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 35 (3450온누리3기)  -  갈전곡봉 구간  :  구룡령에서 조침령까지

 

 

언제 : 임진년 누리달 아흐래 흙날 23시 ~ 해날

 

누구랑 : 대간3기 산우님들

 

어딜 :   구룡령에서 조침령까지 (산행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구룡령에서 조침령까지..

 

 

온 누리에 생명의 소리가 가득차 넘치는 달 6월, 우리는 구룡령을 향해 출발하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대간길이라는 현실에 다들 아쉬움 반 서운함 반.....

말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눈에서 눈으로 느껴지는 아쉬움은 이번 대간길의 소중함을 한번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구룡령

원래 지명은 장구목이다. 도로가 나기 전 강원도 홍천 내면에서 속초로 넘어가던 고개이다.

일만 골짜기와 일천 봉우리가 일백 이십 여리 고갯길을 이룬 모습이 마치 아홉 마리 용이 지난듯하다 하여 구룡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서 있는 이 구룡령이라고 알고 있는 56번 국도가 지나는 고개는 원래의 구룡령이 아니다.

이 도로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자원 수탈 목적으로 원래의 구룡령 옛 고개에서 1km 가량 떨어진 곳에 개설한 비포장도로이다. 

그 후 1994년 이 도로를 포장하여 오늘에 이르는 것이다.

일제 당시 일본인들이 지도에 원래 구룡령의 위치를 표기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든 비포장도로를 구룡령으로 표기하면서 위치가 잘못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1994년 이후에는 모든 지도와 행정 표기에서 구룡령의 위치가 현재의 고개로 표시되었으니 원래의 구룡령을 찾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김희석님의 체조로 몸을 풀고 오늘의 대간길을 위한 여정을 준비하고

 

본격적인 산행은 시작되고

 

이제 도로 절개로 끊긴 마루금은 여기부터 본격적으로 마루금 산행을 시작하고

 

곧이어 구룡령옛길을 만나다

 

최근에는 한계령이나 미시령을 주로 이용하지만 예전에는 구룡령이 영동, 영서를 잇는 주요 통로였다.
산세가 험한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보다 길이 완만하여 동해안 사람들이 한양을 오갈 때 주로 이용하던 길이었다고 한다.

등짐장수들이 영동의 해산물과 영서의 농산물을 부지런히 져 나르던 길이기도 하다
구룡령 옛길은 최대한 경사를 뉘여 자연스럽게 만들어져 있어 노새에 짐을 싣고 오르면서도 그저 숲길을 걷는 듯 숲을 느끼며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말 신작로가 생기고 1990년대에 이 길이 아스팔트로 포장되자, 이 자그마한 산길은 그토록 오래 사람들과 함께했음에도 기억에서 잊혔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일본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도 옛길 찾기 바람이 불자, 양양 갈천리 마을주민들이 수풀에 묻혀 있던 이 길을 찾다                                          

    자료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

 

 

 

홍천군 명개리에서 양양군 갈천리를 이어주는 구룡령 옛길은 2007년 정부로부터 ‘문화재 길’(명승 제29호)로 지정됐다

명개리 明開里는 해발 600m이상의 고지대에 있으며, 우리나라 읍, 면 중에서 면적이 가장 넓다.

자연마을로는 아침갈이(아래 조경동마을) 등이 있다. 명개리는 본래 메밀앗골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옛날 이곳에 어떤 사람이 메밀 아홉 이랑을 심어 아홉섬을 수확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출처] 명개리 [明開里, Myeonggae-ri ] | 네이버 백과사전

 

 

다시 산행은 시작되고

 

갈전곡봉 중간지점쯤 통과하고

 

갈전곡봉이 이제 한시간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고

 

갈전곡봉이다

갈전곡봉 葛田谷峯은 강원 인제군 기린면(麒麟面)과 양양군 서면(西面)의 경계로  여기서 남서쪽으로 가칠봉과 응복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갈라져 나간다. 정상에서 왼쪽으로 홍천군 명개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있다.

갈전곡봉은 '칡넝쿨 밭'이란 뜻이다. 소양강의 지류인 방대천(芳臺川)을 비롯하여 계방천(桂芳川), 내린천(內麟川) 등의 발원지이다

 

 

 

갈전곡봉은 가칠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분기시킨다

가칠봉加漆峰 12409m은 백두대간 갈전곡봉에서 남서로 뻗은 능선상 2.5Km지점의 첫 번째 봉으로 태고의 원시림속에 숨겨진 오지의 산이다.

강원 인제군 기린면과 홍천군 내면의 경계이다.

산림은 천연림으로 전나무와 활엽수가 어우러진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산 끝자락에는 한국명수 100선에 선정된 삼봉약수가 유명하다

 

 

갈전곡봉에서 잠시 휴식 후

 

이제 조침령을 향하여 다시 산향은 시작되고

 

이제 서서히 미명의 세벽은 다가오며 가야할 산들이 앞길을 열어 주는데

 

갈전곡봉에서 부터 계속되던 천둥소리는 결국 비를 내리기 시작하고

 

다행이 큰비는 아니지만 봄비의 흉내정도의 비는 계속되는데.... 1080봉이다

 

잠시 보여주는 틈을 이용해 왔던 길은 조망하고

 

또 가야할 봉을 한번 당겨보고

 

쉼터가 마련되어 있는 봉에서 잠시 휴식하고

 

서쪾으로 조경동과 동으로 왕승골로 내려가는 갈림길이다

 

왕승골 旺勝洞 는  2007년 국토지리정보원에서는 양양군 서면 갈천리의 왕승동(旺勝洞, 마을이름)의 일제시대의 잔재인 왕(旺)을 왕(王)으로 변경하였으며, 이는 원래의 우리 지명으로 되찾았다는데 의미가 있다.
왕승동(王勝洞)은 마을 곳곳에 커다란 무덤이 있는데 이것은 마의태자 왕궁터로 추측된다

 

조경동 朝耕洞은 아침가리골[朝耕洞] 로 산이 깊어 아침에만 잠시 밭을 갈 수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전체가 산에 둘러싸여 오전 9시가 넘어야 해가 뜨고 점심 무렵부터 땅거미가 진다.

대간 아랫길을 따라 아침가리로 가는 길에 삼봉약수와 방동약수가 있다.

 

 

 

잠시 쉬어 보고

 

아직은 봄비가 계속되는 가운데 숲길의 향기를 담아보고

 

가다 지치면 쉬어가기도 하고

 

 

이젠 아예 시간도 거리표시도 없는, 왜 세워 놓았는지를 알 수 없는 이정표를 만나고...

홍천군에서 인제군으로 넘어 오면서 이렇게 바뀌었는데... 혹시????

 

등산 상식좀 안다고 자랑이라도 할 샘인지, 방위각만 덩그라니 쓰여 있다.

이런 이정표는 없어도 대간 산꾼님들이 달아놓은 띠지로도 충분한데,

굳이 돈들여 새울 바에야 도대채 얼마나 남았는지? 얼마를 달려왔는지? 알 수 있게 해야지.....

 

 

이제 비는 어느 정도 그치고

 

조금 오르면

 

삼각점봉이다.(968.1봉)

 

이번 구간에서는 참 보기 힘든 조망에도 잠시 보여주는 가야할 앞봉을 잠시 찍어보고

 

너덜지대를 지나고

 

산죽지대도 지나면서

 

연가리 샘터를 만나고

 

연가리는 옛날에 연초(담배)를 많이 갈았다고 연가리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연가리골은 재앙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룬 곳이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오지 중의 오지였던 곳이다.

연가리는 정감록이 적시한 최고의 피난처 중 하나였다.

불(火)과 물(水) 난(亂)을 피할수 있는곳 삼둔 사가리. 조선시대 예언서인 정감록 에서 전하는 "삼둔 사가리" 는 일곱군데의 피난지소를 일컫는다.

삼둔은 "살둔" "달둔" "월둔" 이고 사가리는 "아침가리" 연가리" 명지가리" 적가리"4곳이다.

 

 

 

비가 그치기를 조금 기다리느라 늦은 아침은 시작되고

 

이제 가야할 봉과 함께 애기단풍 집단 서식지가 시작되고

 

단풍이 들면 아름답겠지만

 

길표시를 해주는 능선을 따라 계속이어가는데

 

정말 볼 것 없는 이번 대간길에서 그래도 추억을 남길만한 것이 있으면 무조건 담아보고

 

 

그만 그만한 봉과 안부가 이어지는 가운데 안부에서 잠시 휴식해 보고

 

정만 감지덕지하게도 잠시 보여주는 연내골의 끝없이 이어지는 계곡을 담아보고

 

1061봉이라 쓰여 있는 봉이다

 

계속되는 단풍나무 숲 사이로

 

나같은 문와한을 완전히 무시한 이정표를 지나고 --  도대채 어떤 양반의 생각이야? ㅉ ㅂ

 

산죽도 아닌 것이 산죽과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는 군락지를 지나고

 

위에서 본 모양 - 누구 아는 분 없나요?

 

아래에서 본 모양

 

이번 구간에 유난히 많은 안부의 휴식공간을 지나고

 

백두대간 안내판을 지나고

 

서면 황이리와 진동계곡 갈림길을 만나니

 

동쪽으로 가면 황이리이고

황이리는 양양군 서면에 있는 마을로,  백두대간을 등에 지고 신라시대 수도승들의 요람이었던 선림원지와 미천골을 품에 안은

전형적 산촌마을인 황이리는 마을 형상이 누런 황룡이 머무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황룡마을로도 불린다.

 

 

황이리로 내려가는 길은 미천골로 내려가는 길이다

미천골 계곡은 하얀 쌀뜨물이 계곡을 따라 흘렀다 해서 `미(米)천(川)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계곡에 깃들어 풍요롭게 살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동쪽으로 내겨가면 진동계곡으로 내려가는데...

 

등로로 봐서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듯하다

기린면 진동리에 있는 진동계곡은 진동1리 추대에서 설피밭에 이르는 장장 20㎞의 계곡이다.

방동약수를 지나 적가리골, 쇠나드리, 설피마을, 곰배령으로 이어지는 계곡길은 백두대간에 걸터앉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

 

 

진흑동은 진동1리의 자연마을이며, 서면은 양양군이다

 

 

이제 산죽지대를 가다보면

 

이번 구간은 소나무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

 

이번 구간에 자주 만나는 풍뎅이도 사진에 담아보고

소나무도 거의 없는 구간이다 보니, 활엽수 입을 주로 먹는 풍뎅이가 자주 눈에 띈다

 

 

역시 계속되는 단풍나무 굴락지

 

대간길에 벗어 나 있는 철탑도 찍어보고 - 얼마나 찍을 거리가 없으면....  ㅉㅉㅉ ... 서림계곡쯤 될까?

 

 

이정표가 하도 높아서 사진 찍기도 불편한 이정표를 지나고 .. 몇번 강원도 대간길을 걷다보니

이해가 간다..   얼마나 눈이 많이 오면 이렇게 높지 않으면 이정표가 눈에 묻혀버리기 일쑤이니..

 

나무가지 사이로 어렵게 보이는 마을도 당겨보고 - 참으로 조망거리도 없구나

 

 

이제 우리가 만나게 될 418번 지방도가 앞에 보이는 봉 너머로 숨어버린다.

결국 앞에 보이느 봉을 넘어가야 한다는 결론인데... 참으로 멀리 느껴진다

 

그래도 가야하니 산죽지대도 넘고

 

앞에 보이는 작은 봉도 넘어야 하고...

 

삼각점 봉에 이르니

 

쇠나드리 이정표가 있는 봉이다 -- 

 

쇠나드리( 옛 조침령) : 진동리 동쪽 냇가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안에 있는 내(川)의 여울이 급하고 바람이 세어서 소가 건너다니기 힘들었다 한다 

옛날 철광석을 녹여 쟁기를 만들던 곳이기도 하다. 갬벌에서 자은리 증골(점골)로 넘어가는 쉰재(쉬인재) 고개 밑엔

지금도, 철광석을 녹여 쟁기를 만들 당시 나온 쇠찌꺼기 더미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하도 높아서 상,하 분리해서 이정표를 찍어보고

바람불이는 본래 세 물줄기가 길을 막았다는 의미의 ‘세나들이’로 불렸는데 넓은 풀밭에 소를 방목하면서 ‘쇠나들이’로 바뀌었다.

강원도 산골마을의 이름은 이처럼 늘리거나 보탤 게 없다. 보이는 대로 태어나고 변해간다.

 

 

 

조침령 옛길(쇠나드리 방향)

 

1.산경표나 增補文獻備考에 나타나는 조침령(曺寢嶺)은 무리조(曺),잘침(寢)재령(嶺)이다. 

2.고지도에 나타나는 조침령(阻沈嶺)은 막힐조(阻),베개침(沈)재(嶺)이다.

1. 무리지어 자고 넘는 다는 뜻이고 2. 험한 고개가 가로막고 있으니 하룻 밤 유숙하여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 일게다.

쇠나드리에서 윗서림으로 넘어가던 길이었다

 

 

 

다시 산죽지대와 함께 오름은 시작되고

 

신록으로 우거진 잡목들이 사람과 키재기를 하자하며 터널을 이루고 있다.

 

이번 구간에서는 꽃들도 보기 쉽지 않다

 

돌이 놓여져 있는 봉을 지나

 

숲길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길이다 보니.... 좀 그렇지???

新綠은 늦봄이나 초여름에 새로 나온 잎의 푸른 빛을 뜻 하는데, 이번 구간은 정말....

오히려 지겹다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신록의 향연이다.

어찌 그 흔한 바위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조망되는 봉우리도 하나 없고..  

 

 

 

또 다시 우리가 내려가야 할 지방도가 잠깐 보여주고

 

조침령 터널 위 목재다리가 바로 보인다

 

먼저 선두로 오신 산우님들과 조침령 산판도로(군사도로) 위에서 조우하고

 

조침령 이정표에서 단체사진 찍으려 이동하고

 

조침령 元 이정표

조침령  阻沈嶺  曺枕嶺   鳥寢嶺

조침령은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세나드리에서 양양군 서면 서림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소금을 지어 나르던 고개이다.
이 도로는 군사도로에서 군도를 거쳐 현재는 지방도로 승격되어 있는 상태다.

그러나 근래에는 '새도 자고 넘는 고개'라는 뜻으로 조침령(鳥寢嶺)이라고 쓰고 있다.

 

 

 

거대한 이정표에서 나도 한 컷 (이번 구간에서 처음 찍어 보는 것 같다)

조침령도 구룡령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길이 본래의 옛길이 아니다. 본래의 옛길은 현재의 조침령보다 남서쪽에 위치한 쇠나드리고개였다.

별로 높지 않은 고개지만 소도 날아갈 정도로 바람 세찼으니

예전에는 새들도 머물러 쉰 후 고개를 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의 조침령은 20여 년 전 군부대가 놓은 군사 도로이다

 

 

군사시설인 것 같은 돌로 만든 진지도 보인다

 

산판길(군사도로)을 따라 쇠나드리 방향으로 내려오면서

 

김재규의 사단장 재직시 3공수부대원들에 의해 개설되었다는 군사도로로 현재의 조침령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지명은 "반편고개" 또는 "반부득고개((서림에서 조침령으로 넘어가는 중턱에 대략 5만여평 되는 소반처럼 넓은 평지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라 하였다.

현재의 조침령은 역사가 20여년 밖에 되지 안했지만 그 당시 군인들의 힘들었던 고난에서 병사들을 새(鳥)로 비유한 것 같다

 

 

 

저 멀리 풍차가 보여서 당겨보고

 

이렇게 비교적 짧은 구간이지만, 조금은 지루하게 느낄 수 있었던 대간길이었다.

그러나 동해에서 생산한 소금을 지고 구룡령이나 조침령을 넘나 들었을 우리 선조들의 삶의 무게를 느껴 본다면

오늘의 대간길도 우리가 경함한 소중한 역사의 한페이지를 썼다고 자부하고 싶다.

사면이 산으로 둘려싸여 있어 하루 3시간 정도 밖에 일을 할 수 없다는 오지중의 오지인

아침가리(조경동)에 지금도 몇 분이 사신다고한다.

그 삶이 부귀영화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고 보면,

오늘 하루 먹을 만큼만 생산하고, 소비하는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습도 상상해 본다.

그것이 진리는 아닐지라도 우리 삶의 어려움이 다가올 때 한번쯤 생각해 봄직한,

내가 오늘 이 길을 걸으며 느낀 생각이다.

 

 

 

37차 대간 산행에 함께한 모든 산우님들 수고하셨습니다.

볼 것도 없는 산행기 끝까지 읽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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