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0온누리 산악회 8월 정기산행 - 괴산 낙영산(684m) 도명산(643m) 화양구곡 연계 

   

             

 

일시 : 을미년(15년) 타오름달 열닷새 흙날        

  

인원 : 3450온누리 산악회 산우님들

 

어딜 : 공림사 ~ 낙영산 ~ 도명산 ~ 마애석불군 ~ 학소대 ~ 화영계곡 주차장

 

 

삼복지간에는 더위가 심하기 때문에 몸의 기운이 쉽게 약해져 사소한 일조차도 힘들고 손하나 까딱하기 싫은 나날이다

그래서 삼복지간에는 입술에 붙은 밥알도 무겁다는 속담이 생길 정도로 여름나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각종 보양식으로 원기를 회복하고 나름대로 방식으로 여름나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끝자락이 보이는 듯하다

계절은 돌고 돈다는 말을 실감하 듯 아침 저녘으로 선선함을 느끼는 것을 보면 몇 일 지난 입추의 힘을 느낄 수 있지만

모든 살아있는 생명은 언제나 마지막 힘을 내듯 절기도 말복을 두어 우리에게 긴장의 끈을 놓지 말라함을 얘기해 준다

말복의 시샘의 끝자락에 떠나는 3450온누리 산악회 산우님들과의 도명산 산행을 떠나본다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2622 에 있습니다

 

 

 

도명산 낙영산 등로 - 참고용

 

 

 

괴산군은 600년 전인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괴산(槐山)으로 굳혔다. 괴산의 '괴(槐)'는 회화나무 또는 느티나무의 뜻을 담고 있다.
느티나무는 수령이 길고 잎이 무성하며 악귀를 쫓는다 해서 예전 관아와 마을 입구 또는 고개에 많이 심어 오늘날까지 노거수로 많이 남아 있다.
느티나무 '괴'는 존귀함을 뜻해 왕이 있는 궁궐을 '괴신(槐宸)', 최고의 행정기관인 의정부를 '괴부(槐府)',

나라의 외교에 관한 문서를 맡아본 승문원은 '괴원(槐院)', 3정승의 자리를 '괴위(槐位)', 3정승의 지위를 나타내는 말로 '괴정(槐鼎)'이라고 불렀다.

느티나무를 지역의 상징나무로 지정하고 있는 괴산군애 있는 낙영산과 도명산 그리고 화양계곡으로 여행을 떠나 본다

 

 

 

 

괴산땅 청천면의 천년사찰 일주문을 통과하여 공림사 대형 주차장에 도착하고

 

소형주차장을 지나 공림사는 우측, 낙영산은 좌측

 

김희석님의 체조로 하루의 여정을 시작하고 - 이번에도 명품 제자리 걷기 넘 좋았습니다. 항상 열정에 감사합니다

 

먼저 단체사진을 남기고... 물놀이팀과 산행팀이 자연스럽게 22명씩 나누어 진행한다 - 우달대장님 작품

 

천년을 살아오며 괴산의 자랑이며 공림사의 역사와 함께 해온 느티나무 보호수

 

공림사 전경

공림사(公林寺)   

공림사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로 널리 알려진 신라 경문왕이 국사(國師)의 지위를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고 물러나서 초가를 짓고 수행에 전념한 자정선사(慈淨禪師)가 창건한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나라의 부름을 거절했지만 선사의 고고한 성품에 감복한  경문왕이 초가자리에 절을 세우고 친히 '공림사'라 이름 지어 사액하였다

조선중기에는 법주사보다 더 흥했으나 전란을 겪으면서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근래 다시 지은 건축물이다.

자료 : 공림사 홈피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며 오름길은 계속되고

 

낙영산 안부인 삼거리에서 0.5km를 더 올랐다 내려와야 한다

 

오르다 노거수 하나가 전당대를 형성하며 쌀개봉으로 이어지는 조봉산 정상을 담아 본다

 

우리가 공림사 입구에서 보았던 느티나무 숲이 만들어 낸 고목군락과 우뚝 솟은 희디 흰 바위산인 낙영산이 펼치는 조화

산에 들면 적당한 암벽과 그리고 곳곳에 자리잡고 모진 세월의 풍상을 가득안고 서 있는 민족과 함께 늙어 버린 노송

이들이 펼치는 경치가 얼마나 아름답고 빼어났으면 수 천리 밖 중국 당나라 고조의 세수대야 물속에까지 비출 수 있었을까

전설같은 얘기가 전하지 않아도 저절로 느낄 수 있을 만큼 낙영산이 보여주는 자화상이다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수면에 떨어진 그림자인 낙영산(落影山)를 찾아 중국의 황제가 찾아 보려 애쓴 것이다

 

 

낙영산 정상 단체사진 - 일부 우달 후미 대장님 작품

낙영산(落影山746m)   

화양구곡의 남쪽인 청천면 사담리에 있는 바위산으로 암곡미 (岩谷美)가 뛰어난 산이다. 

낙영산이란 뜻은 산의 그림자가 비추다 혹은 그림자가 떨어지다는 뜻으로 , 신라 진평왕 때 당 고조가 세수를 하기위하여 세숫물을 받아 들여다보니

아름다운 산의 모습이 비친지라 이상하게 여겨 신하를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한 후 이 산을 찾도록 했으나 나라 안에서는 찾지 못하였는데

어느 날 동자승이 나타나 이산은 동방 신라국에 있다고 알려줘 신라에까지 사신을 보내 찾아보았으나 신라에서도 찾지 못해 걱정하던 중

한 도승이 나타나 이 산의 위치를 알려주니 그 산을 찾아 산의 이름을 낙영산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해진다

 

 

다시 삼거리 안부로 내려와 식후경을 하고

 

도명산 이정표를 따라 소나무 지대도 지나면서 힐링산행

 

암릉지대를 만나

 

미륵산성 안내판이 있다

 

암릉에서 즐기다 일부는 비탐방코스인 암릉을 그대로 타고 오르고 일부는 우회길을 제촉한다

 

암릉인 슬랩지대에서 본 기차바위

 

당겨보니 정말 기차같다

 

산행기를 위해 기존의 등로로 우회하다 두개의 안부를 지나니 도명산 0.2km 이정표가 보인다

 

정상에 있는 안내판

 

도명산 정상에서 본 조봉산과 가운데 코뿔소 바위산 그리고 좌측으로 낙영산으로 이이지고 그 뒤로 괴산의 또 다른 명산 우측 금단산 좌측 덕가산 

조봉산(680m) 충북 괴산군 청천면 상신리 낙영산과 이웃해 있는 조봉산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각종 기암괴석으로 조각된 듯한 바위만물상들이 마치 새의 입부리처럼 뾰족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하여 산 이름을 조봉산이라 지었다.

 

 

낙영산 뒤로 보이는 우측 묘봉과 상학봉으로 이어지는 속리산 서북능선, 그리고 좌측으로 속리산의 주능선을 당겨본다

 

도명산 정상에서의 후미 단체사진 - 꼴두산님 작품

도명산(道明山 장군봉 650m )

문장대로 이어지는 속리산이 만들어 내는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조망터를 가지고 있는 도명산은

국립공원 속리산에 속해 있고  천하 절승지로 알려진 화양구곡의 남쪽을 지키고 있는 산으로

9부능선에 있는 낙양사터 마애석불은 도명산 제1경승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크고작은 바위 다섯개가 지키고 있는 정상에서 북쪽으로는  화양동 계곡과 군자산, 칠보산이 펼쳐지고

동으로는 대야산 그리고 남으로는 낙영산 주봉산 멀리 문장대로 이어지는 속리산 능선을 볼 수 있다

도명산(道明山)은 옛날 어느 도사가 이 산중에서 도를 깨달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정상 부근에 있는 마애불상이 화양천으로 마지막 맥을 다하는 아쉬움을 붙잡고 방점을 찍는다

 

 

 

도명산 정상 암벽에 올라 ...  오랜만에 초보산꾼이 자화상을 남기다  -  꼴두산님 작품

 

정상에 서는 순간 나는 자유의 여신상이 되어 세상을 향해 손을 들어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는 생각에 젖어드는데

앞 옆을 보는 순간 낭떠리지 바위 끝에도 바위 틈 사이에도  터줏대감처럼 용케도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도  

거친 분재의 달인에 손을 거친 듯 하면서도 품격만은 지키려는 단아한 모습으로 세상을 향하고 있는 소나무들이

부질없는 욕심으로 가득 차있는 나에게 까지 엷은 솔잎사이로 햇살을 담아 무한한 미소를 준다 

 

 

도명산 정상의 소나무들

 

 

비록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한 뼘도 안되는 땅도 내 땅이라 여기고 만족하며 자연이 주는 사계를 안주삼아 풍월을 낚았으니

비록 생존의 몸부림으로 볼품없이 자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서 더욱 고풍스럽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나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그림의 완성과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학이라도 한 마리 앉혀 놓고 싶은 맘 굴뚝같지만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알기에 그저 이렇게라도 자라준 소나무에게 고맙다고 말해야겠다

 

 

 

 

 

밀림숲에서는 활엽수와의 경쟁에서 도저히 살아 남을 수가 없어 비록 이렇게 척박한 곳에 자리를 할 수 밖에 없는

슬픈 자화상의 소나무이지만 이렇게라도 살아 남았기에 이제는 남 부럽지 않은 자유의 여신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의지할 곳이 없다보니 옆에 있는 바위에 기대어 잠시 실례를 하거나 홀로서기를 하다보니 

살아온 내력이 그대로 풍체에서 묻어나는 모습으로 남았기에 우리는 소나무를 민족수(民族樹)라 부르는 것이다

 

 

 

정상에서 바라본 화양구곡이 있는 화양계곡이 길게 누워 있다

 

조금 내려오면 도명산 마애불상군이 있는 괴산 도명산 제1 경승지로 알려져 있다

 

도명산 마애불상군은 암벽에 새겨진 거대한 삼존상으로 당대의 불상을 대표할 만한 우수한 작품이다.

본존불상은 현 높이 9.1m 정도이지만, 깨어진 부분까지 감안하면 15m가 넘는 대불상이며, 삼존 모두 장대한 불상들이다.

본존불상은 얼굴이 2m나 되는데 다소 도식적이지만 이목구비가 시원스럽고 큼직하다.

왼쪽 협시상은 타원형의 얼굴과 둥근머리, 이목구비 등이 약간의 부조기법으로 만들어져 세련된 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목 이하는 선각위주이며 천의자락, 신체의 굴곡 등은 다소의 곡선미가 있다.  - 자료 : 괴산군청

 

 

 

하늘을 가리는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있는 부처님의 발끝에서 물이 샘솟고 있어 산에 오르는 사람들의 목을 추겨주었다는데 지금은 식수 불가이다

 

삼체불을 되돌아 본다

 

철다리가 나오면서 지나자 마자 계곡너머로 코끼리 바위가 있다는 능선이 조망되고

 

드디어 학소대가 있는 화양계곡으로 들어선다

 

2014년 8월 28일 명승 제110호로 지정된 화양계곡은 1975년 충북도립공원이 가 1984년 속리산국립공원에 편입되었다
화양천은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청화산이 발원지로 조항산의 물을 받아 중간에 선유동계곡물(관평천)과 합류하여 세룰 불린 뒤
끝부분에 황양구곡을 만들어내고 달천으로 흘러 충주시내에서 남한강과 만나게 된다

화양계곡의 華陽洞은 원래 회양목이 많아서 황양동(黃楊洞)이라 불렸던 마을인데 우암 송시열이 주자의 나라 中華에서 華를

주역에 일양내복(一陽來腹)의 양(陽)을 따서 화양동(華陽洞)으로 고치면서 화양華陽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들어가면 물 건너편에 학소대가 조망된다 - 옛날에는 백학이 이곳에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 하여 이름을 학소대라 하였다

 

천년을 산다는 학을 그리며 보기 쉬운 머리에 무성한 소나무로 집을 짓고 지금도 애타게 기다리고 있건만

이 집의 주인인 학은 어데로 갔을까? 목마르면 마실 냇물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그저 무심하게 흐르고만 있구나

소나무에 학을 키워 저 멀리 하늘로 날려 내맘을 담아보고픈 맘 알까 모를까?

주인을 위해 바위의 살을 에여  층층이 만들어 놓았건만 세월의 흔적만이 느껴질 뿐...

 

 

학대신 소나무가 학소대 틈틈에 수십가지의 모양으로 자리 잡고 있는 보면 볼수록 신기한 낙락장송을 당겨본다

 

 

계속 더 걸음을 제촉하며 오르면 화양구곡의 마지막인 제9경 파천을 만난다

 

화양 제9곡 파천(巴串)

개울 복판에 흰 바위가 펼쳐 있으니 티 없는 옥반과 같아서 학소대 북쪽으로 조금 지나면 이 반석이 오랜 풍상을 겪는 사이에 씻기고 갈리어 많은 세월을 새기고 있다.

오랜 풍상을 겪으며 씻기고 갈려 티 없는 옥반을 닮은 반석들이 개울 복판에 넓게 펼쳐지고, 그 위로 흐르는 물결이 마치 '용의 비늘을 꿰어 놓은 것'처럼 보여 파천이라 했다.  자료 : 괴산군청

 

 

 

 

다시 되돌아와 학소대가 있는 다리를 지나 도로를 계속 따르면 제7곡인 와룡암이다

화양 제7곡 와룡암(臥龍巖)   

옆으로 뻗혀 있는 암석의 생김이 마치 용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듯하고 그 길이가 열 길이나 되어 와룡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길게 누운 바위 위에 솥바닥 같은 둥근 구멍들이 파였고 와룡암(臥龍岩)이라고 적혀있다

 

 

다시 계속 도로를 따르면 상가가 나오면서 6곡인 능운대가 우측에 있다

화양 제6곡 능운대(凌雲臺)

서있는 큰 바위 높이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 마치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듯 우뚝 서있다 하여 능운대라 불리운다

채운사 방향의 산길로 접어들어 조금 가다보면 만나는 민가 앞 너른 마당바위 끝이 능운대 정상이고

그곳에 능운대를 알리는 글자가 희미하게 암각 되어 있다는데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조금만 오르면 고려 시대에 창건했다는 채운암이다

 

채운암에서 본 첨성대 - 하천 건너 숲 속 산 중턱에 반쯤 숲에 가려진 첨성대를 자세히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힘들게 올라와 보니...

 

다시 되돌아와 능운대를 지나 다리를 건너면 첨성대로 오를 수 있다

 

도명산 기슭에 층암이 얽혀 대를 이루어 만든 제5곡 첨성대(瞻星臺)  - 그 위에서 성진을 관측할 수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암벽에 버려두어 못 쓰게 된 성터는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들어간다'는 뜻을 지닌

만절필동(萬折必東)이 크게 암각 되어 있는데 충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이런 글은 명나라 사람보다 더 명나라 사람같다는 송시열의 면모를 볼 수 있는 단어들이다

더 오르면 다른 암각자도 볼 수 있는데 다음 기회로...

 

 

 

바로 냇물 건너에 한폭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 금사담의 암서재 - 계곡을 건너야 제대로 볼 수 있는데 다음 기회로...

화양 제4곡 금사담(金沙潭)와 암서재(巖棲齋)

읍궁암과 약간 떨어진 맑고 깨끗한 물속에 보이는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고 하는 금사담 일대가 화양구곡의 가장 중심지이다

그 바위 위에 1666년 송시열이 암서재(巖棲齋)를 지어놓고 은거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암서재는 방 2칸, 마루 1칸짜리 작은 초가집이었으나, 후대에 기와를 얹고 작은 일각문도 세웠다고 한다

암서재 앞 바위벽에 금사담, 충효절의, 창오운단 무이산공 등 글자가 많이 새겨져 있다.

 

 

 

좌측으로 화양서원이 있고 우측으로 화양서원 묘정비를 따라 내려가면 제3곡인 읍궁암을 만날 수 있다

화양 제3곡 읍궁암(泣弓巖)     읍궁암 옆에 하마비가 있고, 그 오른쪽에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있다

우암 송시열이 제자였던 임금 효종이 죽자 매일 새벽마다 운영담 남쪽 희고 둥글넓적한 이 바위에 새벽마다 올라  

커다란 활모양으로 엎드려 곡을 했다는 곳이다

노선비의 제자에 대한 애틋함과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묻어난다

그런데 이렇게 평평한 바위위에 마치 무릎을 꿇었던 자국처럼 반들반들하게 닳아 페인 곳이 있어 의미를 더해준다

 

 

 

이제 반대편에 있는 사원철패의 원인을 제공했던 화양서원을 만나게 된다 - 좌측에 있는 건물이 화양서원

화양서원,    서원철폐의 원인이 되었다는 우암을 모신 화양서원

노론의 학문적 기반으로 조선성리학을 완성시킨 학문과 사상의 전당인 우암 송시열을 모시는  화양서원은 충청도를 대표하는 서원이다

우암의 사후 제자들이 세웠는데 노론파의 중심지였던 화양서원의 묵패는 수령들의 명령보다 더 권세가 있었다고 한다

제수비용을 명목으로 각 고을에 화양묵패를 돌리면 그 고을 수령도 벌벌떨게하는 그 폐해는 충청도를 넘어 전라도까지 미쳤다고 한다

지금의 대전 송촌동인 회덕현이 고향인 우암은 여러 번 낙향과 출사를 반복하다가 이곳에 은둔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인연으로 사후에도 이곳에 묻혔다

 

 

 

화양서원을 계속 오르면  1983년 홍수 때 만동묘의 내력을 기록한 만동묘정비가 발견되면서 새로 정비한 만동묘정비가 나온다

우암이 죽은 지 2년 뒤인 숙종 22년(1696) 제자들이 세운 화양서원은 그 해에 사액을 받았는데,

우암을 제향하는 전국 23개 서원 중 서인 노론파의 중심지로서 오랫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화양서원의 묵패는 수령들의 명령보다 더 권세가 있었다.

하지만, 우암이 죽으면서 제자들에게 유언하자 권상하 등이 서원 가장 높은 곳에 큼지막하게 세운 만동묘와 비교하면 화양서원은 만동묘의 부속건물 같다.

 

 

 

화양서원의 제일 위에 자리하고 있는 만동묘

만동묘(萬東廟)  읍궁암 옆
뼛속까지 명나라 사대주의 자였던 송시열이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을 해준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懿宗)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만동묘의 흔적이 사라졌다가 1983년 홍수 때 만동묘의 내력을 기록한 만동묘정비가 발견되면서 만동묘 정비를 옛 자리에 다시 세우고 묘역을 정비했다.

만동묘는 병자호란 이후 명나라를 섬기고 청나라를 배척하며 소중화 의식을 키웠던 조선 후기의 사상을 알아볼 수 있는 주요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부끄러운 역사를 상징하는 유적이지만 그래도 당당하고 훌륭한 과거도 역사이고, 숨기고 싶고 부끄러운 과거도 엄연한 역사이다

 

 

 

지나간 역사의 소용돌이를 간직하고 있는 화양서원의 뒷모습을 담아 본다 - 명나라 황제 위패 밑에 화양서원이라...  뭔가 좀 찝찝...

 

화양서원을 나와 우암 송시열 유적지 안내판을 지나면 두개의 돌기둥이 마주하고 있는 하마소를 만날 수 있다

돌기둥이 마주보고 서서 누구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하마소(下馬所)이다

그런데 이 하마소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이 곳을 지나다가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고 화양서원 서생들이 대원군을  말에서 끌어내려 페데기를 친 곳이다

아들 명복이 임금이 되자 서원의 폐해를 실감한 대원군은 고종 2년(1865) 전국에 47개 서원만 남기고 모두 없앴으나

역사는 승자의 것인가?  수많은 서원의 폐해에도 불구하고 대원군 실각후 고종 11년에 다시 부활되었다

 

 

 

뒤돌아 본 하마소 - 지금도  끝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간직한 채 말없이 오고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

 

바로 우측으로 작은 웅덩이에 맑게 비친 구름의 그림자가 아름답다 하여 붙여진 제2곡인 운영담 (雲影潭)

 

 

화양이교에서 바라본 작은 저수지와 운영담, 가을이면 물위에 펼쳐질 운영담과 단풍이 만들어내는 추경의 조화가 기다려 진다

 

역시 괴산하면 떠오르는 느티나무가 화양천과 조화를 이루면 환상의 숲길을 만들어 주고 있다

 

화양계곡 지킴터가 나오면서

 

겨우 시간을 마추는 바람에 제1곡인 경천대는 담을 기약하고 바로 뒤 공터에서 뒤풀이

 

7,8월이 되면 소위 바캉스 시즌이라 하여 우린 모두 산으로 바다로 물이 있는 곳을 찾아 떠나게 된다

아무리 먹고 살기 팍팍하고 어렵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집에서만 있을 수가 없기에 떠나는 것이리라

이왕에 떠날거면 가족단위로 피서도 즐기고 역사적 사실까지 함께 하는 계곡이라면 어떨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찾은 괴산의 달천과 남한강의 공급원인 화양계곡에 있는 화양구곡

거기에 계곡이니 산을 끼고 있을 터 도명산에... 낙영산까지 살짝 끼워놓고...

등산도 하고 시원한 계곡물에 발도 담그고 거기에 역사적 사실까지 반추할 수 있는 곳

여름의 끝자락을 붙잡고 가을을 맞이하기 위한 산행지로 적합했다는 생각이다

 

도명산에서 북쪾으로 이어지는 미끈한 암반위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있어 한여름 피서지로 수많은 인파가 몰리고

기암괴석이 아홉 곳이나 절경을 만들어내고 있어 '화양구곡'(華陽九曲) 또는 '화양동 소금강'으로  불리는 화양계곡

특히 조선조의 대유학자였던 우암 송시열 선생이 조정에서 물러나며 이 곳에 은거했던 곳이라 더욱 유명진 곳이다

거기에다가 이 곳에서 은거하며 중극의 무이구곡을 동경하여 스스로 제1곡부터 9곡까지 이름을 붙이고 이름까지 세겨 놓았다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화양계곡의 물이 흘러 만들어낸 달천강 중·상류 100여리 사이에 구곡이 아홉 곳이 있다고 한다

우리 조선조 정치에 많은 영향을 끼친 주자학의 창시자인 송나라의 주자(주희)가 중극 복건성의 무이산 계곡따라

아름다눈 풍경이 만들어낸 아홉 곳을 정하고 그중 5곡에 무이정사를 지어 후학을 가르친데서 유래를 찾는다

옛 선조들이 많은 곳을 유람하고 경승지를 돌아다니면서 꼭 구곡을 남기려 애썼는지 조금은 알 수가 있는 유래이다

자세이 보면 우리나라에 구곡으로 남아 있는 곳을 보면 거의 주자를 동경하는 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곳이며

최초의 구곡은 이이 율곡이 황해도 고산석담에 고산구곡을 정하고 역시 5곡에 은병정사를 짓고 은거한 곳으로 알려저 있다

 

절경에 취해 놓치기 쉬운 구곡의 역사를 알고 다시 되돌아 본 화양계곡은 우암이 만든 또 하나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서원철패의 근거를 제공했던 화양서원의 역사가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역사에서 우린 무얼 배웠을까? 

지금도 대통령은 나홀로 열심히 뭔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소통이 안된다고 난리들이고

친박 비박, 친노 비노, 우리가 그렇게 역사를 바로 알면서 지금도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숙종시대의 사색당파싸움을 우린 욕할 자격이나 있는지...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 걷다 지친몸으로 하루를 정리하며...

 

가을로 들어서는 입추를 지나 말복까지 보내고 찾은

마지막 물놀이를 겸한 도명산과 화양계곡

끝까지 안전하게 끝날 수 있도록 정리를 해 주신 짱아 총무님

그리고 조박사 카페지기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함께 한 산우님들도

물놀이에 도끼썩는 줄 몰랐던 하루였기를 바래 봅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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