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북정맥01 -  칠장산 구간 :   칠장사에서 배티고개까지 - 

 

 

언제 : 임진년 푸른달 열여드레 금요일 ~ 열아흐래 흙요일

 

누구랑 : 바다사랑 대장님과 금북정맥 식구들

             바다사랑님, 탱이하트님, 상황봉님, 도덕산

 

어딜 :   칠장사에서 배티고개까지

 

 

 

 

 

마음이 푸른 모든이의 달 5월, 우리는 또 하나의 힘찬출발을 알리는 작은 물결이 있었다.

바다사랑님을 대장으로 모시고 안흥진까지 이어지는 금북정맥의 첫 발을 작지만 알차게 장도에 오르게 되었다.

 

 

 

탱이하트님의 1차 운행차량 - 칠장사 도착         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산경표상 금북정맥은 금강 북쪽의 분수령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분수령이 되는 곳은 한남금북정맥이고, 금북정맥은 금강 북쪽 수계를 형성하면서 호서지방으로 향하는 맥이된다.  따라서 약간 애매모호한 분수령이지만 금북정맥은 안흥진으로 향하는 문화와 물류의 흐름으로 맥을 구분지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그런 이유로 금북정맥은 여러 정맥 중에 약간 특이한 특성을 지닌 정맥이다.

 

 

 

칠장사 일주문 - 칠현산 칠장사로 되어있다

 

조선시대에 금북산줄기를 중심으로 그 문화적 교류가 남북으로 나누어 진다.  하지만 호서지방으로 접어들면서 해양문화와 육지문화가 서로 교류하고 외국 문물까지 교역하는 길이 된다.     이를 증명하듯 서산마애삼존불과 태안마애삼존불은 중국 불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그 길목에 형성된 문화제이다.   또한 천주교의 유입이 이곳 안흥진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금북정맥이 지나가고 있는 여러 지역이 순교자들의 처형 장소가 되었다.  우리는 금북정맥길에서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자료 : http://blog.daum.net/san2000/15958739

 

 

 

칠장사에 도착하니 먼저 반기는 것은 견공의 마중이었다. 캄캄한 세벽에 마실다닐 때 듣던 견공의 소리를 생각하니, 언제 다시 그런 시절이 다시 돌아 올 수나 있을련지? 

개짓는 소리만이 유일한 사람소리를 대신하던 시절, 이제 듣는 것 자체가 행복이니....

 

 

어사 박문수길이 먼저 우리를 반긴다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648년 창건한 칠장사는 과거를 보러 가다 이곳에 머문 조선시대 암행어사 박문수가 꿈에서 신선에게 과거 시험 문제를 받아 장원급제했다는 이야기(몽중등과시)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시제 8줄중 부처님이 일저준 7줄은 그대로 쓰고 자신이 마련한 나머지 1줄을 써서 장원에 급재했다고 한다.

어찌됐든 박문수가 어사로 활동했던 시간은 3년밖에 안되는데, 3년이 곧 지금까지 회자되는 어사 박문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핍박받던 민중의 외침이 지금도 들리는 듯 하다.

 

아직은 모두가 잠든 사찰내인지라 절내를 구경할 수는 없었지만, 바로 대웅전 옆에 있는 명부전의 벽화를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임꺽정과 그 무리들  -  칠장사에만 있는 그림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명종 때 임꺽정이 스승 병해 스님과 함께 10여년간 머물던 사찰로, 벽초 홍명희의 역사소설 ‘임꺽정’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의 주요 무대가 되기도 하는 곳이 칠현산 칠장사인데 백정 출신의 갖바치가 병해대사로 도통을 하여 임꺽정 무리들의 아지트가 되도록 해주고 있었다

 

 

 

임꺽정 - 갖바치 출신인 병해대사를 정신적 지주로 삼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85세에 병해대사가 입적하자 이곳 칠장사에 모시게 되었는데, 그래서 핍박 받던 백성들의 애환이 전해지는 유서깊은 절이다.

 

궁예의 벽화도 있다고 하는데 확인할 시간도 없이 나한전을 지나고

 

이곳 안성은 후삼국시대에 궁예의 미륵신앙을 배태시킨 곳이었고 특히 국가지정문화재 983호인 죽산면 칠장리 764번지 소재 안성봉업사석불입상을 비롯해,  삼죽면 기솔리 33-1번재 소재 경기도지정문화재 36호인 기솔리석불입상 등 수십가지 유형의 불상을 만나볼 수 있다.

 

 

혜소국사비 慧炤國師碑 를 지난다 - 시대는 고려시대라고 한다.

 

산신각도 지나고

 

 

산신각은 산신을 모시는 전각이다. 사찰에서는 山靈閣이라고도 부른다.  

산신은 불교가 전래되기 전 도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토착신이다.

 

 

이제 본격적인 금북정맥을 향한 산행은 시작되고

 

칠장산과 칠현산의 갈림길을 지나고

 

3정맥 분기점이다   사진: 바다사랑님

 

한남금북정맥과 금북정맥, 그리고 한남정맥의 분기점이라는 뜻인데, 하여간 밤이라 애매한 산줄기는 확인 불가하고...

 

 

국내 최대 복조리 생산지이자 복조리만들기 400년 전통을 이어오며 전형적인 농촌체험마을로 정평이 나있는 신대마을 갈림길이 있는 칠장산 (七長山, 492m)이다

 

칠장산(七長山, 492m)은 비록 높은 산은 아니지만 금강 이북과 한강 이남의 산경(山經)과 수경(水經)을 갈래 짓게 한다.

 

 

사진 바다사랑님

 

 

칠장산 주차장 이정표를 따라 남진을 계속하니 어느새 칠현산이다.

처음 접해본 바다사랑대장님의 발걸음이 왜이리 빠른지, 사진찍을 시간도 주지 않는다.

 

광혜원 백정 출신이었다는 일곱 명의 도적을 개과천선케 하여 일곱 현인이 되게 한 산자락이라서 붙은 이름이라는데,

칠정산(七丁山)이라 부르다가 칠현산(七賢山, 516m)이란 산명을 갖게 됐다고 하며, 이곳 사람들은 두 산 모두 칠현산이라 부른다.

 

 

명적암으로 가는 이정표

 

 

이제 고도를 한참을 낮추며 한없이 내려가다, 광혜원 중고개라고 쓰여 있는 부부탑 칠순비를 지나면서 다시 본격적인 오름은 시작되고..

이제 공림정상이라는 이정석이 있는 519봉애 오르고

 

 

이정석은 자연석이다 - 이번 구간에서 가장 고생하신 탱이하트 총무님

"공림"은 동쪽으로 곰내미골이 있는데 그것과 관련이 있는 듯

 

생거진천이라 쓰여있는 덕성산 정상에 도착한다. - 이제 진천땅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이다.

 

진천군은 “生居鎭川(생거진천), 死後龍仁(사후용인)”(생전에는 진천에서 살고 사후에는 용인에서 산다)에서 비롯된 역사적 유래를 바탕으로 한 배타적 권한을 갖기 위해 특허청에 ‘생거’에 대한 상표등록을 마쳤다고 한다.
예로부터 진천은 살기에 편하고 용인은 명당이 많아 ‘생거진천 사후용인’이란 말이 전해내려오고 있는데

최근 전북 진안.부안군 등 타 지역이 지명 앞에 생거를 넣어 사용하는 예가 늘고 있다”며 “생거의 배타적 권리를 확보키 위해 특허법률사무소를 통해 특허출원했다”고 한는데..... 

그러나 生居鎭川 死後龍仁의 유래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래글 참조)

 

 

사진 : 바다사랑님

 

 

무술 마을은 조선 연산군 때 조정의 선비가 사화를 피하여 이곳에 와서 걱정 없이 지냈다고 하여 '무수(無愁)'라고도 전해 온다    

이곳은 진천 태생으로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金庾 信:595∼673) 장군이 소년시절부터 용화향도(龍華香徒)라는 낭도(郞徒)들과 무예 등 화랑도(花郞徒) 정신을 연마하던 터이다.

하지만 전국에 무술이라는 골짜기 또는 마을 이름이 몇 군데 존재하는데 그 유래가 분명하지 않다. 가술, 여술 등에 보이는 술과 같은 것으로 보이며, 산의 뜻일 가능성도 있다.

북쪽 골짜기 비들목도 화랑들이 전서구(傳書鳩)를 길들이던 마을이며, 동쪽으로 내려오면 화랑의 연무대와 병기고 자리에 병무관(兵武館) 마을이 있다. 또 산기슭 화랑벌의 화랑도 수련관 자리가 궁전터라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병목안은 병의 목같이 생긴 안쪽을 지시한다. 전국에 병목안이라는 골짜기 또는 마을이 대단히 많다. 이곳 병목안도 병목처럼 생긴 초입을 지나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덕성산 德城山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과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요순산(堯舜山) · 무위산(無爲山) · 무수산(無愁山) · 국사봉(國寺峰) 등으로도 불린다. 고지도나 지리지에서 이 지명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신라와 백제가 대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래서 산성이 있었다는데... 이 산 아래인 '무술'과 '비들목'에 신라군이 주둔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자료 :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어느새 새벽을 알리는 해돋이가 덕성산을 벗삼아 나무가지 사이로 아름답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당겨보니

 

지도상 454.9봉인 삼각점이 보이고

 

 

잠시 후 티고개이다.

무티고개는 인근의 무이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야기도 있고, 무술리 에서 왔다는 얘기도 있고....

 

돌탑도 보이고 - 고개마다 돌탑을 쌇아 놓아 정성이 가득하다

 

이제 완전히 밝아진 아침공기에 소나무까지 앞길을 인도하니

 

사장골 정상이다.

 

병무관 남쪽에 있던 마을이다. 네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너무 외져 위험한 곳이라 하여 이주시켰다고 한다. 사장을 射場으로 보아 신라 화랑들이 활을 쏘고 훈련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전국에 사장골이라는 골짜기가 적지 않은데, 활터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는 지역도 있지만 대체로는 사장나무(당산나무, 마을 앞 둥구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한다.

 

 

이제 촘촘이 놓여진 초록 빛 물결의 대지를 걷다보니 - 앞에 무이산이 보인다.

하지만 올라보니 무이산 갈림봉이다.

 

무이산 정상이다. - 조망이 너무 좋다     사진 : 바다사랑님

 

 

무이산 삼거리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서진으로 한참을 내려오니 안성 음성 고속도로 금광3터널이 지나는 만디고개이다.

고속도로가 지나는 옆에 만디마을이 있다.(충북 진천군 광혜원면 죽현리)

 

여기에됴 어김없이 돌무덤이 정성스럽게 쌇여 있고

 

앞길을 재촉하니

 

고라니봉이다 - 고라니가 좋아하는 약초가 있나???

 

녹음이 완전이 우거진 오솔길을 지나

 

가파른 길을 따르다

 

비교적 넓은 길을 걷다 보니

 

이름이 아름다운 玉井峴이다

 

경기도와 충청북도를 가르는 도계에 놓인 고개다.387번 지방도가 지나며, 해발 390m의 높이로, 행정지명으로 동쪽은 충북 진천 이월면 신계리, 서쪽은 경기도 안성 금광면 옥정리가 된다. 

고개를 넘으면 처음 만나는 마을이 옥정리이기 때문인데, 반면 옥정리 사람들은 이 고개를 이월고개라고 한다.

 

 

 

과거 진천쪽 장꾼들이 주막에서 쉬어갈 때 우물물의 맛이 좋다고 해서 '옥쟁이'라 불렀다. 다시 '옥장이'라 했다가 지금은 옥정(玉井)으로 되었다. 하지만 부근에 우물은 없다. 

안성시 금광면 옥정리는 조금 특징있는 마을이었다. 진천에서 출발한 소가 옥장고개를 넘으면 날이 저무는데, 이때 만나는 마을이 옥정마을이다. 작은 마을인데도 지친 소를 먹이고 재우기 위한 마방(馬房)이 세 곳이나 있었다 한다. 소를 먹이는 곳이라고 하여 ‘소마방’이라고도 불렀다.

 

 

 

이제 콘크리트 길을 조금 진행하다

 

 

바로 능선은 시작되고

 

옥정산이라 쓰여진 삼각점봉(410)을 만나고

 

참으로 아름다운 길을 따라

 

이렇게 휴식도 취해보고

 

송전탑도 지나고

 

양옆으로 우거진 소나무 숲을 지나니 - 이제는 정말 보기 힘든 장관이다

 

서어나무 같은 나무들이 집단 서식지를 지나고

 

헬기봉을 보면서 걷다보니, 경치가 너무도 아름답다

 

사방의 조망이 가능한 470.8봉 헬기장(넓은 나무평판테크)이다

 

지나온 능선이 한눈에 보이고      사진 : 바다사랑님

 

 

무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도 보이고

 

이제 북으로 마루금은 이어지고

 

안성시내도 한번 당겨보고

 

삼거리를 만나 좌로 이어지고

 

힘겹게 오르지만 나뭇잎에서 솟아나는 향기에 그래도 힘을 내어보고

 

좌측으로 성대저수지도 보이고

 

소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걷다보니

 

장고개이다

 

진천백곡면 성대리에서 금광면 상중리로 넘어 가는 고개인데, 고개가 너무 길어 長고개인가? 장보러 가는 고개인가?

굳이 남의 장까지 그 먼 고개를 너머 갔을 리는 없고?????

 

 

 

여기에도 미완의 돌탑이 있고

돌탑은 자연신에게 행운을 비는 샤머니즘 풍습이 한민족 본성에 내재된 가치로 돌탑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기를 받기 위해 천상을 향해 쌓아올린 탑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자연신에게 행운을 비는 의미로 보기도 하고....

이 모든 의미와 해석이 그 산의 주인인 산신과 직, 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마음대로 뻗어 자란 소나무들의 무질서 같은 모습에서 오히려 더 정감이 느껴진다.

 

 

 

35번 철탑을 지나니  -  잠시 휴식도 취해보고

 

연안이씨 묘를 지나면

 

중앙 골프장 부대시설로 가는 시멘트 임도를 만나고

 

조금 진행하면 다시 계단 오름길이 우리를 반기고

 

헬기장 정상

 

할미꽃도 만나보고

 

 

圖根點도 만나보고

(지적측량을 위한 기준점으로, 이미 설치된 삼각점만으로는 세부측량시행시 그 수량이 불충분하여 새로히 측설하는 보조기준점이다)

 

골프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옆에서 어서 내려오라 유혹하지만 - 아직 우린 갈길이 멀다 ^^^^^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그냥 지나칠 수 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우리의 목적지인 313번 지방도가 보이기 시작하고

 

마지막이기를 바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마지막 도로로 내려오는 길을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

 사진 : 바다사랑님

 

이티제이다 - 다음 구간에 이어가야 할 무루금도 보인다.

배티재

370m의  4차선 포장도로로 안성에서 진천-음성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요처로서 오늘에는 313번 지방도로가 되어 있다.

배티재는 고개 마루 동네에 돌배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서 이런 지명을 얻었다 하기도 하고(梨峙),

조선 영조 때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면서 도망을 치다가 오명황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전하였던 고개라는 데에서 <패티(敗峙)>라 불리다가 바뀌었다 하기도 한다.

 

 

 

 

진천군 양백리 노고산 아래에 위치한 배티성지는 많은 순교자를 내었던 곳이고 최양업 신부의 옛 성당 터와 14인의 무명 순교자 묘가 있다. 금북정맥에서 처음 만나는 천주교 성지이며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안성의 고삼저수지 위쪽의 미리내 성지와 함께 천주교인이 아니더라도 찾아보아야만 하는 곳이다.

 

 

 

 

 

 

 

줄곧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했던 골프장으로 이어지는 도로

처음 이 도로를 만나는 지점이 거의 끝 부분이라 착각했는데, 거의 한시간을 더 걸어 왔으니....

 

우리는 다시 원점 회귀하여 칠장사에 도착하여, 밤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탱이하트님의 자동차를 보니 반갑기만 한데....

 

비록 소수 인원으로 출발한 금북 정맥이지만, 안성맞춤과 안성유기의 고장 안성땅에서 맞이한 정맥산행이었기에 더욱 알차고 즐거웠던 산행이 되었다.

앞으로 이어지는 정맥길에서 만나는 서해바다에서 들려오는 역사의 향기는 더욱 우리의 곁으로 한발짝 더욱 다가오리라 생각된다.

다른 정맥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여정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이렇게 금북정맥1차의 여행도 막을 내린다.

 

바다사랑 대장님, 탱이하트 총무님, 상황봉님,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긴 글 읽어 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초보산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