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안 5대 계곡 01  : 옥류동천(2차 답사) -   옥류동과 송석원 각자를 찾아서(옥류동 마을)

 

 

언제 :  임인壬寅년(22년) 물오름달 03월 열이틀(흙날)

 

 

누구랑 :   초보산꾼

 

 

어딜 :   경복궁역 ~ 우리은행 효자동지점 ~ 옥류동 각자 ~ 수성동 계곡 ~ 경복궁역

 

              더 많은 사진은  https://blog.daum.net/kmhcshh/5681  

 

 

      **  본 답사기는 전문가가 이니기 때문에 참조만 하세요..  *****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에 조금만 움직이면 만날 수 있는 성곽돌기와 함께 도성안의 계곡은 최고의 상품이였나 보다.

지금이야 복개와 개발로 옛 풍취는 거의 사라져 실감이 나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인왕산 아래 옥류동천과 북악산 사이의 백운동천과 북악산 동쪽의 삼청동천

거기에 또 다른 도성의 약한 고리이지만 낙산 서쪽의 쌍계동천, 목멱산(남산) 북쪽의 청학동천을 5대 계곡으로 꼽았다고 한다.

옥류동천을 품고 있는 옥인동은 인왕동과 옥류동 마을이 합쳐 탄생했는데 첫번째 답사에서 옥류동 각자를 찾아 산능선 줄기를 따라 답사했다면

오늘 2차 답사는 복개된 계곡을 따라 옥류동 각자를 지나 상류 청휘각까지 답사하고 다시 인왕동 마을이 있었던 수성동 계곡으로 내려온다.

 

 

 

 

 

다음지도에서..  옥류동 각자 답사 후 초소책방을 지나 옥류동천(수성동계곡) 본류로 원위치..  청색은 1차 답사 코스

 

 

옥류동천玉流洞川은 수성동 계곡에서부터 내려오는 인왕동(仁王洞)의 본류, 옥인동 171-1번지 앞에서 본류로 합류하는 지류 누각동천, 누하동 77-15번지 앞에서 본류로 합류하는 옥류동(玉流洞)의 물이 합쳐져 현재의 우리은행 효자동지점 남쪽에서 백운동천과 합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옥류동천의 본류 일대를 인왕동(仁王洞), 현 옥인동 47번지 일대를 옥류동(玉流洞)이라 하였으며, 이 둘을 합하면서 옥인동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반원형으로 형성된필운대6길은 옥류동천이 한 해에 가장 높이 범람했을 때의 높이를 따라 생긴 골목이다. 

 

조선 시대의 옥류동천의 다리 목록이다.

기린교(麒麟橋) : 수성동 계곡에 있는 통돌로 된 다리로, 길이가 3.8 m에 폭이 0.9 m이다.

운교(雲橋) : 누각동천의 합류부와 옥류동 물길의 합류부 사이 지점에 있었으며, 도성도(都城圖)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석교(石橋) : 옥인동 47-144번지(필운대로9길 8)앞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벽수산장으로 들어가던 옥류동 쪽 물길을 건너던 다리로, 오홍교(五虹橋)라고도 하였는데, 그 난간석의 일부 부재가 옥인동 56번지 안에 남아 있다.

 

자료 :  위키백과  옥류동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위키백과를 따라가는 옥류동계곡..  옥류동 각자와 송석원 각자  -    다음지도

 

 

김수항이 청휘각을 지은 지 꼭 100년 뒤 옥류동에 새바람이 불었다. 장동 김씨, 의령 남씨 등 권력 가문이 독차지했던 옥류동에 중인이 몰려들었다. 그 선두 주자는 옥계시사(옥류동 시모임) 또는 송석원시사(송석원 시모임)를 만들어 활동한 중인 문인 천수경, 장혼 등이었다. 옥계는 옥류동과 같은 뜻이며 옥류, 옥천, 옥동, 옥류천으로도 썼다. ‘송석원’(소나무와 돌 정원)은 천수경이 붙인 옥류동의 다른 이름이며, 그의 호이기도 하다.  

송석원 세 글자는 이 시기 옥류동에서 중인이 장동 김씨나 사대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증거다. 마지막으로 청휘각을 소유했던 장동 김씨 김학진은 ‘일양정기’에서 이곳을 ‘옥류동 송석원’이라고 썼다. ‘옥류동’은 장동 김씨가 역사에 새긴 이름이고, ‘송석원’은 중인이 역사에 새긴 이름이다.

 

자료 :  [제1369호][역사 속 공간] 사대부와 중인, 옥류동을 공유하다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21 (hani.co.kr)

 

 

 

 

 

08:11분   경복궁역 4번 출구로 나와..  청계천 지류중 하나인 백운동천 복개 도로인 자하문 터널 방향으로..

 

자하문터널 방향..  우측이 적선골 길건너 좌측이 세종마을 음식 문화거리..

 

08:15분   이제 백운동천과 헤어지고 수성동 계곡으로 더 알려진 옥류동천 합수점인 우리은행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들어가고..

 

08:18분   서울미래유산인 이상의 집..  옥류동천은 수성동계곡 답사에서 자세히 만나기로 하고..

 

08:21분   옥류동천은 도로건너 계속 진진..

 

08:22분   역시 서울미래유산인 대오서점도 지나고..  내려오면서 다시 만날 예정..

 

08:24분   필운대로와 만나 수성동 계곡으로..

 

필운대로를 건너기전 통인동 시장 후문쪽에 지금 답사하고 있는 옥류동천 안내문이 있다..

 

 

현위치 지도에서..  자하문로길이 백운동천이고 이상집터에서 수성동계곡까지가 백운동천 지류인 옥류동천 본류이다.

 

바로 옥류동천 본류와 헤어지는 누하동 77-15번지 앞 옥류동玉流洞 계곡 갈림길..  옥인1길을 따라 간다..

 

옥류동천의 지류중 하나인 옥류동 계곡을 따라가는 옥인1길..  계곡이 하수구로 변한 복개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설물도 보이고..

 

되돌아 본 옥류동천과 옥류동 계곡 합수점..  이제 옥인동의 유래가 되었던 지명 중 하나인 옥류동 마을을 걷게된다..

 

08:33분   신원 빌라가 앞을 가로막고..  옥류동 계곡은 신원빌라 좌측이지만 막혀 있어 우측으로 해서 우회하고..

 

신원 빌라 좌측 길 바닥에 계곡이 하수구로 변한 복개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흔적이 확인되지만 길이 막혀 있다..

 

08:35분   전국 국어교사모임이라는 건물을 지나..

 

08:36분  엉컹크길로 불리웠다는 필운대로9길을 만나..  옥류동 계곡은 좌측으로 해서 이어진다..  

 

 

벽수산장 양관(洋館)은 1935년에 완공되었고, 1954년 6월부터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언커크) 본부가 입주하여 사용하였기에 1970년대 후반에 고급 주택지로 개발되면서 필운대로9길은 ‘언커크’가 발음이 변한 말인 ‘엉컹크길’로 불리게 되었다..  송석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처음 서촌을 답사할 때는 이 길이 '엉컹크길'인줄 몰랐었다는..  집이 거의 없었을 때는 양관만 보였을 터..   사진 자료 :  초보산꾼

 

 

08:36분 ~ 08:54분   잠시 송석원 자료 답사를 위해 우측으로..

옥류동과 관련있는 송석원과 벽수산장 답사기..  https://blog.daum.net/kmhcshh/5683  초보산꾼

 

 

 

08:54분   좌측으로 들어서면 옥인동 47-144번지(필운대로9길 8)앞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석교터..

이제는 인왕산이 보이기 시작하는 우측 필운대로 9가길을 따라 올라간다..  이제 옥류동 각자까지 빠른 길로 답사한다.

 

석교터 우측에 있는 군인아파트 맞은편 세종아파트내의 주차장에 석교 부재 흔적이 남아 있다..

 

 

석교(石橋) : 옥인동 47-144번지(필운대로9길 8)앞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벽수산장으로 들어가던 옥류동 쪽 물길을 건너던 다리로, 오홍교(五虹橋)라고도 하였는데, 그 난간석의 일부 부재가 옥인동 56번지 안에 남아 있다.

자료 :  위키백과  옥류동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08:56분   바로 송석원터가 있었던 갈림길..  좌측 계단위에 그 흔적이 남아 있고 옥류동 계곡인 우측으로 가면 송선원터 각자가 있었던 곳이다..

 

좌측 계단은 현재 남아있는 부속건물 2개중 서용택 가옥인데 윤덕영의 소실이 살던 집으로 알려졌고 입구에 흔적이 남아 있다..  

 

자료 :  초보산꾼..  현재는 철거된 1차답사시 내외주가라는 집이 있었는데..  대문 틈 사이로 볼 수 있었다는..

 

웅벽을 만들면서 세면으로 덧칠을 하는 바람에 바위에 음각된 송석원 각자까지 사라졌다고...  옥인동 47-253번지

 

1817년 음력 4월 김정희는 송석원시사가 모이던 뒤편 바위에 가로로 ‘송석원(松石園)’ 각자를 새기고 그 옆에 ‘정축청화월소봉래서(丁丑淸和月小蓬萊書)’라고 관지를 달았다. 송석원 각자는 한 변의 길이가 4치인 정사각형으로 새겨졌다.  이 각자의 위치는 현재 불분명한데, 주민들은 각자가 옥인동 47-253번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료 :  송석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송석원터에서  좌측으로 해서 오르면..  벽수산장의 양관으로 알려진 건물이나 가재우물터등의 흔적은 우측으로 가야..

 

그럼 옥류동 각자가 있는 암반 위에 서울교회가 보이기 시작하고..

 

09:06분   우측 호천재라는 카페를 보면서 진행하면..

 

그럼 호천재옆을 지나면 암반이 확실히 나타나고..  암반 아래에 옥류동 마을의 유래가 되었던 옥류동 각자가 있다..

 

1차 답사시는 비어 있는 집 뒤로 각자가 있어 철거하고 개방했으면 했었는데 다행히 현재는 철거되고 무슨 공사인지 하고 있고..

 

현재 공사중인 모습..  그런데 각자 자리로 추정되는 곳은 가려놓아 보이지 않고..  또 와야 하나?

 

1차 답사시 담벽 넘어로 손을 올려 어렵게 찍은 사진..  '옥'자만 확실히 보였었다.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고..

 

2019년 2월 서울시는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360 집 뒤편 바위에서 ‘옥류동’(玉流洞)이란 각자(새긴 글씨)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각자는 조선시대 서인 노론의 지도자인 송시열(1607~1689)의 글씨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옥류동은 옥빛의 맑은 물이 흐르던 이 골짜기의 옛 이름이다. 이 각자는 이 일대의 오랜 소유자 집안이던 장동(신안동) 김씨 김학진의 <일양정기>(1913)에도 나오고 언론인 김영상이 쓴 ‘서울 6백년’ 연재 기사(1959년)에도 소개됐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이 일대에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면서 어느 순간 사라졌다. ‘옥류동’ 글씨는 거의 60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자료 :  [제1369호][역사 속 공간] 사대부와 중인, 옥류동을 공유하다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21 (hani.co.kr)

 

 

 

09:13분   이제 서울교회로 올라가는 길과 만나는 옥류동 각자 위로 올라오면 날이 개고 빛나는 집을 뜻하는 청휘각 안내문이 있다..

 

김수항은 1683~1684년 옥류동에 ‘육청헌’(여섯 그루 사철나무 집)이란 살림집을 마련했고, 1686년엔 샘 부근에 ‘청휘각’(날이 개고 빛나는 집)이란 정자를 지었다. 육청헌은 여섯 아들이 모두 성공하길 바란 집이고, 청휘각은 자신의 휴식 공간이었다.   자료 :  한겨레21 중에서..

 

 

09:15분   이제 옥류동 각자 답사를 마치고 옥류동 계곡 상류를 더 답사해보면..

 

09:19분   옥류동 계곡 상류를 계속 따라오면..  '인왕산 숲길' 둘레길을 만나고..  상류로 더 이상 오를 수는 없고 좌측으로 해서 저 건물로 오른다..

 

잠시 우측으로 가면 위항문학 안내문이 있다..  방금 올라온 옥류동 계곡에 이런 의미가 숨어 있다.

 

좌측으로 조금 내려오다 인왕산 숲길과 헤어지고 치고 오르면..

 

 

09:28분   고개위에 더숲초소책방을 만난다..  물은 고개를 넘을 수 없으니 옥류동 계곡 상류는 여기가 아닌 것 같고..

저 고개를 넘으면 백운동천의 또 다른 지류인 김상용 집터에 있었다는 백세청풍 각자가 기다리고 있는 청풍계淸風溪를 만날 수 있다..

 

2020년 대한민국 공공건축상에 빛나는 건물이다..

 

초소 책방에서 다시 내려오면..  인왕산 정상 방향으로 옥류동 계곡은 이어지고 있고..  더 이상 답사 불가..

 

09:33분   현위치 전망대가 나오고..

 

옥류동 각자 암반과 위로 서울교회가 보이고..

 

경복궁에서 시작하여 올라온 길이 거미줄처럼 보이고..  화살표가 군인아파트로 옆에 있는 세종아파트 부근에 벽수산장 정문이 있는 곳이다..

 

09:40분   수성동계곡 상류를 만나 옥류동 계곡 답사를 마치고 이제 옥류동천 본류 답사를 시작한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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