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서울 성곽걷기  :  와룡공원에서 수성계곡 하산..

                         

 

 

언제 : 계사년(13년) 해오름달 닷새 흙날

 

어딜 :   와룡공원 - 북악산 - 창의문 - 인왕산 -수성계곡

 

 

뱀의 해 계사년, 새해 아침에 힘있게 오르는 달인 해오름달 첫 토요일

잠시 정맥의 공백기를 맞아 평소 꿈꾸워 왔던 초보산꾼 강 이야기를 위해 청계천 발원지를 찾아 떠나 본다

 

 

 

서울 성곽 등로

청계천 淸溪川

청계천은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북악, 인와,남산 등 여러 골짜기의 물들이 모여져서 중랑천으로 빠져 나가 바로 한강으로 흘러간다

옛 문헌에 '이 하천은 서울 하수도의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강물이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이 하천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역수(逆水)하는 물기운이므로 한 나라 도읍지의 명당수(明堂水)가 된다'고 하였다.

즉 서울 4개문 안의 한 복판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인 것이다.
1957년에 복개되어 청계천의 흐르는 물을 볼 수 없게 되었던 것이 2003년부터 시작된 복원공사로 인해 그 실체가 드러났다. 

 

 

 

안국역(3호선) 2번 출구에서 종로 마을버스 02번 탑승  와룡공원 하차하고

일제 때 새로 생긴 도로를 '신작로(新作路)'라 하듯이 이곳은 '하천을 수리하여 열었다'는 뜻에서 '개천(開川)'이라 불렸다. 여기서 개천이라는 말이 하천의 보통명사가 되었다.

특히 세종 때 시작한 석축제방 공사가 영조 때 마무리되자, 임금이 친히 광통교에 나와 돈 20관을 다리 위에서 아래로 던져 아이들이 주워 갖게 하고 시를 지어 화답케 하였는데

이때 '개천을 끼끗이 치웠다'는 뜻의 '청개천(淸開川)"이라는 글귀가 그후 청계천(淸溪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출처]http://kin.naver.com/open100/entry.php?eid=os%2FctOLSkF18P9ynKbyLgiFKlmy5FyOL

 

 

 

도로를 따라가면

 

서울시 해돋이 명소인 와룡공원臥龍公園 을 만나고

 

성곽을 만나면서 말바위 안내소로

 

말바위 안내소에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출입증을 받아

 

서울 성곽 숙정문을 만난다 - 말바위 안내소에서 오르며 본 숙정문

숙정문(북대문)

숙정문은 성곽의 4대문 중의 하나로 북쪽 대문에 속한다. 예전에는 숙청문, 소지문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숙정문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했다. 태종 때 풍수학생 최양선이 창의문(彰義門)과 숙정문은 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니

길을 내어 지맥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며 상소를 올려 문을 막고 통행을 금지할 것을 청하므로 마침내 창의문과 숙청문을 폐쇄하고 그 주위에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숙정문은 계속 닫혀 있었는데 다만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내는 시기에만 문을 열었다.

그 이유는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에 따르면 북쪽은 음(陰)과 수(水)에 해당하며 남쪽은 양(陽)과 화(火)에 해당되기에

가뭄으로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때는 북문인 숙정문은 열고 남문인 숭례문은 닫고

장마가 져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낼 때는 남문인 숭례문을 열고 북문인 숙정문을 닫았던 것이다.

 

 

뒤에서 본 숙정문

숙정문은 최양선의 건의가 없었더라도 쉽게 사용할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을 갖고 있다.
도성의 북문으로서 성 밖을 나서면 그 길이 한양에서 원산으로 가는 경원가로(京元街路)로 이어져야 하는데 삼각산과 도봉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사람이 쉽게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오히려 숙정문보다 훨씬 동쪽에는 거의 평지와 다름없는 곳에 혜화문(惠化門)이 있어 이 문을 이용하면 쉽게 경원가로를 오갈 수 있기에 숙정문은 만들 당시부터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한 문일 수 밖에 없었다.

 

 

이와는 달리 다음에 만나게 될 창의문(북소문)은 인조 때부터 문이 열렸는데

광해군을 몰아내려는 반정 군인들이 창의문을 부수고 들어와 반정을 성공시키고 인조를 등극시켰으므로 창의문은 그들의 개선문(凱旋門)이기에 그 문을 활짝 열었다고 한다.

자료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98120702153749

 


촛대바위를 지나고

 

곡장을 만나다

곡장

북악 정상에 이르기 전에 성곽은 북쪽으로 툭 불거져 나갔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데 많이 굽은 성이라고 해서 이곳을 곡성(曲城)이라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인왕산 정상에서 본 무악재 방향 곡성 - 끝 부분 돌출 부분

 

인왕산에도 선바위 위편에 무악재 쪽으로 툭 불거져 나온 성곽이 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곡성이라 부른다.

성벽으로 오르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곽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곳인데 '치'라고도 했다.

성곽의 담장을 여장이라고 하고 그 위를 지붕처럼 덮고 있는 돌은 옥개석이다.

평소에는 지붕 역할이지만 적들이 성벽을 타고 오르려고 할 때면 옥개석을 굴려 떨어뜨려 적들을 방어하는 무기로 사용하기도 한단다.

 

 

그만큼 조망의 최적조건을 준다 - 북한산 보현봉에서 비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성곽을 따르는 동안 태종 때 문을 폐쇄하고 소나무를 심어서 그런지 계속 소나무가 이어진다

 

조금 더 진행하면 청운대를 만난다

 

성벽을 축조할 때 공사구간을 나누어 그 구간을 맡아서 일한 책임자의 이름을 쓰게 했다고 한다. 그런 공사실명제의 증거가 되는 돌도 청운대 근처에서 볼 수 있었다

 

 

 

 

1.21사태 소나무도 만나고

 

 

북악산 정상

백악은 북악의 또 다른 이름이다

백악(白岳)이라 함은 북악에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백악산신(白岳山神)을 모시고 진국백(鎭國伯)에 봉하였기에 신사의 이름을 따라 백악으로 불렀다.

조선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를 하면서 세운 궁이 경복궁인데 경복궁을 뒤에서 안고 있는 주산이 북악산이고 마주 바라다 보이는 앞쪽의 안산이 목멱산, 지금의 남산이다

 

 

북악산 정상에서 본 인왕산과 안산

북악(北岳)은 한양도읍(漢陽都邑)의 주산(主山)으로 내사산(內四山) 중에서 북쪽에 위치하며달리 백악(白岳), 면악(面岳), 공극산(拱極山)으로도 불린다.

 

 

이제 가파르게 계단길을 내려가야 한다

 

돌고래 쉼터

 

창의문

彰義門

북소문 또는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린다. 1396년(태조 5)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의 하나로 창건되어 창의문이란 문명을 얻었다.

북한 ·양주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1416년(태종 16)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 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폐문한 채 일반의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열어 놓았다.

1623년 인조반정 때는 능양군(인조)을 비롯한 의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58년 크게 보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서울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남아 있는 문이다.

 

 

창의문은 달리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하는데 <실록(實錄)>에는 많은 곳에서 장의문(藏義門, 壯義門))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창의문 올라가는 기슭에 장의동(藏義洞)이 있어 장의동에 있는 문, 즉 장의문(藏義門, 壯義門)으로 쉽게 불렀던 것 같다.

창의문도 숙정문과 마찬가지로 최양선의 건의에 따라 태종시대부터 문이 폐쇄되었습니다만 인조반정 때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한 반정군이

세검정을 거쳐 창의문을 통하여 창덕궁을 장악함으로서 반정에 성공했는데 이때 도끼 한 자루로 창의문을 열었다.

 

 

창의문 현판에 걸린 인조반정 공신들

창의문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비상밸이 울려 놀랐는데....들어가도 된다고 하여 놀란 가슴 쓸어내리고 찍은 사진이다.

들어가도 되는데 굳이 왜 비상벨을 울리게 하는거야?

 

 

정선이 그린 그림 소개도 되어 있다

초보산꾼이 걸었던 홍제천의 세검정을 만나니 더욱 정감이 가는 풍경이다

 

 

최규식 동상이 있는 도로로 내려오면

 

오늘의 목적인 첫번째 청계천 발원지 표지석이 있다.  청계천 발원지 중에 최장 발원지..

강의 끝을 하구(河口)라 하는데,  이곳에서 가장 긴 물줄기가 그 강의 최장 발원지이다.

옛 문헌에는 청계천의 발원지를 잠시 후 만나게 될 북악산(청와대 뒤산)의 서쪽계곡(옥인동)으로 알려져 왔으나

지난해 땅이름학회 학술발표회에서 북악산의 동쪽계곡(삼청동)의 물줄기가 약 500m 더 길어 최장 발원지가 바뀌어졌다고 한다.

자료 : http://cafe.naver.com/korea103/16

 

 

서울 종로구는 청계천 발원지로 확인된 종로구 청운동 벽산빌라 뒤편의 약수터 인근에 발원지 표석을 설치할 계획이라고 17일 밝혔다.
구 관계자는 "사실 북한산과 인왕산의 여러 곳을 청계천 발원지로 볼 수 있다"면서 "하지만 이 약수터의 접근성이 좋고 문헌상으로도 고증이 돼 발원지 표석을 설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표석이 설치되는 곳은 대간첩 작전 도중 순직한 고 최규식 경무관 동상이 있는 종로구 청운동 창의문길 부근이다.
조선시대 문헌 등에 따르면 청계천 발원지는 현재 행정구역상 청운동과 백운동에 속하는 북한산과 인왕산의 하천과 샘 등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2005년 보도내용)

 

 

 

 

도로를 건너면

 

살아 생전 이곳에서 많은 활동을 하신 시인 윤동주 문학관과 윤동주 언덕길을 만난다

 

시인 윤동주 언덕에서 백악산(북악산)을 배경으로

 

내려오면 도로를 만나고 도로를 건너 인왕산으로 오르게 된다

 

일일 역사 선생님 알콩님 - 청운대에서 보았던 공사구간 표시와 책임자가 인왕산에도 세겨져 있다

 

성곽을 따라 계속되고 있는 솔 밭사이로 인왕산 정상이 보이고

 

기차바위 능선을 만나고

 

다음에 가야할 백련산과 홍은동 일대

 

인왕산 정상

인왕산仁王山

종로구 옥인동・누상동・사직동・부암동과 서대문구 현저동・홍제동 경계에 있는 표고 338.2m의 산이다. 인왕사(仁王寺)가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조선을 개국하고 태조가 궁궐터를 정할 때, 북악주산론에 대한 인왕산주산론이 있어 필운대 일대가 궁터로 주목받았다

명종 때 학자 남사고(南師古)가 인왕산 아래 사직골에 왕의 기운이 있다고 하였는데, 과연 선조가 사직골에서 났다.

 

 

인왕산 정상부분

광해군 때 인왕산 아래 색문동에 왕의 기운이 있다는 소문이 나서, 그 왕의 기운을 누르기 위하여 인왕산 아래에 경덕궁(경희궁), 인경궁, 자수궁을 지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니.... 역사의 물길은 알고도 막을 수 없었나 보다. 도끼 한 방에 왕이 바뀌었으니....

 

 

초소가 있는 곳에서 또 다른 청계천 발원지인 옥인동으로 가기 위해 인왕천 약수터로 하산 시작

 

색다른 굴을 만나

 

속을 보니 말 그대로 냉천이다

 

옥인동 일대를 바라보며 내려온다

 

인왕샘을 만나고 - 잠시 후 청계천 발원지에서 다시 만나게 될 약수터이다

 

우측 운동시설 방향이 아니고 좌측으로 이어가 군 철조망을 따르면

 

석굴암의 미륵불을 만나게 되는데 서울 시내를 그윽히 바라보고 계신다

 

석굴암 - 암벽에 인왕산 산신도를 그린 산신각

 

 

문을 굳게 닫아놓아 우리같은 신도가 아닌 사람은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자연 암반 속에 대웅전을 꾸민 그야말로 경주 불국사의 석굴암 같은 석굴암인데.....

1.21사태 이후 인왕산의 모든 길이 막히고 절과 암자는 대부분 폐사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석굴암은 폐사를 면했다고 한다.

 

 

계곡 따라 계속 내려 오면

 

인왕 스카이 웨이 길을 건너고

 

바로 수성계곡을 만나게 된다

 

수성계곡에 있는 청계천 발원지..  두번째 역사적 발월지란다..

최장 발원지는 이미 창의문(자하문)에서 보았고

역사적 발원지는 이곳이라 추정되는데, 잔(盞)을 띄울만한 세류(細流)를 발원지로 본다면 이 초보산꾼이 보기에는

석굴암 위에 있던 인왕샘이 더 정확한 발원샘이 되지 않을까?

 

 

아마도 이 곳을 공원화 하면서 공원 가장 윗부분인 이 곳을 발원지로 하지 않았을까? 어디까지나 초보산꾼 생각 ^^^^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 인왕산을 가린 옥인 아파트를 철거하고 공원을 만든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사모정이 보이고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돌다리인 기린교

기린교는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 인왕산을 가린 옥인 아파트를 철거하고 공원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 아래에 놓인 다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계곡 아래에 걸려 있는 돌다리는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등장하고,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위치에 원형보존된, 통돌로 만든 제일 긴 다리라는 점에서 교량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다.

 

 

현 옥인아파트 일대는 조선시대 수성동(水聲洞)으로,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 <한경지략> 등에 '명승지'로 소개되고,

겸재 정선의 <수성동> 회화에도 등장하며, 당시의 풍경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므로 '전통적 경승지'로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

 

 

내려서면 마을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또한 이 일대가 조선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주 무대였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도 의미가 있으며,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집 '비해당(게으름 피지 않는 집)’이 옥류동 골짜기 옆 수성동에 있었고,

안견이 '몽유도원도’를 탄생시킨 꿈도 아마 이 근처에서 꾸었을 것이다.
또한 겸재 정선도 이 골짜기 아랫동네에 살았는데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인왕산제색도’는 이 근처 풍경을 그린 진경산수화의 정수다.

자료 : http://news.cnbnews.com/category/read.html?bcode=128503

 

 

마을 버스로 광화문에서 내려 북악산을 조망하고

 

청계천 광장

 

한양 한 복판을 흐르는 한강이야 그 당시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어 배를 띄워 우리의 젖줄을 보듬었겠지만

사대문 안을 흐르는 청계천은 우리가 걸어 봤던 북악산이나 인왕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하여 거의 건천으로 남아있었을 것이고...

하지만 비가오는 여름이면 이 강에 기대어 살아왔던 우리 민초들에겐 큰 상처를 주기도 했었을 것이다

 

 

청계천 시작부분

 

이 초보산꾼이 다음에 걸어갈 이 물줄기를 따라 고단한 삶을 꾸려갔을 우리 민초들의 생존의 현장이 그대로 담아 있다.

조선시대엔 북촌인 문반과 남촌인 무반의 경계이기고 했고

일제시대엔 북촌과 남촌의 완충지대의 역활을 담당했던 이 청계천에 놓여져 있는 다리마다

현재와 역사가 함께 살아 숨쉬고 있는 우리의 자랑이다

 

 

다음 일정은 청계광장에서 시작하여 동대문에서 낙산공원으로 하여 혜화문까지 걷고

마지막으로 동대문에서 중량천 합수지점을 만나고, 한강이 보이는 응봉산까지 걷게 된다

 

감사합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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