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둘레길 걷기 - 북한산 둘레길 4차 : 10~12구간 산행기

 

 

 

언제 : 정유년(17년) 누리달 6월 엿새 불날 현중일

 

누구랑 : 광명로얄산악회 산우님들

 

어딜 : 방패교육대 ~ 내시묘역길 ~ 효자길 ~ 충의길 ~ 교현 우이령입구

 

                  더 많은 사진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3721   에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잠시 미루었던 북한산 둘레길... 가는 봄을 아쉬워하고 오는 여름을 맞이하고 겸사겸사

게다가 이번구간에 만나게 될 군부대가 많아 붙여진 충의길에 호국선열의 뜻을 기리는 현충일의 의미까지

작년 가을 초입에 이어 겨울을 지나 어떤 모습으로 봄을 지내고 어떤 모습으로 여름을 맞이하고 있는지

북한산 숨은 비경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고 도봉산으로 가는 길목까지의 북한산 둘레길 속으로 들어가 본다  

 

 

들어가기

 

서울둘레길 전체지도

 

서울 외곽을 크게 둘러싼 산과 하천을 따라 서울의 역사와 문화.자연 생태를 탐방할 수 있도록

숲길, 하천길, 마을길을 연결하여 157km의 '서울둘레길' 8개코스를 완성했다

각 코스별로 편안한 트레킹이나 도심속 삼림욕, 경치와 역사 등 각 코스별로 주제를 가지고 있다 

서울 둘레길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북한산 둘레길을 걸어 본다

 

 

북한산 둘레길 전체지도

 

서울특별시 종로구·은평구·성북구·도봉구·강북구와 경기도 고양시·의정부시·양주시에 걸쳐 있는

서울 둘레길 8개 코스 중 일부를 지나가게 되는 북한산 둘레길은 총21코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한산과 도봉산(사패산 포함)으로 이루어진 북한산 국립공원을 한바퀴 도는 코스로

전체 71.5km로 이 중 북한산코스가 13개 코스에 44km이고 서울둘레길 북한산 코스는 34.5km이다

오늘은 8구간 구름정원길에서 서울둘레길과 헤어진 뒤 북한산 둘레길을 계속 이어가는 코스로

내시묘역길, 효자길, 충의길 등 3개 코스로 10.5km이며 은평구와 헤어지고 고양시 속살으로 들어 간다

 

 

 

 

불광역 8번 출구에서 만나 34번 버스로 입곡삼거리에 하차 후 날머리로 잡았던 방패교육대 다리옆 입곡삼거리를 담아 본다

 

방패교육대 방향으로 보이는 쪽두리봉에서 비봉으로 이어지느 능선을 담아 본다

 

 

 

우리가 내렸던 입곡삼거리 정류장을 지나고

 

백화사 방향으로 우회

 

백화사 가는 길... 좌로 원효봉, 우로 의상봉 능선이 잘 보인다

 

여기소 경로당에 있는 여기소 유래 안내석

 

지금은 못은 사라지고 터와 지명만이 그 전설을 전하고 있다. 그 관리는?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 가는 길에 죽었다는 슬픈 얘기

 

동네슈퍼를 지나 바로 우측으로 보이는 소금바위 - 계곡을 메우고 길을 만들었기에 소금바위가 계곡을 벗어났다고...

진관사 입구에 가면 세종의 9째 아들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의 묘역이 있다.

그 신도비에 옮기기 전(前)의 묘역이 ‘양주 중골(中興洞) 솜바위(면암:緜岩)를 정북으로 등지고 앉았다(자좌:子坐)’고 했다.

또 잠시 후 지나갈 내시묘역을 답사한 기록(박상진 님)에 의하면 내시묘역에 묻힌 분들 후손이 소장한 가승(家乘)에 선조들 묘역이

‘중골(中興洞) 솜바위(緜岩) 동쪽’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곳 중골에 랜드마크가 될 만한 상징물로 솜바위(緜岩)가 있었다는 말이다.

솜바위는 어느덧 유래를 모르는 후손들에 의해서 슬그머니 소금바위로 탈바꿈한 것은 아닐까.

여기에 소금장수 전설 하나 덧붙여지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자료 : 이한성의 옛절터가는길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09589  cnb저널

 

 

되돌아 담아 본 소금바위

 

비구니절이라는 백화사 - 가람 뒤로 내시묘역이 있으나 출입금지이다

 

백화사 입구를 지나 동현농산이라는 사유지가 있어 최대, 최고 규모의 내시묘역을 불 수 없어 아쉽다

조선시대 내시파 가운데 이사문을 파조로 하는 이사문공파의 내시 무덤 45기가 모인 이 내시묘역은 2003년 11월에 발견된 것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내시 묘역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다.

내시는 단순히 궁중에서 일을 한 종이 아니라 왕의 측근에서 정무를 보는 사람을 이른다.

왕과 대신들 사이에 전령을 전달하거나 국왕의 의식주 등 모든 것을 관장했던 실무자이자 전문가로 오늘날 청와대 비서실 직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내시묘역은 사대부에서 서민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어 조선시대 내시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인데다 그 역사적 가치도 매우 크다

자료 : 아웃도어  http://media.daum.net/life/outdoor/travel/newsview?newsId=20130226150715470

 

 

이제 의상봉으로 가는 숲길로 접어들고,,

 

왕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말없이 보좌하던 내시... 애기단풍의 부드러운 숲길은 그렇게 내시처럼 길손에게 그늘을 준다

 

함께 한 산우님들이 단풍나무 꽃을 본 적이 없다고 해서... 자료 초보산꾼 : 천마산(5월12일)

 

단풍나무에 꽃이 피는 지도 모른 채 가을에만 활짝 미소 짓는 단풍으로만 생각했었는데...

단풍나무에 꽃이 달리는 시간도 짭고 꽃도 있는 둥 마는 둥 하니 누가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실

하지만 알고 보면 꽃이 피는 아주 짧은 이 시기의 단풍나무의 신록을 신록중의 제일로 친다고 한다

그래서 여름의 길목에서 내장산 신록을 전국 다섯 곳 중 제일로 추천하는 곳이기도 하다.

 

 

의상봉 갈림길... 둘레길은 직진

 

고개를 넘으면 바로 우측으로 경천군 송금물침비 慶川君 賜牌定界內 松禁勿侵碑가 보인다

 

'송금(松禁)' 이란 국가가 필요로 하는 목재를 확보하기 위해 소나무가 성장할 만한 적당한 곳을 선정 보호하는 제도로

조선시대에 소나무의 의미는 건축물 자재뿐만 아니라 자동차가 없던 시절 중요한 수송 수단이던 선박을 만들고

거기에 겨울철 연료로도 쓰이고 흉년 시 구황식품으로서의 기능까지 없어서는 안 되는 자원이기에 보호했을 것이고

자원이 한정됐던 조선시대에 가장 큰 국가의 정책의 1순위로 소나무를 보호하는 것은 어쩜 당연했던 것 아닐까?

 

 

경천군송금물침비는 '경천군에게 하사한 지역의 소나무를 무단으로 침범하거나 벌목하는 것을 금한다'는 내용의 비석이다.

 

전국 300여 곳에 소나무를 심어 송금지역으로 지정 관리했다는 기록만 봐도 알 수 있었던 조선임업정책의 단면으로

지금도 아무리 사유지라도 소나무를 베는 것은 불법인데 조선시대에는 한 두 그루 베면 곤장 100대요

서너 그루 베면 곤장 100대에 군대징집, 열 그루 이상이면 곤장 100대에 변방이주 라는 형벌에 가했던 까닭이다

오늘 북한산 둘레길에서 말로만 듣던 민족의 뿌리를 소나무에서 찾던 조선소나무의 진실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둘레길이 그냥 단순한 둘레길이 아닌 것이여... 몰라도 되지만 알면 상식이 되는...

 

 

북한산성 상가 직전 우측으로 둘레길에서 조금 벗어난 북한산성초등학교를 갈 수 있다.

 

북한산 초등학교에서 담아 본 원효봉 - 학교 담벽에 최근에 새로운 송금비가 발견됐다고 해서 들른 것인데... 확인 못함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를 지나고 - 이제 은평구와 작별하고 고양시로 들어선다

 

좌측으로 해서 들어오면 둘레길은 둘레교를 건너야 한다. 우측에 전주이씨 해안군파 서흥군묘소 이정석이 보인다

 

 

 

 

둘레교를 넘으면 바로 전주이씨 해안군파 서흥군묘소가 보인다

 

 

 

서암문으로 해서 오르는 원효봉 갈림길에서 직진

 

이제 지형은 바뀌어 노고산도 조망되고

 

둘레길은 좌측으로 이어가는데... 그런데 무슨 둘레길이 이렇게 많은지...

 

 

 

이제 내시묘역길은 끝나고 효자길로 접어든다

 

이제 도로를 만나 도로를 따라 가야 한다

 

 

 

관세비스타라는 곳을 지나는데 관성사라는 안내판이 있다 - 이 곳은 실향민이였던 김은주 할머니의 사랑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사람은 나무하고 똑 같이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는 김은주 할머니의 지론이 관세 농원과 장학제단에 남아 있다

 

이제 도로에서 벗어나 숲속으로...

 

막걸리 한병 비우고

 

둘레길이다 보니 이런 것도 포토죤이란다 - y자 나무

 

북문 갈림길을 지나면

 

실계천도 따르고

 

와글와글 식당이 있는 주의 지점 - 둘레길만 따르다보면 효자길의 유래가 담긴 효자비를 놓칠 수 있다

 

박태성 정려비 - 이곳에서 약 300m 떨어진 곳에 박태성 선생의 묘와 그의 부친의 묘가 위치헤 있다고 한다

 

 

 

 

 

밤골공원 지킴터를 지나는데... 몇 번 와봤는데 좌측에 보이는 국사당에서 굿을 하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런데 빨리 나가란다... 내가 잡귀가 된 느낌?

 

북한산 숨은벽을 가기 위해 많이 이용하는 밤골지킴터에서 둘레길은 좌측으로

 

식후경 후

 

백운대 갈림길

 

사기막골에 접속 둘레길은 좌측으로

 

부대에서 사용하는 도로를 따르다 갈림길 우측으로 청담동 각자가 있다 - 되돌아 본 모습

 

우암송시열이 유배 길에 제자 독락재 구시경에게 '사기막골이 푸른 연못처럼 보인다 하여 지어준 이 곳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이름이 아니고 이 곳 사기막계곡을 청담淸潭이라 칭한 듯 하다

청담동(淸潭洞) : 두가지  유래담(由來談)

하나는 이곳이 맑고 푸른 연못이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맑을 청(淸)자, 못 담(潭)자를 써서 청담동(淸潭洞)이라고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동네도 인근의 사기동(沙器洞)과 마찬가지로 예전에는 사기를 굽던 곳이었는데,

구워낸 사기에 퍼렇게 물칠을  하고 그것들을 말리느라 땅 위에 죽 늘어 놓은 것이

산 위에서 보면 마치 맑고 푸른 연못처럼 보였기 때문에 청담동(淸潭洞)이라 부렀다는 것이다. (효자1리(孝子1里))

고양군지  http://www.goyang.go.kr/gunjiDB/index.jsp

 

 

조금 더 내려오면 사기막공원 지킴터가 있는 곳에서 충의길이 시작된다

 

 

 

사기막으로 더 내려가면 나오는 구가원 具家園 표석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곳은 구씨의 땅이라고...

 

비롯 지금은 비도 내리지 않아 건천이지만... 우암과 독락재 두 스승과 제자가 담론했을 청담(사기막계곡)을 담아 본다

 

 

사기막 계곡 사이로 백운대 조망 - 당겨보니 인수봉 숨은벽 백운대가 뚜럿하다.

그런데 좌측 인수봉은 어머니가 아이를 업은 모습 같다고 해서 삼국시대에는 부아악이라고 불렸단다.

 

이번 구간은 유난히 출렁다리가 많다

 

오늘의 최고 포토죤

 

 

 

 

충의길 구간은 부대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별 특징 없는 구간이 계속 되지만 숲길을 걷기 떄문에 무리가 없다

 

농원도 지나고

 

상장봉에서 내려오는 한북정맥길과 만남지점에서 솔고개로 좌틀 - 여기에 있던 비탐구간 감시초소가 없어졌다

 

한북정맥인 상장봉능선을 내려오면서 여기에 있던 초소 때문에 떨면서 내려왔던 기억이 엊그제 이다

 

미르님 따님과 함께 한 둘레길 즐거웠습니다.

 

솔고개에서 약간 벗어난 도로와 만나서 둘레길은 우측으로

 

좌측 도로를 보면 횡단보도가 솔고개 이다. 그럼 이제 고양시와 작별하고 양주시의 속살로 들어간다는 얘기겠죠?

 

교현리 방향으로 진행하다 바로 솔고개 정류장도 지나고

 

요즘 자주 반룡송을 보니 달리 보이는 작품

 

상장봉 능선

 

계속 도로를 따라 간다

 

오늘의 종착역 교현리 우이령 입구 도착

 

담에 가야 할 우이령길 입구에서 본 상장봉 능선

 

좌측으로는 오봉이 이런 모습으로 보인다

 

 

 

횡단보도를 건너 우측으로 가면 버스를 타고 연신내역에서 종료한다

 

유난히 출렁다리가 많은 충의길에서 단체사진... 월궁항아님 함께 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다행히 단비가 내릴려는지 약간은 습한 날씨...

더위도 한 몫한 둘레길...

수고했습니다

 

 

드러마를 통해서 볼 수 밖에 없었던 내시의 세계...

우리가 알고 있는 거세를 당한 내시의 세계 외에 무엇을 더 알고 있었을까?

오늘 내시묘역길을 걸으면서 살펴본 자료에서 너무도 많은 편견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왕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고 때론 지켜야 하기에

얼마나 고통이 컸으면 꼭 비오는 날에만 행했다는 거세의 고통은 기본이요

궁에 들어서도 고참들의 끊임 없는 인내를 시험하는 고문을 통과해야 했다고 한다

그래야 비로서 왕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중요한 자리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왕의 지근에서 보필하기에 왕의 의중이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알아야 했고 어렸을때부터 피나는 훈련과 공부는

올바른 품성과 지성을 가진 학식을 겸비하게 했다고 한다.

내시도 인간이라 병들면 결국 궁에서 쫒겨나야 했지만

노후 보장은 확실히 해주었다고 하니 나름 말못할 고민에 대한 보상은 아닌지...

 

내시묘역을 지나 만나게 되는 송금물침비松禁勿侵碑는

소나무에 대한 조상들의 예지를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산에 들면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소나무이다

참나무가 7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소나무의 능름한 기상이다

거송이라는 단어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사랑받게 된 이유는

우리 산림의 많은 부분을 소나무 군락이 차지하고 있어 친근감도 있지만

우리 민족과 함께 긴 세월을 함께한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장생을 염원했던 우리 조상들이

늘 곁에 두고자 했기에 소나무를 민족수(民族樹)라 부르는 것이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인 소나무는

한국의 100대 상징 중에서 유일하게 나무로는 소나무가 꼽힐 정도로

역사속 그림과 문학작품에서 같이 호흡하며 함께 이어져 왔기에

우리는 흔히 소나무 문화라고 일컫기도 하다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소나무에 대한 막연한 생각으로 대해 왔는데

오늘 북한산 둘레길에서 만난 소나무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애착과 관리에 대한 새로운 자료는 다른 산행에서 가질 수 없었던

또 하나의 기쁨으로 마칠 수 있어 하루를 정리하는 맘이 가볍다

 

 

              초보산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