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 37 (3450온누리 3기)  -  대청봉 구간 :  한계령에서 마등령까지

 

 

 

언제 : 임진년 누리달  스믈사흘 흙날 23시 ~ 해날

 

누구랑 : 대간3기 산우님들

 

어딜 :   힌계령에서 백담사까지 (산행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더 많은 사진료는 http://blog.daum.net/kmhcshh/370에 있습니다

 

 

 

한계령에서 마등령까지..

 

온 누리에 생명의 소리가 가득차 넘치는 달 6월, 우리는 한장 한장 지워지는 구간에 대한 아쉬움을 가득 안은 채....

아쉽다고 언제까지 붙들어 놓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사는 인생이고 보면, 갈건 가야지 어떻하나?

하나가 가야 또 하나의 시작이 뜻을 이루 듯, 또 하나의 멋진 대간이 기다리고 있는 한계령으로 출발한다.

무슨놈의 恨이 그리 많아 한의 경계를 넘나드는 恨界령인가?

우리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넘나드는 고개만큼이나 한계를 느껴 생긴 限界령인가?

 

 

 

한계령 휴게소

 

한계령(寒溪嶺, 1004m)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기린면과 양양군 서면과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인제군에서는 지금의 한계령은 소동라령(所冬羅嶺)과 오색령으로 불렀던 것이며, 해동지도에 소동라령을 오색령으로 표기 했다'고

양양군에서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일축한다.
최병헌 전 인제문화원부원장은 “한계령의 옛 이름은 순수한 우리말로는 `바드랏재'이고 한문으로 표기할 때는 소동라령이다.

1861년 완성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필사본인 동여도를 보면 엄연히 한계령으로 표기된데다 오색령은 별도로 남쪽 가지에 표기하고 있어

소동라령이 오색령으로 불렸다는 논리는 맞지 않는다”며 주장하고 있다.

 

 

 

양양군에서 새운 오색령

지도상의 한계령을 양양군에서 오색령이라 한 것은  領의 기능을 일차적으로 귀향보다는 상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양양의 오색리를 기점으로 하여 오색령의 명명이 이루어진 것은 당연한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 양양은 부(府)이며 인제는 현(縣)에 불과하였다는 점도 오색령의 명명에 참고가 될 수 있다”라며 근거로 삼고 있다.

 

 

 

관광이 주요 산업으로 부상하면서 관광자원을 하나라도 더 가지려는 지자체의 고육지책이 들여다보인다.

그러나 寒溪嶺 이란 이름이 근거가 없는 게 아니다. 설악산은 큰 산이고 사람이 기대어 살기 힘든 바위산이다.

삼국시대 동쪽 바닷가를 지배하던 신라는 설악산을 설악산으로 불렀고 인제군 쪽에서는 한계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문이 열리면서 출발을 알리고

 

고개가 한계령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군인들에 의해 고갯길이 다시 열리고 1971년 비로소 44번 국도가 놓이면서부터다.

당시 공사를 주도한 군인들이 인제군 쪽에서 공사를 시작했는데 그 탓에 한계령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굳어졌다는 것이 양양군의 하소연이었다

 

 

 

설악산 최고봉을 향한 본격적인 산행은 시작되고

 

설악산은 분단 이전에는 금강산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일반인의 발길이 닿지 않던 곳이다.

지금의 설악산 주등산로인 천불동 계곡은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 동네라는 뜻이 담겨 있을 정도로 험난한 설악산에

사람들의 발길이 닿기 시작한 것은 한국 산악 문화의 발전과도 관계가 깊다.

 

 

0.5km왔네...

 

등반 루트와 그 등반의 내용 자체를 중시하는 산악 문화인 알피니즘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능력의 한계를 벗어남을 추구했다.

바위 봉우리와 계곡으로 이뤄진 설악산은 이 땅에서 알피니즘을 구현하기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산이다.

전쟁의 상처와 가난에서 어느 정도 여유를 회복하기 시작한 1960년대에 산악인들의 발길이 설악산으로 이어졌다.

 

 

잘 다듬어진 길은 이어지고

 

노산 이은상 선생은 설악산은 본래 ‘살뫼’였는데 한자로 쓰다보니 ‘설악’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살뫼’의 ‘살’은‘설’의 음역으로 신성숭고 청결(神聖崇高 淸潔)이라고 풀이했다         

 

 

한계령 1.0km지점

 

 

적당한 간격으로 나무계단길과 이런 바위계단길이 우리를 안내하고 

 

서부릉으로 이어지는 귀떼기청봉 갈림길이다             

 

인제군 북면 용대리 해발 1천578m의 '귀때기청봉'은 설악산 봉우리 중에서 자기가 제일 높다고 으스대다가

대청봉, 중청봉, 소청봉 삼형제에게 귀싸대기를 맞아 이름 붙여졌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장수대와 남교리로 이어진다는 이정표

대청봉까지 이어지는 능선이 서북능선이라 되어있다

 

 

어려운 암벽지대도 통과하고

 

이정표도 만나고

 

서서히 여명이 밝아 오면서 귀떼기청봉이 보이고

 

 

여명이 밝아 올 때 어김없이 찾아주는 새소리가 들려오니, 범인을 찾아내고...

보이나요?  가운데 잘보면 보이는데...

 

열심이 지져대고 있는 모습을 당겨보고

 

드디어 대청봉이 앞을 안내하기 시작하고

 

중청 3.6km지점을 지나니

 

 

 

한계령이 보이는 전망 좋은 암벽에서 지금도 귀가 아플 것 같은 귀떼기청봉을 만나본다.

우습게만 생각되는 전설적인 얘기를 생각하니 저절로 손이 귀를 잡고 있다.

좀 전에 본 대청봉과 키재기를 해도 엇 비슷 한 것 같기도 하고... 귀떼기 청봉의 정상은 그리 넓지 않다고 한다.

 

요놈은 죽어서도 나름대로 멋을 간직하고 있는 고목 개선문도 지나고

 

정상능선에서 맛보는 오솔길의 내음도 맡아 가며

 

끝청에 오르다

 

끝청봉은 설악산 중청봉에서 서쪽에서 이어지는 서북주릉상에 위치한 봉우리이다.

동쪽으로 대청봉과 중청봉, 소청봉으로 이어지는 주봉을 조망할 수 있고 서쪽으로는 끊임없이 길게 이어지는 서북주릉을 바라볼 수 있다.

독주폭포獨走瀑布가 있는 독주계곡 을 따라가다 보면 오색 남설악탐방소가 있다.

 

 

 

남설악 오색은 동해를 바라보고 좌(左)대청봉과 우(右)점봉산의 백두대간이 ㄷ자로 감싸고 있는 천혜의 명당이다.

오색약수로 유명한 주전골 일대의 용소폭, 십이폭, 여심폭포와 등선대 그리고 옛날에는 노천온천으로 유명했던 온정(溫井)골도 남설악의 명물이다.

대표적 계곡인 주전골은 도적떼가 숨어서 위폐를 만들다 지나가는 관찰사에게 들켰다는 전설에서 유래됐다.

대청봉(1708m) 남쪽 비탈과 점봉산(1424m) 북쪽 비탈이 골짜기를 이루는 주전골은 몰래 엽전을 주조할 정도로 깊은 곳이다

 

 

북으로 안개속에서도 용아장성릉과 공룡능선을 겹겹이 포개 놓고

 

설악산의 제3봉인 소청봉의 바로 아래에는 기이하게 생긴 바위능선이 하나 있다.

그 바위능선이 바로 용(龍)의 이빨(牙)이라는 뜻을 지닌 용아장성龍牙長城稜이다.  

용아장성의 바위 사이에 봉정암이 들어있음인데 해발1,244m로 동산에 위치한 돌(石)산이다.

100개의 담(潭)이 있어 백담사 했듯이, 그 이름만 들어도 신비로운 담(潭)과 소(沼)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군사시설이 있는 중청봉을 지나니

 

중청봉(中靑峯)은 설악산의 제2봉으로 남동쪽으로는 주봉인 대청봉, 북서쪽으로는 소청봉, 남서쪽으로는 끝청봉과 각각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동해를 마주보고 있다.

현재 중청봉의 정상부는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써 진입이 허가되지 않는다. 대청봉과 중청봉 사이에 현재 중청대피소가 있다.

 

 

오늘의 큰산, 우리 민족의 자랑인 설악산의 큰 봉이 보이고

 

여류시인 금원여사(錦園女使)가 쓴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에 

 ‘설악산 돌은 눈과 같이 희므로 설악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끝청 갈림길을 만나고

 

 

중청대피소가 보이고

 

공룡능선과 천불동계곡이 안개속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고 있고

 

희운각 대피소 앞에 있는 신선대를 한번 당겨보고

 

대청봉이다

 

대청봉 大靑峯

지금처럼 현대화된 대피소가 들어서기 전 대청봉의 피난처는 군인들이 사용하다 버린 벙커였다.

동해를 내려다보는 대청봉 꼭대기에 땅을 파고 들어선 벙커는 좁았다고 한다.

삼팔선으로 남북으로 나뉠 때 설악산은 북쪽의 땅이었다.

북에서 삼팔선을 넘기 전에 양양군 청년들이 공산당을 무찌른다며 설악산 대청봉을 점령하고 태극기를 게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예전에는 청봉(靑峰)·봉정(鳳頂)이라 했는데, 청봉은 창산(昌山) 성해응(成海應)이 지은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서 유래 되었다고도 하고,

봉우리가 푸르게 보인다는 데에서 유래 되었다고도 한다. 

 

 

 

설악폭포로 내려가는 오색방향 이정표

 

설악산은 4개 시·군에 걸쳐 펼쳐져 있다. 주봉인 대청봉은 양양군에, 화채봉은 속초시에, 대승령은 인제군에,

울산바위는 고성군에 속해 매년 300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국민관광지로 한 때는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로 인기를 누렸던 곳이다.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동쪽의 해양성 기후와 서쪽의 내륙성 기후 차이로 인해 서로 다른 설악산의 모습이 사람들을 자주 찾게 유혹한다

 

 

물이 흐르듯 안개가 천불동계곡을 수놓고

 

안개속에서 더욱 빛나는 공룡의 암봉들 (사진 : 완산님)

 

당겨본 천불동계곡을 감싸고 있는 암봉들 -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고려말 강원도 안염사(安廉使, 도지사)로 있던 안축(安軸)이 영랑호에 와서 설악산을 바라보며

이곳 경관을 읊은 시 중에 “모운반권산여화(暮雲半捲山如畵)”란 귀절이 있는데,

이는 “저문날 구름이 반쯤 걷히니 산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구나”라는 뜻이다.

산을 평하는 글에 “金剛秀而不雄 智異雄而不秀 雪嶽秀而雄”이라는 문구가 있다.

금강산은 수려하기는 하나 웅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웅장하기는 하나 수려하지 못한데 비해 설악산은 수려한데다가 웅장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화채봉으로 이어지는 화채능선이 보이고

 

화채능선(華彩綾線)은 대청봉(大靑峰)에서 시작하여 화채봉(華彩峰), 칠성봉(七星峰), 집선봉(集仙峰), 권금성(權金城)까지 이어진 능선.

일명 동북 능선(東北稜線)이라고도 한다

 

 

 

중청봉과 소청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이고

 

설악산(雪嶽山)은 설산(雪山), 설봉산(雪峰山), 설화산(雪華山)이라고도 불렸으며,

금강산을 서리뫼(霜嶽)라고 불렀듯, 설악산을 설뫼(雪嶽)라고도 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외설악 쪽만을 설악이라 했고, 내설악 쪽은 따로 한계산(寒溪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에서는 설악을 영산이라 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적혀 있으니, 신라 때부터 설악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중청 대피소로 내려오고

 

한시간을 넘는 식후경을 마치고 중청을 지나고

 

소청봉을 향해 달려가고

 

소청대피소로 갈 수 있는 갈림길이다

 

소청봉小靑峯, 1,633m 갈림봉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과 중청봉의 남쪽에 위치한 봉우리로 실제로는 봉우리가 아닌 중청봉이 끝나는 지점의 언덕이다.

속초시 설악동쪽에서 시작되는 천불동계곡 등산로와 인제군용대리에서 시작되는 백담계곡 등산로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렇게 가까운 길을 놓아두고 머나먼 길을 돌아 백담사로 가게 될 것이다

 

 

희운각 대피소를 향해 이제 우리는 한없이 내려 가게 될 것이다

 

가끔 공룡의 비경을 감상하면서 - 범봉과 멀리에 세존봉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희운각 대피소가 화채능선을 등에 업고 운해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환상이다

 

 

그런데 왠? 계곡? - 대간 마루금에 이렇게 큰 계곡이 왜 있어야지?

우리가 알고 있는 산자분수령을 얘기 하지 않아도, 어찌 됏든 물은 산을 넘을 수 없는데?????

 

어찌됐든 다리를 건너니 희운각喜雲閣 대피소이다

 

희운각  대피소와 죽음의 계곡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을 꿈꾸던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대도 설악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18명의 대원들이 대청봉에서 희운각대피소로 이어지는 계곡에서 훈련 중에 눈사태를 만났다.

하늘은 에베레스트 등정을 꿈꾸던 젊은이 10명을 데려갔다. 1969년 2월14일의 일이다.

당시 설악산에서 생을 마친 산악인 10명은 설악산 소공원에 묻혔다.

백두대간은 산악인 10명의 목숨을 앗아가 죽음의 계곡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희운 최태묵 선생이 사재를 털어 ‘죽음의 계곡’ 입구에 대피소를 만들었다

 

 

무너미 고개의 시원한 곳에서 잠시 쉬어보고

 

무너미 고개는 천불동 계곡(千佛洞溪谷)과 희운각대피소 전에 보았던 가야동 계곡(伽倻洞溪谷)의 경계에 위치한다.

서울의 수유리(水踰里)의 경우도 원래 '무너미'인데 한자로 옮겨 '수유리'가 된 것이다.

이 지명들은 '물'을 '넘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과거에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서 물을 만나면 그것을 넘거나 우회(迂廻)하는 길이 있게 되는데

그러한 용도로 사용되던 길들에 대한 일반명칭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천불동과 공룡과의 만남이 시작되는 지점이 여전히 환상적인 모습이고

 

공룡능선의 시작을 알리는 신선대의 시작부분의 암봉이 소만물상이다

 

이름부터 남성적인 판타지를 강하게 풍기는 공룡능선恐龍稜線은 설악의 기암절벽 풍광의 정수로 꼽힌다.

능선을 잇는 바위 봉우리들이 마치 공룡의 등을 닮았다 해서 이름 붙여진 이름이다

2006년 설악산을 휩쓴 수해를 복구하면서 각종 고정시설물을 만들고 길을 넓히고 우회길을 만들어 지금은 하루면 족하다.

 

 

희운각대피소 전에 보았던 계곡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가운데 보이는 능선이 대청봉에서 이어지는 능선이고(좌측이 죽음의 계곡), 우측으로 보이는 능선이 우리가 소청봉으로 되돌아온 능선이다.

산행기에 올린 지도의 녹색부분이 우리가 잃어 버린 대간 마루금이고, 우리는 국립공원에서 마음대로 정한 출입금지 조치로

멀쩡한 마루금을 놓고 참으로 길게도 되돌아 왔다.

 

 

이정표도 만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살아 있는 곳도 지나고...

우리가 갈 수 없는 신선대이기에 우회하는 길에도 이런 아름다운 비경이 살아 있다.

공룡능선에서 꼭 바위만이 있는 것이 아님을 나는 이 곳에서 다시 한번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렇게 오르다 보면

 

이렇게 땀에 흠뻣 젖도록 힘은 들지만

 

희운각1.0km지점인 신선대이다

 

신선대에서 대청봉과 중청,소청이 적당이 어우려진 명당에서 병풍삼아

 

그러나 지금까지 잘 보여주던 공룡능선을 너머 구름이 용아장성릉을 삼켜버릴 듯 이동하고...

이제 우리는 꼭꼭 숨어버린 공룡의 신비를 찾아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보여지는 곁 모습만으로 공룡의 모습을 판단하지 않았는가? 아름답다고...

보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 처럼??

이렇게 꼭꼭 숨어버린 공룡속에서도 공룡은 여전히 은은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찾아야 한다

 

 

 

이정표도 지나고

 

이제 구름이 공룡을 완전히 감싸 버려 공룡의 속살마져 보기 힘들다

 

잘생긴 돼지코에 입에 물린 여의주 정도로 해석이 가능할까?

 

구름이 아무리 공룡을 감싸려 해도 이렇게 비경은 계속 이어지고

 

 

 

 

 

 

멀리서 보면 양쪽에 귀가 달린 것 처럼 보일 것 같은 거대한 바위를 마나고

 

 

 

바닷가에서나 볼 수 있는 파도에 의해 만들어  지는 주상절리 같은 암벽도 지나고

 

외돌괴 같은 바위도 당겨보고

 

이런 바위들이 하나 둘 모여 거대한 공룡능선을 이루었으리라

우리 3기 대간 식구들이 하나, 둘 모여 지금까지 이렇게 긴 세월 함께 뜻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힘을 믿었기 때문이리라

이 암벽들이 작게 빛을 발하지만, 모이고 모였을 때는 공룡이라는 최고의 비경을 선사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얼마 남지 않은 대간길이 더욱 아쉽고,

이제 우리 마음속에 영원이 간직할 대간3기의 거대한 여정이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범봉과 천화대리지를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범봉과 천화대天花臺 리지는 설악골과 잦은바위골을 가르는 천화대 암릉의 지릉인 흑범길은 설악산을 대표하는 고전 암릉 길이다.

천화대 리지는  '천 개의 꽃이 피어난 길'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한자표기가 천화대(天花臺)인 것을 보아서는

 ‘하늘에 핀 꽃밭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 같다.

 

 

날씨만 좋으면 이렇게 보일 범봉과 천화대리지

 

아쉬운대로 한번 보고는 가야지

 

이정표도 지나고

 

수해로 복구 되기전의 모습은 어떠 했을까? 이번이 초행길이라.... 상상만 해도 아찔한 길도 지나고

 

성을 쌓은 듯한 암벽도 어렵게 통과하고

 

 

이제 마등령이 1.1km남았네

이정도면 나한봉이 보여야 하지만..... 아쉽다... 그져....

나한봉羅漢峰은 공룡 능선에 있는 봉우리 중의 하나. 불교의 수호신인 나한(羅漢)에서 그 이름이 유래됨

 

 

아쉬운 마음에 자료사진 한번 보고가야지  -  나한봉을 오르며 뒤 돌아본 공룡능선

 

 

오늘은 언덕마다 시원한 바람이 산꾼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는데...

구름속에 가려진 공룡의 모습이  아쉽지만 멀고도 먼 길을 가야하는 우리에게는 오히려 힘이 되어주는 구름과 바람

올라가면 어김없는 시원한 바람이 있다는 믿음에 우리는 힘들어도 올라가는 것이 그래도 즐겁지 아니한가?

 

 

 

얼마 남지 않았지 라는 희망속에 암벽능선도 오르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돌 지대도 지나고

 

앞길을 인도하는 암벽들의 모습이 한폭의 조각품들이구나

 

오랫만에 만나는 너덜지대도 지나고

 

마등령이다

 

오세암 갈림길이며, 마루금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비선대로 5분쯤 더 올라야 한다

 

마등령삼거리이다

 

마등령馬登嶺은 높이가 1,327m의 준봉

1982년 속초시가 발간한 <설악의뿌리> 에서는 산이 험준하여 손으로 기어 올라가야 한다고 하여 마등령(摩登嶺)이라 설명하고 있으며,

현재는 말등처럼 생겼다고 하여 마등령(馬登嶺)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영의 정상에서 사방을 살피면 동으로 동해가 보이고, 서로는 내설악의 일부가 보인다.

남으로는 외설악의 기암괴석과 절경을 바로 눈앞인 듯이 내려다 볼 수 있고, 북으로는 안하에 세존봉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마등령과 대청봉 사이는 공룡능선이 뻗쳐 있다. 마등령 이웃의 봉우리는 나한봉이다.

내설악과 외설악을 완전히 경계를 지우는 영이 마등령인 것이다

 

 

 

36차 대간길에서 비선대로 하산 했던 지점에서 인증샷도 남기고

 

마등령삼거리라는 푯말이 있었던 같은데.....  없다

 

 

다시 오세암 갈림길로 내려와 오세암으로 접속구간 하산은 시작되고....

한참을 내려오니 봉정암 갈림길을 만나고

 

봉정암鳳頂庵

소청봉 아래 해발 1224m 높이에 들어선 암자 봉정암은 설악산 종주 산행을 하는 이들에게는 무심히 스쳐 지나는 대피소쯤에 불과하다.

봉정암은 신라 선덕여왕 13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절이다

적멸보궁은 명당 중의 명당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모셔진 진혈처(眞穴處)다.

전국 5곳의 적멸보궁五大寂滅寶宮 중에서도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의 마등령에 위치한 봉정암이 기도발이 가장 센 곳이다.

자장율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실 자리를 찾기 위해 기도를 하던 중,

봉황이 나타나 알려준 곳이 바로 부처님의 이마(頂)에 해당한다고 해서 사찰의 이름을 봉정암(鳳頂庵)이라 정했다.

이렇게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가운데 유일하게 부처님의 ‘뇌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이 봉정암이다

 

 

 

봉정암 갈림길이 있는 오새암이다

 

오세암五歲庵은 매월당 김시습이 삭발하고 입산한 암자로 유명하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1435~1493년)이 세상을 등진 지 500여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다.

생전 물과 구름 사이에만 발자취를 남긴 김시습. 그는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쓰며 어릴 적부터 천재성을 보인 문학가이다.

또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한 사육신의 수급을 거두고 한평생을 유수인생(流水人生)처럼 살다간 충절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인생은 관서, 관동, 호남, 금오 등 `매월당시사유록'을 통해 전해지며 전국 곳곳에 그의 흔적을 남겼다.

 

 

 

오세암 동자전

 

내설악 오세암. 이곳은 만해 한용운 선사에 400여년 앞서 매월당 김시습이 방랑생활의 시작을 알린 얼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김시습은 이곳 오세암에서 스스로 머리를 깎고 세상과 단절한 채 물과 구름 사이에만 발자취를 남기리라 다짐했으리라.
김시습의 일생과 사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시비가 백담사 한편에 세워져 있다.

 

백담사 김시습 시비 - 이번 회차에 확인 하지 못한 것이 아쉬어 자료를 남긴다

 

 

 

 

  [薄暮 / 저물 무렵]

  萬壑千峰外(만학천봉외) / 천 봉우리 만 골짜기 그 너머로

  孤雲獨鳥還(고운독조환) / 한 조각 구름 밑 새가 돌아오누나.

  此年居是寺(차년거시사) / 올해는 이 절에서 지낸다지만

  來歲向何處(래세향하처) / 다음 해는 어느 산 향해 떠나 갈이거나.

  風息松窓靜(풍식송창정) / 바람 자니 솔 그림자 창에 어리고

  香鎖禪室閑(향쇠선실한) / 향 스러져 스님의 방 하도 고요해

  此生吾己斷(차생오기단) / 진작에 이 세상 다 끊어버리니

  樓迹水雲間(누적수운간) / 내 발자취 물과 구름사이 남아 있으리.

 

 

 

영시암을 만나고

 

수피령대피소를 마나고

 

마등령에서 백담사까지 우리는 36차 비선대로 하산하던 것 과는 전혀 다른 설악산의 모습을 보면서 내려 왔다.

세존봉과 공룡을 마주하며 걸었던 36차 때는 설악의 비경을 바라보는데도 힘이 들 정도로 즐거웠지만......

이번 접속 구간 하산길은 생각에 따라서는 가장 최악의 재미없는,

그져 무료하고 힘만 든 하산길이 되었을 수도 있다.

 

 

수피령대피소에서 백담사까지 거리 이정표이다

 

하지만 한번 더 생각하면 봉정암,오세암,영시암, 백담사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산사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어쪄면 우리에게 필요한 차분한 내일을 위한 참선의 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꼭 필요한 곳에 산사를 세워, 가다가 잠시 멈춰서서 한번쯤 우리를 차분히 되돌아 볼 기회가 되었다.

 

 

백담사 계곡에 있는 사람마다의 소원을 담은 탑들이 지천이다

 

백당사 금강문이다

 

 

백담사百潭寺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인 강원도인제군 북면 용대리의 신라고찰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의 정신적 고향이다.

'님의 침묵' 이곳에서 세상을 향해 빛을 발했고 그의 유품 등이 내방객들의 눈길을 붙들고 있다.

이 사찰 극락보전앞 화엄당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난 1988년 11월 친구인 노태우대통령에 쫓겨와 2년여를 머물던 처소이다.

근세사에서 어쩌면 백담사는 만해보다 전 전대통령때문에 더 유명세를 탓는지도 모른다.

한용운의 호가 만해(卍海)이고 전두환 전대통령의 호가 일해(日海)이므로 한 건물에서 두갈래의 큰 바다가 조우를 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                                   자료 : 충청일보 기사 중

 

 

 

만해 한용운님의 교육관도 만나고

만해는 20세 때 처음 백담사에 들어와 인연을 맺었고,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25세 때 다시 백담사로 돌아와 이듬해 출가했다.

그 후 3·1운동으로 3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다시 백담사로 들어와 불후의 시집 ‘님의 침묵’ 탈고했다.

 

 

만해 님의 흉상도 만나고

인생의 고비 때마다 이곳 백담사를 찾았다. 백담사 경내 한쪽에 자리한 1997년 개관한 만해기념관에서 만해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한용운님의 나루ㅅ 배와 行人(행인) 시비

 

나루ㅅ 배와 行人(행인)
 
나는 나루ㅅ 배 / 당신은 行人(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음니다. / 나는 당신을 안ㅅ고 물을 건너감니다. /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깁흐나 엿흐나 / 급한 여울이나 전거감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오시면 /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마지며 / 밤에서 낫가지 당신을 기다리고 잇슴니다. /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 도러보지도안코 가심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 오실줄만은 아러요 /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 날마다 날마다 낡어감니다.
나는 나루ㅅ 배 / 당신은 行人(행인)

 

고은 시인의 시비도 만나고

 

사찰이 설악산을 품고 있는 덕에 정상을 향해 갈 때의 힘든 순간이 주위 사물과 경관을 즐길 틈을 주지 않는 바

힘이 덜 드는 하산길에 비로서 풍경을 관조하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그러면서 '그 꽃'은 비단 자태를 뽐내고 향기를 뿜는 실체일 수도 있겠지만

내면적으로는 평범속에서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즐길수 있는 대상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일상에서의 낙을 찾기가 쉽지 않음을 에둘러 표현한 시인의 은유나 부처님 말씀의 '내려놓으라 함' 두가지 다 제시하는 화두는  같지만

속세의 필부필남들이 이를 깨우치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은 명확하다.        자료 : 충청일보 기사중

 

 

 

설악의 시인으로 알려진 이성선 시비도 만나고 - 백담사 계곡의 한줌으로 사라지면서까지 시처럼 산 삶이었다고 한다.

 

나 죽어 /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 저 물 속에는 / 산그림자 여전히 혼자 뜰 것이다 - 이성선 ‘나 없는 세상’
몇 해전 시인은 죽고 물소리 잘 들리는 백담사 계곡에 ‘나 없는 세상’을 새긴 시비가 세워졌다.
시인은 가고 없어도 저 맑은 물 속에 여전히 혼자 떠있는 설악산 그림자 바라보고 있노라면 도저하게 밀려오는 생의 허무 앞에 우리는 할 수 없이 비틀거린다                   매일신문

 

 

김구용시비도 만나고

동(冬)

용트림진 고매(古梅) 등걸이 밤에 눈을 맞더니 / 이끼를 툴툴 떨고 하늘로 날아올라 / 먼 새벽의 향기인가, 하마 꽃이 피었네....

 

백담사를 둘려보고 내려오니 주차장까지 운행하는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2000원을 지불하고 백담사 계곡을 따라 가는 사이 보이는 백담사 계곡의 풍경도 왜 설악산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두간만 남았구나?

짧은 만큼 멋진 추억을 남기기를 바라면서 오늘의 설악의 여정도 끝이 난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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