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북정맥를 마치며 못다한 초보산꾼의 금북정맥 이야기

 

 

이제 금북정맥길도 한구간 남았네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금북정맥길의 여름은 추천하고 싶지 않을 길이니까요

초보산꾼이 우리 금북식구들의 걸어온 길을 추억삼아 다시 한번 되돌아 볼까 합니다

산행기에서 하지 못했던 얘기도 더 할 겸, 후답자에게도 전체적인 금북의 모습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미 지나간 것은 추억이 되고,  다시 그리워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인간의 마음인 것을...

가다가 끊기고, 가다가 없어지고, 또 다시 길을 찾아 걸어가고...

다시는 길을 잃지 않고 헤매지 말아야지 하는 희망은 언제나 희망으로 끝나지만

우리는 내일도 모레도 길 위에 서 있을 것이고

우린 다시 길 위에서 길을 잃을 지라고 나무에 기대어 또 다른 길을 찾고 있을 것입니다

또 누군가 우리가 걸었던 길을 똑 같은 마음으로 걷게 될 것입니다

우리처럼 길을 잃고 헤매다 새로운 길을 찾기를 바라며....

 

 

 

임진년(2012년) 5월

힘찬출발을 알리는 작은 물결이 있었다.

바다사랑 대장님과 탱이하트 총무님, 그리고 상황봉님, 또 한사람 나 초보산꾼..

 

 

탱이하트님의 차량 봉사로 칠장사에서 베티고개까지 제 1구간이 시작된 것이다.  칠장사의 견공의 마중소리를 들으며....

그 때는 첫 출발이라 몰랐는데 지금 보니 좀 썰렁하다. 사람마음이라는 것이^^^^^

 

 

태동은 금남호남정맥 완주를 축하하고 새로운 정맥길을 모색하고자 사당에서 있었던 벙개 모임이었다(5월9일)

 

 

나로서는 바다사랑님이나 탱이하트님,상황봉님도 처음 인사를 하는 자리가 되었다.

우리 민족의 큰 줄기인 백두대간

그 대간을 함께할 수 있게 해준 3450온누리 산악회에 계속 남고자 하는 나의 욕심이었다

 

 

금북정맥

금북정맥은 충남지역 역사 문화의 보고이다. 남으로 뻗어 내리다가 다시 북으로 치솟고 서해의 푸른 물결을 따라 안흥진으로 뻗어간다

수만년 동안 축적된 태고의 전설과 민중의 삶의 질퍽한 설화들을 보듬고 있는 것이다

 

금북정맥은 백두대간의 충청권 줄기로, 경기도 안성에서 충북 진천, 충남 천안 공주 예산 보령 홍성 서산 등 13개 시·군에 걸쳐 있는

240㎞의 산줄기이며, 금남정맥과 함께 충청지역의 핵심적인 생태축을 이루고 있다.

 

 

금북정맥 덕성산에서 처음 맞이한 해돋이는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는 아름다움이었다

 

여기서 잠시 우리가 걸었던 금북정맥길에 자료를 보고 가는 것도 도움이 될 듯하다

 

"대전충남녹색연합 보고서" 따르면 금북정맥을 관통하는 법정 도로가 33개이고, 기타 포장도로가 40개, 터널이 6개, 철도가 2개,

임도가 32개 등으로 모두 113개의 도로와 철도가 정맥길을 잘라 놓은 상태라고 한다

대규모 산림 훼손의 주범인 골프장은 모두 6개(안성, 진천, 연기, 태안, 진천과 공주는 건설 중)라고 한다

금북정맥의 허리마다에 있는 송전탑(보고서에는 35개)이 마루금의 역활을 할 정도로 거의 매 구간마다 만난 것 같다.

자료를 보니 3.28km마다 우리가 도로를 만난 것이 된다. 그러니 산지가 낮은 태안 지역같은 경우 생태축 단절이 심각할 수 밖에 없다

 

 

금북정맥 첫 구간 첫 단체사진

 

금북정맥은 고려의 흔적을 여러군데에서 만날 수 있었다
10세기경 혜소국사가 머물면서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해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임꺽정의 스승인 갖바치가 머문 곳으로도 유명한 칠장사 (금북1차)

천안의 명산인 성거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만일사와 천안 성거읍 천흥리에는 고려사찰 가운데 매우 큰 규모를 자랑했던 천흥사지터가 고려의 흔적을 얘기하고(금북2차)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산의 보원사지터, 가야산 순환도로 공사로 몇개 남지 않은 보물마져 운명이 운명이란다?(금북10차)

 

 

돌탑이 있는 고려산

 

또한 금북정맥은 백제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지금도 백제군의 함성소리가 들리는 듯한 천안의 천안 위례성,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한양에서 남하해 초기 도읍지로 삼았다는 곳이다

아직도 정설이 굳어지지 않은 역사적사실이지만, 백제고도의 시작을 우리는 금북정맥에서 만났다.(금북2구간)

나당연합군에 의해 무너진 사비도성에 이어 백제 부흥군이 3년여에 걸쳐 항쟁한 본거지인 고려산성을 연기군 구간에서 만났고(금북3구간)
예산 에서는 임존성을 만난다. 임존성은 백제시대에 수도 경비의 외곽 기지였으나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했다.

다시 후삼국시대에는 견훤과 왕건이 세력 다툼을 별였던 역사의 현장이다. (금북8구간)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떠나본다

 

나마스테님과 겨울애님, 인연님, 공작산님, 완산님이 함께한 배티고개에서 시작된 2차 길에는 한층 더 풍족해졌으나 아직도 인원이?

결국 차량 2대로 어렵게 출발하고

 

 

食後景대신 食後眠으로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서 산행의 피로도 풀어보고

 

 

배티성지에 이어 성거산 순교지도 만나고

또한 천주교의 유입이 이곳 안흥진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금북정맥이 지나가고 있는 여러 지역이 순교자들의 처형 장소가 되었다.

6구간의 '수리치골', 9차의 홍주읍성,10구간의 한티고개가 그 곳이다.

백제의 숨결이 살아 있던 서운산성, 위례산성, 성거산성도 만나고... 태조산(유왕골)까지....

 

 

3차 출발은 처음으로 지하철여행이라는 방법도 택해보고

 

취암산에서 바라본 흑성산 너머로 일출은 시작되고

 

봄가뭄에 애타던 특히 충남지역을 지나며 너무 안타까웠었는데..

취암산 구간을 지나며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용혈동굴에서 옛부터 기우제를 지냈다고 해서

취암산을 지나면서 가뭄이 가장 심한 충청지방에 많은 비를 기원했는데

 

 

 

4차구간 출발 직전까지 마침 비가 전국의 대지를 적셔주어 우리의 마음까지 가벼웠었다.

첫 선을 보인 애마와 함께하니 드뎌 고생 끝? 내집마련꿈에 비교할까?

 

 

(하지만 그때의 가뭄의 피해가 지금 김장철임에도 배추가 흉작이라...

5,6월 가뭄에 이제는 장마를 걱정해야 했던 7월

결국 계속되는 태풍에 가뭄이 더해 올 논농사를 비롯 밭농사까지 망치고 말았으니... 올 겨울 너무 춥다.. 살기가...)

추억의 철길 건널목도 지나고...

 

군부대가 가로막고 있는 구간을 차로 이동하는 색다른 경험도 하고...

 

 

금북정맥길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비도 맞아보고...  복많이 받은겨^^^^

 

 

조선시대엔 군사는 물론 진상품이 이동한 경로였고, 과거를 보거나 장사를 위해 선조들이 한양으로 간 길이었던 차령고개

 

한반도 동맥과도 같은 길이었던 삼남대로의 중요한 요충지였던 차령, 차령산맥이라는 어원이었던 차령

하지만 차령터널의 완공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해주던 현재의 차령고개, 옛 부귀영화는 어디로 갔을꼬?

우리가 만났던 금북정맥에 있던 모든 고개들은 그 지역 사람들의 소통의 고개이고, 삶의 근원이기도 했겠지만

우리가 경부고속도로가 중심축이었 듯 이곳 사람들은 삼남대로로 가기위한 고개였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인 차령이 이정도이니, 격세지감을 넘는 현장이었다.

 

 

5구간인 곡두고개에서 차등고개까진 왜 여름에 정맥을 피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구간이다

 

 

이렇게 벌목을 해 놓아 보기에는 좋지만

큰 나무가 없으니 잡목이 자랄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주고, 거기에 점점 낮아지느 고도로

긴긴 여름 밤, 우리는 잡목의 덕에 걸리는 서막을 알리는 코스로 기억된다... 

 

여름휴가로 1차를 쉬고 다신 만난 6구간,

5구간 절대봉을 절대 만나지 않았어야 했는데.... 결국 6차 장학산에서 다시 한번 잡목에 기력을 잃고...

가장더운 견우직녀가 만나는 달에, 이번에도 가장 힘들었던 잡목구간으로 기억된다,  너무도 길게`````  힘들게~~~

 

 

하지만 이런 무릉도원 같은 순간도 있으니(야광고개 직전)

 

 

더위와 잡목, 그리고

잘 못 들어선 마루금을 알면서도, 산줄기에 기대여 평생을 살아 오고 있는 우리 이웃들을 만난다는 이름아래

사라골 마을로 내려오기도 하고,

 

잡목구간이 발목을 잡을 뿐만 아니라 산꾼들의 마음까지도 마루금에서 발길을 돌리게 했던 구간.

우리가 정맥이라는 큰 길을 걷는 것을 핑게로 이 무더위에 이런 잡목구간을 굳이 고집하여 마루금을 이어갈 필요는 없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그런 이유로 다시 한번 학당마을로 내려왔으니

 

 

 

학당마을 당산나무

 

 

수송대장님의 배려로 효제고개에서 사온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추기는 것 까지는 좋았으나

문박산 338봉이 그렇게 높게만 느꺼졌는데... 내 기억에 가장 힘들었던 구간으로 기억된다.

 

 

문박산 직전 잡목구간

 

 

꽝수님의 차량봉사로 줄어든 인원으로 다시 시작된 7차

오봉산 직전 임도에서 만난 소나무 행렬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시원한 바람과..

 

 

이때까지 산위에서 부는 솔솔바람에 흥겨웠지만

백월산 직전 보물상자님과 인연님이 벌에 쏘이는 아찔한 순간도 맞이하고....

 

 

백월산을 지나 이제 금강이 없는 금북정맥이 시작되는

 

이제 금북은 다시 내포가 시작되는 북서진하게 된다.

 

 

금북식구들의 사고 소식과 아들면회로 다시 한차레 순연된 가운데 다시 만난 8차

여전히 적은 인원으로 꾸려나가자니...

결국 생각지도 않았던 고속버스 마지막 막차를 이용하기에 이르고   

 

식구들이 많으면 아무런 걱정없이 짜여진 각본대로 그져 몸만 움직이면 만사형통이련만...

사람이 궁하면 통한다고... 이렇게 정맥산행하면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우리는 몸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한팀은 밤에, 또 한팀은 아침 첫차에...

 

 

억새의 명품 산행지 오서산?  좀 그렇지??

 

하지만 서해의 등대라는 명성에 맞게 전망만큼은 최고였가.

또한 백제 멸망 후 오서산 일대는 복신(福信), 도침(道琛) 등 유민들이 나당연합군에 저항했던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다.

한용운, 이응로, 김좌진, 윤봉길, 추사 김정희 같은 야성(野性)이 강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수 밖에....

 

 

아홉째 구간은 그야말로 적은인원으로 정맥길을 간다는게 왜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구간이다

승용차 두대로 움지이다 보니 사람고생, 마음고생, 산은 갔으나 걱정이 더 무거우니...

안전산행보다 더 중요한게 이동할 때 안전운전인데.....

 

만해 한용훈선생님과 조선말기 국권 회복을 위해 봉화를 처음 올렸던 하우고개의 홍주병오의병주둔유지비도 만나고,

고개에서 죄인이나 가축을 죽였다고 하여 생긴 듣기에도 섬찍한 살포쟁이(殺捕峙) 고개도 만나봤다.

 

 

거의 옛 명성을 잃어가는 옛고개중에서도 그래도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는 수덕고개

대형마트에 밀려 골목상권이 무너지고, 우리의 친근한 이웃인 전통시장이 설자리가 없어지는 것과 똑 같은 현상일게다

 

사실 모든 고개들이 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나름대로 명성을 이어갓을 것이다.

도로가 넓혀지고 포장이 되면서 사람대신 차가 고개를 넘나들었지만

사람도 힘들면 시원한 고개마루에서 쉬어 가듯, 차도 고개를 넘을 때는 한번쯤 쉬워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름대로 고개에 상권이 있었을 것인데, 누가 이제 생각하랴 이 고개들의 애환을....

물론 터널이 뚫리면서 오지가 새롭게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소통의 역활도 담당하게 되는 긍전적인 모습이 더 크겠지만?

 

 

탱이하트 총무님이 즐기신 흔들바위의자 모양의 멋진 바위를 알바 덧에 만나보고

이 모습은 자주 생각나는 장면이다. 스크린의 잊혀지지 않는 한 장면처럼.... 알바도 품격이 다르다니까?

 

 

내포물결따라 다시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서울에서 가까워지면서 당일 산행으로 바뀐 첫 산행 10차

첫 차 고속버스를 이용하려니 정신이 없다

해미순교성지인 한티고개를 지나 만난 가야산 정상

 

덕숭산에서 뻗어나가다 솟구쳐 일어난 가야산은 아산과 예산을 가르며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포 평야로 불어 닥치는 외풍을 막아준다

임진 병자년 두차레의 난리도 이 곳에 미치지 않았고, 토지는 비옥하고 평평하며 넓고, 물고기와 소금이 넉넉하여 대대로 사대부가 많았다고 한다

 

 

가야산에서 내려와 백제의 미소가 있는 수정봉을 바라보며 걸었던 소나무 숲길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다시 걷고 싶을 숲길이다

 

 

모과울고개 직전 단풍나무 밭에서 마지막 가을의 풍경을 담아본 11차 금북길

인생의 산물인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해방되는 자유의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어찌 됐든 만추의 여행이었다

 

 

이번 구간은 산행보다는 서산의 산해진미를 느꼈던 구간으로 생각된다

상황봉님이 직접 골라낸 순 국산 굴

 

피조개까지

 

나도 처음 맛본 게국

 

현지주민들이 게국을 맛이 없다고 추천했을 때는 고개를 흔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직접 접해 본 게국에서 우리는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장사하는 분들은 생선하나라도 더 팔아야 먹고 살기에 좋은 생선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 팔다 남은 부스러기 게를 이용 대충 빻아 거기에 흔한 시래기를 넣고 된장에 간단히 먹을 수 있게 만든 먹거리이다

그러니 현지 분들은 먹고 싶어 먹은 음식이 아니고 살기 위해 먹었던 먹거리 였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니 질리기도 할 것이고...  우리 선조들의 질긴 삷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던 음식이었다.

 

 

올해를 넘기지 말자고 해서 만들어낸 작품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1박2일" 금북정맥길인 12차

바다사랑대장님의 차량봉사로 시작된다

 

 

 

서산시와 태안군의 경계지점인 굴포운하지가 던지는 절박했던 당시 역사를 다시 느끼게 됐던 구간이다 

지금이야 돈으로 세금을 걷으니 이해할 수가 없겠지만

당시에는 돈(엽전)이 있으면 뭐하랴. 삼남지방의 쌀이 올라와야 임금님도 밥을 먹지

그렇다고 지개로 일일이 지고 올라올 수는 더욱 없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물류비가 장난아니겠지?

 

그렇다고 경기도 지방에서 나는 쌀이라 해봤자 주민들 먹고 조금 남으면 팔고

예나 지금이나 서울은 만원이니, 그 많은 사람들 입에 풀칠이라고 할라치면 곡식은 당연이 모자랐을 것이다

그래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세곡을 운반하기 위해 굴포운하를 생각했을 것이다.

 

 

 

고려 말의 충정왕 때부터 공양왕 때까지 약 40년 동안은 나라의 재정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조운로 공사 실패와 세곡 조운선들의 난파, 거기다가 왜구들의 조운선 약탈 등이 겹쳐 조정의 관리들에게 녹봉조차 줄 수가 없었다.

계속되는 세곡미 운송 부진으로 왕도 하루에 한 끼를 겨우 먹을 정도였다. 그것은 결국 나라의 쇠망으로 이어졌다

 

 

 

굴포운하지(堀浦運河址)는 고려 인종 12년(1134년)부터 조선 중기 임진왜란 직전까지 400여년간 가로림만 상류인

팔봉면 이송리와 천수만으로 흘러드는 흥인천 사이의 좁은 목 3km를 굴착해 수로로 연결하기 위해 공사를 벌였다.

하지만 암반이 많은데다 조수에 밀리는 토사 등으로 인해 결국 실패한 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계획에 없던 야간 산행을 하는 바람에 태안읍내의 야경을 선물받고 - 백화산에서 본 야경

 

 

백제의 미소인 서산 마애삼존불이 있다면, 또 다른 한 축인 태안 마애삼존불을 확인하지 못함이 아쉽기만 하다

 

외국 문물을 물론 대륙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해상을 통해 들어오는 문물 중에는 대륙을 통해 들어올 수 없는 문물이 사람이 사는 세상에 없을 수가 없다

대표적인 것이 천주교의 유입이었을 것이다. 박해의 역사를 우리는 금북정맥길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또한 마애불은 외국 문물이 안전하게 운송되기를 비는 역활을 비는 마음으로 세겼다고 한다.

 

 

 

서해를 향하여 삿대질을 하려고 내닫고 있는 형국이라고 하는 태안반도의 본격적인 여행을 2일째 시작한다

태안반도의 두축인 소원면과 근흥면도 역시 3면이 바다인 반도인 면이다. 

 

 

근흥면은 일찍 고려시대부터 여송무역선이 드나드는 국제항으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소원면의 만리포, 천리포 해수욕장은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어 여름철이면 욕객들이 운집하고 있는 명승지이다

 

 

자료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83279

         한겨레신문

         대전일보

 

 

이렇게 한 구간만 남기고 조용히 마지막 구간을 기다리고 있다

금북줄기가 품고 있는 역사와 현재의 공존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의미있는 길이기도 했고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대전충남녹색연합 보고서"에서 본 자료에서 만날 수 있었다

 

우리가 산길을 걷는 다는 것은 대화하는 것이다

걸으면서 끝없는 나와의 대화

자연을 만나면 함께 호흡하는 자체가 대화이며

걷다가 들판을 보면 거기에 삷의 지게를 지고 살아갔을 농부와의 대화이고

바다를 보면 그물코 하나하나에 삶을 얘기했을 어부님들과 대화

산길을 걷다 보면 저절로 또 다른 내가 동행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 금북식구들은 자연이 나에게 "너는 누구냐"고 묻는 다면

자연과 또 다른 동행을 하는 자연인임을 말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이 금북정맥길을, 금북식구들과 함께 걸으면서 느낀 이 초보산꾼의 마지막 아쉬움을 전하는 이야기이다.

 

 

감사합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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