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서울답사기 :   탑골공원     (서울 종로구)

 

                                            

 

언제 : 계사년 해오름달 열사흘 해날

 

 

어딜 :   청계광장 - 삼일교 - 탑골공원 - 오간수교 - 광희문 - 동대문 - 낙산산성 - 혜화문

 

 

 

탑골공원 안내판

 

고려시대 흥복사가 있던 자리에 1465년(세조11년)에 원각사라는 절이 세워졌으나 연산군 때 폐사되었고

고종 34년에 영국인 브라운의 설계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1920년에 '파고다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1992년 옛지명을 따 탑골공원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이라는 설도 있지만, 인천 각국공동조계안에 1889년에 개설된 만국공원이라고 한다.

 

 

탑골공원 안내도

 

파고다는 브라운이 이 곳에 공원으로 할 것을 건의 할 때 탑이 있는 공원이라는 뜻에서 Pagoda Park로 부를 것을 건의 하였다는 설과 백탑(Pagtab)이라는 음이 전화하여 파고다가 되었다는 설이다

 

 

삼일문

 

원래 광복직후 서예가 김충현씨의 현판이 걸려있었는데, 1967년 박정희가 직접 쓴 현판을 새로 달았다

그러나 2001년 한국민족정기소생회 회원들이 3.1운동의 발상지인 이 곳에 일본군 장교 출신이 쓴 현판을 걸 수 없다고 뜯어 냈다.

2003년에 새로 제작하게 되는데, '삼일'은 독립선언서의 글자를 그대로 이용했고,

선언서에 없는 '문'자는 다른 글자의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3.1운동 기념탑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손병희는 동학의 3대교주로서 이름을 천도교로 바꾸고 발전의 기반을 닦았다.

교주를 그만둔 후 그는 수도에 전념하였으나 사실상 천도교의 정신적인 지도자로서 보성중학교(나중에 보성고보)를 인수하여 교육 사업에 힘썼다.
그래서인지 보성 출신들이 3·1운동의 계획 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하게 된다. 도쿄 2·8독립선언의 소식을 국내에 처음 전한 송계백이 보성 출신이었다.

그는 선배인 현상윤과 함께 당시의 보성 교장이던 최린을 만나 의논하고, 결국은 손병희의 천도교가 다른 종교계를 움직여 3·1운동의 계획하게 된다.


 

 

3·1독립선언서도 보성고보 안에 있던 천도교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인쇄하였다.

이처럼 보성학교와 천도교계가 3·1운동의 계획 과정에서 한 역할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보성중고등학교 교정에는 '3·1운동 기념의 보성종'과 3·1운동 부조 등을 만들어 이를 기념하고 있다.
이렇게 손병희 선생의 천도교계가 중심이 되어 여러 종교계 인사들로 민족 대표 33인을 구성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독립선언 날짜를 정하는 준비 작업을 추진했다.

즉 3·1운동의 계획은 이들 민족 대표 33인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선언서

 

그러나 막상 3월 1일이 되자 이들은 사태가 커질 것을 우려했다.

결국 음식점인 태화관에 모여 자신들끼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제 경찰에 자수하고 말았다.

이들의 선구적인 역할은 아쉽게도 여기에서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예전과는 달리 33인의 역할에 대해 일정하게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런 점 때문이다.

이런 나약함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으니 이들 중 일부는 친일파로 전락하는 안타까움을 보여주었다.

 

대원각사비

 

제액題額에는 두 줄로 꺾어서 ‘대원각사지비’라 전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강희맹의 글씨라고 한다.

보물 제3호로 지정되어 탑골공원내에 소재하고 있는 원각사비는 조선 세조 10년(1464)에 창건된 원각사의 창건과 명명의 뜻,

그리고 절의 위치와 면적, 절의 연혁, 절의 조성, 탑의 건립과 그 안에 사리와 원각경을 수장한 사실 등이 기록된 비로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발굴출토 우물

 

 

 

 

 

 

앙부일구 대석

 

해시계인 앙부일구는 세종 때 발명되어 물시계인 자격루와 함께 조선시대의 표준시계의 역할을 했다.

앙부일구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당시의 운종가 즉 종로에 설치되어 일종의 공중시계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곳에 남아 있는 대석은 앙부일구를 설치한 받침대이다.

안내문에는 19세기 초까지 종로를 지키고 있다가 사라진 후 대한제국시대 전차 공사 중 발견되어 이곳에 옮겨졌다고 한다.



 

뜻밖에 이곳에서 세종시대의 과학의 흔적을 발견하니 반갑다. 자세히 살펴보니 2층 계단에는 성혈 자국이 선명하다.

성혈은 사람들이 복을 빌기 위해 기원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구멍이다.

어느 때부터인가는 이 대석이 백성들의 기원의 장소로서의 역할까지 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측된다.

 

 

'3·1정신찬양비' - 만해 한용운선사비

공원의 한편에는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한용운 스님의 작은 비가 눈에 띈다. 그의 저항 시 '님의 침묵'은 언제나 우리의 가슴에 남아있다

 

 

각 지역별 3·1운동의 모습을 동판에 조각한 부조들

 

 

 

원각사지 10층 석탑

 

팔각정 뒤의 원각사지10층석탑과 함께 비각 안의 원각사비는 이곳이 본래 절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고려시대 이곳에는 흥복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초 억불정책으로 절은 없어지고 빈 터만 있던 곳에 세조때 다시 절을 세워 원각사라 하였다.

기본적으로 억불정책이 진행되던 시기였지만 왕에 따라 불교를 신봉하기도 하였으니, 일시적으로 탄압이 약화된 결과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종 이후 억불정책은 다시 강화되었고 결국 연산군 때에 이르러 폐사되고 말았다.

특히 연산군은 이곳에 전국에서 뽑아 올린 기생과 악사들을 관리하는 관청을 두기까지 하였으니 절의 운명이 완전히 달라진 셈이다.

이후 폐사가 된 이곳을 종과 탑, 그리고 비석만이 지켰다.

그중 원각사 종은 광해군 이후 종각 즉 지금의 보신각에 매달리게 되었다.

범종으로서가 아니라 한양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로 자신의 임무를 바꾼 것이다.

그나마 1985년 새 종이 만들어지면서 지금은 박물관으로 옮겨져 쉬고 있다

 

 

 

이 탑은 고려 말에 세워진 경천사10층석탑과 모양이나 재료, 심지어는 조각까지 비슷하다.

지금은 국립박물관에 복원된 경천사10층석탑은 고려 말에 세워진 것으로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탑이다.

종래의 우리 탑과는 전혀 다른 외형도 그렇고 10층이라는 짝수 층의 탑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원각사지10층석탑은 이 탑을 거의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즉 예술적인 측면에서는 많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그럼에도 유리 너머로 보이는 섬세한 조각은 사람들의 발길을 오랫동안 붙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국보인 원각사지10층석탑은 지금은 유리 보호각으로 씌워져 있다.

비둘기들의 놀이터가 되는 바람에 그 배설물이 대리석 탑을 훼손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 고육지책의 결과이다.

결국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유리집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탑인 셈이다. 그 많던 비둘기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탑골공원 팔각정

 

1919년 3월 1일, 수많은 학생 시민들은 이곳 팔각정 앞에서 33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들이 잡혀갔다는 소식만이 전해졌다.

결국 청년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시위를 시작하였다. 비로소 3·1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시위는 약 3개월여에 걸쳐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심지어는 만주, 연해주, 하와이에서까지 시위가 전개되었다

 

 

 

혹시 3·1운동이 3월 1일만의 운동이었다는 생각과 그 선두에 33인이 있었다는 잘못된 이해를 하고 있다면 바로잡을 필요가 있겠다.
즉, 3·1운동의 초기 조직 단계와 시위운동 단계에서의 주체가 명백히 다르며, 이곳에서 시작된 시위가 비로소 3·1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33인이 학생 시민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들에 대한 평가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삼일문을 나오며 공원 내부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본다.

 

 

 

삼일문을 나오면 육의전터를 만난다

 

 

조선시대 서울 종로에 자리 잡고 있던 여섯 종류의 어용상점을 뜻하는 육의전은 선전(비단 상점), 면포전(무명 상점), 면주전 (명주 상점), 지전(종이 상점), 저포전(모시․베 상점), 내외어물전(생선 상점) 등으로 구성됐다.

육의전은 국역 부담 능력에 의해 특권화된 시전으로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관청에 관한 부담 능력과 정부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상업능력에 따라 변화했다.

 

 

 

청계천을 걷다가 잠시 들리게 된 옛 파고다 공원이었던 탑골공원에서

삼일빌딩이 갖는 의미를 되세기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이제 다시 청계천으로 발길을 옮긴다

 

자료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95349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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