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9차  부항령에서 우두령까지

 

 

 

언제 : 갑오년(14년) 열매달  열이틀 쇠날 밤  ~  열사흘 흙날 (무박2일) 


누구랑 : 대간5기 산우님들         

 

어딜 :  부항령 ~ 해인리 삼거리 ~ 삼도봉 ~ 밀목재 ~ 석교산 ~ 우두령

                           20.2 km(접속포함) (상황봉 대장님 공지내용)

                                                     (산행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여름을 마음껏 즐기고 이제는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하는 결실의 계절 열매달 9월

오곡백과가 식탁의 주인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수확의 기쁨을 선사하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언제나 풍성했던 추석 한가위도 바람처럼 지나고 

여름내내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던 맑은 하늘이 보상이라도 할려는 듯 잭빛 하늘로 수놓고

거기에 힌구름 몇조각 그려놓아 마음까지 가을로 떠나는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하고

우리 대간 식구들도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 잠시 잊었던 대간길을 위해 길을 떠나 본다 

 

        자료 : 디지털 김천대재전

 

 

대간 9차 등로

 

 

 

부항령 아래 있는 삼도봉터널에 도착하고

김천시의 지방도에 개설된 터널로는 삼도봉터널이 있다. 삼도봉터널은 김천시 부항면 어전리에 위치한다. 연장은 390m이고, 총 폭은 11m 높이는 6.8m이다.

삼도봉터널은 1999년에 준공되었다. 삼도봉터널이 생기기 전에 이곳의 부항령이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부항령은 예부터 김천시 부항면과 무주군 무풍면을 연결하는 통행로 구실을 했던 곳이다. 고개로서의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하다가

지방도 1089호선이 개설된 뒤 국도 30호선이 지나는 덕산재와 함께 소백산맥을 넘어 김천시와 무주군을 잇는 고개 기능을 수행하였다.

자료 : 디지털 김천대재전

 

 

이번 한가위를 환하게 밝혀주던 13%나 크게 보였다는 달도 이렇게 조금씪 세월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렇게 출발하고

 

부항령 마루금에 도착하고

釜項面

부항령은 경상북도와 전라북도를 연결하는 옛길로, 작게는 김천시 부항면과 무주군 무풍면을 오가는 지름길이다. 

부항면 어전리 가목 마을이 자리 잡은 곳의 형상이 가마솥과 같아서 가매실·가매목이라 하던 것으로 한자로는 부항(釜項)으로 표기한다

 

 

무풍을 중심으로 한 부항령 일대는 ‘정감록’의 십승지지로 손꼽혔다.

일제강점기에 나제통문이 뚫리지 않았다면 분명 무풍을 중심으로 한 부항령 일대는 십승지지의 복을 온전히 누리지 않았을까.

무풍은 행정구역 상 전북 무주군에 속하지만 부항령을 사이에 두고 수천년 경상도 땅 김천과 교우했다. 그래서 ‘전라도 속 경상도’이다.

통혼이나 상거래의 경우 나제통문을 통한 무주보다는 부항령과 덕산재를 통해 김천 등 경상도와 주로 이뤄졌다.

말씨도 경상도 말씨에 더 가깝다. 역사의 길이자 이상향의 길인 부항령은 고개를 사이로 인연을 잇고, 문화의 벽도 허문 옛길인 것이다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5092&yy=2009#axzz3BjauRQ5m

 

 

부향령 800m 이정표봉을 지나 우회길을 버리고 마루금을 따르다 만난 무명봉 -보천봉은 근거없는 명칭. 구미의 보천사가 있긴 있는데...

 

부항령1.5km이정표 지나 우회로와 만나 좀 더 진행하면 나오는 백수리산

백수리봉 1034  헬기장

백수리산은 무주 설천면에서 볼 때 눈이 많이 쌓여 수리를 닮은 이 봉우리가 하얗게 보여 백수리산으로 불러졌다고 전한다

 

 

삿갓봉 갈림길을 지나면

 

삼각점이 있는 1170.4봉인 유래를 알 수 없는 박석산 - 김천시경계 종주팀이 붙여놓았다

김천은 백두대간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총연장 62㎞. 6개면 22개 마을(리)이 수천년 동안 백두대간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김천의 백두대간은 봉화, 영주, 예천, 문경, 상주를 거치면서 고산준령의 기세를 이어오다 잠시 숨을 고른다.

용문산 맷돌봉(710m)을 시작으로 금산(370m) → 추풍령(220m) → 눌의산(743m) → 장군봉(624m) → 괘방령(300m)까지가 그러하다.

하지만 이내 황악산(1,111m) → 우두령(720m) → 석교산(1,207m) → 삼도봉(1,176m) → 대덕산(1,290m) → 대덕 삼도봉(1,249m·초전산) 등이

경상·충청·전라도 땅으로 다시 대간의 힘찬 기세를 이어준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김천이 금(金) 산지로 명성이 높아 삼도봉 자락인 대야리 인근 금광굴에서 금이 많이 채굴됐다고 한다

이곳에 경찰 주재소가 들어설 만큼 많은 기술자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인근 산에는 곳곳에 금굴의 흔적이 남아 있어 등산객들이 폐광구에 빠지는 일이 가끔 발생하는 등 주의를 요하고 있다.

 

 

전망이 좋을 듯한 나무계단을 지나고 나면 만나게 되는 해인리 갈림길

해인리(海印里)와 해인사(海印寺)

해인리의 지명에 대한 궁금증은 저 멀리 경남 합천 해인사로 향한다. 한자까지 동일한 이 두 명칭이 필시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일까?

기대와 달리 『경상북도마을지』나 『김천시지』에 적힌 내용은 약간 실망스럽다. 다음은 기록된 내용을 조합한 것이다.

“‘해인’이란 마을의 지명은 신라 시대 마을 뒤 삼도봉 골짜기에 해인사(海印寺)라는 큰 절 이름에서 따왔다고 알려져 있는데,

일설에 삼도봉 해인사가 경상남도 합천의 해인사로 옮겨 갔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해인리와 해인사에 대한 연관성이 그리 생뚱맞은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과거 해인리에는 해인사라는 사찰이 존재했으며, 이에 연유하여 해인리라는 지명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료 : 디지털 김천 문화대재전

 

 

삼도봉 대화합 기념탑이 있는 삼도봉

 

삼도봉(화전봉). 경상도 김천, 충청도 영동, 전라도 무주가 맞닿은 정점이다.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해인리 ,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미천리의 경계에 있는 산

백두대간상에 삼도봉이 세게인데 지리산 날나리봉(1490m)과 대덕산 삼도봉(초점산·1250m), 그리고 여기 삼도봉인데 

나머지 둘은 경남과 전남·북, 전북과 경남·북 등 경상과 전라, 두 지역의 경계인 데 반해

오늘 찾은 삼도봉은 경상 전라 충청 등 세 지역의 경계이기 때문에 진정한 삼도봉이라 한다.

 

 

게다가 삼한시대에는 마한 진한 변한의 경계였다니 삼도봉 가운데서도 으뜸이라 할 만하다. 

삼도봉을 중심으로 태백·소백·덕유·지리산이 갈라지니 사통팔달의 산줄기다. 이를 차지하려고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소백산 기슭 삼도봉은 삼국시대에는 신라, 백제의 국경이었다.

조선 태종 때인 1414년 조선을 8도로 나누면서 경상`충청`전라 삼도의 분기점이라 삼도봉 이름을 얻어 지금까지 유지되어 오고 있다

 

 

바로 앞에 있는 전망암에서 바라본 삼도봉에는 화합이 있기까지 지금은 웃고 지나갈 숨은 역사가 살아 있다

 

세 개의 도가 모여 있던 이곳에서는 항시 좋은 이야기만 전해졌던 것은 아니다.

“삼도봉헬기장에 가면 정상에 돌무더기 세 개가 있는데, 처음에는 한 돌무더기를 경상도에 가면 그 돌무더기를 경상도에 가져다 놓고,

전라도에 가면 전라도에, 충청도에 가면 충청도에 가져도 놓았어.

자꾸 자기네들 마을에 가져다 놓은께, 나중에는 돌무더기가 세 개가 되었는데, 각자 크게 쌓으려고 해서 계속 올렸다고 하더라고.

그것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싸움도 많이 하고, 몰래 가서 옮긴다고 보초를 서기도 했어. 지금은 없어지고 헬기장을 만들어 놓았어.”

 

 

지금은 이렇게 구름처럼 서로에게 다가 갈 수 있지만 돌무덤의 위치에 따라 잘 살 수 있다는 근거없는 전설때문에...

 

서수생[1936년생] 씨의 말처럼 삼도봉의 돌무덤은 그것이 위치한 도가 잘살게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늘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3도가 만나는 삼도봉에서는 한 발자국만 옮겨도 다른 도로 넘어가는 것이 쉬웠다.

이 때문에 이곳에 돌무덤을 쌓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도에 돌무덤이 많이 걸칠 수 있도록 했고,

이 과정에서 3도의 사람들이 깊은 밤 몰래 삼도봉을 올라 돌무덤을 옮겨 놓기를 거듭 반복했다는 것이다.

 

 

돌무덤의 위치를 떠나 이젠 크기에 집착하는 악순환은 계속되고  - 삼도봉과 석기봉

 

그러나 반복된 행동은 결국 분쟁으로 이어져, 돌무덤이 세 개나 만들어지는 웃지 못할 결과를 초래했는데,

돌무덤이 세 개가 되었지만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사람들은 다른 도의 돌무덤보다 더 높게 쌓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 옛날에 있었다는 삼도봉의 돌무덤을 직접 본 해인리 사람은 없다. 다만, 구전으로 전해 오는 이 이야기를 전혀 허구로 생각지는 않고 있다.

 

 

인간도 싸우다 정이 든다고 했던가? 오늘의 화합탑이 정답을 얘기해 준다 - 우리가 걸어온 마루금에 경상도와 전라도를 넘나들고 있는 구름

 

지리적으로 한 곳에 위치하지만 3도 사람들의 기질은 확연히 구분된다. 하지만 경쟁적 돌쌓기는 분쟁으로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3도의 사람들은 돌쌓기와 돌무덤을 이동하면서 서로 부딪히며 만났을 것이고,

이것도 하나의 관계가 되어서 상호 교류의 물꼬로서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디지털 김천문화대재전

 

 

석기봉에서 민주지산, 각호산으로 이어지는 각호지맥(초강지맥)의 갈림길이기도 하다 - 전북과 충남의 만남이기도 하다

초강(각호角虎)지맥 분기

석기봉에서 민주지산을 지나 각호산에서 초강에서 생을 다하는 산줄기이다

 

草江

충청북도 영동군의 심천면과 황간면에 있는 하천이다. 상촌면 삼도봉 북사면에서 발원하여 고자천 · 장교천 · 석천 · 송천으로 불리다가

 심천면 심천리와 초강리에서 심천과 초강이 되어 금강 본류인 고당강에 합류한다.

초강은 『해동지도』에 '초강서원'이 표기되면서 지명이 처음 등장한다. 『여지도서』에 '서일면 대초지리(大草旨里)'라는 관련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초강의 다른 이름인 심천은 조선 시대의 여러 지리지와 고지도에 이른 시기부터 기록되어 표기자 변화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료 : 한국지명유래집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66668&cid=43740&categoryId=44176

 

 

삼도봉에 있는 각호지맥 방향 이정표

석기봉(石奇峰, 1,205m).     충청북도 영동군과 전라북도 무주군 경계. 물한계곡

바위산이며, 쌀겨처럼 생겼다고 하여 '쌀겨봉' 또는 '쌀개봉'이라 부른데서 석기봉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하나

암석이 옹기종기 쌓여 있어 마치 송곳니처럼 솟은 봉우리가 '기이한 돌로 된 봉우리' 같다하여 석기봉(石奇峰)이라 불리워졌다 한다..

석기봉 정상 서남쪽으로 50m쯤 아래 암벽에는 삼두마애불이 새겨져 있으며 바로 옆에 샘과 캠핑장이 있다.

샘에는 물이 마를 때마다 3도(道) 인근 마을에 번갈아가며 상이 생긴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민주지산(岷周之山, 1,242m)
민주지산은 본래 산이 민두름하다는 데서 유래했는데, 언젠가부터 ‘민주’라는 이름 때문에 더 유명세를 타고 있다.

옛 삼국시대는 신라와 백제가 접경을 이루었던 산이기도 하다.
민주지산이라는 이름보다는 차라리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원래의 이름인 '백운산(白雲山)'이 훨씬 좋아 보였다.

이 이름에는 '산을 인간 세상에 광명을 주는 신성한 곳'으로 여기던 옛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있으니 말이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57088

 

일제 강점기에 한자로 표기하면서 민주지산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도에는 이 산은 '백운산(白雲山)'으로 표시돼 있다.

이를 근거로 한때 산림청과 시민단체, 지명 전문가들이 왜색 산명을 버리고 백운산으로 바꾸자는 운동을 펼쳤지만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하고 불발에 그쳤다.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20126000023


 

각호산(角虎山, 1,176m).

충청북도 영동군 용화면(龍化面)과 상촌면(上村面)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1,176m이다.

옛날에 뿔 달린 호랑이가 살았다는 전설에서 산의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배거리산이라고도 한다.

 

 

 

운동시설이 있는 삼마골재

삼마골재

삼마골재는 경북 김천 부항 사람들과 충북 영동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갯길이다.

삼막골 : 해인리에서 삼도봉으로 가는 골짜기이다.
삼마골재 : 삼막골에서 충청북도 상촌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헬기장을 지나면 삼각점이 있는 1123.9봉

 

밀목령(닭목령) 이름처럼이나 숲이 우거져 있다. 닭목령은 풍수지리에서  오는 말이다

 

1089봉에서 잠시 휴식

 

전망암이 있는 1175봉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게 다가오는 계절이 바로 지금과 같은 새롭게 다가온 가을이다

아침저녘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이 가을이 왔음을 전해주고

창문을 열고 들어온 가을 바람에 나는 이제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준비한다

새로운 계절이 펼쳐놓은 들판에 피어나게 될 아름다운 풍경들은 가을이 주는 힘인 것을...

 

 

삼도봉에서 석기봉 민주지산으로 이어지는 각호지맥

 

생각만으로도 풍성했던 한가위가 오곡백과로 상차림을 먼저 마련해 주고

가을의 전령사인 코스모스꽃을 먼저 피워 이미 우리 맘속에 자리하더니

이제 사루비아나 백일홍 국화꽃이 가을의 전령사 다운 모습으로 우릴 반길 준비에 들어가고

파란 하늘과의 조화를 위해 나무들도 단풍으로 갈아 입을 준비를 하고 있다

성질 급한 놈들은 벌써 꽃을 피워 이미 우리 눈을 즐겁게 하고 있지만...

 

 

가야할 석교산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렇게 다가온 가을은 우리가 아무리 아쉬워 해도 머물러 있어 줄 리 없고

우리가 아무리 코스모스를 사랑해도 피었다 질 것이고

시간의 흐름속에 만물의 모든 것들은 이렇게 숙명처럼 오고 가나니

아쉬워 하기 전에 가을 열심히 사랑하고 즐길 준비를 하는 시간들이 싾여 가기를

 

 

암벽능선을 지나야 한다

 

대지에 피어나는 가을처럼이나 여기 대간길에도 역시 자유롭게 넘나들던 구름이 맘껏 푸른 가을 하늘을 노닐고

우리가 걷는 길에 구절초가 만발하고 수줍게 쑦부쟁이도 존재감을 알리는 가을을 재촉하는 꽃들이 있어서 행복했던 하루

시간은 결코 우리 것이 될 수 없으니 순간순간 맘껏 즐길 수 있는 대간 산우님들이 되시길

 

 

석교산 이정석이 있는 정상

石橋山(화주봉)

여지도서(輿地圖書)에 '황악산은 추풍령-괘방령에서 와서 서쪽으로 석교산-삼도봉을 일구었다,하였으니

석교산이란 '황악산과 삼도봉 사이의 돌다리(石橋)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석교산의 산세가 여러봉을 거느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냇물을 건너는 돌다리 정도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화주봉은 남쪽 골짜기의 숲실마을 사람들은 석교산에서 흘러내리는 골짜기를 화주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되돌아 본 1175봉과 그 뒤로 각호지맥

 

이제 가을임을 느끼게 신록도 서서히 빛을 잃어 가고 있다

 

아침 저녘으로 느끼는 몸에 다가오는 공기의 감촉은 이미 가을임을 느끼지만

산속에 들면 그래도 아직은 가을이라 하기에는 푸르던 잎이 그대로 인 것 같고

그래도 계절은 이제 소리없이 우리 곁에 내려 앉는다

자세히 보면 잎속에 감춰진 상처를 보면 자연들도 가을을 준비하고 있음을 느낀다

 

 

오랜만에 대간길에 왕림해 주신 탱이하트님의 가을여심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오고 가는 계절은 숙명처럼 우리곁에 다가오고 있다

가을의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봄 여름을 지나면서 오랜동안 흔들리면서도 온 갖 서러움을 품안에 안아 주었기 때문이다

다가온 계절따라 대지에서 품어 나오는 소리에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석교산에서 우두령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어 사진 먹익감으로 선정된 나무

 

가을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 다니고 있는 저 새들은 알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단풍되어 흘린 낙옆들이 나를위한 자양분이 된다는 것을 나무는 기억하지 못한다

날개를 가진 숙명을 알기에 새는 그렇게 날 수 밖에 없음이고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계절에 따라 살아남기 위해 낙옆을 위한 단풍의 과정이 나무의 숙명인 것이다

 

 

이제 가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대간 산우님들

 

우리가 산속을 걷다 보면 얼키고 설킨 자연의 조화속에서

오고감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을 눈으로 감촉으로 느끼면서 걷는 기쁨

바람에 흔들리는 것 조차 다르게 보이는 가을의 풍경은

바람이 불고 지나간 호수에 파문처럼이나 길게 여운을 남기게 해 준다

 

 

갑자기 삼각점이 나타나고 - 지도상 815봉인 듯

 

동물이동생태통로가 있는 오늘의 날머리 우두령

牛頭領

우두령(牛頭嶺)은 고개로 이어지는 산 능선의 생김새가 소머리와 비슷하여 붙인 이름이다. 행정 구역상 거창군에 속하는 우두령에서 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우두령마을이 있다.

김천 구성면과 영동 상촌면을 잇는 고개인 우두령은 추풍령과 괘방령보다는 키가 훨씬 크다. 해발 720m에 이른다. 백두대간 산줄기의 삼도봉과 황악산 사이에 있다.

우두령 주변은 황악산, 삼도봉, 석기봉, 민주지산, 각호산 등 1,000m가 넘는 높은 산들이 둘러싸 심산유곡을 이룬다. 그래서 우두령 기슭은 깊은 산골의 오지였다.

그래서 우두령은 궁벽한 통로인 것이다. 대동여지도도 우두령 주변의 지리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우두령의 상징물

우두령이 얼마나 오지였길래 영동 상촌의 흥덕리라는 마을 이름이 ‘설보름 마을’이다. 설에 들어오면 보름에 나갈 정도로 오지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두령의 깊음은 전쟁 때 피난처 역할을 했다고 한다.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할 때 임시 관아가 있었고,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도 중요 은신처였다.

우두령은 옛길의 원형이 대부분 남아 있다. 오지 덕을 본 셈이다. 

1592년 7월 17일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김면이 의병 2,000명을 매복시켜 왜군을 물리친 우두령 전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루의 여정을 정리하고 뒷풀이 장소에 도착하고

 

맛있는 삼겹살로 하루의 피로를 풀어본다

 

이번 구간도 역시 밤에 출발하여 어둠속에 빛나는 한가위달의 지원까지 받으며 출발했지만

진행하여 올라 갈수록 서서히 밀려드는 안개가 눈앞을 더 가로막고

어제 내린 충청남도의 비소식 떄문인지 습기를 많이 품은 안개가 안개비를 만들어

가을 한가위를 지나며 처음 맞이하는 대간길에서의 맑은 가을 하늘의 여명과 조망에 대한 바람과 달리

맘속에 감춰진 바램을 비웃기라도 하듯 내리는 안개비가 어둠속에서도 존재감이 있어 나무들을 울리고

이제 가을 준비하며 힘을 잃어가고 있는 나뭇잎이 흘리는 눈물에

걱정하며 걷던 사이, 그래도 날은 밝아 삼도봉에 올라 바라본 가을 하늘과 삼도봉이 만들어 낸 산줄기들

 

 

삼도봉에서 본 가을 하늘과 구름 그리고 우리가 어둠속에 걸어 왔던 길

 

 

거기에 언제 어둠속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구름들이 앞다투어 안개를 거두어 바람타고 넘나드는 장관을 만들어 주고

아직도 산줄기 곳곳에 숨어있는 안개마저 서서히 구름에 녹아들어 뒤따라 엉덩이를 밀어내고

그렇게 한동안 삼도봉에서 행복해하며 즐긴 오늘

삼도민들의 화합까지 의미가 더해지며 남다른 생각에 잠기게 했던 삼도봉에서의 풍경

 

 

인생에 정답이 없듯 우리가 산속에 들면 역시 산길에도 정답은 없다

대간길을 함께 하는 산우님들은 이미 한번 이상의 경험이 있는 산우님들이 많다 보니

이번 구간도 역시 별 다른 어려움이 없이 진행되어 우두령까지  모두 도착해 모처럼 일찍 서울로 올라 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늦어지는 후미와 서로 연락이 되지 않는 사이에 아직 산속에서 악전고투를 하고 있을 산우님을 생각한다고

갑자기 청목님이 맥주 한병 들고 달려가고...

오랜만에 함께 하신 산우님의 상태가 좋지 않아 막바지 진행에 어려움을 걲다가 결국 알바까지... 했다는 소식이 들어오고

 

 

아픈다리를 이끌고 그래도 진행해야 하는 산우님의 맘이 천근만근 더 아팠을테고 

거기에 후미대장님도 나름대로 역활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헀지만 숨겨진 정답을 찾지 못하고

일찍 끝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일찍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산우님들은 나름대로 추측만 있을 뿐... 어떻게 할 방법이 없고

겨우 연락이 된 후미팀의 소재가 밝혀지고 수송대장님의 3km를 넘는 뒷걸음질

그런데 청목님은 왜 안내려 오는 겨?  늦어지는 산우님을 생각하는 맘은 알지만 헨드폰도 놓고가 연락방법이 없으니...

약 1시간 반에 걸처 후미와 청목님의 돌출행동에서 오는 시간들을 곰곰히 반추해 보면

지도 한번 바라보고, 내가 행동전에 서로 연락할 헨드폰이라고 챙길 여유를 가졌었다면 하는 아쉬움

잃어버린 시간은 그렇게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없어저 갔으니...

 

인생에 정답이 없듯 산길에도 정답이 없음을 느끼게 한 마지막 순간들

나는 아직도 길에서 길을 묻고 있음을...

 

느끼고 또 느끼고 있을 뿐이다

 

 

수고했습니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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