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서울근교 - 백련산 안산 인왕산 구간

                        

 

 

 

언제 : 계사년 매듭달 서른날 흙날

 

누구랑 : 우리부부

 

어딜 : 백련산 ~ 안산 ~ 인왕산 ~ 기차바위 ~ 부암동주민센터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1371 에 있습니다

 

 

초보산꾼 강이야기를 한면서 청계천 발원지를 찾아 가는 길에 함께했던 서울 성곽길인 북악산과 인왕산

인왕산 중간지점에서 청계천 발원지로 내려오는 바람에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던 인왕산 남은 성곽길도 걸을 겸

인근산인 안산과 백련산까지 들러 보고

무박산행을 하는 관계로 함께하지 못하고 있는 옆지기와 동행으로  여행을 떠나 본다.

 

 

 

인왕산 안산 백련산

 

 

 

녹번역 3번 출구에서 내려

 

사거리에서 무악재 방향으로 오르면

 

관음사 방향으로 우틀하면

 

관음사 위에서 본 관음사

 

아직도 가을?

 

 

가을아!

아직 나는 너를 보낼마음이 없는데...   마음만 일까?

앙상한 가지 위 한잎 남은 잎새에 겨울은 묻어 나고

길 위에 갈 곳 없이 이리저리 바람따라 뒹구는 낙엽들이 겨울이 오는 소리를 전해주고 있다.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주머니 속으로 손이 들어가는 걸 보면 겨울임을 느끼게 하고

길을 가다 마주치는 마지막 생명을 놓지 않고 있는 나뭇잎들에서 아직 가을의 향기는 느낄 수 있다

겨울도 아닌것이 가을도 아닌 것이

이 계절이 오면 괜시리 쉼없는 열정으로 살아 온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가슴 한켠이 아려온다.

 

 

백련산 첫 봉에 오르고..

白蓮山

서울시 서대문구와 은평구 사이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215m이다. 백련산이라는 이름은 서대문구 홍은동에 있는 백련사(白蓮寺)에서 유래되었다. 백련산은 응봉(鷹峰)이라고도 불렀는데 조선시대 왕족들이 백련산 바위에서 매사냥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현재 매사냥을 즐겼던 바위난 남아있지 않지만, 매바위라는 이름의 바위를 최근에 다시 지정하여 명명하였다고 한다. 
백련사의 고찰인 백련사는 1399년(정종 1) 어느 여름날 연못에 하얀 연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고 백련사라고 변경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련산 [白蓮山] (두산백과)

 

 

계속 능선을 따르다 백련산 정상 은평정

 

백련사의 유래에서 보았던 매바위에 관한 공덕비가 보인다

 

한강도 보인다

 

백련산의 유래가 된 백련사 갈림길이 나오면 도로를 따른다

 

내려오다 체육관 정문 앞에서 본 안산

 

큰길로 나오면 앞에 홍은2동 동사무소가 보인다.

 

도로를 건너 백암순대국집에서

 

계속 길을 따라가다 보면 홍제천의 백련교을 만나고. 홍제천으로 들어가면 인공폭포를 만날 수 있다

 

내부순환로를 운전하다 보면 여름에 시원하게 내려가는 폭포를 만날 수 있다.

 

안산 입구에 "연희 숲속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숲속으로 들어와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메타 세퀘이어 숲길

 

 

 

메타 세퀘이어 향기에 취하다 만나게 되는 안산, 정상은 통신시설에 빼앗기고 정상역활을 하고 있는 봉수대

봉수대(안산)

무악(안산)의 정상에는 조선 시대의 봉화터가 두 군데 있는데 봉화불이 두 개 켜지면 적병이 나타났다는 신호이고 세 개가 켜지면 적병이 내습한다는 신호였다.

이곳의 봉화대는 평안도·황해도는 물론, 부산·의주·회령까지 급보를 전하였다고 한다.

 

 

안산鞍山 (무악산)

높이는 295.9m로 낮으막한 도심의 산이다. 산의 생김새가 말이나 소의 등에 짐을 싣기 위해 사용한 길마와 같이 생겼다 하여 길마재라고도 하며, 모래재, 추모련이라고 불렀고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봉우재라고도 불러왔다. 낮은 산이지만 전망이 좋고 수맥이 풍부한 27개의 약수터가 있어 등산로가 발달하였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시대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며 한국전쟁 때 서울을 수복하기 위한 최후의 격전지였다.  네이버 지식 두산백과사전

 

 

안산의 끝자락에 금화터널이 있는 방향으로 하산하게 된다 - 서대문 형무소도 보인다

 

봉수대에서 본 인왕산

 

기암괴석을 보면서 내려오다 되돌아 본 안산

 

팔각정을 지나 만나게 되는 정망대

 

전망대에서 본 인왕산과 북악산 그리고 형제봉에서 보현봉으로 이어지는 삼각산 능선

 

조금 더 내려오면 안산자락길이라 명명된 잘 가꾸어진 길을 따르면 나오는 화장실이 있는 능안정 갈림길

 

서대문 독립공원 이정표 방향으로  내려오다 바로 시멘트 포장도로로 우틀하면 극동아파트가 보인다.

 

서대문 독립공원

 

서대문 형무소 역사 박물관

 

독립공원 정문으로 나와 길을 건너면 보이는 현대 아파트로 들러 간다

 

현대아파트 둘레를 계속 오르다 보면 마지막 부분에서 만나게 되는 인왕사 이정표

 

인왕사 방향으로 좌틀하면 만나게 되는 골목길 - 계단을 올라 좌틀한다

 

 

콘테이너 박스가 있는 공터에서 본 인왕사와 선바위

 

인왕사로 내려오다 보면 만나게 되는 일주문

인왕사로 올라오는 길이 보인다.

자료를 찾아봐도 안산에서 인왕산으로 가는 방법을 알 수가 없어 무작정 현대 아파트로 올라왔는데

지금보니 이 길로 올라오면 좀 더 편하게 올라 올 듯

 

 

양 옆으로 암자들이 위치하고 있어 골목길이 불교 공화국에 온 느낌으로 걷는다

 

인왕사 대웅전을 지나면 보이는 국사당

국사당터

국사당은 본래 남산 정상에 있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뒤 백악산(지금의 북악산)과 목멱산(지금의 남산)에 신사를 짓고 매년 제사를 올렸다. 그 중 목멱신사가 바로 국사당인데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조선 신궁을 짓는다고 목멱신사를 지금의 인왕산 선바위 아래로 옮겼다.
일본신을 모신다고 주인인 조선신을 쫓아냈으니 나라 잃은 설움이 이에 더하랴? 국사당에 국사로 모셔져 있는 무학대사가 통탄했을 것이다. 남산 팔각정 옆에는 국사당 터였다는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지금의 인왕산 국사당은 무속의 중심처가 되어 굿이 자주 벌어진다. 민속자료인 무속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암자를 벗어나면 보이는 선바위

선바위

장삼을 두른 두 스님 모습의 선바위(선암 禪岩)가 있다. 이곳에서 기도하면 아들을 낳는다 해서 기자암(祈子岩)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부터 있어 온 오랜 전통이다.

 

장삼을 두른 두 스님 모습?

 

선바위를 둘러싸고 유명한 이야기가 야사에 전해져 온다.

서울 도성을 쌓을 때 무학대사는 선바위가 도성 안에 있도록 경계를 잡자고 했고,

삼봉 정도전은 불교가 성행할까 걱정해 선바위가 도성 밖에 놓이도록 성벽을 쌓자고 했다고 한다.

두 사람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태조 이성계가 결론을 내렸다.

어느 날 눈이 내렸는데 그 눈이 내린 흔적대로 성을 쌓으니 지금의 서울 도성이라 한다.

결국 선바위는 도성 밖으로 밀려 나고 조선은 유교국가가 되었다는 야사의 한 토막이다.

 

 

조금 더 올라오니 역시 기도발이 좋은 곳인지 기도하는 장면을 자주 만나게 된다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도 바로 인왕산에 있었다.

일제가 1925년 남산 기슭에 저들의 신사인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당시 남산에 있던 전국 무속인들의 총본부격인 국사당(國師堂)을

지금 인왕산인 무악동 산2-12 자리로 옮겼는데 그 자리가 바로 태조의 기도터였다고 전해진다.

지금이야 무속인들의 성지처럼 됐지만, 어쨌든 인왕산에는 이러저러한 아픔이 서려있다

 

 

기암괴석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부대가 자리하고 있어 오를 수 없는 모자바위가 있는 성곽부분

 

모자바위 아래에서 우틀하여 계속 이어가면 성곽 들어가는 계단이 나온다

 

남산으로 이어지는 언젠가는 다시 한번 걸어야 하는 성곽길 - 최근에 수리가 끝 난 듯

 

범바위를 지나면

 

청계천 발원지가 있는 인왕천 약수터 갈림길이 나온다

 

뒤 돌아 본 범바위와 군대가 자리하고 있어 갈 수 없는 모자바위가 있는 곡장

 

인왕산 정상

인왕산仁王山

인왕산은 1968년 1월21일 김신조 무장공비 일당의 ‘1·21사태’ 이후 출입이 통제되다 1993년 5월에 개방됐다

인왕산(338m)은 한양의 서쪽에 있다 해서 조선 초까지 서산(西山)이라 불렸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 15년(1433)에 인왕산(仁王山)이란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고려시대부터 이 산에 인왕사(仁王寺)라는 절이 있어 거기서 유래했다고도 전한다. 현재 인왕산 무악동 기슭에 ‘인왕사’란 130년 정도밖에 안 된 절이 있다.

 

 

인왕산 정상에서 본 기차바위 능선과 삼각산

仁旺山 과 仁王山

조선 후기 화가인 겸재 정선(1676~1759)이 비온 뒤의 인왕산 모습을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비롯해 여러 옛 지도에도 ‘仁王’으로 적혀 있다.

일제가 ‘일·왕(日·王)’의 뉘앙스가 있는 ‘旺(왕)’자로 간교하게 고쳐놓은 것을 1995년 뒤늦게 바로잡았지만 여전히 그 잔재가 남아 있다.
인왕산은 풍수지리적으로 도성의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그래선가, 인왕산은 유별나게 ‘호랑이’와 인연이 많다.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있나’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모양부터 호랑이와 닮았다.

풍수학자 최창조는 인왕산이 마치 호랑이가 남쪽으로 도성을 호위하면서 웅크린 모양을 하고 있다고 본다.

인왕산 자료 : 문화일보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1090201033533008003

 

 

 

인왕산 정상의 옥인동 방향으로 뻗어 있는 치마바위 - 인왕산에서는 촬영금지 구역이라... 이곳에서 촬영

치마바위

성벽길에서는 치마바위가 바로 코앞이다. 500년 전, 연산군에 반대하는 세력이 반정을 일으키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니 바로 중종이다. 이 분의 부인이 신(愼)씨였는데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과 처남·매부 사이였다. 그래서 남편이 왕이 된 지 일주일 만에 폐비가 되어 궁에서 쫓겨났으니 기구한 신세였다.
쫓겨난 신씨는 경복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곳 치마바위에 당신의 붉은 치마를 걸어 놓아 서방님이 보시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끝내 폐서인으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는데, 230년이 지난 영조 때에 와서야 복위가 되어 지금 장흥 온릉에 잠들어 계신다. 한편, 중종은 조강지처 버린 뒤에 비빈을 11명이나 두었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면 기차바위 능선 이정표가 보이고, 이정표따라 내려오면 기차바위

 

처음으로 우리 부부 사진한장 남긴다

 

 

삶이란 이렇게 살건 저렇게 살건, 그 정답이나 해답은 없다.

비가오면 우리는 우산을 받쳐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同行, 함께 걷는 길, 나는 우산을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고 걸어간다.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의 마음처펌 변하고 또 변하는 삶의 여정에서

우산으로 삶의 여정을 덮어 버리면 우산에 가려진 비의 진실을 알 수가 없다

함께 비를 맞으며 걷는 同行, 피할 수 없는 비가 우리 인생인 것을

나의 반쪽 옆지기와 함께 할 산행의 기회가 줄어듬에 따라 생각해본 同行의 단상

 

 

 

기차바위 전망바위에서 본 우리가 걸어 온 백련산과 안산

 

수락산에만 있는 줄 알았던 기차바위, 여기에도 있었네

 

너무도 멋진 솔숲길이 계속 이어진다.

 

 

백련봉 직전 팔각정 쉼터에 있는 부암동 갈림길에서 부암동 방향으로 우틀

 

이 곳은 안전시설이 없어 겨울철에는 위험하다

 

대나무 숲길이 나오고

 

아름답고 수려한 풍경을 의미하는 말의 청계동천이라고 쓰여 있는 암각된 바위를 만날 수 있다

 

동네골목길제4코스로 명명된 부암암동 골목길이 카페길이 되어 있었다

 

"빈처" "운수좋은날"등을 쓴 빙허 현진건 집터 이정석이 보이고

 

골목으로 들어가면 철대문으로 열쇠가 굳게 잠겨있는 무계정사

무계武溪정사 터  부암동사무소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200여m 더 직진하면 무계정사 터가 보인다.

세종의 셋째왕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꿈에 박팽년 등과 함께 노닐던 도원을 당대 최고 화가 안견에게 그리게 한 작품이 유명한 ‘몽유도원도’인데,

안평대군이 그림에 나타난 장소를 찾아 이곳까지 왔다가 “여기가 바로 꿈 속에 본 무릉도원과 같다” 하여 정자를 짓고 글을 읊은 것이 별장의 유래가 되고 있다

 

 

대문 사이로 어렵게 촬영한 무계정 암각된 바위 - 안평대군의 친필로 추정된다

 

50m만 더 오르면 윤치호의 부암정(傅巖亭)이 있고, 부암동 동사무소에서 300m쯤 내려가면 대원군이 아호를 석파로 했던 석파정이라는 정자도 있는데 다음기회로 미루고...

 

 

靑溪洞天이라는 옛 선조들의 생각이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며 부침바위(付岩)가 있던 데서 유래된 부암동주민센터에서 종료하고

 

무박으로 낙동정맥길을 따라 가다 보니 백두대간 이후 여러번 같이 했던 옆지기와의 산행을

함께 할 기회가 없었는데 모처럼 토요일 시간이 있는 옆지기와 함께한 인왕산과 안산, 그리고 백련산

 

주산(主山)인 북악산(北岳山)과 인왕산, 청와대가 있어 아직도 출입이 번거로움이 있는 주산이었던 북악산,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인왕산이 주인공이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부터 실록을 검색해 보면 백악산(白岳山·지금의 북악산)은 68건이 나오지만, 인왕산은 99건이 등장한다고 한다.

또 풍수논쟁에서도 세조·선조 때 등에 호랑이가 궁궐에 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인왕산 호랑이’가 괜한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靑溪洞天이란 바위에 각자를 할 정도로 인왕산이 주산인 북악산보다 더 화재가 되었던 모양이다.

또한 조선 초기 한양 천도 시 궁궐터를 둘러싸고

정도전의 ‘북악 주산론’과 무학대사의 ‘인왕 주산론’이 맞붙었다.

그러나 역사는 좌우의 날개로 날아가는게 아니고 결국 정도전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초보산꾼이 쓴 관악산 산행기에서도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논쟁에서

정도전의 손을 들어 주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고려 쇠망의 원인 중 하나를 불교에서 찾아 그것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새로운 유교권력이

애초 승려의 말에 따를 리는 없었을 것이다.

 

두번에 걸쳐 걸어 보았던 인왕산의 모습이 정말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서울 중심에서 보이는 인왕산과 북악산의 모습은 그래도 보이는데로 볼 수 있는 환경이 되지만

옛 선조들이 별장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숨어 있던 부암동의 숨은 속살을 볼 수 있어 행복했고

또 오랫만에 옆지기와의 동행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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