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관악지맥 2구간 - 국사봉에서 매봉(과천.의왕경계)까지 

 

 

언제 : 병신년(16년) 매듭달 12월 스물나흘 흙날

 

누구랑 : 초보산꾼외 1명 

 

어딜 :  금토동(성남) ~ 운중동 갈림길(서판교)  ~ 국사봉 ~ 망경대 분기점 ~ 매봉 ~ 정부과천청사역

                              

                                 더 많은 사진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3494 에 있습니다

 

 

 

동짓날 내리는 비...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된다는 동짓날에 비가 오면?

옛날에는 농사가 근본 이였으니 동짓날에 추울수록 다음 해에 풍년이 든다고 하는데...

지금이야 동짓날에 비가 오던지 눈이 오던지 절기를 따지면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니 다행...

가족들이 빙 둘러 앉아 집에서 쑤던 팥죽은 사라지고 시장 팥죽집에 길게 늘어선 진풍경에서 오늘이 동지구나...

동짓날 기나긴 밤이 길어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한 살을 더 먹게 된다는 사실이...

 

 

들어가기

 

한남정맥 전도

 한남정맥은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끝나는 칠장산에서 북서로 해발고도 200m 내외의 낮은 산들이 이어져

 한강 본류와 남한강 남부유역의 분수령을 이룬다.
이 산줄기를 이루는 산들은 도덕산·국사봉·함박산(函朴山)·부아산(負兒山)··

응봉(鷹峰)·광교산(光敎山)·백운산·수리산(修理山)·소래산(蘇來山)

·성주산(聖住山)·철마산·계양산(桂陽山)·가현봉(歌弦峰)·필봉산(筆峰山)·학운산(鶴雲山)·문수산 등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남정맥 [漢南正脈] (두산백과)

 

한남관악지맥

 

 한남관악지맥 漢南冠岳枝脈이란

한남정맥상에 있는 백운산에서 북쪽으로 가지 하나를 분기하여

하오고개 국사봉을 지나 이수봉에서 잠시 서진하며 매봉을 거쳐 갈현고개로 고도를 낮추다가 다시 관악산(632 m)을 솟구쳐 놓고

줄기 하나는 우면산을 거쳐 탄천으로 해서 한강으로 흘러 보내고

또 한줄기는 까치고개로 내려가 서달산(179 m)과 장승배기를 거쳐 안양천과 한강의 합수점 늪산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43 km를 관악지맥이라고 칭한다

 

 

 

한남관악지맥2구간 - 청색은 접속구간 : 매봉에서 정부과천청사역으로 하산

 

한남정맥 백운산에서 분기하여 북쪽으로 가지 하나를 만들어 의왕시와 성남시의 경계를 따라 국사봉까지 내려 왔다면

이제 이수봉에서 성남시와 작별을 고하고 의왕시와 과천시의 경계를 이루면서 관악산을 향해 서진하게 되는 구간이다

과천시민은 물로 서울시민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관악산

관악산의 족보를 찾아가는 여정 두번째 이야기... 청계산 이수봉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 답사를 떠나 본다

 

 

 

 

한남관악지맥2구간의 출발점인 국사봉을 오르기 위해 모란역 5번출구에서 11-1번 마을 버스이용. 금토동행

그런데 인터넷 자료에는 6,7번 사이 정류장이라고 해서 혼선이 있었음... 참조

 

11-1번 버스는 옛골에 많은 산우님들을 내려놓고 종점인 금토동에서 하차. 되돌아 찍은 사진

판교 금토동(金土洞)

金土洞은 조선시대 금현동金峴洞과 둔토리遁土理 에서 1914년 금(金)자와 토(土)자를 떼어다 만든 합성어이다

이곳은 금이 많이 나와서 돈을 쓰고 남아 돈을 물 쓰듯이 하여 돈이 퇴가 난다고하여 돈퇴리로 불렸다는 설화가 있으며,

1914년 일제가 처음으로 만든 조선 측량지도에도 특별관리지역 표시가 있는 마을이다.

 

 

오늘은 좀 멀지만... 평소에는 오기 힘든 성남 금토동에서 국사봉으로 올라 보기로 하고...이렇게 출발

 

 

정일당강씨묘역(조선후기여류문인)과 금릉남공철묘역(조선후기문신) 갈림길에서 직진. 이 길은 영남길이기도 하다

여기서 정일당 강씨 묘 방향으로 좌틀하면 머금이산으로 올라 갈 수 있다

 

삼남에서 서울로 가자면 거쳐야 하는 길목이기 때문에 교통의 요충지로서의 역활뿐만 아니라

특히 천림 산에는 목멱산에 봉화난 봉수를 전달하던 봉수(烽燧)터가 있다고도 한다

이 봉수 터는 세종5년(1423년) 최초로 설치하고 천천산 봉수로 다시 월천현 봉수로 불리다가

중종25년(1530년)에는 천천현 봉수로 불리었고 영조5년(1729년)에 천림산 봉수로 개명 되었다.

- 자료출처 : 성남문화원  http://ajl.co.kr/?m=bbs&bid=m5&uid=8093 아리랑 저널

 

 

여기서 옛골로도 갈 수 있다. 또한 아까 종점에서 시작된 영남길 갈림길이기도 하다.

 

혹시 그 때 줍다 남은 금조각이라도 하나 있을까?

서울로 가는 중요한 길목답게 지금 새롭게 걷기 열풍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초보산꾼도 꼭 한 번 걷고 싶은 경기 옛길 영남길이 지나가는 곳이다 

 

 

영남길은 또 언제 걸어볼까나? 바랑대신 배낭을 메고 출세를 위해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의 심정으로...금토동 출발 등산로

 

이제 본격적으로 출발... 그런데 여기가 능안골이라는데...

능안골 산지정화초소

남원윤씨의 묘역이 이 부근에 있어 능안골이라 했다고 하는데 애국지사 윤재옥의 묘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陵은 보통 왕족의 무덤에 쓰는 것으로 알고 있어 자료가 잘 못된 것 같고...

여기에 묻히신 금릉 남공철 묘역의 金陵은 호인 것 같은데... 어느 왕손이 묻혀 계신 것일까?

 

 

금토동은  윤치장 의병장과 남상목 의병장등 경기도의 대표적인 의병장이 태어난 의기의 고장이다

 

이제 능선을 만나 우측으로...좌측은 머금이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정일당강씨 묘와 사당으로 해서 올라오길 기대하며...

 

이런 높이에도 운동시설이?

 

이제 좌측 국사봉과 우측 이수봉이 동시에 보이기 시작하고

 

운중동의 또 다른 산 서둘산으로 내려갈 수 있는 갈림길. 운중초등학교 갈림길

 

성 루도비꼬성지 갈림길 - 안내판이 지워져 있다

 

 

조금 내려와 보면 천주교 선교를 위해 조선에 와서 포교활동을 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당신 새남터에서 

26세의 어린나이에 순교하신 성 루도비코(볼리외, Beaulieu)신부가 박해를 피해 숨어 계셨던 굴이 나온다

 

운중동 먹거리촌 갈림길 - 어찌됐든 이 코스도 이제 운중동의 규모가 커지면서 많은 산객들이 찾고 있다

 

국사봉이 가까워지면서 연리근을 만난다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말처럼 쉽지 않다

서로 양보하며 살면 된다지만 살다보면 어디 맘먹은 데로 살아지던가?

이성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이렇게 합合을 한다는 것이 어려운데

부부간 혹은 남녀 간의 사랑의 상징이 된 연리지連理枝가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지금 보고 있는 연리지로 다시 태어날 확률이 많지 않다는 사실

가까이서 자라다 보니 어느 한 쪽이 시들어 죽거나 서로 부실하게 자라다 보면 모두 죽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가 되는데 성공하면 몸집이 커진 만큼 더욱 강한 나무로 자란다

두 나무가 합合한 만큼 내실이 튼튼하니 병충해등 외부의 환경에 강해진다나 어쩐다나... 

 

 

하늘에 올라가서 비익조가 되고 떨어져선 연리지가 되어 세세생생에 부부가 되어야지라고…”

월탄 박종화 선생의 역사소설 ‘다정불심’에 나오는 말이다.

죽어서도 ‘연리지’가 되자며... 이 사랑 영원히 변치 않겠다고 맹세해 놓고는...

그렇게 인간은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지만 연리지에게는 이별이라는 게 없다.

생을 다해 마감할 때도 아마 함께 세상의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자료 : 초보산꾼 - 검단지맥에서 만났던 연리지

 

뿌리가 완전히 다른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서 마치 나무 한그루처럼 자라는 것을 연리지라 한다

원래 연리는 후한後漢 사람이던 채옹이란 사람의 효심을 기록한 후한서 채옹전蔡邕傳에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연리連理는 효심을 나타내다가 훗날에 남녀간의 사랑 혹은 부부간의 사랑으로 쓰임이 바뀐 것은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그린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가 애창되면서 효심은 사라지고 사랑만이 남았다 

 

 

되돌아 본 굴참나무 연리지連理枝 

 

후한(後漢) 사람 채옹(蔡邕)은 성품이 독실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어머니가 병으로 앓아누운 3년 동안 계절이 바뀌어도 옷 한번 벗지 않았으며, 70일 동안이나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집 옆에 초막을 짓고 모든 행동을 예에 맞도록 하였다. 「그 후 채옹의 집 앞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자랐는데, 점점 가지가 서로 붙어 하나가 되었다. 원근의 사람들이 기이하게 생각하여 모두들 와서 구경했다.(又木生連理, 遠近奇之, 多往觀焉.)」
이 이야기는 《후한서(後漢書) 〈채옹전(蔡邕傳)〉》에 나오는데, 여기서 나온 ‘연리(連理)’는 처음에는 지극한 효심을 뜻하는 말이었다.

 

훗날 이 말이 부부간의 지극한 사랑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된 것은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장한가〉는 120구, 840자로 이루어진 당현종(唐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다.

<장한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애창되었으며, 시가와 소설과 희곡으로 윤색되는 등, 중국 문학에 많은 제재를 제공했다.
자료 : 다음 백과  고사성어 대사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26XXXXX00975

 

 

국사봉에 도착하면서 이제 본격적인 한남관악지맥이 시작된다

국사봉國思峰(540m)

고려 말 이색(어떤 곳에서는 조윤)이 망한 고려를 생각하고 그리워했던 봉우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전국에 많은 국사봉이 선비 사(士)를 쓰지만, 이곳 국사봉은 생각 사(思)를 쓴다.  
국사봉에는 봉화대가 있었다거나, 어느 선비가 나라님을 그리워한 유래를 가졌다거나,

또는 나라를 위한 기도터나 도당굿터가 있었다는 등 대부분 나라와 관계 있는 사연들이 많다.

 

 

좌측으로 청계사와 그 뒤로 관악지맥이 보이지만 오늘도 여전히 조망이 없다

 

가야 할 의왕시와 과천시의 경계인 매봉으로 가는 줄기인 관악지맥 능선

 

청계사 갈림길 안부를 지나 이런 안내판도 있고...

 

깔딱고개에서 옛골로 내려가는 능선과 만나 좌측으로 보면 이수봉 표지석이 있다 - 실제적인 이수봉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다

이수봉(545m)   

목숨을 두 번 건졌다는 의미다. 일두 정여창이 그의 스승 김종직과 벗 김굉필 등이 연루된 무오사화를 예견하고

이 산에 은거하여 두 번에 걸쳐 목숨을 건졌다 해서 목숨 수(壽) 자를 쓴 ‘이수봉(貳壽峰)’이라 불린다.  

 

 

헬기장을 지나 계수기까지 통과하면

 

 

청계산 정상 망경대 갈림길이 나오면 관악지맥은 직진. 의왕대간 안내판을 계속 따른다

이제 성남시와 이별하고 과천시와 의왕시의 경계를 따른다

 

바로 전망대에서 본 청계산 석기봉과 그 뒤로 청계산 정상 망경대

 

가야할 매봉이 먼 것도 아닌데 가운데 희미하게 멀리 조망된다. 앞에는 헬기장봉. 우측이 서울대공원과 과천시내

 

기이한 바위를 지나는데 청계산의 전설 안내판이 있다. 전설의 바위가 이 바위?

 

그런데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 사진이 지워져 어떤 바위를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아님 여기에서 봐야 하나?

 

청계사 갈림길인 절고개 안부를 지나 헬기장이 있는 388.7봉 - 삼각점이 있다

 

과천 갈림길 - 응봉 우회길이다

 

응봉에서 되돌아 본 헬기장봉과 우측 국사봉 좌측 청계산

 

응봉 369m  과천시와 의왕시의 경계

 

응봉에서 담아 본 과천시와 관악산

 

계속 의왕대간 이미마을로 내려오다 과천정부청사역으로 갈림길을 지나니

 

길 위에 삼각점이 보인다. 348m

 

 

예상보다 늦어진 산행... 과천시에서의 약속시간을 맞추기 위해 여기서 하산 하기로...  탈출하기 위해 과천청사역으로 우틀

관악지맥은 의왕대간따라 이미마을로 계속 직진해야 해야 한다. 담 구간도 짧게 잡았으니 다시 매봉부터 시작할 예정

 

청사역으로 탈출하는 길따라 계속 내려오면 약수터와 운동시설을 지나고

 

우틀하면 동네라 복잡하다고... 현지 주민의 말쌈에 따라 직진했다

 

여기서 우측으로 해야 청사역으로 하산이 가능하다

 

이 시설이 계속 보인다. 포스트 삼아 내려오면 좋을 듯...

 

굴다리를 지나면 래미안 슈르 대단위 아파트가 나오고 아파트를 빠져 나와  과천청사역에서 모임 후 정리한다

 

 

 

길은 서로 소통할 때만이 존재 한다.

이웃과 이웃을 연결해주는 소통도 좋고 산길을 걸으면서 자연과 소통하는 것도 좋고...

길은 소통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이웃과 이웃이 맘의 문을 닫아 버리고 우리가 산을 찾지 않는다면 소통할 길은 사라진다.

우리가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고 아무 때나 자연과 소통할 수 있는 것도 길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 이래 길 따라 남겨진 수많은 사람들이 소통하며 남겨놓은 흔적들이 켜켜이 살아 있고

그들이 만든 길속에 풍파를 견디며 살아 왔을 흔적들이 많이도 숨겨져 있을 것인데

우리가 길을 찾지 않으면 선조들이 남겨 놓은 삶의 흔적까지 잡초에 묻히게 되는 것이다.

 

자연은 항상 신선한 공기와 녹음을 선사하는 숲길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황무지 같은 벌판도 준다.

그 때도 나는 구름사이로 비추는 햇살을 벗 삼아 나의 그림자로 자화상을 만들어 소통하고 

구름사이로 비춰주던 햇살마저 구름이 다시 가져가버리면 다시 사라질지 모르는 나의 자화상이지만

알면서도 내가 길을 찾는 것은 열려 있는 소통의 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앞 선 사람들이 남겨놓은 길 따라 나의 자화상을 비춰 살아가는 세상은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음이니...

 

초보산꾼이 지금 걷고 있는 지맥길도 자연과의 소통이며 선답자가 걸었고 또 후답자가 걸어 갈 것이고...

그렇게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길이 있기 때문이다.

 

길...

이왕이면 소통의 길이였으면...

불통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는 지금 차가운 벌판에서 떨고 있지 않은가??

 

 

           초보산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