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둘레길 걷기 - 북한산 둘레길 1차 : 1~3구간

 

 

언제 : 병신년(16년) 열매달 9월 사흘 해날

 

누구랑 : 광명로얄산악회 산우님들

 

어딜 : 우이동종점 ~ 소나무길 ~ 순례길 ~ 흰구름길 ~ 북한산 생태숲

 

                  더 많은 사진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3318   에 있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지나가버린 여름보다 조석으로 대하는 바람이 먼저 가을을 준비하고 있음을 얘기해 주는데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하장군夏將軍까지 대동하면서까지 그간 잃어버린 존재감을 맘껏 나타냈지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무더위를 넘어 계속 이어지던 열대야도  가는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을 실감한다

하장군의 무릎을 꿇리게 한 것은 계절의 힘이지만 하장군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버텨낸 과정이 있어

다가올 가을이 더욱 행복할 것 같은 생각으로 달려가는 둘레길의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우릴 기다리고 있을까?  

 

 

 

들어가기

 

서울둘레길 전체지도

 

서울 외곽을 크게 둘러싼 산과 하천을 따라 서울의 역사와 문화.자연 생태를 탐방할 수 있도록

숲길, 하천길, 마을길을 연결하여 157km의 '서울둘레길' 8개코스를 완성했다

각 코스별로 편안한 트레킹이나 도심속 삼림욕, 경치와 역사 등 각 코스별로 주제를 가지고 있다 

서울 둘레길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북한산 둘레길을 걸어 본다

 

 

북한산 둘레길 전체지도

 

서울특별시 종로구·은평구·성북구·도봉구·강북구와 경기도 고양시·의정부시·양주시에 걸쳐 있는

서울 둘레길 8개 코스 중 일부를 지나가게 되는 북한산 둘레길은 총21코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한산과 도봉산(사패산 포함)으로 이루어진 북한산 국립공원을 한바퀴 도는 코스로

전체 71.5km로 이 중 북한산코스가 13개 코스에 44km이고 서울둘레길 북한산 코스는 34.5km이다

오늘은 서울둘레길의 일부인 제1구간 소나무길을 시작으로 순례길, 힌구름길 3구간으로 9.5km를 걷게 된다

 

 

 

 

수유역 3번 출구로 나와 바로 중앙 버스 전용 차로에서 153번 버스로 우이동 종점에서 내려 백운천으로 이동

손병희 선생 묘소 방향으로 둘레길을 시작한다

 

백운천을 우측으로 끼고 계속 걷다 나무를 배려한 주택도 지나고

 

이제 백운천과 헤어져 우이동 만남의 광장으로 올라 간다

 

만남의 광장을 대각선으로 해서 올라간다

 

만남의 광장에서 잠시 봉황각을 들려본다

 

봉황각 안으로 들어가 본다

봉황각 鳳凰閣

이름만 보면 사당이나 사찰의 부속 건물 같지만, 실은 의암 손병희(1861∼1922) 선생이 3·1운동을 구상한 장소다.

봉황각은 민족종교 천도교의 교육기관으로 1912년 손병희 선생이 건립했다.

기와를 얹은 2층 한옥건물이 건립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어 보존가치가 높다.

이준용·문병석·안찬복 등 봉황각에서 교육을 받은 애국지사 483명이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들 중 중 15명이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에 포함돼 있다.

자료 : 중앙일보 보도내용   http://news.joins.com/article/19555824

 

 

보통 이 건물을 봉황각으로 착각하는데 봉황각은 이 건물 뒤에 있다

 

건물 뒤로 가면 봉황각이 보이고 좌측으로 보이는 쪽문으로 하여 선생이 묘소를 들어 갈 수 있다. 물론 관린인에 허가가 필요하다

 

봉황각에서 도봉산을 배경으로 미리내 카페지기님 - 함께 해 주시고 일일 총무까지 감사합니다

3·1운동 이후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됐다가 1957년 ‘의창수도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황각이라는 이름은 천도교 교주 최재우가 남긴 시에 자주 나오는 '봉황'이라는 낱말을 딴 것이란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민족대표 33인중의 한분이며 독립운동가이고 서예가 였던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이 썼다고 한다

 

 

이 쪽문을 열고 들어오면 선생의 묘소를 들어 갈 수 있다

 

손병희 선생의 묘소

 

농사꾼님의 해박한 지식에 의해 동학과 손병희 선생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다시 되돌아 와 본격적으로 둘레길 시작하면서 굳게 닫힌 손병희 선생의 묘소를 담아 본다

 

 

 

이제 본격적으로 북한산 둘레길 1구간 소나무숲길이 시작된다

지난 69년 1·21 사태 이후 통제됐던 우이령길을 북한산둘레길 완성에 앞서 2009년 먼저 개방했다고 한다

그 다음에 둘레길을 만들며 시계방향으로 번호를 붙이다 보니 소나무길이 1코스가 된 것이다

북한산 대부분이 참나무로 이루어져 있는데 솔밭공원에 조성된 1,000그루가 넘는 소나무가 모여 있어 소나무 숲길이라 했다

우이동 쪽 우이령 입구에서 솔밭 근린공원까지 이어지는 약 3.1㎞ 구간으로 원래 동네 주민의 산책길을 둘레길로 만들었다

 

 

우이제일교회와 송주사 사찰과의 오묘한 조화

 

그런데 왜 아직도 우이령 고개를 넘나드는 북한산 마루금은 개방하지 않는겨?

북한산과 도봉산을 이어주는 줄기를 싹뚝 잘라 버려 서울 시민과 경기도민들의 맘까지 갈라 놓고...

하루빨리 시민의 발로 걸을 수 있도록 개방하여 맘꺽 서울과 경기도를 조망할 수 있게 하면 안되겠니?

 

 

송주사에 잠시 들려 본다

 

세월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산천의 모습을 얘기하는 萬古江山 약수터에서 잠시 휴식도 하고

 

이용문장군묘를 지나니(11:31)  박을복 자수 박물관이 나타나고...좌측으로 계속 소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우이동 솔밭근린공원이 나타난다 - 붉은색따라 둘레길은 이어진다. 목책 안쪽으로... 잘못하면 둘레길을 놓칠 수 있다

 

천그루가 넘는 소나무를 심었다고 하니... 생각했던 이상의 힐링 산책길 솔밭공원 잠시 감상

 

뒷배경 소나무가 미리내님을 환영하기 위해 호위모드로 열지어 있네요

 

북한산의 옛이름 삼각산을 형상화한 돌탑을 배경으로... 산구름님 함꼐 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솔밭공원 상단이라 이름 붙여진 생태연못과 놀이터가 있는 이 곳에서

 

성원 아파트 사잇길로 올라가면 된다

 

조금 오르다 보면 좌측으로 북한산 둘레길 2구간 순례길이 시작된다. 지금부터 왜 순례길인지 확인 들어갑니다.

2코스에만 모두 12기의 순국선열 묘소가 있어 순례길이다. 무엇보다 4·19 국립묘지가 2코스에 있다.

지난 60년 이승만 정부에 반대하며 분연히 일어섰던 민주열사 237위가 여기에 잠들어 있다.
전망대에서부터 3코스 중반까지 북한산을 휘감는 2.5㎞ 길이의 길에 순국선열의 묘소가 줄지어 있다.

김창숙·이시영·김병로·이준·신익희·신하균·조병옥 등 애국선열은 물론이고 광복군 17위를 모신 합동묘지도 있다.

왜 강북구에 이렇게 많은 순국선열이 잠들어 있을까. “이 일대에서 일본 헌병과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손병희 선생의 봉황각도 있었고 이 일대는 독립운동의 요람이였다. 인근에 조선 왕릉(정릉)도 있다.

자료 : 중앙일보 보도내용   http://news.joins.com/article/19555824

 

 

잠시 우이동 마을로 내려와 농사꾼님의 라면 봉사로 맛있는 식후경

 

 

 

4.19 묘역도 감상하고

 

 

 

보광사도 지나고

 

잠시 사찰안으로 들어가 대웅전

 

보광사와 멀리 도봉산과 오봉이 보인다

 

순례길... 4.19묘지에 이어 보광사 그리고 건국훈장을 받으신 강재 신숙의 묘

 

 

 

애국선열 김도연선생 묘를 지나면서 순례길 확인... 넘 많아 이 지도로 대신...위치 확인 해 보시고 담에 하루 날 잡아서...

 

 

 

백련공원 지킴터 - 무장애 탐방로도 시작되고 대동문으로 가는 길과 함께 한다 

 

근현대사 기념관도 있다

 

애국선열 단주 유림선생묘에서 본 섶다리

섶다리

강을 사이에 둔 마을 주민들의 왕래를 위해 매년 물이 줄어든 겨울 초입에 놓았다가

여름철 불어난 물에 의해 떠내려갈 때까지 사용하는통나무, 소나무가지, 진흙등으로 만든 임시다리이다

 

이 곳 수유리가 북한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이 마을을 넘쳤기 때문에 물『水』자와 넘칠『踰』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우리말로는 물이 넘친다 하여 『무너미』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비롯 인공적인 섶다리이지만 섶다리의 효용성을 생각해보니 수유리의 이름이 실감이 난다

 

 

태극기의 변천사를 설명한 안내판을 지나... 애국선열이 지킨 민족의 자존심 한켠에 남아 있을 태극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중국 각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 순국한 애국선열 18위의 합동묘소인 광복군합동묘 갈림길

 

대동문 갈림길

 

애국선열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선생 묘 지나면 바로 이준 열사 묘를 만날 수 있다. 위훈비와 홍살문을 지나고

 

이준열사가 남긴 글들을 적어놓은 비석의 글들을 읽으며 길따라 올라가 본다. 자유평화 수호의 상도 지나고

 

이준 열사 묘

이준(李儁·1859~1907) 열사 묘에 닿는다.

이준 선생은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 등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1907년 7월 14일 숙소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그의 시신은 헤이그 서쪽 외곽에 있는

니우 에이컨다위넌(Nieuw Eykenduynen) 시립공동묘역에 묻혔다가 1963년 우리나라로 운구해 지금의 위치에 안장되었다.

자료: 월간 산지  http://san.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2/29/2016022902115.html

 

 

이준열사의 묘를 끝으로 순례길이 끝나고 도로가 나오면 좌틀하면서 힌구름길이 시작된다

 

통일교육원에서 우틀... 북한산둘레길 탐방센터에서는  둘레길 관련 팸플릿과 책자 등을 제공한다고 한다

 

게이트볼을 지나면 희구름길이 나타난다

이준 열사 묘역 입구를 시작으로 냉골지킴터를 지나 북한산생태숲에 이르는 코스로 4.1km 거리에 2시간 정도 걸린다.

흰구름길은 조망이 좋은 길이다. 울창한 숲과 아담한 오솔길을 걸으며 화계사를 지나 15분쯤 가면 12m 높이의 구름전망대에 닿는다.

 

 

신토불이 식품이 있는 본원정사 갈림길을 지나 영락기도원이 있는 도로를 건너면 우회길 이정표가 나온다.

 

 

 

여기부터 리본이나 이정표가 없어 이 표지기를 따르다 보니

 

베드민턴장이 우측으로 보이고 끝 부분에 용봉쌍수가 보인다

 

다시 둘레길을 만나보니... 결국 우리가 왔던 길이 기존의 둘레길이였다. 통제한다고 하고서 통제는 하지 않고 있다

 

화계사로 올라가는 화계공원지킴터가 있는 도로를 만나고

 

작은 전망대에서 본 삼각산

 

힌구름길 최고의 전망대인 힌구름 전망대

 

궁중 무수리들의 생활상을 조금은 엿볼 수 있는 빨래골공원 지킴터가 있는 도로

 

궁 안에서 절제되고 통제된 생활을 하다가 빨래터에 나와서 맛보는 해방감을 우리는 얼마나 이해를 할 수 있을까

무수리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궁에서 오직 자기가 모시는 상전만을 위해 살기 때문에 외출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나이에 궁에 들어가 상전을 위해 일하다가 상전이 죽으면 궁에서 쫓겨나와

상전을 잘 모시지 못한 죄인 취급을 받으며 결혼도 못하고 평생을 상전의 귀신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 곳의 계곡은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해 대궐의 궁중 무수리들이 빨래터와 휴식처로 이용하면서 생긴 이름이란다

 

그래도 궁에서는 입고 자고 먹여 주고 게다가 따로 월급까지 쥐어주니 차곡차곡 모았다가

초보산꾼과 함께 찾았던 보문사나 미타사처럼 비구니절에 시주를 하면서 갈 곳 없는 영혼을 부탁했던 것이다

궁에서 500명이 넘는 궁녀들이 생활했다는 기록을 보면 왜 서울에 비구니절이 많은지 이해가 간다

역사 속 무수리들 얘기를 떠나서도 냇가에서 빨래하며 수다를 떨던 때가 옛날이 아니고 엊그제 우리 이웃의 얘기이다

 

 

빨래골에서 빨래대신 갑자기 더워진 날씨에 잠시 얼굴도 씻고...

 

우물이 귀했던 시절 양은다라나 세수 대야에 빨래 감을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서 하나 둘 모여들어 빨래를 두드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들어가는 힘 속 에 그간 풀지 못했던 스트레스가 저절로 빨래 감에 묻어 있던 때와 함께 사라지고

시어머니부터 시누이 시동생 그리고 남편도 벗어 날 수 없었을 것이다. 수다로 낚는 험담 속에...

그렇게 집을 벗어나 빨래터에 모이다 보면 동네 경조사까지 다 참견하고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지금은 도시는 물론이고 시골에서 조차 보기 힘든 정겨운 나의.. 아니 우리 어머니의 얘기인 것이다

그리고 밤이면 달빛을 벗 삼아 또 다시 풀벌레 소리와 함께 울려 퍼져나갔던 다듬이 소리...

시어머니 그 소리는 뚝딱뚝딱 뚝딱뚝딱... 며느리의 그 소리는 똑딱똑딱 똑딱똑딱

잘도 넘어가네 가락도 흥겨워라 다듬이 다듬이 다듬이 다듬이 다듬이 다듬이소리

 

아! 정말 그립고... 아 옛날이여...

 

 

처음 시작할 때는 시원해서 좋았는데... 갑자기 더워진 3구간... 4.12km  짧은길이 아니네.. 전망데크에서

 

그런데 빨래터에서 왕이 태어난다면?  고려 2대 왕 혜종(惠宗)의 얘기이다

 

高麗 太祖 王建은 빨래터에서 만난 여성과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은 高麗의 두 번째 王이 된다.
王建은 泰封(태봉)의 弓裔(궁예, 861-918)의 장수로서 903년 수군을 이끌고 後百濟 땅인 羅州를 공격한다.

木浦에 배를 정박시키고 있는데, 멀리 오색 구름이 서린 동네가 보인다. 찾아가 보니, 어떤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그 지방 호족의 딸이었는데 보아하니 인물이 괜찮다. 그래서 그 여자와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시집 안 간 처녀를 건드려 놓고 王建은 여자의 출신 성분이 낮다 하여, 임신을 원하지 않았다. 해서 돗자리에다 사정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처녀의 행동이 놀랍다. 여자는 전날 밤 龍이 자신의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龍은 곧 王이 아닌가.

여자는 이불에 흘린 정액을 쓸어 넣었다. 일종의 인공수정인 셈인데, 어쨌거나 임신이 되었고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惠宗이다.

자료 : 한넷회 카페
http://cafe.daum.net/hynetwork/KGZs/877?q=%BB%A1%B7%A1%C5%CD%C0%C7%20%BC%F6%B4%D9

 

 

 

수락산과 불암산 그리고 서울

 

세력이 약한 집안에서 태어난 탓에 임금으로써 기도 펴지 못하고 항상 불안에 떨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을 떠나신 혜종의 사인은 아직도 오리무중...

옛날에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차지하려면 확실한 금수저로 태어나야 하는 가 보다...

그것도 왕족의 씨를 받은 금수저로 태어났다면,,,

백성은 없고.. 지 잘난 맛에 맘껏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었을 것인데...

 

지금 우린...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걸까?

 

 

솔샘길 시작점과 희구름길 마지막 지점에서 농사꾼님 - 함께 해 주시고 식후경도 넘치고 뒤풀이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솔샘길을 조금 더 진행하면 미아리 북한산 생태숲이 나오고 공원으로 하산 북한산 둘레길 1차 산행을 종료한다

미아리

미아제7동 불당골에 미아사라는 절이 있어 미아동의 동명이 생겼고

또 일제 때 미아동에 공동묘지가 조성된 후 미아리고개라 칭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원래 이 고개를 되너미고개라 하였다. 병자호란 때 되놈〔胡人〕들이 넘어왔다가 넘어갔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공원길 내림길을 지나면 우이동 속으로 들어간다. 지금은 삼양동이라 한다나?

 

성북구 돈암동에서 미아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미아리 고개는 옛날에는 몹시 험준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북쪽으로 통하는 유일한 관문 이였기에 전쟁 초기에 삼팔선을 넘어온 인민군과

이 곳 미아리고개에서 아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지만 폐하면서 속수무책으로 서울이 함락되고 말았다

6월27일 서울이 함락되고 서울 시민들이 우왕좌왕할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줄기 희망 이승만 대통령의 말쌈

 “나 대통령 본인도 서울을 떠나지 않고 국민과 함께 서울을 지키고 있습니다"

시민들은 그렇게 서울에 남으라고 하고 그는 이미 대전까지 내려갔다 나 어쨌다나...

다음 구간에서 만나게 될 인조가 조금만 신변에 위협을 느끼면 형제봉을 넘어 북한산성으로 줄행랑 쳤듯이...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이라는 者가 할 짓 이였는지...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의 첫 단추가 이정도이니...

 

 

다음 구간 이름인 솔샘이 눈에 들어 온다. 생태숲과 솔샘은 다음 구간에 만납니다

 

3개월 후 서울이 수복되면서 퇴각하던 북한군이 다시 이 고개를 넘으면서 반공인사 2천명을 처형했으며

수많은 애국인사들을 북으로 끌고 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만든 한 많은 고개가 되고 말았다

끌러가야만 했던 인사들과 가족들의 생이별이 주는 아픔과 슬픔 속에 남겨 졌을 회환...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끌려가며 뒤돌아 봤을 가족들에게 남겨진 창자를 도려내는 고통

단장(斷腸)의 미아리 고개란 노랫말이 지금까지 우리 맘속에 남아 심금을 울려주는 이유일 것이다 

이미 병자호란 때 이 고개를 통해 조선인을 수없이 끌고 간 민족 애환의 역사가 반복되고 말았다

인조가 남긴 병자호란의 역사를 몰랐을 리 없는 이승만이 똑 같은 역사에 오점을 남겼으니...

줄행랑치는 지도자 밑에 고통 받아야만 했던 민초들의 삶이 옛날 얘기만이 아니다 는 사실...

 

 

벽산아파트를 나와 길을 건너 택시로 길음역으로 이동

 

북쪽으로 통하는 유일한 관문 이였을 정도로 험준했다는 미아리 고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금

이젠 고통 없는 평화만이 가득하고 사랑과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미아리로 남았으면...

 

그런데 역사적 사실은 뒤로 하고 이제는 삼각산 아래 따뜻한 마을인 三陽洞으로 부른다죠?

 

 

뒤풀이 장소 - 농사꾼님 뒤풀이 봉사 감사합니다. 그리고 산구름님 발전기금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루를 정리 한다

 

산행을 위주로 하는 산악회에서 처음으로 시도해 본 둘레길 걷기

나부터 둘레길하면 마을사람들의 산책길 정도로만 생각했고

몸이 힘들거나 시간이 많지 않을 때 필요하면 도덕산 둘레길을 걷는 정도로 만족했었는데

내 몸이 아프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바로 둘레길 이었다

안산에서 인왕산으로 산행하면서 올린 산행기를 보고 어느 산객께서 댓글을 달았는데

안산에 무장애 둘레길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이젠 가기가 싫다고...

사실 산에 오르고 싶어도 오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 사람들에게 산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고마운 둘레길이기에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행복한 공간이 생겼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광명 로얄산악회에서 시작한 북한산 둘레길이

길이 있어 서로 맘의 벽을 허물고 서로 이해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 가져 봅니다 

산객의 입장에서 둘레길을 왜 걷지?  가 아니라

둘레길을 걸으니 이런 일도 있구나... 

걷기 바쁜 산행에서 느낄 수 없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걸을 수 있는 여유로운 걷기

다음 구간에도 역시 계속 됩니다.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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