 속성을 그대로 자랑 한다

동해의 수분을 마음껏 품은 낙동정맥의 눈은 더욱 우리를 힘들게 하지 않았던가

등로 초입에 보여준 눈길은 그래서 우리를 더욱 긴장하게 했다

봄이 오는 소리에 한 가닥 희망을 걸어 보았건만

 

 

아랫삼승령에서 출발준비를 하고

 

아래 三僧嶺

스님들이 영양과 서울을 왕래할 때 항상 3명의 승려가 동행하여 넘었다 하여 삼승령

윗삼승령과 아랫삼승령 사이 굴아우봉 좌측으로 큰 바위가 3개 있는데 마치 승려의 형상을 하고 있어 삼승바위라 했다

비포장 임도가 있는 곳이며, 영양읍 기산리의 저시마을과 영덕군 창수면 백청리를 연결한다.

 

 

첫 봉인 유래를 알 수 없는 학산봉

 

늘 그랬으니 아마 일 것이라 생각하고 아이젠까지 무장하고 나섰던 정맥길

하지만 정맥능선에 들어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바닷물이 둘로 갈라지는 모세의 기적처럼 눈 쌓인 산등선이의 가운데를 길을 열어 주었다

어둠속을 걷는 관계로 산우님들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아마 안도의 기쁜 숨을 쉬지 않았을까?

 

 

쉰섬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쉰섬재, 그만큼 넓은 안부를 가지고 있다

 

쉰섬재

옛날에는 쉰섬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하여 이름이 부쳐졌다고 하여

또 다른 유래는 조를 쉰섬(50섬)이나 수확 할 수 있는 넓은 안부를 가지고 있다해서 붙여진 지명인데 그럴만한 넓은 공터가 없는 것 같으며

좌측은 영덕군 청수면 백청리 방향이고 우측은 영양군 수비면 기산리 방향을 잇는 고갯길로

백청(栢靑)이라는 말은 잣나무를 이르는 말로 백청저수리를 가운데로 좌측은 잣나무골 우측은 큰골이다 

 

 

706봉 직전 저시재

 

저시재  영양읍 기산리 저시 마을에서 추론     골짜가 깊으며 땅으로서 거름지지 않으므로 곡식이 잘 되지 않는다 특히 서민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고기환(49) 제보) 글자로 보면 지대가 낮고 골이 깊어서 붙인 이름이 아닌가 한다.  영양군

 

 

714봉 가까이 있는  옷재

 

옷재 (오현 烏峴)

경상북도 영덕군의 창수면 백청리와 영양군 영양읍 무창리에 걸쳐 있는 고개이다. 옛 문헌에 오현(烏峴) 혹은 오령(烏嶺)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영해)에 '오령'으로 표시되어 있다. 즉 오어면(烏於面, 지금의 창수면 일부)의 '삼승령(三升嶺)과 덕현산(德峴山, 지금의 독경산으로 추정)

사이에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오현과 옷재의 선후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순 우리말 옷재를 한자로 표현하여 오현 혹은 오령이 되었거나,

반대로 까마득한 고개라는 의미를 오현으로 나타내었고 이것이 변음하여 옷재가 되었을 수도 있다.               [지명유래 ➣➣ 영양군 옷재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옷재 [Otjae]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2011.12, 국토지리정보원

 

 

서낭당고개

 

사람마음이라는 것이 한번 데인 기억은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속 깊이 자리하고 있기에

아이젠은 벗을 수가 없었다. 더 올라가면 또 눈이 앞을 가로 막고 있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멧 부리를 몇 번 넘고서야 우리가 남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아이젠을 벗는다

북쪽은 눈이 있을 지라고 남사면은 눈이 녹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648봉에서 식후경

 

식후 멀리 사라져 가는 백암산도 조망해 보고

 

지경 표시봉인 670봉

 

670봉 지경 표지판

영덕군과 영양군 군계가 되는 경계갈림길이 잠시 영양군으로 그리고 마루금은 영덕군 속으로

실제 지금까지의 산줄기가 낙동정맥 마루금을 따라 군계를 형성해 왔는데 670봉에서 690봉까지 군경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파란색 줄기가 영양군과 영덕군의 경계이다 

 

 

밤남골 임도

 

밤남골 임도

창수면 보림리와 밤나무골을 연결하는 산판도로이다.  

보림寶林 동명의 유래는 마을 주위에 수목이 울창하여 좋은 재목이 나온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낙동강상류의 지류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동해안과 가장 인접한 곳은 북위 36.59, 동경 129.16, 해발 약 761.0m인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 일명 밤남골 부근의 도로변이다라고 한다.

*밤남골(栗南洞, 밤나뭇골, 자라모기) : 창수 남동쪽 자라모기 고개 밑에 있는 마을로 *밤남골(栗南洞, 밤나뭇골, 자라모기) : 밤나무가 많이 있음.

 

 

삼각점과 통신시설이 있는 독경산

 

獨慶山(638.2)

봉우리가 홀로 우뚝 솟아 있다고 하여 독경산이라하고 옛날 선비들이 이 산에서 공부를 한 산이라고 하여 獨經산이라 한다.

창수면 수리리 희암마을의 성왕사(成王寺)와 보림리 오현사(烏峴寺)에서 수행하던 스님들의 독경 소리가 산 전체에 울려 퍼져 讀經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창수령으로 오르는 도로가 보이기 시작하고

 

이문열 작가는 아마 저 산길을 따라 오면서 소설 마지막 부분을 나름대로 그리면서 올라 왔으리라

우리가 낙동정맥이라는 산길을 목적으로 하기에 밤잠을 설치면서도 걷듯

이 작가는 온통 머릿속에 주인공의 심적 변화를 이 창수령과 비교하려 애썼을 것이다

왜 이리 넘고 또 넘으면서 힘들다고 투덜대면서도 우리가 걷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창수령

 

창수령은 자래목이라고도 부르며, 내륙의 영양 사람들이 영덕지방으로 나가려면 이곳과 울티재를 넘어야 했다

창수리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창수원(蒼水院)이라는 숙식(宿食)시설이 있어 창수원 또는 창수라 하였다 

신라시대 이전부터 고갯길이 열린 것으로 전해지는 창수령. 창수령은 이문열이 소설에서 언급한 뒤  공식 명칭이 됐다.

창수령은 조선시대 영해부 관할인 영해·영덕·울진·흥해 사람들이 한양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옛날 대구와 의성, 경주 등지의 영남 사람들은 문경새재를 통해 한양으로 갔지만 선비 고장으로 유명했던 영해부 관할지역은 지형상 창수령을 이용했던 것이다.

 

 

689.6봉으로 오르다 본 창수령고개 오름길과 독경산

 

창수령의 본래 이름은 읍령(泣嶺) 내지 울티재였다. 재가 워낙 험해 '울면서 넘는다'는 뜻이었으며, 큰재로 불리기도 했다.

유래는 2가지다. 한 가지는 후삼국시대 고려 태조 왕건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도망가던 궁예 부하들이 창수령을 넘으면서 너무 힘들어 울었다는 설이다.

다른 한 가지는 조선시대 관리들의 수탈에 고통받던 민초들이 조세나 곡물을 등짐지고 재마루를 넘을 때 힘들어서 엉엉 울었다는 설이 있다. 

영덕군 창수면에서 영양군 양구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창수령은 조선시대 관리들을 영접하거나 전송하던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892&yy=2011

 

 

창수원이 있는 창수저수지 방향 : 풍차가 있는 맹동산까지 계속 친구를 해준다

 

창수령에서 작가가 보고자 했던 것도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과 똑 같다는 생각

그렇다면 너무 앞서 간 것일까? 목적이 다를 뿐 느끼는 감정은 똑 같다

단지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고 글을 쓰는 능력이 다를 뿐

임어당이 모든 것이 다 풍경이다고 했듯이 마음속에 담아온 지나온 풍경들이

지금 우리 마음속에 그림이 되고 한편의 시같은 소설속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오늘 우리 낙동식구들은 이문열과 같은 무명의 작가가 된 것이리라 믿고 싶습니다

 

 

지도상 무너미 고개 갈림봉에서 좌틀

 

이제 손에 닿을 듯 맹동산은 가까워지고 있으나 언제나 그렇듯 돌고 또 돌아 간다

 

창수저수지와 멀리 백암산

 

울치재

 

울치재

영덕쪽 창수리와 영양쪽 양구리를 넘나드는 임도로, 예전 영양에서 영해로 넘나들 때 호랑이와 도둑이 들끓는 이 고개를 울며 넘었다 하여 "울치재"라고..

창수령은 힘들어서 울고 이 고개는 호랑이와 도둑들 때문에 울고 언제 한번 허리펴고 넘을 수 있을 까나

옛날에는 석양(夕陽)에 이 재를 넘으면 반드시 그 나그네는 참상을 입었다 해서 울고 넘는다는 뜻으로 울티재(泣嶺)라 했다 하며 저녁만 되면 이 재 넘어 가기를 꺼려했다 한다

울티재는 영해 고을의 교통의 요충지로 영해 고을을 오고가는 대소의 관리들이 처음 이 고개를 넘으면 반드시 죽임을 당하곤 하였다. 그래서 영해 고을의 관리가 되는 것을 모두가 꺼리게 되었다

 

 

 

조선초기 고려왕조의 부흥운동을 염려해 경상도 감사로 손순효(孫舜孝)로 보냈는데 이 울티재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한다

울티재에 내려와 주위를 살핀 다음 오래된 나무 한 그루를 베고 글을 쓰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汝揖華山呼萬歲 我將淪命慰群氓 個中輕重誰能會 白日昭然照兩情

너희들이 공손히 화산곡(華山曲)을 만세토록 부른다면 내 장차 임금의 명을 받아 너희들을 위로하리라

개개일들의 가볍고 무거움을 누가 능히 헤아리랴 밝게 비추는 햇님이 우리 양 충정을 비추어 주지 않은가,

그러자 바로 괴이한 일들이 없어지고 이후로는 흉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울티재는 괴이한 일들이 없어졌다고 하여 파괴현(破怪峴)이라 하였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태조 2년(1393) 5월에 전조 고려 왕씨들의 후예들을 영해에 옮겨 살도록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의 후예들이 점차 장성하면서 조선 왕조에 대한 반감으로 범아제비 혹은 산적 등으로 변장하여 새왕조의 관리들을 살해하여 선조들의 원한을 갚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 왕조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오래 방치하면 구왕조의 부흥운동이 일어 날까봐 병조좌랑 등을 역임한 손순효(1427∼1497)를 경상도 관찰사(감사)로 삼아 이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이 때가 성종 16년(1485)이었다.

이는 조선이 건국된 지 불과 73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으로 이 때까지도 신왕조에 대하여 반발하는 세력이 영해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손순효가 써서 붙인 방문(榜文)의 마지막 구절에도 여실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으며,

이후 연산군 1년부터 연산군 4년(1495∼1498)에 이르는 동안 영덕현령으로 재직한 권오복(權五福)의 ‘파괴현’이란 시로써도 이를 알 수 있다

 

 

삼각점이 있는 527.1봉

 

 

바로 당집이 보이고

 

문앞에 놓인 동자승을 닮은 돌에 눈이 간다

 

맹동산에 가까워 지면서 뒤돌아 본 독경산, 689.6봉, 527.1봉이 차례로 보인다

 

맹동산 풍차 단지가 시작되고 - 계속 도로를 따른다, 맹동산 상봉까지

 

경북일보 자료에 연매출 150억이라는 맹동산의 풍차

2015년까지 개발을 끝내고 나면 우리나라 최대 풍력단지가 된다고 하는데

풍차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어떻다 말 할 수는 없지만

영양군의 큰 산인 이 맹동산이 개발이라는 이름하에

풍차에 빼앗기고 농장에 빼앗기고 무참히 사라진 정맥길을 보면서

자연그대로와의 공존은 불가능한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변전소도 보이고

 

해발 천고지도 되지 않는 맹동산에 풍차를 설치했다는 것은

그만큼 바람이 많이 분다는 얘기일 것이다

동해안의 해풍과 내륙풍이 연중 일정하게 불어주는 곳이라는 설명이고 보면

산이 높다고 다 바람이 많은 것은 아닌 것 같고 바람이 많다고 풍차를 돌리는 것도 아난가 보다

넘쳐도 문제이고 모자라도 문제이고 다 적당하면 좋으련만 적당은 어디에서도 발을 붙일 수가 없는게 현실이다

맹동산의 풍차를 보면서 걷는 동안 생각해본  단상이다

 

 

이제 멀리 보이는 창수리 방향과 풍차

                                                                              

먹구름이 몰려 오고 있는 가운데 멀리 동해 바닷가가 햇살에 더욱 빛나고 있다

 

이제 가까워진 상봉

 

상봉 직전  영양군 석보면과 영덕군 창수면과 영해면의 삼면경계봉

 

방가골芳佳洞 약수터와 마당두들(瑪邱洞)약수

마당두들약수는 위장병, 피부병,빈형 및 허약체질에 좋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방가골약수는 목의 부기를 내리는데 특효가 있다고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별의미가 없는 것 같아 오르지 못한 맹동산 상봉

 

맹동산(萌洞山(민둥산) 807.5m     

연잣골 골짜기에 자리잡았으며, 마을뒷산이 맹동산이다.

맹동산은 주위의 다른 산보다 높고 특히 바람이 세어서 나무들은 잘 자라지 못하고 풀들만 자란다고 하여 맹동산(민둥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는데, 산

아랫마을 역시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최상문(51) 제보).

그러니까 민둥-맨둥으로 소리가 바뀌었다가 마침내 맹동산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아울러 이 마을에는 농바위가 널리 알려져 있다. 농바위는 마치 농을 포개 놓은 것 같이 두 개의 바위가 겹처있다

 

 

멀리 다음에 가야할 봉화산과 좌측으로 포도산 우측으로 마루금인 맹동산

 

오늘의 마루금의 마지막 지점인 하삼의 갈림길

 

마당두들 약수터가 있는 방향과 반대인 하삼의 마을로 우틀

 

영양곰취농장 삼거리

 

양쪽 골짜기에서 흘러 나오는 물소리가 이제 봄임을 느끼게 해 준다

 

이제 봄은 우리에게 말없는 발걸음으로 더욱 가까이 왔음을 이 계곡 물소리에서 느낄 수 있었다

봄이 왔음을 알리려는 듯 더욱 세차고 빠른 발걸음으로 내달리는 물결속의 봄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아직도 겨울속에 움츠리고 있음을 발견하고서 마음속으로 그저 웃고 만다

남이 알까 부끄러워 말도 못하고 그저 계곡 물소리에 같이 묻어 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직 눈속에 흐르는 그래도 겨울인데 하는 못 다했던 겨울이야기도 들려 줄 겸...

 

 

이제 정자가 보이는 마지막 날머리 지점

 

삼의三宜 : 삼의리는 산하곡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높은산 밑에 있다하여 산밑골로 불리기도한다

옛날에 김부자라는 사람의 아들삼형제를 삼의라불러 맏이부터 상삼의 중삼의 하삼의라 부르고 이들이 사는곳을 통틀어 삼의라함

 

 

아직은 춥지만 그래도 상큼님의 정성이 가득 들어간 뒷풀이

 

이별은 누구에게나 아쉬움을 뒤로 하는 것이지만

계절과의 이별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똑 같은 일상의 한부분임을 깨닫게 된다

당연히 오고가고 하는 계절의 속성을 알면서도

때로는 오지도 않은 계절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도 하고

갈 생각도 없는 계절을 빨리 보내고픈 마음으로 속만 태우고

이별과 만남은 인연이라는 끈으로 연결되기에 가고 오는 지금의 인연을 소중히 하고 싶다

 

 

마지막 겨울 산행을 자축이라도 하듯 함박눈까지 깜짝 선물을 안겨주고

 

아마 지금 내리고 있는 이 함박눈이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정말 그리워 질 것이다

우리가 추위를 견뎌내며 이렇게 함께 하는 것도 다 이유 있는 겨울 끝자락의 추억이었음을

낙동정맥 식구들에게 마지막 전하는 행복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품을 수 있는 만큼 품어 여름까지 이어갈 여정에 다 풀어 놓을 수 있는 행복으로 가득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드래곤형님과 상큼님의 정성으로 뒷풀이가 끝이 나면서 오늘 하루를 정리한다

 

이렇게 마지막이 될 지 모르는 함박눈의 축복속에 가는 겨울을 자축도 하고

아쉬움도 잔뜩 남긴채 이제 봄을 맞으려 한다

오는 봄은 어느새 소리없이 우리 곁에 다가와 있지만

나는 아직도 겨울의 외투속에 안주하고 있었구나 하는 아쉬움을

하삼의 마을로 흘러 내리는 계곡속을 흐르는 물길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역시 자연은 우리의 스승이며 말없는 실천으로 인간의 아니 나의

한발 늦게 반응하는 무능함을 항상 앞에서 일께워 주는 위대함이 살아 있음을

다시 한번 느끼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산을 오르고 자연을 벗삼아 훌쩍 둥지를 떠나

알 수 없는 길을 나의 고향인양 그렇게 걷고 또 걷는 모양이다

힘들지만 그래도 끝나면 누구나 아쉬우면서도 행복했다고

말들을 하는 것을 보면

오늘 하루 행복했으면 됐지 무슨 욕심이 더 있을 수 있을까?

 

행복

생각보다 더가까이 있었음을 다시 한번 느끼면서

같이 걷게 되어 행복했습니다.

특히 상큼님과 드래곤 형님

넘 고맙습니다. 그 많은 것을 준비해주시고 챙겨주시고

 

 

낙동정맥 식구님들

수고했습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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