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서울답사기 -  : 정순왕후의 길 따라 걷기

            

                                                                                

언제 : 갑오년 누리달 현충일

 

누구랑 : 초보산꾼과 세사람이 함께

 

어딜 :   혜화문 ~ 비우당(원각사) ~ 동망봉 ~ 청룡사 ~ 영도교

 

세월의 흐름은 빠르기도 하지만 세상의 모든 슬픔과 기쁨도 함께 안고 흐르고 있다

세월호의 아픔이 온 국민들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안기고 그렇게 또 흘러가고 있는 것을 보면

세월의 무상함이 삶과 달리 생각하고 싶지만 도저히 때어놓을 수 없음이다

초보산꾼이 청계천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렇게 빨리 찾고 싶었던 동망봉

단종과 정순왕후의 가슴저린 사연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세월과 함께 흘러갔지만

여전히 우리 가슴속에 살아 있는 것을 보면서

벌써 1년하고도 반을 넘기는 시점에서야 만나게 됨을 반성하며 길을 떠나본다

 

        더 많은 자세한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1738 에 있습니다.

 

 

정순왕후의 숨결이 살아있는 흔적들  -  홀로 진행할려다가 식구가 늘어나면서 한성대 입구역에서 시작 -  (네이버지도)

 

낙산공원에서 비우당 - 동망봉 - 정업원터(청룡사) 까지 - (네이버지도)

 

정업원터(청룡사)에서 청계천 영도교까지  - 네이버 지도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

대부분의 임금이 세자나 세손일 때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단종은 너무 어린 12세에 왕위에 올랐기에 임금이 된 후인 13세에 한 살 연상이었던 송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권력에 눈이 멀었던 세조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어린나이에 단종과 정순왕후는 상왕과 대비가 되어

창경궁으로 물러나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으니 충신들의 복위운동이 활발했던 것은 어쩌면 하늘의 뜻이었을 것이다

유교를 근간으로 세운 조선에서 그에 반하는 쿠테타를 일으킨 것부터가 이미 용서받지 못할 행위이기 떄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힘있는 자에 의해 이루어저 왔기에 오늘 초보산꾼은 동망봉에서 영월땅을 바라보며 단종을 그리워하고

영월 청령포 바위 절벽에 망향탑을 쌓고 매일 올라 한양쪽을 바라보며 부인을 그리워 했을 단종을 생각하며

이미 세월속에 묻혀저 가고 있는 한조각의 숨소리라도 느껴보고자 길을 떠나본다.

 

 

 

한성대 입구역 5번출구 방향으로 오르면 혜화문을 만나게 된다

혜화문(惠化門)  일명 동소문(東小門)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했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弘化)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해 1511년(중종 6) 혜화로 고쳤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헐어버렸다가 1992년에 복원했다.

1928년 일제에 의해 철거됐지만 94년 지금 자리에 복원됐다. 원형은 크게 훼손됐다.

원래 위치는 이미 도로가 점거하고 있어 궁여지책으로 오른쪽 언덕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애통한 일이지만 당시의 흔적을 상상해 볼 수는 있다.

 

 

한성대 입구역에서 출발하는 낙산산성 입구

 

오르다 뒤돌아 본 혜화문과 멀리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삼각산 보현봉이 보인다

 

계속 바깥쪽 성벽으로만 따라가게 되어 있어 여름철에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 낙산공원으로 올라가는 입구

 

낙산공원

낙산駱山

낙산은 산의 모양이 낙타와 같아서 낙타산(駱駝山), 또는 타락산(駝酪山)이라고도 하고 그 서쪽의 계곡을 쌍계동천이라 부른다.

쌍계동천이라 함은 경신고등학교 어름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는 성균관 옆을 지나 반촌으로 흘러들고

또 다른 하나는 혜화문 아래쪽 지금의 대학로로 흘러들어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모두 복개되어 두 물줄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낙산은 효종(孝宗) 때 왕의 아우인 인평대군의 거소인 석양루(夕陽樓)와 이화정(梨花亭),

영조 때 문인인 이심원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등이 있어 왕족, 문인, 가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이화정 옛 터에는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이화장(梨花莊)이란 이름으로 거처를 마련하고 건국을 위한 준비를 이곳에서 하였다

 

 

낙산에서 본 삼각산 - 앞에 보현봉을 시작으로 멀리 인수봉이 하얗게 귀를 쫑긋하고 있다

 

삼거리에서 좌틀한다 - 직진은 동대문으로 내려가는 성곽길이고 좌틀하면 동망봉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낙산의 줄기이다

 

낙산삼거리 정류장에서 낙산길 방향으로 좌틀

 

쌍용아파트2단지 정류장에서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조금 내려오면 비우당을 만날 수 있다 - 이정표와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비우당(庇雨堂)

비우당(庇雨堂)은 ‘비를 피할 만한 집’이라는 뜻이다.

이수광이 지었다는 ‘비우당기’를 보면 이수광의 외가 5대 할아버지인 유관 대감이 이곳에 초가삼간을 짓고 살았는데,

당시 유관 대감은 정승답지 않게 동대문 밖 지봉(芝峰)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았다. 초가는 비가 오면 방에 비가 새는 집이었다.

비가 올 때마다 대감이 아내에게 한 말인즉 “우산도 없는 집은 이 비를 어찌 막을꼬”였다고 한다.

 

 

이수광 (李睟光, 1563~1628)의 지봉유설

이수광이 비우당에서 지은 ‘지봉유설’은 그가 영창대군 사건으로 관직을 내려놓고 원고를 정리하기 시작해 1614년에 편찬된 책으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내용은 천문, 시령, 군도, 병정, 인문, 인사, 종교 등 25부 182항목으로 분류ㆍ구성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수광이 활동했던 시기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치르고, 광해군 때의 정치적 갈등과 인조 때의 이괄(李适)의 반란을 겪은 혼란기였다.

그는 이러한 어려운 정국에 살면서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항상 강직하면서 온화한 성품을 지켰다. 지금도 그는 성실한 관료의 본이 되고 있다.

자료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91226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자주동샘을 만날 수 있다

자주동샘(紫芝洞泉)

비우당 좌편에 보이는 우물은 ‘자주동샘’이라고 하는데, 단종의 비인 송씨(정순왕후)가 비단을 빨면 자주색으로 물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정순왕후는 궁궐의 도움을 일체 거절한 채 고고한 품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민초들의 도움에 기대어 있지 않고 염색을 하며 생업에 뛰어들어 80을 넘길 때까지 영원한 국모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옆 바위에 세겨져 있다

동천이라는 샘에서 자라는 ‘지초’라는 풀로 염색을 하면 보라색으로 물드는데, 정순왕후와 시녀는 이를 시장에 내다팔아 생계를 이었을 것이다.

왜 우리가 정순왕후를 잊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찾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곳이다

 

 

비우당 옆에 바로 단종대왕 천도 도량인 원각사가 있다 - 극락보전과 산신각이 있으나 이전했다는 안내와 함께 전혀 관리가 안되고 있다

 

다시 비우당 이정표 도로로 나와 계속 진행하다 삼성힐스테이 아파트 단지 삼거리에서 길을 건너 공원과 아파트 사이로 진행한다

 

동망봉 쉼터에서 잠시 옆에 있는 보문사에 들어가 본다

 

 

 

 

보문사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미타사가는 길이 보이고 좌틀한다 - 이정표도 있다

 

단종비 송씨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안내판이 있는 비구니 절 미타사

 

 

미타사 안쪽으로 들어가면 3층씩 시대가 다른 특이한 6층석텁을 만날 수 있다

 

다시 동망봉 이정석있는 곳으로 올라와 동망봉쉼터로 올라 정자에서 잠시 휴식

 

조선 최초로 간택으로 왕비가 되신 분이 정순왕후인데 권력에 눈이 멀었던 수양대군이

당시 이렇다할 권력이 없었던 친구인 송현수의 여식을 왕비로 간택한 것은 외척의 간섭없는 왕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결혼도 안한 왕을 쫒아낸다는 것이 부담스러웠기에 빨리 결혼시켜 상왕이라는 구색을 갖추기 위한 치밀한 계획아래

속전속결로 이루어지고 힘이 없던 단종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1455년 7월, 왕이 된지 불과 3년만에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말았다

 

 

계속 올라가면 E편한 세상아파트 보문단지 정문을 나와 좌틀

 

어린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웠을 정치적 싸움에 양위하면서

조금이라도 마음졸이며 살지 않기를 바랐을 단종과 정순왕후의 생각과 달리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과 연루자 70여명이 모조리 처형당하는 피비바람을 몰고 왔으니...

우리가 대간길이나 정맥길에서 만난 단종에 대한 민초들의 생각을 만날 수 있었던게

이런 역사적인 아픔이 있었기에 더욱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소중함을 느끼에 된다

 

 

아남아파트가 보이면서 동망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노산군 부인으로 강등돼 궁궐에서 쫓겨난 정순왕후의 삶이 우리를 더욱 가슴 미어지게 한다

친정 아버지인 송현수를 비롯한 남자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조용히 살고자 했던 바람은 거센 바람앞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는 영도교(永渡橋)에서

단종과 기약없는 이별로 역사는 진행되고 있었으니 짧은 만남과 긴이별이 서리어 있다

한 나라의 국모였던 그녀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채 평민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된다

그때 나이가 불과 18세 꽃다운 나이에 내몰린 삶은 어떠했을지...

 

 

계속 동망봉을 보며 오르면 체육시설이 있는 동망봉이 보인다

 

지금도 사인이 명확하지 않은 단종의 영월에서의 죽음 소식에 통곡하며

이떄부터 한평생을 이 동망봉에 올라 눈물지으며 단종을 그리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움으로만 끝났다면 동망봉의 의미가 그저 한여인의 슬픈 望夫歌로 들렸겠지만

그리움으로 끝나지 않고 국모로서의 새로운 삶의 본보기로 여생을 살았기에

이 동망봉이 더욱 가슴으로 와 닿는 것이리라

 

 

체육시설 옆에 동망봉(東望峯) 이정석

 

60여년을 더 살면서도 서렵고 고된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힘은 아마 단종에 대한 못다 이룬 꿈일 것이다

짧은 제위 기간동안 마음졸이며 살았을 단종에 대한 애석함, 뜻을 펴기도 전에 죽임을 당한 단종에 대한 아쉬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더욱 흐르는 눈물을 감싸안고 국망봉에서 다짐했으리라

 

 

동망봉 정상에서 본 채석장

 

어린 단종이어서가 아니라 임금 단종이 꼭 이루어야 했을 꿈을 생각했기에

왕비로써의 채통을 지키면서도 민초들과 당당하게 삶의 교감을 이루며 살아갔던 이유는 아닐련지...

후대 사람들이 숱한 왕실의 여성들 중에서도 정순왕후의 삶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단종의 못다 이룬 꿈을 중생들과 아픔을 함께하며 진정한 국모로 거듭났던 삶에 있을 것이다

 

 

창신역 4번출구 정류장 표시 있는 곳으로 내려와 청룡사에 도착하고

 

우리가 이렇게 정순왕후의 행적을 찾아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것은 애틋함만은 아닐 것이다

홀로 지낸 60여년의 세월이 주는 무게를 우리는 잘 알고 있기때문이다

일반인은 상상도 못할 기구한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민초들과 어울려 살아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어려울 때마다 또 얼마나 단종이 그리웠을 련지... 남몰래 흘렸을 눈물이 그려진다

 

 

삼각산청룡사라 쓰여있는 문을 지나면 대웅전이 보인다

청룡사 - 정순왕후의 거처

단종과 생이별을 한 후 정순왕후는 청룡사에서 세 명의 여종과 함께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세조는 정선왕후를 위해 영빈정(英嬪亭)을 지어주고 식량과 생필품을 보냈으나 왕궁에서 보내온 모든 물품을 거절하고 정업원에서 살았다.

화가 난 세조는 그들에게 일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청룡사는 이곳에 단종비의 사당을 모시고 매년 다례재를 봉행하며 그녀의 넋을 기리고 있다

 

 

정면으로 동망봉이 보이는 장소라면서 명당자리라고 스님이 말씀하신다

 

정업원구기비가 있는 터로 들어가는 쪽문이 잠겨 있다

 

지금은 비구니절이라고 하시면서 스님으로 부터 절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받고 정업원구기비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전하자

나름대로 절을 관리할려면 돈이 필요한데 관리가 쉽지 않다고 하시면서 미안해 하신다

영도교가 마지막 코스라고 했더니 불분명한 이름인 영도교라 붙여진 이름에 대해 아쉬음을 전하면서 영미교로 불러야 한다고 다짐을 두신다.

절에 대한 역사는 물론 정순왕후의 역사적 배경까지 역사선생님같은 강의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합장

 

 

절문을 나와 조금 내려오면 정업원터 이정표가 있다

정업원(淨業院)  자료 http://cafe.daum.net/millennium7/5P2o/38?docid

정업은 청정하고 깨끗한 행위로서 선업(善業)을 뜻하며, 정토왕생을 위해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행위의 불교용어다.

그 뜻을 살린 정업원은 고려 왕실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 유생들이 혁파의 대상으로 여겨 논란을 거듭하다가 1505년 연산군에 의해 폐지되었다.

그 후 중종이 다시 설치하려 했으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고 1550년(명종 5년)에 다시 설치했으나

1612년(선조 40년)에 비구니들을 내쫓으며 혁파한 후 영원히 복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771년 (영조 47년)에 영조가 청용사를 들러 정순왕후의 이야기를 물어 확인한 후 청용사를 정업원으로 개칭하며 정업원 구기비를 세웠다.

 

조선시대의 후궁들은 임금이 죽으면 궁 밖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이들의 일부는 불교에 귀의하여 임금의 명복을 빌며 여생을 보내기도 하고 일부는 정업원에서 보냈다.

초기에는 당당한 실세들의 궁내 종교행위였는데 후기에는 후궁들이 여생을 보내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 한물간 여인들의 한풀이 장소쯤으로 여기던 정업원은 조선 여인의 심금을 울린 단종비 정순왕후에 얽힌 이야기가 있어 더 애절하다.

지금도 가슴 찡하게 전해오는 정순왕후의 이야기는 권좌에서 밀린 현대판 정치인들의 최후를 보는 것 같아 더 실감있는 이야기로 살아난다.

그러나 여기 스님의 말씀으로는 여기에 들어오면 역적으로 취급되어 함부러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비문은 볼 수 없지만 현판은 볼 수 있다

영조의 역사관  자료 : http://blog.daum.net/kanggiok/6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후 정순왕후가 겪은 고난이 영조에게는 남의 일같이 않게 느꼈음을 알 수 있다.

무술이 소생으로서 왕위에 오르기까지 위태로운 고난을 겪은 영조는 자신의 아픔이 정순왕후의 아픔에 오버랩되어 북바쳐오는 슬픔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왕의 체통도 잊고 눈물을 삼키며 썼다는 음체서(飮涕書)의 기록을 남겼다.

여기에는 영조의 올바른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부끄러운 역사도 영원히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제왕으로서의 역사인식을 피력했다.

 

 

현판의 ‘前峰後巖 於千萬年’이 그것이다.

이를 왕의 입장에서 보면 ‘앞의 산봉우리여, 뒤 언덕의 바위여, 천만년 영원하라.’는 명령형 해석이 가능하고,

문학적으로 보면 뒷부분을 ‘영원하리라’는 영탄적 해석이 가능하다.

이 작은 현판과 비문 앞에서 한 임금의 역사에 대한 인식과 왕권에 대한 인간의 욕망, 그리고 그에 따른 여인의 한을 읽을 수 있으니

역사의 현장은 세월이 갈수록 더 찬란한 빛으로 후세를 교훈한다.

역사는 그렇게 옳게 산 사람과 그르게 산 사람을 심판하는 공정한 거울과 같은 것이니 바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문틀사이로 어렵게 반룡송을 찍어 본다

반룡(盤龍)은 아직 하늘에 오르지 않고 땅에 서려 있는 용을 일컫는 말이므로

반룡송은 아직 승천하지 못한 용처럼 위로 4m정도만 자라다가 몸을 비틀어 옆으로 가지를 뻗는 소나무를 말한다.

반송(盤松)이 밑둥지에서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어 버섯 모양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라면

반룡송(盤龍松)은 밑둥지에서 한 줄기로 솟아오르다가 옆으로 뻗는 것이 반송과 다르다.

 

 

자료 : 장수군청 안에 있는  의암송 - 정업원터의 반룡송과 비교하니 관리가 필요할 듯

정순왕후의 어렵던 시절을 함께 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정감이 가지만 틈새로 봐야만 하는 안타까움도 있다

역사를 다시 단종시대로 되돌린다면 이렇게 넓은 가슴으로 백성들을 보살펴 주었을까?

무더웠던 오늘 시내길을 걸으면서 받았던 더위를 한번에 쓸어내릴 것 같은 소나무이다. 이런 지도자가 그립다

 

 

창신역으로 다시 내려와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식후 다시 본 동망봉과 채석장

채석장

동망봉의 왼쪽 아래편으로 나 있는 길을 걷다보면 '채석장 길'이라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표지판은 보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 쓸 화강암을 떼어 갔다고 한다. 채 100년도 되지 않은 역사의 아픔이 있는 현장이다

서울 내사산중의 하나인 낙산의 반절이 사라져 가버렸으니...

영조 47년에, 그 친필로 이 암벽 위에 '동망봉'이라는 글씨를 새겨 추모했다고 한다. 채석장이 되면서 그마저도 떨어져 나갔으니...

 

 

동묘앞역 3번출구 방향으로 건너면 벼룩시장이 시작된다

동묘의 벼룩시장

벼룩시장은 청계천 복원사업에 의해 밀려난 노점상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저 80, 90년대에 청계천 7가, 8가 일대 즉 옛 명칭으로 한다면 ‘황학동 벼룩시장’을 중심으로 먹고 살던 사람들이었다.

청계천 복원사업의 완공 이후에도, 그 언저리를 멀리 벗어나지 못하여 배회하다가, 마침내 동묘앞 주말 벼룩시장을 만들어냈다.

 

 

동묘에서 우틀하여 계속 이어진다 - 오늘 처음 와본 벼룩시장, 구경한번 오시길... 사람구경...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물건...

 

숭신초등학교 정문 옆에 여인시장터 표석이 있다

여인시장터

이곳이 조선시대에 여인들만 출입할 수 있었던 여인시장이 있던 곳이다. 여인시장은 채소를 주로 팔던 곳이었다.

조선 6대 임금 단종이 숙부인 세조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당시 왕비였던 정순왕후 송씨는 궁에서 쫓겨나 동묘 부근 정업원(현재 청룡사)에서 살게 됐다.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난 정순왕후 송씨를 도와주던 사람들이 바로 금남의 장소인 여인시장 여자들이었다.

궁에서 이를 금지해도 도움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던 여인시장 사람들이 채소와 먹을 것들을 정순왕후 송씨에게 가져다줬다.

 

 

오랫만에 휴일 벼룩시장의 사람냄새를 맡고 오늘의 마지막 종착지인 청계천 영도교(영미교)

영도교(永渡橋) 영미교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다리,

영도교는 처음에는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라고 하여. 성종 때 영도사(永導寺 : 지금의 안암동 개운사)의 승역을 동원해 돌다리를 놓은 뒤,

성종이 직접 영도교라는 어필을 내렸는데, 영도교는 이때 붙은 이름이다고도 한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살곶이다리와 영도교의 석재를 뜯어 사용하여 영도교는 다시 나무다리가 되었다가 시멘트를 바른 다리로 고쳐졌으나

청계천을 복원하는 바람에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이름만으로도 단종과 정순왕후의 아픈 사연을 증언하는 역사물로 살아 있다

현재 성동기계공고 옆 영미교길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긴 뒤 강원 영월로 귀양갈 때 아내 송비(宋妃)와 이별했던 장소다. ‘영영 건넌 다리’ 등으로 불린 이유다.

1457년 어느날, 청계천 영도교에서 16살 단종이 17살 부인 정순왕후와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이날 단종은 사랑하는 부인을 남겨두고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로 떠나는 길이었다.

청계천 다리를 소재로 한 김별아씨의 첫번째 장편소설 ‘영영 이별 영 이별’의 주요 배경이기도 하다.

 

 

청계천을 따르다 도착한 광장시장 - 오늘도 어김없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광장시장안에 있는 광장육회가든에서 뒷풀이로 하루를 마감한다

 


계속 산으로만 다니다 오랜만에 찾은 역사의 현장 정순왕후의 흔적을 찾아 나선 길

창신역에서 출발하면 코닿을 곳에 있는 정순왕후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는데 굳이 낙산산성을 애둘러 돌아 온 것은

동대문에서 혜화문까지 낙산산성을 걸으면서 낙산공원 정상에서 혜화문까지 걷지 못했던 낙성성곽도 이을겸

한 때 허울좋은 국모라는 탈을 벋고 끝까지 민초옆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는지 느끼고 싶었다

옛날의 흔적은 남아 있었지만 너무도 변해버린 서울거리에서 그 당시의 기분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청룡사에서 스님이 들려준 이 골짜기에 얽혀있는 역사를 들을 수 있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행복했고

내사산중의 하나였던 낙산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자 동대문에 얽힌 사연들을 다시금 느끼면서

거기에 정순왕후의 역사가 함께 오버랩되면서

비록 더운 날씨의 짜증나기 쉬운 여행이었지만 행복했던 하루를 그렇게 마감한다

 

  낙산과 동대문의 더 많은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791 에 있습니다

 

 

     초보산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