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령 운영위원님과 함께한 산행 - 관악산

                                  

 

언제 : 2013년 3월 1일 금요일

 

누구랑 : 은비령님,  연모님,  캐츠비님,  도덕산

 

어딜 :   관악역 - 삼성산 - 무너미 고개 - 삼막사 - 염불암 - 안양유원지     

                                                  (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삼막사 주자료는 http://weekly2.cnbnews.com/category/read.html?bcode=5530 에 있습니다

 

 

 

가람은 장송숲에 고즈넉하게 앉아 있다

 

 

 

삼막사 가람배치도 http://www.koreatemple.net/korea_temple/traditional_temple/place/view.asp?category_id=9&temple_seq=315

 

 

 

삼막사 유래

 

절 입구의 안내판에는 신라 문무왕 17년(677년) 원효, 의상, 윤필이 천막 치고 도를 닦았기에 삼막사(三幕寺: 휘장 막)라 한다.

여지승람 기록에는 삼막사(三?寺: 아득할 막/묘)로 기록되어 있으니 세 성인이 천막치고 도 닦았다는 이야기는 후세에 붙여진 이야기인 것 같다.

정사(正史)에는 기록이 없으나 세상에 전해지기로는, 세조 때 왕실의 안녕을 빌던 원찰이 서울 네 곳에 있어서 4대 명찰이라 했다는데 동쪽은 불암사, 서쪽은 진관사, 남쪽은 삼막사, 북쪽은 승가사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삼막사에는 문화재도 많고 볼거리도 만만치 않다

삼막사는 1천300여년전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원효(元曉)·의상(義湘)·윤필(尹弼) 등 세 성인(聖人)이 암자를 지어 정진한 것을 삼막사의 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이때부터 삼성산(三聖山)이라 불렸다 한다.
그 후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중건한 후 관음사(觀音寺)로 부르다 고려 태조가 중수하면서 다시 삼막사로 고쳤다. 조선 전기에 들어서면서 무학대사가 한양 천도(漢陽 遷都)를 즈음해 절을 중수하고 국운의 융성을 빌었는데 남왈삼막(南曰三幕)이라 하여 한성 주변의 4대 명찰로 꼽히던 곳이다.

 

 

 

소나무 숲의 호위를 받으며 삼막사경내로 들어선다

산 중턱에는 세 개의 초막 중 하나인 삼막(三幕)만이 삼막사(三幕寺)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고 일막(一幕)과 이막(二幕)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범종각이 먼저 반기고

 

 

 

범종각 옆에 있는 부도탑

 

 

육관음전이 보이는 경내로 들어서면

나무판자들로 엮여있는 마당으로 되어있는 삼막사 본전인 육관음전과 명왕전, 망해루, 종무소로 사용 중인 건물이

 ‘ㅁ’ 모양으로 옹기종기 처마 끝을 맞댄 전각배치가 정갈한 느낌을 준다

 

 

 

명왕전(冥王殿)

삼막사에 특이한 것은 다른 절과 달리 지장보살을 모신 곳을 명부전이나 시왕전지장전으로 편액하지 않고, 명왕전(冥王殿)이라 이름 붙였다는 점이다. 경기 문화재자료 60호이다.

명왕전에는 중앙에는 지장보살, 좌우로는 무독귀왕, 도명존자가 협시하고 있고 그 옆으로 시왕(十王)이 도열하고 있다. - 안은 확인하지 못함

 

지장보살이란 분은 석가모니불이 떠나신 후 우리 중생을 위해 성불(成佛)도 미루고 중생 제도(구하기)에 몸 바치는 분이라고 한다.

‘중생 제도를 다해 바야흐로 깨달음을 얻고 지옥이 비워지지 않는다면 약속컨대 나 혼자서는 성불하지 않겠다.

(衆生度盡 方證菩提 地獄未空 誓不成佛)’라고 하셨다 한다.

 

지장보살 옆에는 우리가 잘 아는 염라대왕과 그 친구들, 시왕(十王)이 계신다. 이야기 나온 김에 시왕(十王)에 대해 짚어 보아야겠다.

흔히 불가나 민속신앙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49재(齋), 100일, 소상(小祥), 대상(大祥)을 치른다.
사람이 죽으면 시왕(十王)에게 10번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해서 일곱 번(49번) 심판 받고, 100일에 심판 받고, 1년(小祥), 3년(大祥)에 심판 받아야 심판이 끝나는 것이다.
이 때 돌아가신 영혼이 잘 보이게 도우려고 산 자들이 망자를 위해 재(齋)를 올린다.

죽은 지 일주일 후에 진광대왕에게 심판 받고, 그 일 주일 뒤에는 초강대왕에게 심판 받고….

이렇게 하여 3년 뒤 오도전륜대왕에게 심판 받는 것으로 심판이 끝난다는 것이다.

 

 

 

6분의 관세음(觀世音)을 모신 육관음전(六觀音殿)

 

절 마당으로 들어서면 시야가 확 트이는 것이 멀리 서해바다가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듯한 望海樓 - 조선후기양식

 

삼층석탑 직전 관세음보살이 있는 불전함

 

좌우로 놓인 수많은 작은 부처님들을 하나씩 찬찬히 바라보니 모두 표정이 달랐다. 자비롭거나 진중하면서도 익살스럽다

 

삼층석탑

마당에서 바라보는 축대 위에는 아담한 고려 시대 삼층 석탑 자리 잡고 있다. (일명 살례탑(撒禮塔),  경기유형문화재 112호 )

승장 김윤후(金允候)가 몽고군 원수 살리타이(撒禮塔)를 용인 처인성 싸움(1232)에서 죽인 것을 기념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김윤후는 살리타이를 쏘아 죽였는데 나라에서 제수한 상장군의 직위를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끝내 제수 받지 아니하였다 한다.

 

 

감로정 석조 (安養三幕寺甘露井石漕) - 물 저장용기이다

삼막사 경내 삼층석탑 아래쪽에 귀부형과 원통형 2기가 있다. 귀부형 앞쪽에 ‘甘露井(감로정)’이라 새겨져 있다.
귀부형은 거북 모양의 석조와 거북의 등껍질 문양이 새겨진 뚜껑이 각각 다른 석재로 되어 있다.
석조는 1837년에 조성된 것으로 4개의 석재가 석조를 받치고 있다. 석조의 앞쪽에는 목을 움츠린 거북머리가 표현되었다.

원통형 석조는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는 50cm정도이다.

 

 

천불전뒤로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토굴이 있다고 한다

 

앞 마당에서 본 삼성산 능선

 

삼성당

 

계단을 오르면

 

계단에 새겨진 두꺼비

 

삼막사 사적비

 

유형문화재 125호인 사적비는 숙종 33년(1707)에 세워졌는데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렵다.

사적비의 비갓은 팔작지붕형이고 지대석(地臺石)은 땅에 묻혀 있다. 비문(碑文)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나 "조선국 경기 관악산맥 갑묘행룡 삼성산하 사명삼막좌유향로봉(朝鮮國京圻冠岳山脈甲卯行龍三聖山下寺名三幕左有香爐峰)"과 건립연대(建立年代)를 밝히는 "강희(腔熙) 46년(四六年) 정해(丁亥)"란 명문(銘文)이 있어 이 비석(碑石)의 위치는 경기 관악 산맥 삼성산밑 삼막사에 있고 왼쪽에는 향로봉이 있으며, 조선(朝鮮) 숙종(肅宗) 33년(1707)에 건립되었음을 말해준다. - 사적비유래내용 -

 

 

요사체인 월명당 뒷편으로 우회하면 산신각이 나온다

 

정대스님이 2003년 11월 18일 새벽5시 안양 삼성산 삼막사 월암당에서 입적한곳이다.

스님은 입적에 앞서 ‘來不入死關 去不出死關 天地是夢國 但惺夢中人(올 때도 죽음의 관문에 들어오지 않았고/갈 때도 죽음의 관문을 벗어나지 않았도다/ 천지는 꿈꾸는 집이어니/우리 모두 꿈 속의 사람임을 깨달으라)’ 며 임종게를 남겼다. 1937년 전북 전주에서 출생한 스님은 1962년 전북 완주 위봉사에서 전강(田岡)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62년 용화사에서 전강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으며, 67년 통도사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스님은 도봉산 망월사 선원을 비롯해 수덕사, 용주사 중앙선원 등에서 수행정진했다. 스님은 은사인 전강스님으로부터 ‘板齒生毛(이빨에서 털이 난 도리가 무엇인가)'를 화두로 받고, 그날부터 자신의 전신을 견성(見性)의 열정으로 채워 정진(精進)에만 몰두했다. 3년동안 ‘판치생모(板齒生毛)’의 화두를 놓고 용맹정진한 스님은 불조(佛祖)의 진면목을 참구한 끝에 ‘중생과 부처가 다름이 없고, 마음 밖에 부처도 중생도 없음’을 자증(自證)하고 견성(見性)을 이루었다   http://saraegi.egloos.com/viewer/5657730

 

 

 

계속 이어가면 천연 바위에 최근 조성한 마애산신(磨崖山神)은 그런대로 산신과 동자와 범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삼막사의 산신각은 전각을 세운게 아니고 바위를 네모로 깊게 파 들어가 산신을 모신 형태이다.

산신과 호랑이 동자상을 새김했고, 우측에는 구름을 새겨놓았따.

 

 

 

계단은 계속 이어진다

 

산 위로 보이는 기암괴석

 

 

 

산신각을 돌아오니 정대스님이 2003년 11월 18일 새벽5시 입적한곳인 월암당이 보이고

 

 

 바로 삼귀자 각자가 보인다

 

또 이곳의 특이한 명물은 거북 귀(龜) 자를 전서체 등 3가지 형태로 써 놓은 이른바 삼귀자(三龜字) 암각인데,

불기 2947년(1920년) 서화가 지운영(池運永: 종두를 실시한 지석영 선생의 형님) 선생이 백련암을 짓고 은거하다 관세음보살을 꿈에 친견하고 

벅차오르는 환희심으로 글씨를 새겼는데 오른쪽 각자 머리에 ‘관음몽수장수 영자(觀音夢授長壽 靈字)’라 해서

꿈에 관음보살을 본 후에 글씨를 썼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앞에 요사체인 월암당, 그리고 명왕전이 보인다

 

 

경기도 문화재인 삼막사 남.녀 근석을 만난다

 

“칠성님 전 명을 빌고, 제석님 전 복을 빌고, 아버님 전 뼈를 타고, 어머님 전 살을 빌어…”
남근석, 여근석을 설명하는 안내판에는 이곳에서 치성 드리면 출산, 번영, 수명장수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랬는지 칠보전 안에 치성광여래는 이미 코가 없어졌다.

아들 점지 받기를 원하는 엄마들이 그 코를 갈아서 약 먹듯이 먹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칠성님 코를 베어 먹고 아들 낳기를 원했다니 빙그레 미소가 떠오른다. 얼마나 상징적인가.

 

 

칠보전 앞에는 경기시도 민속자료 3호인 남근석과 여근석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규모는 크지 않으나 남근석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정낭(精囊:불알)이 아담하게 붙어 있고,

여근석은 하트모양으로 예쁘게 마주하고 있다. 북두칠성과 남근석 여근석.

이는 회심곡이나 무가(巫歌)의 칠성풀이를 완벽히 실현한 장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삼막사 마애 삼존불상이 있는 칠보전

기자신앙의 대상물로서 산신각이나 칠보전(칠성각에 해당), 그리고 남여근석이 한곳에 모여있는 사례는 삼막사가 유일하다고 한다.

 

칠보전에는 치성광여래를 중앙으로 좌측에는 일광보살(日光菩薩), 우측에는 월광보살(月光菩薩)이 협시(脇侍)하고 있다

(경기 유형문화재 94호). 이 삼존불은 영조 39년(1736년) 조성된 것으로, 연대가 확실하므로 시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칠보전

칠보전(七寶殿)

칠보란 북두칠성을 뜻하는 말이다. 도교의 숭배 대상이었던 북두칠성은 불교에 수용되면서 칠원성군(七元星君)이 되고 북두칠성의 중심점인 북극성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로 자리 잡았다.

 

 

이제 삼막사 고개로 향한다

 

돌탑도 지나고

 

삼막사와 염불암 갈림길

 

염불암(念佛庵)이 보이기 시작하고

 

염불암(念佛庵)이 위치한 삼성산(三聖山)에는 두 가지 유래가 있어

그 하나는 원효, 의상, 윤필거사 세 분이 이 산에 들어와 원효대사는 삼막사(三幕寺)를 의상대사는 연주암(戀主庵)을 윤필거사는 염불암을 각각 짓고 수도하였다는데서 기인하고

또 하나는 삼막사에 지공, 나옹, 무학 세 분이 주석했던 까닭에 삼성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기록에 의하면 염불암은 고려 태조 왕건이 창건했다는 유래도 있으며 이 때 이름은 안흥사(安興寺)로 곧 염불암의 시초로 전해진다.

조선 태종7년(1407년) 한양의 백호에 해당하는 관악산의 산천기맥을 누루기 위해 왕명으로 사찰을 대중창했다고 한다

 

 

 

염불전

이후 계속된 중수를 하여 조선후기 철종때에 이르러 도인스님의 칠성각(七星閣) 건립과 1992년 청봉스님에 의해 요사체(療舍體)와 대웅전(大雄殿)이 완공되며 그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사찰 선방 주변에 있는 조선시대 부도중 마애부도(磨崖浮屠) 2점은 매우 특이한 형태로 부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경내에 서있는 500년의 보리수(도지정 보호수 5-2)는 염불암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범종각

 

대웅전

 

나한전

 

 

 

산신각, 칠성각이 보인다

 

 

 

 

 

미륵전

 

대웅전 뒤편에 위치한 높이 8m의 미륵불은 전해오는 말에 1947년 성공 기석(奇石)화상(和尙)이 주지로 부임하여

낡고 퇴락한 전각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불사(佛事)를 준비하던 중에 꿈에 미륵보살이 나타나 마애불상을 새겨 널리 중생을 구제하라는

현몽을 받들어 1964년부터 5년의 불사끝에 완공된 것이다

 

 

 

 

삼성산에 있는 삼막사와 염불암을 함께한 삼성산 산행을

안양유원지로 내려가 막걸리 한사발로 마친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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