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여행이야기 - 도선굴(道詵窟) 구미 금오산
일시 : 2015년 02월 07일 (토)
인원 : 3450온누리 산악회 산우님들과 함께
어딜 : 도선굴
금오산 주차장
주차장 우측에 있는 야은 길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채미정을 지나
케이블카도 설치되어 있다
운흥정 이정표가 있는 해운사가 나타나고
대웅전 뒤로 도선굴이 보인다
절을 나오면 바로 도선굴 이정목
겨우 한사람 빠져나갈 길이 나오는데 쇠난간 하나에 의지해 깎아지른 벼랑을 돌아가는 길이 바로 도선굴로 가는 길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낙석이 우두두 떨어져내릴 것 같은 벼랑 옆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도선굴로 들어가는 길
실크로드를 연상시키는 도선굴로 가는 길
옛날에는 안전시설이 있을리 없을 터이고 길재는 이 위험한 길을 넘나들며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고려 쇠망의 기운을 몰랐을 리 없는 야은 길재는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고향으로 내려왔다
아직 이성계가 임금자리를 차지하기 이전이니 그래도 한줄기 희망은 잡고 있었을까?
도선굴 입구가 보이고
그러나 그의 스승 포은 정몽주의 선죽교에서의 철퇴에 맞아 죽은 비보는 다시는 돌이 킬 수 없는 길이 되고 말았다
계속되는 국가의 부름에도 두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뜻을 끝까지 남기며 이 곳에서 후학들을 길려냈던 것이다
후학이나 길러내면서 이 곳 도선굴에 앉아 참회하며 보내야만 했을 야은 길재의 무거운 발검음이 느꺼지기도 하지만
참으로 만나기 힘든 인재 하나를 속세에 남기고 만 아쉬움도 살아 있는 것이다
입구
지금 생각하면 인재를 만들기는 쉬어도 인재를 옥석으로 써먹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뜻이 깊고 사려깊은 이런 분들이 계속 조선에서도 많은 역활을 했으면 어떨까?
그런면에서 야은 길재는 자손들에게는 조선에 충성해야 한다는 현실을 인정했다는 점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듯 보인다
자신이 고려에 충성했듯 자손은 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옷으로...
내부에는 이렇게 촛불을 켜 놓아 식지 않은 야은 길재의 체감을 조금을 느끼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됐다
도선굴
'기도발'이 좋다고 소문 나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이 자연동굴엔 길재가 머물렀던 곳이다
길이가 7.2m, 높이 4.5m, 너비 4.8m 가량 되는 석굴을 도선굴(道詵窟)이라 부르는 것은 풍수지리의 대가인 신라 도선대사가 이 곳에서 득도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의 법호가 '길 도(道)'에 '많을 선(詵)'이 되었고, 한많은 길재 또한 이 곳에서 세상의 바른 길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지금도 누군가 늘 춧불을 켜놓아 어둠을 몰아내주고 있어 대리만족할 수 있는 곳이다.
굴에서 바라보면 가까이 해운사가 보이고 구미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야은 길재가 일어나면 이런 모습으로 선산땅을 향해 이렇게 금오산의 정기를 받았을까?
산에 들어가면 산을 볼 수 없고 숲에 들어가면 나무를 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전망이 좋은 바위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발을 옮겨 탁 트인 전망을 조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 도선굴에 은거하며 계절따라 바뀌었을 금오산의 풍경이 굴밖에서 손짓할 때마다
이제는 자신의 뜻을 펼 수 없기에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심정으로 바라 본 마음속 풍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해안사와 구미땅이 보인다
자신은 두임금을 섬길 수 없어 이 도선굴에 들어 캄캄한 어둠을 촛불 하나에 의지해
고려의 마지막을 지키지도 또 기울어 가는 모습을 보고도 그저 바라만 보아야만 했을 자신을 탓하며
조선 인재의 절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절반은 선산에서 났다고 했던 금오산의 정기마저
분출하지 못하고 삼키며 후학을 위한 교육에 힘쓸 수 밖에 없는 심정 우리가 어찌 감히 해아릴 수 있을까?
사진을 당겨보면 낙동강도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렇게 굴밖으로 나서면 전혀 다른 세상이 우릴 기다리고 있는데 하는 아쉬움
이렇게 멀리 도리사를 바라보며 두 팔 높이 하늘로 치켜들어 처다보면 금오산의 정기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전달되고
도리사에서 아도화상이 우연이 창공을 응시하다 문득 보았다던 금빛까마귀의 비상
내가 지금 그 자리에 이렇게 서 있는 것이다. 역사는 역사일 뿐 우린 다시 일상속으로...
다시 되돌아 나오면서 오형돌탑이 있는 봉이 보인다
바로 옆에 대혜폭포가 보인다
이곳은 길재가 머물렀다는 도선굴이 위에 있으니 이곳에 자주 들렸을 것이고
폭포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눈을 지긋이 감고 들으면 그저 물소리가 아니고
큰 뜻을 품은 사나이의 가슴에 나라잃은 슬픔의 소리로 남았을까?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며 하늘로 올라갈 준비를 했듯이
야은 길재도 목욕재계하며 망국의 한을 참회하며 참아냈을 것 같은 곳
입추가 지나면서 야은 길재의 눈물처럼 겨우내 얼었던 폭포도 슬픔을 나타내는 듯 녹아 내리고 있다
길재가 나라를 잃고 이 도선굴에 들어 처음 얼어붙은 대혜폭포의 얼음조각같은 모습을 보면서
어떤 회환에 들었을까?
엄동설환같은 추위에는 단단한 모습으로 천년만년 할 것 같았던 고려의 모습이 그리웠을 것이고
또 2월이 되어 조금씩 흘러 내리는 폭포의 눈물을 보면서 함께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금오산에 함께 하시는 산우님들은 과연 어떤 상상을 하면서 바라 보았는지?
이렇게 야은 길재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들러보고
금오산에서의 하루를 정리 한다
초보산꾼
'답사기 > 서울 외 지방 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보산꾼 여행이야기 - 화본마을 (군위 조림산 연계) (15년) (0) | 2023.01.12 |
---|---|
초보산꾼 여행이야기 - 간이역 화본역 : 눈물포겐 기다림 속의 추억 (15년) (0) | 2023.01.12 |
초보산꾼 여행이야기 - 채미정(菜薇亭) : 금오산에서 야은 길재 (冶隱 吉再)를 만나다 1 (14년) (2) | 2023.01.12 |
초보산꾼 여행 이야기 : 소쇄원 瀟灑園 (14년) (0) | 2023.01.12 |
장수 장수리 의암송 (長水 長水里 義巖松) 과 논개와 장수의 인연 (13년) (0) | 2023.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