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서울성곽걷기 :  낙산구간 -  광희문에서 혜화문까지..

                                                       

 

언제  :  계사년(13년) 해오름달 열사흘 해날

 

어딜  :    광희문 - 동대문 - 낙산산성 - 혜화문

 

 

 

옛 기록에 도성 안의 경치 좋은 다섯 골짜기가 있다고 한다.

인왕산 아래 옥류동천, 북악의 동쪽과 서쪽에 삼청동천과 백운동천, 낙산의 서쪽 쌍계동천, 목멱산 북쪽의 청학동천을 일컫는다고 한다

그 쌍계동천을 품고 있는 낙산이지만

풍수지리에서 볼 때 너무 지세가 약하다 보니 더욱 많은 사연을 안고 살아 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광희문으로 가는 길에 남산도 조망하고

 

남쪽의 작은 문인 광희문이 반긴다

광희문(光熙門)

남소문(南小門)에 해당하는 광희문(光熙門)은 건국초기에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따로 남소문이 세워졌다가 그 효용성이 없어 폐쇄되고

이로 인해 광희문은 초기에는 남소문과 구별하여 한양의 물길이 지나가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가까이 있어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렀고,

도성에 장례행렬이 지나갈 때는 이 광화문으로 지나가는 관계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광희문 정면

광희문과 인조의 인연이 깊은데....

이괄이 난을 일으켰을 때 인조가 광희문을 통하여 도성을 빠져나가 공산성으로 도망갔고....병자호란 때도 인조가 광희문을 통하여 남한산성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사신들은 옥수동 두모포 나루로 한강을 건너 광희문을 통하여 도성에 들어와 목멱산(남산) 북쪽 자락인 인현동에 있었던 동평관으로 갔다고 한다.

 

 

광희문에서 남대문(숭례문)으로 이어지는 성곽

 

 

동대문 역사 문화관으로 향하다 바라본 광희문

 

사실 우리 나이 때 쯤 되면 동대문 운동장에 대한 추억이 많다

특히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에는 동대문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고교야구의 인기는 지금의 프로 스포츠를 능가했다

5,60대에게 동대문운동장은 마음의 안식처와 같은 곳이었던 것이다.

그 동대문운동장도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었던지 헐리고 동대문역사문화관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그런데 동대문 운동장이 일제에 의해 왜곡된 일제 침략의 산물이었음을 안다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풍수지리학상 좌청룡인 북악산의 정기를 안고 있는 낙산의 지세가 약하다 보니 여러 비보책(裨補策)을 썼는데

그 중에 하나가 동대문 옆에 청계천을 준설한 흙으로 가짜산((假山)을 쌓아 낙산의 지세를 넓히려 했다고 한다.

 

 

 

동대문 역사 문화 공원역 2번 출구를 지나고

 

일본이 침략 이후 이런 비보책을 물랐을 니 없었을 것이고... 그래 그 가산을 쓸어 버리고 운동장을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그게 바로 동대문 운동장이었던 것이다. 쇠말뚝만 박은 줄 알았는데....

 

그 낙산의 숨은 진실을 보기 위해 낙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이제 동대문 성곽 공원이 멀리 보이기 시작한다

 

동대문역사공원에서 눈여겨 볼 것은 복원된 성곽 터 아래 부분에 설치된 이간수문(二間水門)이다고 한다.

이곳의 이간수문은 목멱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 중 청계천에 유입되지 않고 도성 밖으로 내보내는 두 개의 구멍을 낸 수문(水門)이다.

다음 기회에 확인하기로 하고 동대문으로 향하는데...

 

 

낮이나 밤이나 붐비는 동대문 시장

 

서울 올라와 잠시 동대문 새벽시장에 올 일이 많았었는데...

옷시장을 모두 돌고 나면 2~3시간은 금방 흘러간다. 정말 사람사는 냄새가 진동했다고 해야 하나?

사람도 많고, 먹는 장사며 노점상까지.. 정말 없는게 없는 동대문의 밤 풍경이었였다. 거기에 세벽에 오댕국물로 허기를 채우면....

세계로 뻗어가라고 지은 세운교, 전통시장에 맞는 새벽다리, 나래처럼 훨훨날개를 펼치기를 기원하는 나래교.....

정말 그 때는 먹고 살기 바빠 몰랐었는데... 다시 천천히 되돌아 보는 이 곳이 이렇게 많은 얘기를 나에게 들려 주고 있다.

 

 

 

다시 오간수교에서 바라본 세번째 만나게 될 청계천은 말없이 계속 흐르고 있고...

 

이제 동대문이 보이고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울 4대문중 하나로 보물 제1호이다.
서울의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都城)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동대문 사거리에서 보이는 문이 후문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한다.

 

 

 

동대문 옹성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둘러 축조한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성)을 갖추고 있다

 

 

흥인지문 정문..   사진 생략

동쪽은 오행상 木이요, 仁을 상징한다.

동대문만 유일하게 네글자인 흥인지문이라 하여 之자가 첨가된 것은, 옛부터 동쪽이 낮아 왜구의 침입을 많이 받으므로 동쪽의 기운을 높이는 뜻에서 산맥을 뜻하는 之자를 첨가했다고 한다.

또한 낙산의 지세가 낮아 동대문 운동장에서 본 가산을 싾았다고 한다. 그리고 옹성까지.

 

왜 낙산의 지세가 약한 것인지, 이 초보산꾼은 풍수지리를 모르니 잘 모르겠지만....  확인하려 낙산으로 출발한다.

 

 

 

동대문 성곽공원으로 본격적인 성곽길이 시작되고

 

오르면서 본 흥인지문

 

성곽의 높이가 장난이 아니다

 

동내 골목길 코스라고 한다

 

정말 성곽 주위로 옛집이 계속 이어진다

고샅길은 좁은 골목길을 의미하는 순 우리말인데 종로구에서 이런 골목길을 찾아

걷기 열풍과 맞물려 코스를 개발한 것 같다

오늘도 많은 젊은이들이 연신 카메라로 골목을 사진에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 문이면 당연히 "이리 오너라"하고 마당쇠를 불렀을 대문이다

 

성곽 주위에 화살나무를 심어놓으니 어떤 조화?

 

창신동 일대가 보이고

가운데 보이는 암벽이 비우당이 있는 거북바위이고, 그 뒤쪽으로 보이는 산 줄기가 낙산에서 동망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이다

단종을 영월로 유배를 떠나 보내고, 정순왕후가 슬픔을 억누르며 살았던 길을 따라 가는 길이다.

청계천 이야기가 끝나면 그 길을 따라 안암천을 따라 걷다 청계천의 영도교와 만나게 될 것이다. 마지막 이별의 다리인 것이다.

 

 

성곽길은 '걷고 싶은 동내 골목길,과 함께 계속 이어진다

 

 

이 초보산꾼이 다음에 청계천에 이어 가고자 하는 비우당과 동망봉이 조망되고

 

낙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한 지맥이 뻗어가서 숭인동과 보문동 사이에 봉우리 하나를 만들었는데 이를 동망봉(東望峰)이라고 한다.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갔을 때 단종비(端宗妃) 송씨가 인근에 있는 청룡사에 살면서 매일 산봉우리에 올라 동쪽의 영월을 바라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도 역시 북악산보다는 못하지만 소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 낙산 산성 정상이 보이기 시작하고

 

성곽 바깥 창신동 방향 도로가 계속 길을 함께하고 있었다

 

다 쓰러져 가고 있는 집과 현대식 빌딩, 그리고 햇님

 

전망대 정자가 보이고

 

정자에서 본 북악 스카이웨이 길과 인왕산, 그 뒤로 북한산

 

화장실을 지나 낙산정이 있는 이정표 ㅡ 여기서도 역시 인조와 관련있는 흥덕이밭도 보인다.

 

낙산공원으로 내려가는 낙산정 방향 길을 버리고 계속 성곽길로

 

마을버스가 올라오는 낙산 정상 부분

 

낙산駱山

낙산은 산의 모양이 낙타와 같아서 낙타산(駱駝山), 또는 타락산(駝酪山)이라고도 하고 그 서쪽의 계곡을 쌍계동천이라 부른다.

쌍계동천이라 함은 경신고등학교 어름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는 성균관 옆을 지나 반촌으로 흘러들고

또 다른 하나는 혜화문 아래쪽 지금의 대학로로 흘러들어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모두 복개되어 두 물줄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가 올라오면서 본 체육시설

 

낙산 마을 버스 정류장에 있는 알림판

 

낙산은 효종(孝宗) 때 왕의 아우인 인평대군의 거소인 석양루(夕陽樓)와 이화정(梨花亭),

영조 때 문인인 이심원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등이 있어 왕족, 문인, 가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이화정 옛 터에는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이화장(梨花莊)이란 이름으로 거처를 마련하고 건국을 위한 준비를 이곳에서 하였다.

 

 

다음 초보산꾼 안암천 이야기인 비우당 방향을 버리고 혜화역으로 내려오면

 

 

 

한성 대학교가 보이고

 

우리가 내려온 성곽길

 

제3전망 광장에서 성곽으로 통하는 문을 닫아 놓아 더 이상 진행이 불가하여 혜화역으로 하산한다

 

다시 성곽으로 진입을 시도했으나 허용되지 않는다. 문이 열리지 않으면 진입할 길이 없다고 현지 할머니가 증언하신다.

 

할 수 없이 혜화역으로 내려오는 중에 만난 동승동 아트 센타

 

동덕여대 공연 예술 센터도 만나고

 

상명대학교 예술 디자인 센터도 만나고

 

 

혜화역을 지나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 한성대 입구역으로 가다 보면

 

동쪽의 작은 문 혜화문을 만난다

혜화문(惠化門)은 일명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한다. 도성에는 4개의 대문(大門)과 4개의 소문(小門)이 설치됐는데, 이 문은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했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弘化)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해 1511년(중종 6) 혜화로 고쳤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헐어버렸다가 1992년에 복원했다.

 

 

1928년 일제에 의해 철거됐지만 94년 지금 자리에 복원됐다. 원형은 크게 훼손됐다.

원래 위치는 이미 도로가 점거하고 있어 궁여지책으로 오른쪽 언덕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애통한 일이지만 당시의 흔적을 상상해 볼 수는 있다.

 

 

낙산 제 3전망대에서 굳게 잠겨 있던 성곽길이 이 곳에서 열려 있었다

 

 

한성대 입구역에서 끝으로 오늘의 성곽여행과 청계천 여행 모두를 마친다

 

날씨도 맑고, 모처럼 한결 따뜻해진 일요일

처음으로 배낭도 없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 본 청계천과 낙산산성 길

우리 부부 함께라서 즐거웠고

낙산이 북악산이나 인왕산 그리고 남산에 비해 낮은 산세때문에

동대문이란 큰 문을 만들어 놓았으나 큰 대문에 어울리지 않은 낙산의 산세 때문에

동대문을 더 튼튼하게 보호하기 위해 옹성甕城을 만들고

이름도 다른 문과 달리 '之'자를 넣어 산맥처럼 뻗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거기에 조금이라도 산의 지세를 높이기 위해 동대문운동장터에 가산假山을 만드는 등

 

옛 선조들의 눈물 겨운 노력을 읽을 수 있는 여행이 되었다.

현재의 잣대로 보면 그런 노력들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느냐 하겠지만

나라를 소중히 생각했던 그런 마음들이 지금의 서울을 지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오늘 내가 걸으며 내린 결론이다.

 

우리가 아무런 의미 없이 바라 보았던 동대문을 이렇게 초보산꾼과 함께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시간나는데로 낙산에 올라보면 종로구에서 정한 골목길 걷기 코스가

우리 곁에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음을 느끼는 계기가 되기도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정말 한번 더 걷고 싶은 길이었읍니다.

감사합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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