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정맥 08 :  명동산 구간 -    ok풍력단지 임도(하삼의)에서 황장재까지                        

                                                                       

          

언제 갑오년  물오름달 열닷새 흙날 ~ 열엿새 해날 (무박)

 

누구랑 : 한돌대장님과 낙동정맥 식구들

 

어딜 : 하삼의 - 봉화산 - 명동산 - 박짐고개 - 포도산삼거리 - 여정봉 - 화매재 - 황장재     

 

               산행거리  : 낙동정맥 20.9 km   접속구간 : 1.5km 총거리 22.4 km (한돌 대장님 공지내용 )

                                                    ( 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1529 에 있습니다

        주자료 : http://san.80port.net/nakdong/nak09.htm   영덕군, 영양군 홈피

 

 

조석으로 불어오는 찬 바람에 몸은 움츠려 들지만 마음만은 이미 붐속에 들어 왔음을 

낙동정맥 7구간에서 보았던 생강나무의 여린 가지 끝에 돋아나온 움에 봄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았고

봄얘기를 주고 받던 냇물들의 한 옥타브 올라간 재잘거림에서 느낄 수 있었던 봄의 기운

산과 들에 물을 머금은 새싹들이 하나 둘 움을 터고 올라 온다는 물오름달 3월도 중순

오랜 기다림 끝에 내린 봄비와 함께 즐거운 마음을 안고 

2주 지난 지금,  과연 어떤 변화로 우리에게 봄을 기운을 선물할 지 영양땅으로 달려가 본다

 

 

 

낙동정맥 8구간 등로

 

이번 구간은 낙동정맥의 가장 많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던 영양군을 벗어나 청송땅에 발을 들여 놓고

정맥은 적당히 남진을 곁들여 줄곧 서진을 하여 내륙 깊숙이 청송땅으로 향해 파고들게 된다.

포산마을로 들어서면 임도를 끼고 걷게 되는데 낮은 만큼 마루금도 표지기를 주의해서 걸어야 하고

지금까지의 낙동정맥에서 보기 힘든 묵정밭을 자주 접해 본 구간이기도 하다.

 

 

 

하삼의 마을 정자에 도착하고

 

삼의三宜 : 삼의리는 산하곡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높은산 밑에 있다하여 산밑골로 불리기도한다

옛날에 김부자라는 사람의 아들삼형제를 삼의라불러 맏이부터 상삼의 중삼의 하삼의라 부르고 이들이 사는곳을 통틀어 삼의라함

 

 

8구간 출발을 알리는 단체사진을 남긴다

 

천마농장 이정표를 따른다

 

초반부터 더욱  풍부해진 물소리

 

이제 봄소식은 방송을 통해 멀리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가까이 있는 듯 한데도 피부로 느끼기에는 아직은 멀리 있다

쌓여 있던 눈의 잔상이 아직 가는 겨울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지만 오랜 겨울을 이겨낸

땅속에서부터 솟아나는 온기가 이렇게 계곡에 먼저 물소리로 오는 봄을 얘기해 주고 있었다

지상에 피는 꽃에서만 봄을 맞으려 했던 우리들에게 말없는 흐름으로 땅속 봄을 전하여 준다

 

 

드디어 출발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서 우틀

 

2월 보름달이 함께하는 마당두들 이정표가 있는 정맥 능선에 들어서고 

 

2월에 뜨는 달은 동동주를 먹는달이라고 했던가?

계속 우리 곁을 지켜준 보름달을 보면서 낙동식구님들은 노래 한번 떠올릴 여유가 있었는지?

맹동산에 오르자 거센바람이 먼저 반기는 중에도 모처럼 밝은 달을 보니

하루하루 살기 바쁜 우리들에게 오늘 만이라도 둥근마음을 가지라 얘기해 주고 있는 듯 하다

밝은 하늘에 가려 한동안 숨어 있다 나온 보름달이 넘치지 않게 내마음 크기 만큼만 보여 주고 있다

 

 

봉화산 방향으로

 

바로 산속으로 진입해야 한다 - 강철님 작품

 

달의 기운을 얻은 탓인가? 쉽게 도착한 봉화산

 

봉화산烽火山 (733m).

 경상북도 영덕군의 영해면 서쪽 끝 대리에 있는 산이다(고도 : 452m). 맹동산이 북쪽에, 명동산이 남쪽에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광산(廣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쪽으로 진보 남각산(南角山)에 응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서』에 "광산봉수(廣山烽燧)는 부의 서쪽 43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진보현의 남각산봉수에 응하고,

동쪽으로 대소산봉수(大所山熢燧, 영해면 사진리에 있는 봉화산을 가리킴)에 응한다."라는 기록도 나온다.

 

 

오지에 있는 탓으로 이런 소중한 역사 유적지인 봉수대시설도 관리가 안되어 오지 취급을 당하고 있다

 

대부분의 군현지도와 『대동여지도』, 『동여도』와 같은 전국지도 대부분에 광산(廣山), 광산봉수(廣山烽燧), 광산봉수대(廣山烽燧臺) 등의 명칭으로 표시되어 있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광산'으로 표시하고 봉수임을 나타내는 삼각형이 그려져 있다.

주변에 읍령(泣嶺, 지금의 울치재), 창수원(蒼水院), 무곡천(畝谷川, 지금의 남천) 등이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이름 봉화산(烽火山)은 예전에 봉화가 있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봉화산 [烽火山, Bonghwasan]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2011.12,국토지리정보원)

 

 

고도차가 심하지 않은 관계로 벌써 밝아오는 아침과 함께 명동산에 도착한다

]

명동산(明童山 812.4m)

예전 이 산아래 신동이 있어서 산 이름이 명동산이라 불러지고 있는 곳이다

경상북도 영양군의 남동쪽 끝에 있는 산이다(고도 : 812m). 영양군의 석보면 ·영덕군 지품면과 영해면 3개 면의 경계가 되는 산이다.

 

 

단체사진도 남기고 - 한돌대장님 작품

 

조선시대 영양땅의 중심은 석보였고, 영덕땅의 중심은 영해였다.

두들마을로 유명한 석보에 고택들이 즐비하고, 고을 원님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원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석보면 원리리에서 동쪽으로 5㎞쯤 가면 요원리가 나온다.  허리 ‘요’(腰)자를 썼는데,

그 옛날 석보에서 영해로 이어지는 고개를 넘기 전에 쉬어가던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화림지맥 분기봉

 

능선 분기점(삼면경계분기점) 화림지맥 

이 지점은 영덕군 지품면, 영해면, 영양군 석보면을 가르는 삼면 분기점으로 삼면봉-800봉-국가당산-독점고개-화림산-삼거리재-동해로 흐르는 기맥이 분기하며 ,

이 기맥은 송천천과 오십천의 물가름을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서진하다 바라본 포도산

 

박점고개

 

박점고개(명동재) 

박점고개는 영양쪽 삼의리 박점마을과 영덕군 영해쪽 속곡리를 연결하는 비포장 산악임도

이 곳은 주민들이 옛부터 나무 바가지를 많이 다듬어서 팔았다고 하여서 바가지점 즉 박점이라고도 불렀다 한다(신수산(61) 제보).

삼의 3교가 있는 917도로의 박점마을 에서 유래를 찾는다

 

 

식후경

 

포도산 삼거리에서 앞에 포도산은 보이지만 선두는 벌써 올랐다는 소식도 전해오고 - 이제 서진을 잠시 멈추고 남진 시작

 

 

 

포도산 사거리

 

유래를 알 수 없는 삼각점이 있는 여정봉 - 다시 서북진을 시작한다

630.5(5만 지도에는 632.1봉) 삼각점 "낙동정맥 여정봉"
박점고개와 화매재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고 지형도에 그어진 마루금을 살펴보면

이 일대가 메기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으며 630.5봉은 메기의 주둥이 부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낙동정맥 트레일 종합 안내판이 새로 설치 된 듯

 

영양구간 안내판

 

이제 포장임도와 비포장임도가 연이어 나타난다 -  50번 철탑도 지나고 

 

장구메기

이곳 지형은 묵정밭을 가운데로 두고 한 바퀴 삥 돌아 나가며 심한 맥돌이를 하는 지형으로 메기의 눈 부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구머리 마을의 북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을 작은구머리라고 하는데, 이 마을은 지형이 장구처럼 생겼다고 해서 장구매기라고도 부른다(우상술(66) 제보).

우리가 마루금을 걷다보면 느끼는 지명에 대한 한계이다. 전체의 모습을 볼 수가 없으니... 산은 기대어 사는 민초들의 것임을...

 

 

당집도 지나고 - 마음의 기도를 올리는 촛불만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국지사 남평문씨묘도 지나고

 

밭과 경계인 수랫길이 나오면서 바로 앞에 보이는 산속으로 진입해야 한다 - 잘못하면 포산마을까지 내려간다

 

포산마을 葡山里 = 원터院一일대는 아늑한 고원분지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형태를 이루고 있다.

포산동에서 제일 낮은 곳에 있는 마을로 조선조에는 이 곳에 원집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 원터는 광제원(廣濟院)을 가리킨다. 널리 사람들을 이롭게 하려고 세운 것인 만큼 병 치료뿐만 아니라

가뭄을 함께 걱정한 계기가 되었으니 사람들로서는 기억할 만한 장소가 된 것이다.

 

 

포산마을도 조망하고

 

원터라 하게 된 사연은 옛날 이 근처 고을의 원님이, 부인이 있는 영해의 속실로 가는 도중에 앞이 훤히 트인 이 곳에 앉아서 잠시 다리를 쉬고 있었다.

그 때 고을에는 심한 가뭄이 들어서 온 들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원님은 이 곳에 앉아 들을 바라보면서 가뭄을 걱정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결에 여우 한 마리가 나타나서 "어르신네 내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몇 달 전의 큰 비로 원님이 앉아 계신 뒷산에 산 사태가 났는데, 그 때 내 뼈들이 두 곳으로 나누어져 묻혔습니다.

흩어진 내 뼈를 찾아 한 곳에 묻어 주시면 비를 내려 드리겠습니다."하고 말했다.

꿈에서 깨어난 원님은 여우가 가리킨 곳에서 그 뼈를 찾아 거두어 양지 바른 곳에 정성껏 묻어 주었다.

그 후에 가뭄은 걷히고 비가 내려서 풍년이 들게 되자 주민들은 원님이 앉아 있던 곳을 원터라고 불렀다 한다(신현부(51) 제보).

 

 

수랫길과 임도를 따르다 방향이 바뀌어 화매리 방향도 조망하고

 

                                                                                 

두개의 철탑을 지나 황장재가 시루봉 사이에 보이고

 

화매재

 

花梅里  영양군 석보면 화매리 화매마을  영덕 지품면과 영양 석보면을 연결하는 고개  911번 2차선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은 탓으로 주위에서 흐르는 물들이 이 곳에서 합하여 흐른다 해서 이 내를 화매천(花梅川)이라고 하며

화매는 꽃매를 한자로 뒤쳐서 적은 이름으로 보인다.

꽃매는 옛말로 곶매이니 은 툭 튀어 나온 모양을 한 지형을 이르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는 물이니 물이 돌아 드는 곳을 일러 곶매로 한게 아닌가 한다.

땅 이름의 분포로 보아 매화 매(梅)는 상당 부분이 물(水)과 걸림을 보이는 곳이 많다.

 

 

영양군 안내판 뒤로 묵정밭이 된 듯한 밭을 끼고 오른다

 

우리 음식에서 곰삭다라는 말이 있다

음식이 곰삭으면 음식의 고유한 맛은 살아지고 전혀 다른 맛이 탄생한다

홍탁에 묵은 김치를 겉들이고 돼지고기를 더하면 삼합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다

발효식품의 막바지에 나는 냄새가 곰삭은 냄새이고 보면 묵혀두면 둘 수록 좋아지는 경우일 것이다

 

 

오르다 다시 만나게 되는 묵정밭

 

생식을 해야 할 경우가 있고 곰삭은 음식을 먹어야 할 떄도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우리 인연도 곰삭을 정도로 깊어지면

나의 본연의 모습은 잠시 잊혀지더라도 새로운 인연으로 다가온다

파릇파릇한 첫 만남의 생식도 중요하지만

회를 거듭할 수록 곰삭아지는 우리의 인연이 더욱 소중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낙동식구님들 마지막까지 완전 곰삭아진 인연으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 했으면 하는 마음...

 

 

아마 저 아래 부지런한 농부가 열심히 올라와 경작을 했을 것인데? 세월의 무상함?

 

부안 출장차 엊그제 다녀온 부안 격포의 아름다움도 잠시

새만금이라는 이름으로 갯벌이 서서히 흙으로 덮여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본과 권력이 만든 우리세대의 稀代의 작품인 새만금

미래 후손의 최대 자본 주주이신 갯벌님을 이렇게 무참히 짓밟고서 어떻게 후손을 대할지...

이왕 개발은 시작됐으니 되돌릴 수도 없고... 앞으로도 수십조가 더 들어가야 한다는데...

 

 

이제 이번 코스의 마지막을 장식할 삼면봉인 시루봉이 보이고

 

묵혀 두면 둘 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갯벌은 마지막 순간에도 우리에게 할 말은 잊지 않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 두면 곰삭은 갯벌이 되어 더 많은 자연을 선물할 수 있을 텐데..

자본의 욕심에 정치적인 욕심에 세계적인 천혜의 자원인 갯벌이 사라지는 모습이 그저 안타까울 뿐...

우리가 땅을 디디고 사는 공간은 사람의 손길과 끝없는 정성이 들어가야 곡식으로 보답하지만

가꾸지 않으면 거칠어질 수 밖에 없는 흙의 속성이 이렇게 묵정밭을 만들어 낸 것이다.

 

 

모두 힘들게 올라온 삼면봉인 532봉

 

힘을 다해 가꾸어야 할 이 땅은 정성이 부족하여 묵정밭이 되고

자연 그대로 두어 푹 삭아야만 재기능을 발휘하는 갯벌은 너무 정성이 들어간 개발로 신음하고

뭐이레 세상이...

 

 

 

532 

영양, 영덕, 청송을 경계짓는 산봉으로 줄곧 영양땅을 이어오던 낙동정맥이 청송군으로 입성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조금 내려오면 만나는 정자가 있는 임도 삼거리 - 등산로 아님 방향으로 진입해야 한다

 

황장재 이정표를 따라 임도로 내려가면 도로에서 다시 도로를 따라 올라와야 한다

 

소나무 향기에 취해 본다

 

개구멍을 통과하면 황장재

 

황장재 34번 국도   영덕군(盈德郡) 지품면(知品面) 황장리(黃腸里)

황장리 (黃腸里) 는 1세기 후기(1570년경)인 선조(宣祖) 연간에 남평문씨(南平文氏)가 들어와서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조선 초기에 이곳에서 나는 나무를 나라에서 재목으로 쓰기 위하여 황장봉산으로 봉하였으며, 황정(黃井)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황장재

 

황장재는 영덕과 안동을 연결하는 2차선 국도지만 고개마루는 4차선 오르막 차도이며 안동 간고등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고개다.

해산물이 귀했던 안동지방인지라 인근 강구, 후포, 축산의 해산물이 운반되던 주요 육로로,

이동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 등짐장수들의 애환이 서린 고개이기도 하다.

 

 

 

항구에서 갓 잡아낸 고등어는 보부상들에 의해 이 험준한 황장재를 넘어 신촌에서 하루밤을 묵은 뒤 안동으로 이동되었고,

전라도 염전에서 생산된 천일염은 부산을 거쳐 낙동강 하구를 타고 안동포구로 올라온 소금배와 만나

안동고유의 염장문화를 만들어 지금의 특산물인 "안동 간고등어"를 탄생시키게 했으니

험준한 황장재를 넘어야 했던 안동의 지리적 조건이 또다른 음식문화를 만들어 낸 셈이다.

 

 

 

일설에 의하면 진보에 있는 신촌약수는 한 등짐장수가 황장재를 넘다가 도적을 만나 낭패를 당하여 가까스로 도망쳐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사경을 헤메던 중 신촌에 있는 빨간물이 솟는 샘터에서 그 물을 마신 후 정신이 맑아지고 상처를 치유한 이후로 약수의 효험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이로 인해 각종 피부염, 속병환자가 몰려들어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신촌이라는 동네가 형성되었다 한다.

 

 

정자시설이 있는 휴게시설에서 뒷풀이

 

오늘의 최고의 요리사 니고나오님

 

 

이렇게 낙동정맥8구간도 모처럼 일찍 내려온 기쁨으로 맛있는 뒷풀이와 함께 저물어 가고 있었다.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염장鹽藏을 지른다는 말이 있다

안동 간고등어도 그 유래는 아닐 지라도 염장을 지른 것이니 한자리 끼워주면 어떨지...

옛날에는 영덕땅인 동해에서 잡힌 고등어가 안동으로 가기 위해서는 꼬박 이틀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불가능하겠지만 늘 고개를 타고 넘어야 했던 바지게꾼들에게는

소위 요즘 말하는 시간이 곧 돈이었으니 가능했으리라

그러니 얼마나 많은 고통과 시름하며 넘었을까? 괜히 아리랑이 나오는게 아닐 것이다

 

교통이 여의치 않던 시절 영해·영덕 지역에서 잡은 고등어를 내륙 지방인 안동으로 들여와 판매하려면

영덕에서는 육로로 황장재를, 영해에서는 창수재(7구간)로, 울진 쪽에서는 백암을 거처 구주령(6구간의 구슬령)을 넘어

진보를 지나 꼬박 하루가 걸려야 임동면 채거리 장터에서 물건을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알고보면 음식문화가 자리 잡는데는 많은 우여곡절을 넘기고서야 겨우 탄생하는 비밀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수많은 고개를 넘고 넘어서야 한구간을 완성했다고 하듯이...

 

벌써 이 안동간고등어를 탄생시킨 유래를 안고 있는 고개를 모두 넘었네요

낙동정맥이 아니었다면 왕조실록 위주로 생각하는 역사의 한계를 어떻게 뛰어 넘을 수 있었을까요

9정맥이 백두대간을 만들었듯이 이런 민초들의 거친 숨소리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었을 것이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염장을 지를려면 소금이 많이 필요한데 소금은 어디서 가져 올까요?

9구간에서 만납니다. 한번 연구해 보시죠?

 

영양이 본향인 조지훈의 "승무"의 시구를 빌려와 만든 외씨버선길이 영양과 청송을 상징하고

김주영객주길로, 등짐과 머릿짐에 삶을 맡기고 전국을 무대로 삼던 민초들의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김주영객주길이 있는 청송땅에 우리는 이제 발을 디디게 되었습니다.

주왕산ㆍ달기약수탕길을 우리가 걸을 수는 없겠지만

벌써 다음 구간이 기다려 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제 실력들이 너무 빨라저서 이 초보산꾼이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을 정도로

산꾼들이 다 되어가는 낙동식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하루도 넘 행복했습니다

 

모두 수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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