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서울답사기 : 정순왕후의 길 따라 걷기  2번째 

                                        

 

                                                    

언제 : 갑오년(14년) 매듭달 스물여드레 해날          

 

누구랑 : 조박사, 올리브, 산에는, 바시, 바시원, 티티, 아톰마마, 피그여왕, 도덕산, 뒷풀이 청솔, 단애(경칭생략)

 

어딜 : 광희문 ~ 낙산산성 ~ 비우당 ~ 동망봉 ~ 영도교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2213 에 있습니다

 

 

정순왕후의 고단했을 삶의 현장인 흔적들을 찾아 나서는 길 이번이 두번째이다

허울뿐인 국모라는 탈을 벗고 세상속으로 들어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기에 18청춘에서 팔순까지

몸은 비록 힘들고 맘은 항상 낭군을 생각하면 가슴찢어지는 고통이었겠지만

세조가 보내준 호위호식할 수 있는 집과 음식을 거절하고 살아 갈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생각하고 생각하고 걷다 보면 몇 번을 들린다 해도 또 들리고 싶은 곳이 바로 정순왕후가 남긴 흔적들이다

마침 많은 산우님들이 함께 동반을 해 주신다고 하니 오늘은 또 어떤 생각을 하며 걸어가게 될지...

 

 

낙산산성에서 청룡사까지 등로 - 다음지도

 

청룡사에서 영도교까지 - 네이버 지도 : 동망봉 직전 청룡사를 먼저 들리고 동망봉을 들림

 

 

조선시대에 정순왕후가 두분이 계시는데 한분은 그 유명한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게 하는데 일조하고 

어린 순조대신 수렴청정을 하면서 스스로 여왕(女主,女君)이라 칭했던 여걸 貞純王后이고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될 定順王后는 조선 제 6대 왕 단종의 비이다. 지금 남양주 사릉에 모셔져 있다

너무도 다른 생을 사신 두분의 행적과 흔적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지금도 진행형인 것 같다

어느 궁중의 여인처럼 화려하고 풍성한 여생을 보낸 것도 아니면서 지금까지 심정으로만 추앙받고 있는 定順王后

어찌 됐든 역사적 평가는 극명하게 갈리지만 정치적 한 복판에서 남성위주의 조선사회에서 뚜럿한 족적을남긴 관계로

지금도 자주 사극의 주인공이 되어 나타나는 貞純王后

지금까지 잊혀저 가고 있는 定順王后의 흔적을 찾아 가는 길이 그래서 더 소중하게 다가 오고 있는 것 같다

 

 

 

초보산꾼과 함께 서울 시내 걷기를 위해 동대문역사문화역 3번출구에서 만나

 

광희문을 배경으로 한장

 

횡단보도를 건너 남쪽의 작은 문인 광희문

광희문(光熙門)

남소문(南小門)에 해당하는 광희문(光熙門)은 건국초기에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따로 남소문이 세워졌다가 그 효용성이 없어 폐쇄되고

이로 인해 광희문은 초기에는 남소문과 구별하여 한양의 물길이 지나가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가까이 있어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렀고,

도성에 장례행렬이 지나갈 때는 이 광화문으로 지나가는 관계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김지하의 시 「녹두꽃」의 시구인 “별 푸른 시구문 아래 목 베어”가 떠오르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광희문 안쪽으로 들어가 안내인으로 부터 성곽에 대한 카다로그를 받고 = 실내는 다 똑 같다고 보여주지 않는다

 

다시 되돌아 나와 동대문운동장을 헐고 새롭게 태어난 동대문 역사 박물관 - 서문

 

사실 우리 나이 때 쯤 되면 동대문 운동장에 대한 추억이 많다

아마도 5,60대에게 동대문운동장은 마음의 안식처와 같은 곳이었던 것이다.

그 동대문운동장도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었던지 헐리고 동대문역사문화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런데 동대문 운동장이 일제에 의해 왜곡된 일제 침략의 산물이었음을 안다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풍수지리학상 좌청룡인 북악산의 정기를 안고 있는 낙산의 지세가 약하다 보니 여러 비보책(裨補策)을 썼는데

그 중에 하나가 동대문 옆에 청계천을 준설한 흙으로 가짜산((假山)을 쌓아 낙산의 지세를 넓히려 했다고 한다.

 

 

남소문동천의 이수문이 복원되어있고..  물도흐르지만 치안도 담당했다는 뜻으로 쇠창살까지 함께 복원되어 있다.

 

이제 옹성이 빙 둘러 있는 동대문(흥인지문)을 만난다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울 4대문중 하나로 보물 제1호이다.  동대문 사거리에서 보이는 문이 후문이다

서울의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都城)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정문에서 단체사진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둘러 축조한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성)을 갖추고 있다

동쪽은 오행상 木이요, 仁을 상징한다. 동대문만 유일하게 네글자인 흥인지문이라 하여 之자가 첨가된 것은,

옛부터 동쪽이 낮아 왜구의 침입을 많이 받으므로 동쪽의 기운을 높이는 뜻에서 산맥을 뜻하는 之자를 첨가했다고 한다.

또한 낙산의 지세가 낮아 동대문 운동장에서 본 가산을 싾았다고 한다. 그리고 옹성까지.

한 나라가 탄생하는게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낙산으로 오르다 바라 본 동대문

 

역시 서울도시 걷기는 이렇게 여유롭게 걸어야 돼

 

한양도성박물관을 지나 종로 녀던길과 함께 성곽따라 걷다보면 이렣게 정감이 있다

 

 

 

박무속에 남산을 배경으로 사진한장

낙산駱山   종로구와 성북구의 경계

동대문에 인접한 낙산(駱山)은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으로 종로구 이화동과 동숭동, 동대문구 창신동, 신설동, 보문동, 성북구 삼선동에 걸쳐 있는 산

한양도성의 동산(東山)에 해당하여 서쪽의 인왕산(仁旺山)에 대치되는 산이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낙산은 산의 모양이 낙타와 같아서 낙타산(駱駝山), 또는 타락산(駝酪山)이라고도 하고 그 서쪽의 계곡을 쌍계동천이라 부른다.

 

쌍계동천(雙溪洞川)이라 함은 경신고등학교 어름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는 성균관 옆을 지나 반촌으로 흘러들고

또 다른 하나는 혜화문 아래쪽 지금의 대학로로 흘러들어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모두 복개되어 두 물줄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쌍계동천은 삼청·인왕·백운·청학과 더불어 도성내 5대명승지로 꼽혔다.

 

 

 

이제 낙산 정상에 있는 낙산공원 - 여기서 우측 쪽문으로 나가면 혜화문으로 가고 좌측으로 내려가면 혜화역으로 내려 가게 된다

 

낙산의 지세를 알기위해서는 우리 산방에서도 열심히 걷고 있는 한국의 산줄기 개념부터 확인을 해야 한다

백두산에서 시작해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구간 중 강원도 식개령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한북정맥이고

도봉산을 지나 우이령에서 상장봉으로 치닫는데, 줄기중 하나가 북한산이 되고 다시  엊그제 함께한 북악산이 이어진다

그래서 한양 도성에서 보면 북악산이 主山이 되고 북한산이 祖山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서로는 인왕산338m 남으로는 목면산(남산)이 나름대로 높이를 가지고 있어 믿을 만한데 동쪽을 책임지고 있는 낙산120m이 문제였다

우백호인 인왕은 여성을 의미하는데 높고, 좌청룡인 낙산은 남성, 장자(큰아들)을 의미하는데 형편없고...

다 알고 보면 이렇게 남속모르는 속앓이가 있듯이 건국하는데도 이런 속사정들이 있었음을 알아가는게 우리가 걷는 목적인 것이다

 

 

 

인왕산과 북악산 그리고 북악하늘길을 담아 본다

 

낙산의 정상에 서면 한양도성의 주산인 북악산이 보이고 우청룡인 인왕산 그리고 조산인 북한산이 하늘을 지붕삼아 한양을 지키고 있다

또 잠시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한양도성의 안산인 남산(목면산)이 가까이에 보인다

이렇게 낙산을 오르면서 내사산을 모두 볼 수 있고 풍수에 문외환이라 할 지라도 산세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리가 되고 있다

왜구의 침입이 잦아 동쪽의 기운을 높여야 하는데...

 

 

네거리에서 우틀하여 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낙산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 하면 쌍용아파트 정문을 만나게 된다

 

바로 앞에 있는 좁을 길로 우틀하면 비우당과 원각사가 나온다 - 자주동샘 이정표가 있다

비우당(庇雨堂)

비우당(庇雨堂)은 ‘비를 피할 만한 집’이라는 뜻이다.

이수광이 지었다는 ‘비우당기’를 보면 이수광의 외가 5대 할아버지인 유관 대감이 이곳에 초가삼간을 짓고 살았는데,

당시 유관 대감은 정승답지 않게 동대문 밖 지봉(芝峰)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았다. 초가는 비가 오면 방에 비가 새는 집이었다.

비가 올 때마다 대감이 아내에게 한 말인즉 “우산도 없는 집은 이 비를 어찌 막을꼬”였다고 한다.

 

 

 이수광 (李睟光, 1563~1628)의 지봉유설

이수광이 비우당에서 지은 ‘지봉유설’은 그가 영창대군 사건으로 관직을 내려놓고 원고를 정리하기 시작해 1614년에 편찬된 책으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내용은 천문, 시령, 군도, 병정, 인문, 인사, 종교 등 25부 182항목으로 분류ㆍ구성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수광이 활동했던 시기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치르고, 광해군 때의 정치적 갈등과 인조 때의 이괄(李适)의 반란을 겪은 혼란기였다.

그는 이러한 어려운 정국에 살면서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항상 강직하면서 온화한 성품을 지켰다. 지금도 그는 성실한 관료의 본이 되고 있다.

자료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91226

 

 

 

복원한 초가집을 보니 지금의 눈으로 보면 옛집에 대한 정감이 있어 나름대로 의미를 주지만

비우당이라는 의미에 맞게 복원할 생각이었다면 곧 비가 오면 쓰러질 것 같은 느낄을 살릴 수 없었을까?

이렇게 반듯한 목제가 아니고 좀 휘어진 기둥도 보이고 물 센 흔적도 좀 보이고...너무 많은걸 기대했나? 

이거라도 감지덕지 해야지... 이것도 없었으면 누가 지붕유설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세기리...

 

 

자주동샘

 

과연 이 비우당에 있는 샘에서 어떻게 빨래를 했을까?

지금이야 낙산정상 턱 밑까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전혀 현대인의 눈으로는 알 수 없지만

비우당 반대편 낙산에서 흘러내리는 쌍계동천(雙溪洞川)이라 해서 도성내 5대명승지로 불리운 것을 보면

왕족이나 문인,가인들이 자주 찾아 풍류를 즐겼다는 루각이나 정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추정할 수 있게 해 준다

 

 

바로 옆에 '자지동천'이라 암각되어 있다

자주동샘(紫芝洞泉)

비우당 좌편에 보이는 우물은 ‘자주동샘’이라고 하는데, 단종의 비인 송씨(정순왕후)가 비단을 빨면 자주색으로 물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정순왕후는 민초들의 도움에 기대어 있지 않고 염색을 하며 생업에 뛰어들어 80을 넘길 때까지 영원한 국모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동천이라는 샘에서 자라는 ‘지초’라는 풀로 염색을 하면 보라색으로 물드는데, 정순왕후와 시녀는 이를 시장에 내다팔아 생계를 이었을 것이다.

왜 우리가 정순왕후를 잊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찾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곳이다

 

 

비우당 따로 정리..

https://cojcby19.tistory.com/m/2185

 

 

단종의 천도도량인 원각사를 들렸다 다시 되돌아 나와 길을 따르다 원각사 뒷모습

 

 

원각사 답사기는

https://cojcby19.tistory.com/m/2186

 

 

 

명신초등학교를 지나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담장 사이로 진입해야 보문사로 빨리 갈 수 있다

 

경사가 심하고 아직까지 얼어 있어 유격훈련하듯 내려와야만 했다

 

힘들게 내려오면 바로 보문사 정문

 

미타사와 보문사

세계 최초의 비구니 종단이라는 보문종(普門宗)의 본사인 보문사와 미타사, 그리고 청룡사까지 모두 비구니 절인데

왜 이렇게 서울에 비구니절이 많을까? 이런 의문이 들지 않나요?

그런데 문제는 임금에게 수많은 궁인들이 따라 다니게 되는데 그 궁인들이 언제까지 궁에 머물 수 없다는데 있다

그렇다고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궁에서 많은 세월을 보냈기에 딱히 의지 할 곳도 없고

 

 

비구니절의 본사인 가장 큰 절인데 여인들의 모습을 담아봐야지

 

그래서 의지하게 되는 것이 절이었던 것이다. 업을 닦는다는게 뭐 별건가? 이게 업이지...

그래서 청룡사로 바뀐 정업원의 의미도 똑 같다고 보면 무리가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 대표적 비구니절은 청룡사, 보문사(미타사) 와 현 옥수동의 미타사 그리고 청량리 청량사로 알려저 있다

조선은 충효를 강조하는 유학의 나라였으나 영혼의 세계와 사후 세계는 불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보문사에서 나와 조금 내려오다 미타사 이정표 방향으로 좌틀하여 미타사를 만나다

 

말이 궁중생활이지 얼마나 많은 제약속에 살아갈 수 밖에 업다 보니 복을 빌면서 마음을 의지해야 할 곳도 필요했을 것이다

왕가 사람이 아니면 궁에서 최후를 맞을 자유도 없는게 현실이었던 것 같다. 평생을 궁에서 지냈는데도...

그래서 돈을 모으는데로 나름대로 불화(佛畵)같은 것들을 시주로 많이 하면서 궁을 나오면 그 절에 몸을 의탁했다는 것이다

궁에서 궁녀로 산다는 것, 곁은 화려하게 보여도 알고 보면 다 업으로 살아갔던 생활이었던 것이다

 

 

미타사에서는 가장 높은 단하각 옆에 있는 6층 석탑을 봐야 한다. 3층씩 시대가 다르다고 한다. 원인은 알 수 없다

 

 

보문사와 미타사 따로 정리..    왜 서울에 비구니절이 많을까?

https://cojcby19.tistory.com/m/2188

 

 

 

시간도 시간인지라 식후경을 위해 바로 아래에 있는 보문역에 있는 음식점에 들러 식후경

 

신장개업에 음식깔끔하지 맛있지...

 

 

 

 

 

다시 보문사로 올라오다 보면 동망봉 쉼터가 보이고 공원으로 올라간다

 

계속 올라가면 E편한 세상아파트 보문단지 정문을 나와 좌틀

 

아남아파트가 보이면서 동망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거리가 나오면 우측으로 청룡마트 방향으로 내려오면 청룡사가 보인다

 

 

 

 

 

청룡사에 들어서면 단종과 영원한 이별이 될 줄 몰랐을 마지막 밤을 지낸 곳으로 알려진 우화루가 반긴다

 

꽃비가 내리는 雨花樓, 워낙 낭만적으로 들리는 어감과 뜻을 지니다 보니 사람이 잠시 쉴 수 었는 장소에 어울리는 단어이다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설법할 때 하늘 위의 신들과 하늘 아래 축생 아귀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였는데 이때 꽃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대웅전가 마주보고 있는 이 곳 우화루는 귀양길에 나선 단종과 왕비가 마지막 밤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슬픔을 안고 있다

꽃이 비처럼 흩날리듯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별의 눈물이 비되어 정순왕후의 가슴을 아리게 했을 것을 생각하니 분하고 원통하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영원히 이별한 장소라는 의미로 永離亭으로 불리다가 영원한 아름다움을 간직했다는 뜻의 永美亭으로 불리기도 했다.

 

 

 

지금은 문이 닫혀 있는 정업원 구기비가 있는 반룡송을 담아 본다

반룡(盤龍)은 아직 하늘에 오르지 않고 땅에 서려 있는 용을 일컫는 말이므로

반룡송은 아직 승천하지 못한 용처럼 위로 4m정도만 자라다가 몸을 비틀어 옆으로 가지를 뻗는 소나무를 말한다.

반송(盤松)이 밑둥지에서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어 버섯 모양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라면

반룡송(盤龍松)은 밑둥지에서 한 줄기로 솟아오르다가 옆으로 뻗는 것이 반송과 다르다

 

 

보문사에서 만난 반송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절을 나와 조금 내려오면 정업원 구기터를 만난다

 

고려왕실에서 부터 시작돼 고려유생들에 의해 혁파의 대상으로 지목돼 폐지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정업원

고려조 공민왕의 비였던 혜비(惠妃: 이제현의 딸)가 공민왕 사후에 이 절로 출가를 하면서 왕가의 여인과 인연을 맺었고

이어 태조 이성계의 셋째 공주인 경순공주도 태종 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으로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친 오빠 방번, 방석이 살해되자 이 절에 일생을 의탁했으며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우화루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영도다리에서 영영 이별하고 이곳에서 여생을 살았던 곳이다

 

 

 

조선시대의 후궁들은 임금이 죽으면 궁 밖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들의 일부는 불교에 귀의하고 일부는 정업원에서 보냈다고 한다.

초기에는 당당한 실세들의 궁내 종교행위였는데 후기에는 후궁들이 여생을 보내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 스님의 말씀으로는 여기에 들어오면 역적으로 취급되어 함부러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궁에서 궁녀로 산다는 것, 곁은 화려하게 보여도 알고 보면 다 업으로 살아갔던 생활이었던 것이다

 

 

영조의 역사관이 돋보이는 현판이 걸려 있다

영조의 역사관  자료 : http://blog.daum.net/kanggiok/6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후 정순왕후가 겪은 고난이 영조에게는 남의 일같이 않게 느꼈음을 알 수 있다.

무술이 소생으로서 왕위에 오르기까지 위태로운 고난을 겪은 영조는 자신의 아픔이 정순왕후의 아픔에 오버랩되어 북바쳐오는 슬픔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왕의 체통도 잊고 눈물을 삼키며 썼다는 음체서(飮涕書)의 기록을 남겼다.

여기에는 영조의 올바른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부끄러운 역사도 영원히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제왕으로서의 역사인식을 피력했다.

현판의 ‘前峰後巖 於千萬年’이 그것이다.

이를 왕의 입장에서 보면 ‘앞의 산봉우리여, 뒤 언덕의 바위여, 천만년 영원하라.’는 명령형 해석이 가능하고,

문학적으로 보면 뒷부분을 ‘영원하리라’는 영탄적 해석이 가능하다.

이 작은 현판과 비문 앞에서 한 임금의 역사에 대한 인식과 왕권에 대한 인간의 욕망, 그리고 그에 따른 여인의 한을 읽을 수 있으니

역사의 현장은 세월이 갈수록 더 찬란한 빛으로 후세를 교훈한다.

역사는 그렇게 옳게 산 사람과 그르게 산 사람을 심판하는 공정한 거울과 같은 것이니 바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다시 올라와 계속 길을 따르면 운동시설이 있는 동망봉에 오른다

 

동망봉

 

역대 궁중의 여인 중에 지금까지 존경받으면서 사람들이 찾고 있는 분이 두분인데 

그 중에 한분은 광명 영회원에서 만난 조선 제16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민회빈 (愍懷嬪) 姜씨(1611~1646)이고

또 한분이 바로 오늘 우리가 낙산길을 걸으면서 만나게 될 단종의 비 정순왕후 여산 송씨 이다

단종과의 가슴아픈 이별이 켜켜이 남아 있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정순왕후의 초보산꾼 역사이야기는   http://blog.daum.net/kmhcshh/2189  에서

 

 

다시 숭인공원사무소 방향으로 내려와 우측 계단으로 내려오면

 

아픔을 안고 있는 채석장을 볼 수가 있다

채석장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 쓸 화강암을 떼어 갔다고 한다. 채 100년도 되지 않은 역사의 아픔이 있는 현장이다

서울 내사산중의 하나인 낙산의 반절이 사라져 가버렸으니...

영조 47년에, 그 친필로 이 암벽 위에 '동망봉'이라는 글씨를 새겨 추모했다고 한다. 채석장이 되면서 그마저도 떨어져 나갔으니...

동대문운동장에 이어 일제시대의 아픔을 생각해  본다

 

 

 

계속 골목길을 내려오면 지금은 많이 사라진 한 때 호황을 이뤘던 봉제공장 집단지 였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봉제공장 건물

 

이제 창신역으로 내려와 동묘역까지 걸어 온다

 

동묘역 4번 출구 방향으로 동묘벼룩시장이 시작된다

 

오늘은겨울인데도 더 유난히 사람이 많다. 왜?   그만큼 없는 서민들은 겨울에 일자리가 없다는 반증? - 동묘울타리가 나오면 우틀

동묘의 벼룩시장

벼룩시장은 청계천 복원사업에 의해 밀려난 노점상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저 80, 90년대에 청계천 7가, 8가 일대 즉 옛 명칭으로 한다면 ‘황학동 벼룩시장’을 중심으로 먹고 살던 사람들이었다.

청계천 복원사업의 완공 이후에도, 그 언저리를 멀리 벗어나지 못하여 배회하다가, 마침내 동묘앞 주말 벼룩시장을 만들어냈다

 

 

추억은 남겨야지?

 

동묘를 지나 숭신초등학교 정문을 지나면 바로 여인시장터가 있다

 여인시장터

조선시대에 여인들만 출입할 수 있었던 여인시장이 있던 곳이다. 여인시장은 채소를 주로 팔던 곳이었다.

조선 6대 임금 단종이 숙부인 세조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당시 왕비였던 정순왕후 송씨는 궁에서 쫓겨나 동묘 부근 정업원(현재 청룡사)에서 살게 됐다.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난 정순왕후 송씨를 도와주던 사람들이 바로 금남의 장소인 여인시장 여자들이었다.

궁에서 이를 금지해도 도움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던 여인시장 사람들이 채소와 먹을 것들을 정순왕후 송씨에게 가져다줬다.

 

 

여인시장터..   더 많은 답사기 자료는

https://cojcby19.tistory.com/m/2193

 

 

 

조금 이동하면 바로 청계천 영도교가 나온다 -영도교로 내려간다

 

사실 우리가 영도교를 아무리 보아도 이미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우리 기준으로 만든 영도교에서

어린 단종과 정순왕후가 생이별을 해야만 했던 가슴아픈 이별의 아픔을 느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한 번 걸어보고 나면 다시 생각해도 다른 느낌으로 다가 옴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이 초보산꾼이 느끼고자 하는 마음이다

 

 

영도교에서

영도교(永渡橋) 영미교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다리,

영도교는 처음에는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라고 하여. 성종 때 영도사(永導寺 : 지금의 안암동 개운사)의 승역을 동원해 돌다리를 놓은 뒤,

성종이 직접 영도교라는 어필을 내렸는데, 영도교는 이때 붙은 이름이다고도 한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살곶이다리와 영도교의 석재를 뜯어 사용하여 영도교는 다시 나무다리가 되었다가 시멘트를 바른 다리로 고쳐졌으나

청계천을 복원하는 바람에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이름만으로도 단종과 정순왕후의 아픈 사연을 증언하는 역사물로 살아 있다

현재 성동기계공고 옆 영미교길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영도교를 지나며

1457년 어느날, 청계천 영도교에서 16살 단종이 17살 부인 정순왕후와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긴 뒤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 영월로 귀양갈 때 아내 송비(宋妃)와 이별했던 장소다.

'영이별다리' ‘영영 건넌 다리’ 등으로 불리면서  후에 붙은 영미교(永尾橋)역시 영이별교의변음으로 추정되고 있다

永尾洞에서 내려오는 하천 끝부분에 있는 다리라 해서 영미교라 했다는 설도 있고

옛날에 창신동에 있었던 영미사라는 절의 승려들이 가설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청계천을 따르다  동대문역에서 단애님과 접촉하고 방산시장 반대편에 있는 광장시장으로 이동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보면 흥인지문 아래 개천(開川: 청계천) 가에 두 개의 가산(假山:임시로 만든 가짜 산)이 기록되어 있다.
낙산의 산줄기를 이렇게라도 해서 늘려 주고 싶었던 그 시대 사람들의 안타까움의 표현이다.

이 가산에 온갖 방초(芳草)가 흐드러지게 피니 사람들은 방산이라 불렀다. 하나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오늘날도 방산시장이 이곳에 있으니 비보의 흔적이 지금도 이어진다.

여기에서 뒷풀이 - 청솔대장님도 마지막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아쉽지만 서울시내 걷기가 끝을 알린다

 

 

서울시내를 걷는 다는 것 말처럼   쉽지 않다

아무리 지도에 잘 나와 있다해도 막상 가보면 찾는게 쉽지 않다

그만큼 서울시 자체가 사람도 많지만 집도 많고 길도 많고... 얼키고 설켜있는 복잡한 서울도심

우리 사는 인생살이와 어쩜 이렇게 닮아 있는지...

거기에 문제점은 현지 주민들도 관심이 없으면 옆에 두고도 오희려 나에게 그게 그거예요?

그렇게 어렵게 찾아내어 걸어 보았던 낙산과 국망봉 길

낙산을 걸었을 뿐인데 한양의 풍수를 한눈에 볼 수 있었고

어떻게 사는 것이 후세에 귀감이 되고 존경을 받으면서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동망봉에서 배웠다

멀리 가지 않고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걷는 동안 추위를 녹여내는 훈훈한 서로에 대한 산우애가 있어

더욱 값지게 다가왔던 태마 산행길이 되었습니다

 

조선 태조가 건국한 이래 인왕산이나 북악산 그리고 남산에 비해 형편없는 낙산의 산세가 언제나 말썽이었다

참으로 옛임금님들 잠못이루는 날들이 계속 되었을 것인데... 그래서

이미 동대문편에서 말한데로 우리가 걸으면서 보았던 낙산의 기운이 너무 약하여 여러 비보책을 쓰게 됐는데

동대문만 유일하게 산맥을 뜻하는 之자를 첨가하고 거기에 오성까지

거기에 이미 추억속으로 감춰진 동대문운동장 이전에 있었던 가짜산((假山)까지...

함께 한 산우님들과 한양 내사산의 지세를 살펴보고 왜 낙산이 이렇게 많은 어려움을 주는지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산방에서 왠 역사얘기냐고 반문하실 산우님도 계실거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역사얘기를 하고 싶은게 아니고 산우님들과 여유있게 걸으면서 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이렇게 천천히 걸으면서 힘도 들이지 않고

배고프면 바로 아무데나 들러 배를 채우고...

 

앞으로 기회가 되면 서울시내 걷고 싶은 명소를 찾아내어

한 번 걷고 싶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연말에 바쁘신데도 함께 해주신 산우님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뒷풀이에 함께 해주신 단애님과 청솔대장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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