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100대 명산 - 금오산(金烏山·977m)   구미시

 

 

일시 : 을미년(15년) 시샘달 이레 흙날         

 

인원 : 조교 대장님과100대명산 산우님들

 

어딜 : 금오산주차장 ~ 대혜폭포 ~ 금오산정상 ~ 법성사 ~ 금오산주차장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2296 에 있습니다

 

 

 

잎샘추위와 꽃샘추위가 있는 겨울의 마지막 달 2월, 겨울이 마지막 힘을 다하는 시샘달

'꽃샘잎샘에 설늙은이는 얼어 죽는다'는 옛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게 계절은 소리없이 흐르고 있고 

젊지도 아니하고, 아주 늙지도 아니한 조금 늙은 설늙은이의 심정속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삼사월에 꽃과 잎이 피는 것을 시샘하는 추위가 설늙은이 얼어 죽일 정도로 매우 춥게 다가오지만

우린 야은 길재의 숨결이 곳곳에 함께 하고 있는 구미의 진산 금오산으로 여행을 떠나 본다

 

 

 

금오산 등로

 

 

 


3450온누리 산악회 2월 백대명산팀의 금오산 산행이 만차의 기쁨을 안고 구미에 도착하고 - 어떻게 까마귀가 하늘을 향하고 있나요?

 

오랜만에 함께 하신 김희석님의 체조로 금오산 산행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 제자리뛰기도 명품이 있슴을 알게 됐습니다

 

채미정을 가기 위해 주차장 우측으로 나오면 금오산 안내판이 나온다

 

 

모든 산은 절대 혼자 일 수 없고 흐르는 물처럼 서로 어깨동무하며 연결되어 있다

금오산도 백두대간에서 분리되어 나와 우여곡절끝에 어렵게 연결되어 있다.

 

수도지맥과 금오지맥

지도자료 : 지도 상단에 블로그 주소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백두대간 대덕산 못 미쳐 동쪽으로 갈라져 나온 줄기가 수도산을 거쳐 가야산,성산에 이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수도지맥87.93km을 이루며

수도지맥 수도산 1313봉(분기점)에서 북쪽능선으로 시작하여 삼방산과 염속산을 지나면서 동쪽으로 이어지다

염속봉산을 지나면서 다시 북쪽으로 지맥은 이어져 고당산을 지나 금오산성에 접어 들면서

지맥은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백마산을 끝으로 감천으로 떨어지는 실 거리87.93km의 금오지맥은 끝을 맺는다. 

 

 

 

주차장 좌측으로 바로 고려 유신(遺臣)으로 이름 높은 야은 길재 (冶隱 吉再)의 충절을 기린 채미정이 있다

야은 길재 (冶隱 吉再)

1353년(공민왕 2)∼1419년(세종 1).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학자로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경북 선산의 금오산(金烏山) 정기를 타고 태어났다고 해서 금오산인(金烏山人)으로도 불린다

초야에 살 것과 후학을 기르는 것을 실천한 인물로서 우리가 정치와 학자로써 최고봉으로 섬기고 있는 퇴계 선생의 사표가 되었다.

두문동 72인 가운데 이색,정몽주,그리고 권근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제자인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 등은 후일 사림파(士林派)의 원천이 되었다

길재 선생을 제향하고 있는 대표적 서원으로 금산의 청풍서원(淸風書院)이 있다. 그의 처가가 있었던 곳이다

 

채미정은 초보산꾼의 여행이야기 참조 : http://blog.daum.net/kmhcshh/2290

 

 

 

먼저 채미정 입구의 빗돌에 야은 길재가 지은 그 유명한 회고가가  세겨져 있다

  

길가 입구 우측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선비들은 이곳을 지날 때 말에서 내려 예를 올리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이곳에서는 경건함을 잃지 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내가 제일 존경하는 스승이라면 더 무슨 말이 필요하리요

자꾸 교육의 현장에서 스승의 설자리가 없어지는 현실이 그래서 더욱 안타깝게 다가 온다

 

 

경북 기념물 제55호인 채미정 경내로 들어가는 지역의 명필 일산 김성묵의 글씨로 알려진 흥기문(興起門)

 

정자의 배치가 아름답다

 

 

바로 우측으로 국가 명승 52호인 채미정

채미정은 1768년(영조 44)에 지어졌다

'채미'와 '은(隱, 숨어 살다)'은 다른 왕조를 섬기지 않으려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았다는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너희들은 무왕을 섬기지 않는다면서 어찌 주나라 땅에서 나는 고사리는 먹느냐?"고 하자 두 형제는 고사리마저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야은 길재는 정몽주의  제자로, 스승 포은 정몽주, 그리고 목은 이색과 더불어 '여말 삼은(麗末 三隱)'으로 기려지는 인물이다.
길재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 때는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임금자리를 차지하기 이전인 1389년 이었다

스승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철퇴에 맞아죽은 비보를 듣고 세자 이방원의 부름을 단호히 거부하며 금오산 중턱 도선굴에서 지냈다

 

 

구인재

구인재 求仁齋 : 길재선생의 후학들의 강학공간  김성묵 글씨

구인재(求仁齋)란, 공자왈 '백이숙제는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어찌 후회가 있으리오'라는 뜻에서 나온 말인 듯

 

 

여닫이 구조로 되어 있는 옛 선조들의 예지가 빗나는 뒷문을 열면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올 듯하다

 

경모각 입구

 

 

문을 열어 보면 길재의 충절을 기린 숙종이 남긴 어필오언구(御筆五言句)와 야은 초상이 걸려 있다

 

 

 

左司諫 吉再 좌사간 길재

 

歸臥烏山下 귀와오산하   금오산 아래 돌아와 은거하니

淸風比子陵 청풍비자릉   청아한 기풍은 자릉(嚴光의 호)과 비견할 만 하네

聖主成基義 성주성기의   성주께서 아름다음 이루게 하시어

勸人卽義興 권인즉의흥   모든 사람에게 절의를 일으키게 하심일세

 

​돌아와 금오산 아래 누었으니 청렴한 기품은 엄자릉에 비하리라

성주께서 그 미덕을 찬양하심을 후인들에 절의를 칭찬함이다

 

 

 

채미정을 나오면서 500m 정도 이어지는 아름다운 단풍 때문에 한국을 대표하는 가로수길로 선정됐다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따라

 

돌탑 21c 알람판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오름은 시작되고

 

금오동학 암각 각자를 지나고

 

 

금오산성의 시작을 알리는 대혜문이 나오고 - 완산님 작품

 

 

영흥정 안내판이 있는 해운사가 나오고

 

대웅전뒤로 도선굴과 바로 옆에 대혜폭포로 착각할 만큼 얼어 붙어있는 물줄기도 보인다

 

사찰을 나와 조금 오르면 도선굴 오르는 갈림길

 

 

오르는 길 직전 옆에는 대혜폭포가 얼음조각상을 이루고 있다

 

지금이라도 당장 낙석이 우두두 떨어져내릴 것 같은 벼랑 옆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도선굴로 들어가는 길

  

 

실크로드를 연상시키는 도선굴로 가는 길

옛날에는 안전시설이 있을리 없을 터이고 길재는 이 위험한 길을 넘나들며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고려 쇠망의 기운을 몰랐을 리 없는 야은 길재는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고향으로 내려왔다

아직 이성계가 임금자리를 차지하기 이전이니 그래도 한줄기 희망은 잡고 있었을까?

 

 

도선굴 입구가 보이고

 

 

그러나 그의 스승 포은 정몽주의 선죽교에서의 철퇴에 맞아 죽은 비보는 다시는 돌이 킬 수 없는 길이 되고 말았다

계속되는 국가의 부름에도 두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뜻을 끝까지 남기며 이 곳에서 후학들을 길려냈던 것이다

후학이나 길러내면서 이 곳 도선굴에 앉아 참회하며 보내야만 했을 야은 길재의 무거운 발검음이 느꺼지기도 하지만

참으로 만나기 힘든 인재 하나를 속세에 남기고 만 아쉬움도 살아 있는 것이다

 

 

입구

 

지금 생각하면 인재를 만들기는 쉬어도 인재를 옥석으로 써먹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뜻이 깊고 사려깊은 이런 분들이 계속 조선에서도 많은 역활을 했으면 어떨까?

그런면에서 야은 길재는 자손들에게는 조선에 충성해야 한다는 현실을 인정했다는 점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듯 보인다

자신이 고려에 충성했듯 자손은 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옷으로...

 

 

내부에는 이렇게 촛불을 켜 놓아 식지 않은 야은 길재의 체감을 조금은 느끼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됐다

도선굴

 

도선굴의 더 자세한 내용은 초보산꾼 여행이야기 http://blog.daum.net/kmhcshh/2291 참조

 

 

도선굴에서 나와 보면 해안사와 선산(구미)땅이 보인다

 

산에 들어가면 산을 볼 수 없고 숲에 들어가면 나무를 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전망이 좋은 바위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발을 옮겨 탁 트인 전망을 조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 도선굴에 은거하며 계절따라 바뀌었을 금오산의 풍경이 굴밖에서 손짓할 때마다

이제는 자신의 뜻을 펼 수 없기에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심정으로 바라 본 마음속 풍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사진을 당겨보면 낙동강도 보인다

 

자신은 두임금을 섬길 수 없어 이 도선굴에 들어 캄캄한 어둠을 촛불 하나에 의지해

고려의 마지막을 지키지도 또 기울어 가는 모습을 보고도 그저 바라만 보아야만 했을 자신을 탓하며

조선 인재의 절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절반은 선산에서 났다고 했던 금오산의 정기마저

분출하지 못하고 삼키며 후학을 위한 교육에 힘쓸 수 밖에 없는 심정 우리가 어찌 감히 해아릴 수 있을까?

 

 

야은 길재가 일어나면 이런 모습으로 선산땅을 향해 포효하며 금오산의 정기를 받았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렇게 굴밖으로 나서면 전혀 다른 세상이 우릴 기다리고 있는데 하는 아쉬움

이렇게 멀리 도리사를 바라보며 두 팔 높이 하늘로 치켜들어 처다보면 금오산의 정기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전달되고

도리사에서 아도화상이 우연이 창공을 응시하다 문득 보았다던 금빛까마귀의 비상

내가 지금 그 자리에 이렇게 서 있는 것이다. 역사는 역사일 뿐 우린 다시 일상속으로...

 

 

도선굴을 나오면 대혜폭포의 카페지기님과 운영총무님 : 폭포처럼 산우님들의  큰마음이 되었으면 합니다 -완산님 작품

대혜폭포 (명금(鳴金)폭포)  해발 400m

1595년경 임진왜란 당시 만들어진 아홉 개의 우물[九井]과 일곱 개의 못[七澤]이 있어  거기서 비롯된 큰 계곡을 대혜계곡이라 하였고

27m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대혜계곡에 있어 대혜폭포라 했다고 하는데

또한 여기에서 떨어진 물이 구미시민들은 물론 구미지방사람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으니 혜택을 많아 받았다고 해서 그렇다고도 하고

鳴金瀑布, 이 심금을 울릴 것 같은 싯귀에나 어울릴 듯한 이름을 얻을 정도로 소리는 금오산을 울릴 정도로 크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입추가 지나면서 야은 길재의 눈물처럼 겨우내 얼었던 폭포도 슬픔을 나타내는 듯 녹아 내리고 있다

 

 

이 폭포는 길재가 머물렀다는 도선굴이 바로 위에 있으니 이곳에 자주 들렸을 것이고

폭포에서 떨어지는 소리를 눈을 지긋이 감고 들으면서 사납게 쏟아지는 폭포수만큼이나 세상풍파를 담아내는

그저 물소리가 아니고 큰 뜻을 품은 사나이의 가슴에 나라잃은 슬픔의 소리로 남았을까?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며 하늘로 올라갈 준비를 했듯이

야은 길재도 목욕재계하며 망국의 한을 참회하며 참아냈을 것 같은 인고의 세월을 얼어붙은 폭포수가 묵언으로 전하고 있다 

 

 

여름이면 폭포수 뒤에서 타는 가슴을 달랬을 것이고 겨울이면 얼어 붙은 폭포와 동질감을 느끼고 지금은 이런 가슴아픈 소리로 들렸을까?

 

길재가 나라를 잃고 이 도선굴에 들어 처음 얼어붙은 대혜폭포의 얼음조각같은 모습을 보면서

어떤 회환에 들었을까?

엄동설환같은 추위에는 단단한 모습으로 얼어붙은 폭포수를 보면서 천년만년 할 것 같았던 고려의 모습이 그리웠을 것이고

또 2월이 되어 조금씩 흘러 내리는 폭포의 눈물을 보면서 어쩔수 없는 세월을 탄하며 함께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금오산에 함께 하시는 산우님들은 과연 어떤 상상을 하면서 바라 보았는지?

 

 

이제 고려가 서서히 멸망해 갔듯이 이 폭포수의 조각상도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야은의 한처럼

 

 

열심히 계단을 오르면 할딱고개

 

 

할딱고개를 넘으면서 금오산 정상인 달이 걸려있는 모습이라는 뜻의 현월봉에 달대신 해가 걸려 있다

 

금오저수지와 구미시내

금오지

구미의 명소가 된 2010년 만들어진 올레길로, 길 이름은 시민 공모로 정했다고 하고  '구미로 올래'라는 뜻이다고 한다

2.7km 거리중 일부가 나무 데크로 되어 있어 물 위를 걷는 것 같은 금오산 자락의 산중호수인 '금오지'를 한바퀴 도는 산책길

산책로를 따라 수변식물원, 생태습지원도 조성되어 있어 자연생태환경 체험로 역할도 하고 있다.

 

 

 

할딱고개이니 잠시 쉬어봐야지 - 완산대장님 작품

 

 

금오산은 급경사인 만큼 여기도 폭포와 같은 얼음조각상을 이루고 있었다

 

 

 

마애석불, 오형돌탑 갈림길을 지나면 철탑에서 식후경

 

 

식후경후 해발 800m 지점의 평평한 분지(盆地)에 1970년대까지 이곳에 마을이 있었다는 성안 갈림길을 지나

 

 

고려시대 성터가 있었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4차례에 걸쳐 수축(修築)했다는 성곽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현월봉 직전 헬기장 갈림길 - 직진이 현월봉

 

성안마을, 칼다봉으로 진행하는 헬기장에서 본 칼다봉

 

금오산 정상인 현월봉

 

금오산(金烏山·977m)은 백대명산 순위 64위... 영남8경에 들어가는 보봉(普峰), 야은 길재의 흔적이 그대로남아 있는 금오산

구미의 주산으로 경북 구미시와 김천시, 칠곡군에 걸쳐 있는 도립공원

달이 걸린다는 뜻의 금오산 정상 현월봉(懸月峯)이 국제적인 문제아 미군기지가 철거되면서 시민품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금오산은 정상 일대가 분지를 이루고 이를 칼날 같은 절벽이 병풍처럼 받치는 특이한 산세로 산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현월봉에서 단체사진 - 완산님 작품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는데 산봉우리가 웅장한 기상이 넘쳐 예로부터

중국의 오악 가운데 하나인 숭산(崇山)에 비해 손색이 없다 해 '남숭산(南嵩山)'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으며,

경치가 아름다워 '소금강(小金剛)'으로도 불리고 있다.

금오산 주봉인 현월봉(懸月峰)과 약사봉(藥師峰), 보봉(普峰)이 구미 시가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금오산 정상이 우리 곁으로

 

 

사람이 하늘을 보고 누워있는 것 같아서 와불산(臥佛山) 또는 거인산(巨人山)이라고도 한다.

붉은 햇빛이 구름과 어울려 금빛 날개가 되고 금오산의 세 봉우리(현월봉, 약사봉, 보봉)이 다리가 돼

금빛까마귀가 비상하며 기우는 모습을 보고 아도화상에 의해 금오산이라 이름이 붙어졌다고 한다

아도(阿道)는 고구려에서 신라로 들어온 승려로 신라 삼국통일의 근본적인 힘과 호국불교문화의 시원이 된 분이다

 

 

우리가 가야할 약사암이 구미시가지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1690~1752)은 자신의 인문 지리서 택리지(擇里志)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구미)에 있다'고 했다.

실제로 구미(선산)는 고래로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야은 길재 선생을 비롯해,

사육신 하위지, 생육신 이맹전, 김숙자, 영남 사림의 종조 김종직등 대단한 분들이 태어나신 곳인 선산(구미) 땅

선산땅을 대표하는 산은 금오산이다. 금오산에는 어떤 정기와 사연이 있기에 이처럼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을까

 

 

금오산 정상에서 본 구미시내 - 조교대장님 고생했습니다. 올 한해 금오산의 정기로 계속 만차의 기쁨을 기원합니다

 

동국제일문을 지나면서 금오산의 백미인 약사암으로 내려오는길

 

깎아지른 절벽 틈에 암자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약사암으로 내려가는 길, 하늘 오름길 내림길이 따로 없구나

 

약사암의 대웅전과 종루가 반쪽만 보여주는 환상적인 풍경속의 가야산 총무님 고생했습니다

 

역시 다시 되돌아 보아도 환상적인 풍경

 

 

암벽에 기대다 보니 장소가 없어서인지 대웅전과 좀 떨어진 암벽에 설치한 종루와 연결된 구름다리가 아찔하게 보인다

 

 

종루 구름다리를 지나 면서 좌측으로 진행되고

 

마애보살 입상 갈림길에서 마애보살이 있는 좌측으로 진행 - 계획했던 법성사 방향은 직진인데 포기하고 원점회기

 

멋진 마애보살인줄 알았던 곳인데...

 

조금 더 진행하면 평면이 아닌 각이 진 암벽에 새긴 마애보살입상

마애보살입상
평지에 우뚝 솟아오른 금오산은 기암절벽이 이어지는 만큼 돌과 바위와 관련한 명소가 여럿이다. 예전부터 잘 알려진 게 마애보살입상이다.

정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보물 제490호 금오산 마애보살입상은 암벽에 5.5m 높이로 새겨져 있다.

특이하게 거의 90도로 꺾이는 암벽의 튀어나온 부분에 조각해 측면에서 보면 절반만 보인다.

 

 

옆 모습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토착신앙의 대상인 바위 신앙과도 관련이 깊은 듯하다.

​일찍이 인간은 거대한 바위 속에 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바위에 치성을 들여왔고

​지금도 바위 곳곳에 무속금지라는 안내판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거대한 바위 앞에 섰을 때 경이로움에 존경심을 갖게 되는 인간의 습성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 ​

영적인 힘의 표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옛 부족들의 고인돌이나 선돌에서도 느낄 수 있다

​삶의 터전을 지키는데 마땅한 수단이 없던 시절에 큰 바위에 기대어 치성을 드려 왔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시대적 산물이겠다

​사찰마다 있는 산신을 모시는 산신각이 가장 대표적인 토속신앙과 불교신앙과의 만남이다

 

초보산꾼 글 중에서 : http://blog.naver.com/kmhcshh/220177373945

 

 

 

요즘 마애보살입상보다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오형돌탑이 보인다 - 완산님 작품

 

 

두 곳에 나뉘어 20기의 돌탑이 서 있고 비스듬한 사면에는 돌로 만든 거북과 한반도 지도도 보인다.

뇌병변 장애를 가진 손자의 건강을 기원하다가 10살떄 죽은 손자를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낙동강을 바라보는 절벽 위에 하나씩 쌓은 것이라고 한다.

만들어진 지 오래되지 않은 이 돌탑군은 금오산과 손자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오형돌탑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못다핀 너를 위해 세월을 묻는다는 글이 할아버지의 가슴에 묻어야만 하는 아픔까지 돌탑에 남아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하늘나라에 간 손주는 지금도 여기에서 할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을 새기면서 금오지와 멀리 보이는 낙동강과 함꼐 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10살 손주를 불치병으로 먼저 하늘 나라로 보내고 할아버지가 손주를 위해 낙동강을 보면서 싾은 오형돌탑이

지금도 맘에 찡하게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지

단지 우리가 너무 행복하기에 모르고 지나가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 돌탑과의 인연속에

일상이 이렇게 더욱 소중함을 느끼며 오늘 하루가 행복하지 않으면 안됨을 느껴본다

 

 

다시 오른 길을 따라 내려와 함께 하지 못한 산우님을 대표해 채화님에게 채미정에서 증명사진을 남긴다

 

전에 우리 산방에서 열심히 활동했다는 산우님의 중국음식점에서 뒷풀이로 하루를 정리한다

 

 

 

선산  남쪽 귀퉁이에서 어느날 갑자기 5.16쿠테타가 준 국내 최대의 내륙공업기지로 탈바꿈했던 구미

개발에 따른 땅의 이동과 함께 환경파괴라는 양면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지금까지 공업단지로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러나 구미의 속살 금오산에 들어 본 모습은 야은 길재와 불교의 흔적들이 말없는 역사를 전하고 있었다

사람이 하늘을 보고 누워있는 모습이라던 금오산의 모습을 아래에서 아무리 보아도 알 듯 모를 듯

금빛까마귀가 비상하며 기우는 모습을 보고 아도화상에 의해 금오산이라 이름이 붙어졌다고 하는데

순간포착의 어려움(?)과 날이 어둑하게 질 때 쯤 노을빛에 보이는 모습이라 해 질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달이 달려 있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현월봉에 맘만은 걸어 놓고 떠남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을 따라 시작된 산행길, 단풍철이 아니라 좀 아쉬웠던 가로수길이지만

명금(鳴金)이 없는 대혜폭포의 봄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서서히 녹아내리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야은 길재의 눈물과 나의 삷의 어딘가에 묻혀 있을 어둠을 생각하며 녹아내리는 물과 함께 사라지기를 기도했다

금오산(金烏山) 정기를 타고 태어났다고 해서 금오산인(金烏山人)으로도 불리는 야은 길재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 등 후일 사림파(士林派)의 원천이 된 제자들을

길러냈다는 의미에서 보면 아마 이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비록 고사리만을 먹으면서 가난하게 도선굴에 은거하고 살았을지라도...

 

이 세상에 독불장군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자연도 마찬가지이다

금오산도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고 백두대간에 기대어 살고 있는 줄기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구미시민들은 지금도 독립된 산으로 인정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구미시민들의 자존심일 것이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금오산을 떠나면서 남기고 싶은 얘기이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사람이 필요하고 귀감이 될만한 멘토가 필요하 듯이

구리시민에 비친 금오산의 모습처럼 맘속에 담아 둘 수 있는 멘토를 나는 가지고 있었던가?

 

2월4일 입춘이 지나고 나니 이제 봄 생각이 절로 납니다

 

立春의 소리만 들어도 벌써 온대지에 피어나게 될 꽃 생각으로 생명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겨울,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었던 설원은 이제 서서히 존재감을 잃어 갈 것이고

우리에게 다가와 있던 움츠림도 함께 걷어지면서 기지게를 켜기 위한 과정에 있습니다

언제나 자연은 우리에게 희망만을 주는 것이 아니고

 

경계하고 경계하며 살라는 가르침을 주기에

마지막 남은 겨울의 시샘도 슬기롭게 지낼 수 있는 3450온누리 산우님들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리딩하시느라 수고하신 조교대장님과 가야산 총무님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해 주신 대장님들과 운영위원님들

구미의 진산 금오산에 정기를 맘꺽 받으신 함께하신 산우님들

고맙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초보산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