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여행이야기 :  직지사直指寺 (황악산 (黃岳山) 1111.4)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언제 : 계사년 시샘달 사흘 해날

 

누구랑 : 100대 명산 산우님들 26명

 

어딜 :    직지사  (3450 온누리 산악회 백대명산 황악산 산행 중)

 

 

직지사 直指寺    자료 : 직지사 홈피

소백산(小白)의 준령(竣嶺)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그 서쪽 추풍령(秋風嶺)에서 잠시 머물러 관문(關門)을 이루었고, 다시 서남쪽으로 웅장(雄壯)한 산세(山勢)를 유지하며 달려와 힘차게 솟아오른 황악산(黃岳山) 동남쪽 산자수명(山紫水明) 한 곳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直指寺)가 자리해 있다.본사(本寺)의 초창(草創)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 아도 화상(阿道和尙)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그 사명(寺名)을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창건주 아도 화상이 일선군(一善郡, 善山)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했다는 전설(傳說)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이는 모두 창건설화와 연관된 직지(直指)의 미화(美化)된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지만, 실은 불교 본연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상징하는 의미로 풀이 될 수 있다. 즉 창건 설화의 직지(直指)와 선가(禪家)의 직지(直指)가 둘이 아니라고 볼 때, 이는 곧 불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또한 사명 (寺名)에 불교의 본지(本旨)를 이처럼 극명(克明)하게 나타내는 사찰도 흔치 않으리라 본다. 절의 위치가 산곡(山谷)이면서도 높지 아니하고,야지(野地)인듯 하면서도 산사(山寺)의 풍취(風趣) 가 항상 흘러 넘쳐서 4계절 내내 도량을 참배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자료 :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6376&yy=2012

조선 태조의 둘째아들 정종의 태실(胎室)을 모셨던 직지사는 왕가의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답게 최고의 길지(吉地)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정종의 태실은 풍수에서 최고의 길지로 알려진, 뱀이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형상의 머리 부분 혈(蛇頭血)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한다.

동생 이방원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오른 정종은 목숨을 부지하고자 왕위를 태종에게 물려주고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19년 동안 영위하다가 63세로 일기를 마쳤다. 사두혈에 태실을 옮긴 덕분인지 몰라도 정종은 정안왕후 김씨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지만, 나머지 7명의 부인 사이에 15남 8녀를 두었다. 냉엄하고 비정한 권력 다툼의 세계에서 한발 벗어나 상왕생활을 19년간이나 누리고, 또 23명의 자식까지 두며 영화를 누렸으니..

 

 

 

 

황악산에서 내려오면

 

부도전을 만나고

 

직지사 전각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茶室이 있는 전각을 지나면

 

安養樓를 만난다

극락전은 대웅전과 비로전의 영역에서 떨어져 있는데 직지사를 크게 양분하는 능여계곡 건너편에 위치하여 서방정토세계를

연상시키고 있고 到彼岸橋인 이 다리를 지나면 앞에 보이는 전각인 안양루가 나오고 이 누각을 지나면 극락전에 이르게 된다는데

출입금지이고..  안양루는 극락전을 호위하는 역활을 하는 前衛 누각이라고 한다.

 

 

극락전과 대웅전을 가르고 있는 내원천의 능여계곡

능여계곡에는 그 옛날 능여 대사(能如大師)가 황악산 계곡의 원천(源泉)을 찾았다는 멱원대(覓源臺)를 비롯하여

많은 대(臺)와 소(沼)가 있고, 두 곳의 폭포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능여천(能如泉)과 법수천(法水泉) 등의 약수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대웅전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으로 대웅이란 말의 뜻은 인도의 옛말 마하비라를 한역한 것으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컬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즉 석가모니부처님은 일반인이 가질 수 없는 큰 힘이 있어 마군의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부처님이 되었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전각(殿閣)의 사전적 의미는 임금이나 왕족이 사는 큰 건물, 즉 궁궐을 뜻한다. 사찰에서는 전각에 부처를 모신다.

궁궐이나 사찰이나 전각들이 이마를 맞대고 늘어선 모습은 닮은 점이 많다.

전각인 직지사 대웅전은 경북유형문화재 제 215호였는데, 2008년 9월 3일 보물 제1576호로 지정되었다.

 

 

 

비로전

고려 태조때 능여 조사에 의해 처음 세워진 비로전은 천불상을 모시고 있으므로 천불전이라고 한다.

임진왜란떄 병화를 모면한 3동의 건물중 하나로 근년에 개수하였다

 

 

 

비로전 앞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측백나무가 있다.

 

 

천불상

비로전 내의 천불상은 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모습이 제각기다르다.

불상의 재료는 경주 특산인 옥돌을 사용하였는데 ,그 모습은 사방의 모든 부처님을 모셔놓은 듯 장엄하다

천불상 중 독특하게 벌거벗은 동자 모습을 한 불상으로 법당에 들어가 첫눈에 이 동자상을 보면 옥동자를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비로전 앞 삼층석탑

 

 

 

응진전

응진전은 부처님의 제자들을 모신 곳으로 응진이란 ‘존경받을 만하다’, ‘공양받을 만하다’라는 의미이다.

또한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하여

석가모니불의 직제자 가운데 정법을 지키기로 맹세한 16나한이나 경전결집에 참여했던 500나한을 모시기도 한다고..

나한은 부처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미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이므로 초자연적인 신통력과 더불어 독특한 표정과

자유스러운 자세를 갖고 있고 미래불인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중생들을 제도하라는 부처님의 수기를 받은 분들이라

민간신앙에는 무수한 설화들이 등장하며 서민들의 기복신앙으로 확고히 자리잡고 있다.

500나한을 모신 곳으로 유명한 곳은 금산사 나한전, 옥천사 나한전, 기림사 오백나한전, 송광사 나한전 등이다.

 

 

관음전

관음전은 일명 원통전이라고도 하며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이다. 협시로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후불탱화로 나타나며 대승불교가 낳은 수많은 보살중에서 관세음보살 만큼 대중의 신앙대상이 된 보살도 드물다.

모든 중생의 애환을 대자대비로 거두어 주는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근기에 맞게 32응신으로 화현하여 중생을 구제한다.

 

 

약사전

약사전은 동방유리광정토를 표출시킨 법당으로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다.

아미타신앙이 사후의 신앙을 기본으로 하는 반면에 약사여래신앙은 현실적 이익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약사여래는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하여 줄 뿐만 아니라 죽음을 물리치는 힘을 갖고 있는 부처로 대중의 신앙대상이 되었다.

왼손에는 약사여래의 특징적 모습인 약합을 들고 있다.

 

 

황악루 종각

황악루는 비로전 영역으로 들어가는 누각이다.

대웅전 영역으로 들어가는 곳에 만세루가 있는 것처럼 직지사의 가람은 주요 전각 앞에 누각을 설치하고 있다.

원래 대웅전 앞에 있었던 것을 비로전 앞으로 이전한 것이라고 한다. 1713년에 주조된 범종이 걸려 있다.

 

 

명부전

임란 때 불에 타 현종 9년(1668년)에 팔상전으로 중건됐다가 명부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달았다.

명부는 도교에서 쓰이는 말이다. 시왕(十王)은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판결한다고 하는 10명의 지옥 왕으로 각각 하나의 지옥을 다스린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시왕 앞에 가서 생전에 지은 선악을 심판받는다.

사람이 죽은 뒤 명부전에서 제를 지내면 사후의 길을 편안하게 극락왕생한다고 말한다.

자료 :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1338&yy=2012

 

 

 

사명각

박 전 대통령이 쓴 사명각 편액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씨가 쓰여 있다.

대부분 전각들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여진 것과는 정반대다.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 가로형 현판을 써 보냈다고 한다.

 

 

 

관음정에서 본 비로전

 

 

성좌각

성좌각은 쉽게 볼 수 없는 편액인데 三聖閣과 같은 역활을 한다고 한다. 안에 獨聖과 산신인 七星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탱화에 관심있는 분은 http://blog.naver.com/mallarmel?Redirect=Log&logNo=10097361612 참조

 

 

 

감사전

 

 

황악산이 보이는 경내

 

 

동서 삼층석탑

원래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웅창(熊倉)마을 북쪽 금강변 도천사지(道川寺址)로 알려진 곳에 있던 3기의 석탑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인데 이들 3기 가운데 1기는 현재 직지사 비로전(毘盧殿) 앞에 건립되어 있다. 석탑의 형태는 3기가 모두 동일하다

 

 

만세루

강당은 불교의 교설을 강의하는 곳으로 조선시대의 선종에서는 법당이라 불렸다. 신라 때까지는 모든 절에 강당이 반드시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법당 앞에 있는 만세루 또는 보제루 등의 누각(樓閣)이 강당 역할을 대신하고 있으며,

모든 설법은 원칙적으로 이 곳에서 행해졌다. 그래서 '설법전(說法殿)'이라 부르기도 한다.

 

 

성보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청풍안

 

 

청풍안 옆에 있는 조선시대 직지사 목조수조와 쌍계사터 동종

동종은 조선시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쌍계사터에 있던 것이라 하는데 어느 쌍계사인지는 확실치 않다.

 

목조수조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대형목조 水槽이다.큰 괴목을 잘라 속을 파서 만들어 낸 것으로 석조 수조 대신 사용한 것이다.

 

 

사천왕문을 나오며 바라본 황악산

 

 

사천왕문

 

 

 

천왕문은 부처님과 불법과 스님과 불자들을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건물이다. 외부의 악한 기운이나 침입자로부터

사찰을 보호하여 청정도량으로 만들기 위한 것으로 사천왕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서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용(龍), 지국천왕(持國天王)은 검(劍),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비파(琵琶), 광목천왕(廣目天王)은 탑(塔)을 들고 있다.

사천왕을 사대천왕(四大天王)·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이라고도 한다. 욕계육천(欲界六天)의 최하위를 차지한다.

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섬기며, 불법(佛法)뿐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금강문

천왕문의 좌우측 대문에는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져 있습니다.

금강역사는 코끼리보다 수십배 이상의 엄청난 힘을 소유한 천하장사로, 이 강력한 힘으로 사찰을 수호하는 기능을 맞고 있다.

그래서 금강문이라는 별도의 문을 갖춘 사찰도 있는데, 이 곳에는 금강역사가 조각이나 그림으로 조성되어 있다.

좌우측에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이 모셔져 있다.

 

 

큰 광명을 상징하기 위해 1990년에 세웠다는 대양문

 

 

일주문

黃岳山 直指寺' 현판 글씨는 글씨로 인해 벼슬을 제수받았던, 정조 때 최고의 명필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의 필체로 유명하다.

두 기둥 중 왼쪽 기둥은 1천 년 묵은 싸리나무, 오른쪽은 1천 년 묵은 칡으로 만들어 세웠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보수를 위해 해체한 기둥 목재의 DNA조사를 한 결과, 알려진 것과 달리 싸리나무도 칡나무도 아닌 느티나무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 탄소연대측정법을 통해 살펴본 바는 숙종(1661~1720) 때인 조선 후기 건물로 확인됐다.

직지사 장명 스님은 "일주문의 건물연대가 전해진 것과 다르게 나와 아쉬움은 있지만 사실을 바로잡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며

"일주문 건축양식을 볼 때 조선 후기 때 건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자료 :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4595&yy=2012

 

 

직지사 안내도

직지사는 <<가람의 구조>>가 선종(禪宗) 사찰 형태를 보이는 대표적인 절이라고 한다. 불국사와는 크게 대비된다.

교종의 대표적인 사찰인 불국사는 백운교, 청운교를 올라 자하문을 지나야만 불국토 세계로 들어설 수 있다.

얕고 깊은 깨달음을 여러 차례 거쳐야 하는 이치다. 하지만 직지사는 일주문만 들어서면 바로 가람의 모든 전각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른바 선종의 '돈오돈수'(頓悟頓修), 깨치는 순간 이미 부처가 된 것을 상징적으로 잘 조화롭게 조성한 가람인 것이다.

 

 

산사 안내도

 

 

일주문 입구 풍경

일주문(一柱門)은 통상 사찰입구에 들어서는 첫 번째 문(門)이다. 문의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는 데서 유래한 명칭으로, 

한 곳으로 마음을 모으는 일심(一心)을 뜻하는 일주문을 사찰의 입구에 세운 것은 신성한 곳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세속의 번뇌를 깨끗이 씻어내고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向)하라는 뜻에서이다.

부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불도를 닦는 사람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와 진리를 생각하면서 일주문을 지나야 한다고 한다.

 

 

매표소가 있는 山門

 

사찰은 거룩한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청정하고도 장엄한 곳이며 스님들이 머물면서 수행하는 터전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닦고 올바른 삶을 다짐하는 곳도 여기며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전법의 주요 공간도 이곳이다.
사찰의 중심인 큰 법당에 들어서려면 산문(山門), 일주문(一柱門), 금강문(金剛門), 천왕문(天王文), 해탈문(解脫門)을 지나야 하는데,

이러한 문들을 일컬어 산문(山門)이라 한다. 하지만, 일주문 앞에 별도의 산문(山門)을 통상 세우기도 한다.

산문은 승가과 속가의 경계이며, 청정한 수행공간인 사찰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직지사 등 대찰에 가보면 일주문 가기전에 사찰 초입에 큰 문이 있는데, 이것이 산문이다.

이 산문이나 일주문을 들어서면 사찰 초입에 통상 스님들의 부도밭과 사찰의 유래를 적은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무궁화 공원

무궁화공원은 연접한 직지사, 황악산, 직지문화공원과 연계한 관광 자원화를 위해 김천시가 2000년 12월부터 2001년 4월까지

총 사업비 8억 원을 투입하여 조성한 공원이다. 무궁화를 특히 많이 식재한 녹지 공간을 조성함으로써

나라꽃인 무궁화의 아름다움과 조경목으로의 우수성을 자연스럽게 홍보하고 있다

 

 

 

100대 명산인 황악산과 함께한 직지사

많은 것을 배운 하루가 되었다.

비록 날씨가 추워 모든 전각들이 문을 닫아 놓아

불교 신자가 아닌 내가 직접 문을 열어 볼 수 가 없어 내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어 안타깝지만

여러 자료들에서 많은 새로운 사실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초보산꾼  

 

 

직지사와 권력자들의 인연    
자료 :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1339&yy=2012

 

직지사는 신라, 고려, 조선 그리고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왕실 등 권력자들과 밀접한 인연을 갖고 있다. 이는 사찰의 흥망성쇠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먼저 직지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은 신라 눌지왕 성국 공주의 병을 고쳐준 인연으로 포교를 공인받았다. 이로써 도리사와 함께 직지사를 세울 수 있었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경순왕이 고려`후백제의 틈바구니에서 쇠잔해져 가는 국운을 다시 일으키고자 금자대장경을 만들어 이곳에 보관한 것도 신라왕실과 직지사의 특수한 관계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직지사의 사운을 결정하는 역사적인 사건은 능여대사와 왕건의 인연이다. 927년 견훤에게 대패한 왕건이 직지사의 도움으로 퇴로를 열어 개경으로 무사히 귀환한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뒤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토지 1천 결을 하사한다. 이후 고려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은 대찰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전국의 사찰이 극도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직지사는 2대 정종의 어태 대웅전 뒷산 북봉에 안치함으로써 태실 수호사찰로 배불(排佛)의 칼날에서 비켜나 사세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임란 중에 대부분의 전각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선조의 신임을 받았던 호국선사 사명당이 출가한 사찰이라는 이유로 왕실의 지원 속에 신속한 중창이 이루어진다.

직지사와 권력자의 특별한 관계는 근`현대에 들어서도 이어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구미 출신으로 어릴 때 이곳을 자주 찾은 인연으로 재임 기간 중 수차례 이곳을 방문했다. 이런 인연으로 크고 작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녹원 스님과의 각별한 친분은 널리 알려져 있다. 명부전에 박 전 대통령 내외와 양친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사명각 현판도 박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아울러 직지사 최대 규모의 건물인 만덕전(萬德殿)도 불교신도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 내외의 관심 속에 탄생된 건물로 알려져 있다. 편액은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의 법명 만덕(萬德)을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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