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패 미틈달 11월 정기산행 산행기  - 성남 南漢山城     

 

 

 

언제 : 계사년 미틈달 열흘 해날

 

누구랑 : 4기 김성용, 5기 최병의 부부, 10기 채수엽, 최현주부부, 뒷풀이 6기 최연성

 

어딜 : 노적산 - 약수산 - 한봉 (남한산성 시작) - 벌봉 - 동문  - 남문 - 주차장

                                    ( 산행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사진 산행기는 http://blog.daum.net/kmhcshh/1293 에 있습니다.

 

산행기점 : 광지원리 중부면 사무소

 

 

 

우리나라 도시에 많은 가로수길에 환경지킴이 역활을 담당하고 있는 은행나무

유실수 이면서도 매연에 강한 탓에 집만 나서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지금이 은행나무들이 마지막 가는 만추의 가을 햇살을 자양분 삼아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썰렁하기 쉬운 늦가을의 또 다른 즐거움을 주고 있다.

만추의 마지막 끝자락을 쌀패 식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 본다.

 

 

이 산행기는 http://weekly2.cnbnews.com/category/read.html?bcode=17724 를 참조하여 정리 한 글입니다

 

 

 

천호역 3번출구 현대백화점 앞에서   : 13번, 13-2번 버스로 광지원리, 남한산성입구에서 하차  

광지원리光池院

이 마을에는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황교원(黃橋院)이 있었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 의하면 '州에서 동쪽으로 20리에 황교원(黃橋院)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곳에 원(院)을 두었던 것은 조선시대(朝鮮時代) 왕들이 여주에 있는 영릉(英陵 세종대왕능)과 영능(寧陵) 행차시 이 곳에서 쉬어가게 되었는데,

큰 연못이 있어 그 물이 맑고 달빛에 비추어 밝은 빛이 나서 '광지원'(光池院)이라고 불러왔다. 조선시대의 원(院)은 관영 숙박시설이었다.

이 마을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에 신작로(新作路)가 개통되면서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고, 예로부터 남한산성의 관문지역으로 유명하다

 

 

중부면 사무소가 있다

 

다리를 건너 길을 계속 따르면

 

이정표가 잘 되어 있는 오늘의 들머리

 

해공 신익희 선생 추모비가 있다

독립운동가이며 한국정치사에서도 많은 족적을 남기신 신익희선생은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가 출생지라서 그런지

이곳에 추모비를 건립한 것 같고, 남한산성안에 신익희 선생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고 한다.

1956년 3월 18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어 1956년 5월 3일 30만 인파속 한강 백사장에서 한국정치사상 가장 많은 인원인

약 30만 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선거유세를 벌인 기록도 남기고 있다.

1956년 5월 5일 상오 5시 15분 호남 지방유세차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急逝)하시면서 

역사는 만약에라는 말이 통하지 않지만, 우리는 큰 별하나를 가슴에 묻어야만 했다.

 

 

 

시작부터 소나무 숲이 마지막 가는 가을의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첫 봉인 노적산에서 단체사진

<노적산,노적봉 (388.5m)>
광지원리와 오전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인데, 마치 노적을 쌓아 놓은 것 같다고 하여 예로부터 '노적산' 또는 '노적봉'이라고

불러왔다.          -광주문화원-

 

 

약사산

<약사산 (415.9m) >
미라울마을 남쪽에 있는 앞산을 말하는데, 이 산의 고개를 넘으면, 오전리와 불당리이다. 불당리와 오전리의 경계지점에 있는 산인데,

예전에 '약사사'라는 절이 있었다.    -광주문화원-

 

 

오전리 엄미리 갈림 안부

 

식후경

 

유래를 알 수 없는 약수산(407.1m)

 

다시 한번 더 안부를 지나면

 

드디어 산성이 보이기 시작하면 한봉

 

<한봉(漢峰) (418.1m)>

이곳에서 시작하여 봉암성(蜂岩城) 남쪽 끝 암문까지 이어지는 성이 한봉성이다.

숙종 19년(1693년) 수어사 오시복의 책임 하에 쌓은 외성인데 영조때 조현명이 개축하였다.

『1872년지방지도』에 한봉(汗峯)으로 기록되어 있고, 『해동지도』와 『광여도』에는 남한산성 동문 아래 한봉(漢峰)으로 묘사되어 있다. 『중정남한지』에 "한봉(漢峯)은 남한산성의 동쪽에 있고 옛 이름은 한봉(汗峰)인데 성 안을 엿볼 수 있기때문에 돈보(墩堡)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태종이 이곳에 주둔했었다고도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봉 [汗峰, Hanbong]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2008.12, 국토지리정보원)

 

 

 

외성이었던 한봉성을 따라 간다

 

은고개 갈림길

성곽안쪽으로 들어가면  옛 영원사의 유지 있다고 한다. - 영원사지보살상 암벽화
이곳에 한봉성을 쌓은 후 한봉성 방어와 관련하여 승군(僧軍)들의 거주처로 세웠을 것이다.

숙종 연간에 세웠던가 아니면 적어도 영조 15년(1739년) 한봉성 개축 즈음에는 세웠을 남한산성 사찰 중 하나이다.

중정남한지에는 ‘동문밖에 있다(在東門外)’고 짧게 소개하고 있다.

확인은 다음 기회로 넘기고...

 

 

 

또 다른 길인 은고개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외장대터가 있는 남한산 정상

초보산꾼 산행기 성남 남한산성 1편 < 검단지맥 1-2구간 >을 참조  http://blog.daum.net/kmhcshh/978

 

 

봉암신성 신축비가 있는 벌봉

지금의 벌봉이 마치 쪼개진 것처럼 틈이 벌어져 있는 것은,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벌봉에 어린 정기를 날려 버리려고 깨트렸던 자국이라고 한다

 

 

또 다른 외성중의 하나인 봉암성 성곽길을 따르면

3개의 외성(外城)이 있다. 신남성(新南城), 한봉성(漢峰城), 봉암성(蜂岩城)이 그것이다.

한봉에서 시작된 한봉성(본성의 동남쪽)이 벌봉까지 이어졌고, 벌봉에서 봉암성(본성의 동쪽)까지 이어진 두개의 외성을 만나 봤다.

마지막 하나 남은 신남성은 본성의 남쪽에 있는 검단산으로 이어지는 성인데 다음 검단지맥 2구간에서 만나게 된다.

 

 

동문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만나는 봉암성

신남성뿐 아니라 한봉성, 봉암성 등 외성은 병자호란의 전투형태를 살펴보아야 이해할 수 있는 성이다.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던 인조 15년(1637년) 1월 24일 자 실록을 보면 ‘적이 대포(大砲)를 남격대(南格臺) 망월봉(望月峯) 아래에서 발사하였는데,

포탄이 행궁(行宮)으로 날아와 떨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피하였다. (賊放大砲於南格臺、望月峯下, 砲丸飛落行宮, 人皆?易)’는 것이다.
남격대는 검단산의 옛 지명이며 망월봉은 봉암(蜂岩, 벌봉)의 옛 지명이다

 

 

 

문으로 들어와 넓은 공터로 올라오면 동장대터가 있다.

 

여기서 부터 본성(本城)이 시작된다 - 동장터에서 본 북문 방향

 

동문으로 이어지는 본성이 계속 시원하게 이어진다

 

장경사신지옹성이 있는 제2암문

 

 

잠시 암자가 있는 임도를 만나고

 

송암장터가 나온다

 

 

동문(좌익문)이 보이기 시작하고

서문이 우익문(右翼門), 동문이 좌익문이 되는 까닭은 임금이 계시는 남한산성 행궁이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행궁에서 남면(남쪽을 바라 봄)하면 동문이 좌(左), 서문이 우(右)가 되어 우익문, 좌익문이라는 문의 명칭을 이해할 수 있다

 

 

동문

호란 당시 서문쪽은 경사가 가팔라 청군들은 주로 보병이 포진했고, 동쪽은 지세가 완만하여 주로 기마병이 포진했다.

이렇게 포위되어 항전하던 40여일,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전라도 근왕병(勤王兵)들이 임금을 구원하러 출병했으나

전라병사 김준용 장군, 평안병사 유림 장군만이 작은 승리를 거두었을 뿐 모든 근왕병은 참패하거나 싸움조차 해 보지 못하고

미원에 물러가 있었다. 이러는 사이 포위당한 조정은 희망을 잃고 더구나 식량이 바닥났다.
남한산성 항복의 직접적 원인은 식량부족이었던 것이다.

 

 

 

동문이 있는 308번 지방도를 지나면

 

바로 제11암문이 나온다

암문(11암문) - 일명 시구문(屍柩門)
천주교가 탄압 받을 때마다 남한산성으로 옮겨온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받아 300여명이 순교했다고 한다.

그 시신들은 돌보는 이 없이 이 시구문 밖에 버려지기도 하고 이 문을 통해 장사지내러 나갔기에 시구문이다.
남한산성 최초의 순교자는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발생했다

 

 

황사영 백서사건

신해박해(1791년) 이후 탄압을 받기 시작한 천주교도들은 각도의 오지로 숨어들었는데 제천 봉양(현 베론성지)으로 숨어든 이들 중 황사영(黃嗣永)이 있었다.

북경교구 앞으로 조선의 천주교탄압 실정을 알리고 천주교탄압을 중지시킬 목적으로 비단에 백반으로 글을 써 글씨가 보이지 않게 쓴 백서(帛書)인데 청나라 사신 가는 일행편에 북경으로 보내려다가 발각됐다.

문제는 외국군대의 힘을 빌려 조선을 협박해달라는 내용이 포함됐다는 점이다. 이른바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무수히 많은 이들이 순교했다.
이때부터 천주교는 기해박해,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더욱 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 때의 일을 이미 잊은 듯 한가롭다.

 

 

 

제3남옹성을 만나면 이제 성 외부로도 길을 갈 수 있다.

 

다음에 가야할 신남성 외성이 있는 성남의 검단산이 통신시설을 이고 가까이 와 있다.

신남성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남한산성은 산성의 특성상 고립될 수밖에 없는데 신남성(검단산) 산줄기는 삼남으로 이어지는 급소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을 청군(淸軍)에게 점령당하고 조정을 구하러 왔던 팔도의 근왕병(勤王兵)들이 패함으로써 인조는 고립무원의 위기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곳의 지리적 중요성은 변함이 없어 돈대가 있는 두 봉(峰)에는 오늘날에도 통신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제2남옹성

홍이포(紅夷砲)는 청나라 사람들이 쓰는 서양식 화포였다. 천자총통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화력의 차이였던 것이다.

청나라도 명나라와 싸울 때 화력의 차이로 고전하였는데 어렵게 홍이포를 구해 무장했던 것이다.

조선이 청에 항복한 이후도 청나라는 조선이 홍이포로 무장하지 못하도록 감시하였다고 한다.

홍이포! 지금 이 산성 밖에서 금방이라도 넘어 올 것 같은 착각을 해 본다. 저 멀리 보이는 송신탑이 있는 검단산에서...

그땐 정말 저승사자와 같은 소리로 들려 왔을 것인데...  이 좁은 성안에서...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를 잘 만나야...

 

 

 

오늘의 종착지 남한산성의 정문인 남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원성(元城, 本城)과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진왜란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른 조선 조정(朝廷)은 남한산에 성을 쌓을 것을 논의하였으나 실행에는 옮기지 못하였는데

광해군 13년(1621년) 만주 벌판을 통일한 후금(後金, 뒤에 淸으로 국명 개칭)의 위협이 현실화 되자 침략에 대비해 옛 토성(土城)을 석성(石城)으로 개축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이괄의 난으로 공주까지 피난하였다 돌아온 인조는 위급한 상황에 피신할 수 있는 보장지지(保障之地; 종묘사직을 지킬 수 있는 피난처)를 구축하려 했다.

하나는 강도(江都; 강화도)였으며, 또 하나 새로 남한산성을 축성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인조2년(1624년)에서 4년(1626년)까지 산성을 수축하게 되었다.

그 때의 쌓은 산성이 본래의 남한산성인데 현재의 산성 모습은 대체로 그 때 쌓은 것이다. 단지 옹성(甕城)의 모습만이 현재와 차이가 있다

 

 

 

남문

남한산성 정문은 남문(지화문·至和門, 해발 370m)이다. 인조도 그 문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엔 송파와 가까운 서문(우익문·右翼門, 해발 450m)으로 나갔다

지화문을 바라보며 375년 전 병자년에 이 문으로 허겁지겁 들어왔을 인조 임금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인조 14년 병자년(1636년) 12월 13일 자 기록에 도원수 김자점이 적병(청나라 군)이 안주(安州: 평안북도 안주군)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치욕의 병자호란을 겪으리라는 생각은 아무도 못했고, 어떻게 막을 것인지를 논의하는 단계였다.

 

 

지화문(至和門)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단아한 해서체 글씨로서 안내판에는 정조 3년에 이 문을 개축하며 지화문이라 불렀다는 내용이 있다.

2009년 문루를 복원할 때 정조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편액을 달았다 한다.

 

 

주차장으로 이동하면 만나게 되는 새로 복원을 완료한 행궁중 외삼문의 주 출입구였다는  한남루

남한산성에도 임금이 거동할 때 머무는 행궁이 있었다. 상궐과 하궐로 구분된 행궁은 조선 인조2년 산성 보수와 함께 지어졌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한양을 떠난 인조가 47일간 이곳에 머물렀다.

그 후 영조와 정조임금도 영릉 전배 길에 들렀던 곳으로 어느 행궁보다 역사의 상흔이 깊게 배어있는 곳이다.


 

남한산성도 한양도성과 마찬가지로 구색은 다 갖추었다고 하는데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확인하지 못했다.

임금의 숙소인 252.5칸짜리 행궁(북한산성 행궁 120칸, 수원화성 행궁 576칸)과 지휘본부 장대(將臺), 종묘, 사직, 관아, 감옥, 객사, 종각 등 없는 게 없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최근 복원이 완료됐다.

 

 

입장료를 받고 있어 외부에서 찍은 모습

 

주말이면 운행한다는 산성역까지 운행하는 버스로 오늘의 뒷풀이 장소인 신천역 3번 출구로 나와 만나게 되는 장소

 

아랍인들의 전통 방식에 따라 나온다는 양고기로 하루의 피로를 풀고

 

뒷풀이 장소에서 합류한 최원장의 적극 추천으로 아랍인들이 즐겨 피운다는 물담배 맛도 보고

 

이렇게 쌀패 산우회의 정기산행도 저물었다...    해와 함께 늦은 밤까지...

 

전날 비가 오는 바람에 정기산행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오희려 대표적인 대한민국의 브랜드인 가을 하늘을 볼 수 있어 즐거운 산행이 되었고

말없이 다가오고 있는 겨울의 한기를 먼저 준비하고 있는 자연과 함께 했던 산행

함께 해주신 김성용 선배님의 배려가 고맙고

계속 함께 해주고 있는 채수엽 부부의 동행이 고맙고

또 함께 하지 못함을 아쉬워 하며 늦게 나마 뒷풀이에서 함께 좋은 자리를 빛내 준 최연성 후배님 고맙고...

 

도성 안 어디서나 만나게 되는 인조의 흔적을 이 곳 남한산성에서도 병자호란의 한가운데 있었다.

치욕의 역사를 말없이 흘려보내고 지금 우리 곁에 누구나 걷고 싶은 산성으로 다시 돌아온 남한산성

한때는 백제 초기 온조대왕의 산성으로 불리웠다는 사실이 지금까지 살아 있고

당나라를 막아낸 신라의 자랑스러운 성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더 자랑스러워 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지금 천변을 걸으면 벌써 겨울을 얘기하 듯 억새가 많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더욱 활짝 피워가는 모습을 하루하루 즐겨보는 것도

이 한 겨울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내어 한번 천변으로 나가 보시죠.

 

12월 산행은 최연성 후배님이 연말 모임과 연계하여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아주 간단하게 산행하는 방법으로 결정될 것 같으니 많은 쌀패 식구들이

마지막 달의 의미있는 연말모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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