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북정맥 8구간 : 샘내고개에서 도봉산까지

  

 

 

 

 

언제 : 병신년(16년) 해오름달 서른날 흙날

 

 

누구랑 : 나홀로

 

 

어딜 : 샘내고개 ~ 임꺽정봉 ~ 오산삼거리 ~ 한강봉 ~ 울대고개 ~ 도봉산 ~ 도봉산역(접속)

                 정맥 25 km(접속구간 포함)               ( 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

 

***  더 많은 사진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2882 에 있습니다 *********

 

 

 

 

병들지말고 신나게 한해를 보내자하고 힘차게 시작했던 해오름달이 이렇게 서서히 해오름의 이름을 내리려 하고 있다

겨울이 겨울답지 않다고 철없는 계절을 얘기하다가도 또한 너무 추우면 또 이상한파다고 난리들이다

삼한사온으로 대변되는 겨울철 날씨만큼이나 인간이 변덕도 삼한사온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무리 추워도 힘차게 뛰어 놀았을 것 같은 임꺽정의 놀이터쯤으로 생각했을 불곡산

이 초보산꾼에게는 어떤모습으로 다가올지 임꺽정의 채취를 조금이나마 느끼고자 길을 떠나본다

 

 

 

 

한북정맥 샘내고개에서 도봉산까지 등로 ; 참고용

 

이제 천보산 갈림봉에서 양주의 속살로 들어와 인간의 욕심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루금을 어렵게 이어오다

이름의 유래가 많은 도락산 갈림길을 지나 불곡산중에서도 임꺽정의 생가가 있어 이름붙여진 임꺽정봉을 지나

한국인의 기상을 품고 있는 삼각산을 키우기 위해 서서히 몸집을 높이는 과정에서 호명산을 지나고

한강봉과 첼봉으로 더욱 산세를 높여가며 감악지맥과 오두지맥을 분기시키고 울대고개에서 마지막 숨고르기를 하고

본격적으로 삼각산 속살속으로 들어가는 사패산에서 양주 속살에서 의정부가 만나게 된다

 

 

 

07:20 의정부역 5번출구로 나와 지하도로 해서 6-2번 출구로 다시 나오면 이번에는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제일시장입구정류장에서 샘내고개에 가는 25번 버스가 먼저 온다

 

07:40 15분정도 걸려 샘내고개에 도착, 버스가 왔던 길로 보이는 횡단보도를 건너 중고차매매단지 사잇길로 진행

샘내고개라는 이름은 근처에 맑은 물이 솟는 샘내가 있어 유래되었다. 꽃바위우물, 즉 화암정(花岩井)이라고 하는 유명한 약수도 있었다.

옛날에 서평강(徐平康)이라는 평강군수가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악정을 벌이다가 쫓겨나자 짚둥어리를 타고 이곳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서평강은 동네 복판에 큰 못을 팠으며 그 흙으로 못 옆에 산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풍경을 아름답게 하였다고 한다.

그 옆에는 큰 뒤주처럼 이상하게 생긴 바위가 있었으며 이 바위를 대감바위라고 불렀고 바위 밑에서 옥수가 나와 이곳을 샘내라고 하였다고 한다.
샘내고개는 달린고개라고도 불리었으며, 고개가 높아서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샘내고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신도비가 있는 묘지군옆 좌측 산속으로 진입 산행은 시작된다

 

07:51  무박산행에서나 보았던 당일산행에서는 생각지도 않은 일출을 사진에 담아본다

 

당겨보면

 

08:20  임도를 만나면 도락산 방향으로 좌틀하면 바로

 

도락산 쉼터가 나오고 우측 도락산 방향으로

 

 

08:28  도락산 갈림길에서 정맥길은 좌측으로

도락산(楊州 道樂山)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와 덕계동, 은현면에 걸친 산

도락산 정상에 있는 바위와 관련있는 이름으로 돌이 많은 악산이란 뜻으로 돌악산으로 부르다가

도락산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돌압산(突壓山), 도락산, 두락산(頭落山), 노락산과 같은 이름이 나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건국 후 지관(地官)을 시켜 송도(松都) 근처 500리 이내의 산천을 돌아보게 했는데

도락산만 송도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예를 드리는 모양이라고 해서 고려 시대에는 충신산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이 한양에서 건국되고 다시 한양 근처 500리 이내의 모든 산을 답사하도록 하였는데 오로지 도락산만 한양을 배반하고 있다 해서

조정에서 산의 머리[山頭]를 치게 했고 그로 인해 산의 머리가 떨어져 두락산이 되었다고 이런 전설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

고려 건국을 지지하고 조선의 건국을 반대한 세력들이 바로 이 도락산 주변 지역에 많이 살았음을 반영하는 이야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 네이버 지식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08:39  앞에 보이기 시작하는 임꺽정봉을 보면서 내려오면 부대시설이 있는 청엽굴고개에서 좌틀

 

 

08:43  부대시설로 인해 우회하기 위해 계속 포장도로를 따르면 이정표가 나오고 우틀

 

좌측으로 철탑이 보이면서 우리가 가야할 유격장이 있는 마루금이 보인다

 

인공암벽등 군시설을 지나면 부흥사 갈림길인 안부가 나오면서 군부대 시설은 끝이 난다

 

비교적 안전시설이 잘 돼있는 오름길을 하다 전망바위에서 멀리 죽엽산 방향

 

우리가 걸어온 도락산과 도락산 삼거리 방향 - 좌측 멀리 설인귀의 전설이 살아 있고 임꺽정봉까지 있는 감악산이 보인다

 

불곡산 8보루 안내판이 있는 임꺽정 봉 직전 마루금 갈림봉으로 우측 대교아파트 방향으로 - 임꺽정봉에 잠시 올랐다 되돌아 온다

 

3대의적으로 불리며 장길산 홍길동과 함께 우리에게 소설과 드라마로 더욱 친숙하게 다가왔던 소설 "임꺽정"

조선 명종임금 당시의 기록인 명종실록에는 임꺽정과 무리들을 약탈과 살인등을 서슴치 않는 인간들로 묘사하고 있는데

일제시대 민중의 결집을 위한 방편으로 사회주의적인 성향의 독립투사였던 홍명희의 손에 의해  1928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되면서

명종실록과 역사적 해석을 달리하여 새로운 역사인물로 그려지며 한국문학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재 탄생한 것이다

 

 

 

임꺽정봉은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생연도는 알 수 없고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신분으로 태어나 주로 황해도 구월산 일대의 산악지대를 본거지로 삼았다

힘(力)하면 임꺽정을 떠올리지만 도적만이 아니고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그를 따른 것을 보면 지략가이기도 했다

거기에 단순한 도적이 아니고 양반과 토호들의 재물을 빼앗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폭정을 일삼는 관청까지 상대하니

폭정에 시달리다보니  관군을 더 괴롭혀 주기를 바라는 조정에 등을 돌린 민심을 얻는데 성공하며 의적으로 거듭난 것이다

 

 

 

 

우회하여 임꺽정봉으로 올라와 가야할 마루금을 담아 본다.

나무가지 물결따라 산성산 호명산 한강봉이 서서히 높이를 높이고 있다. 우측 끝이 감악지맥의 은봉산?

 

도적때로만 생각했던 조정에서도 턱밑까지 다가오는 좀 도둑을 잡기 위해 을묘왜변의 영웅인 장수까지 투입해야 하고

이번기회에 한건 올리려는 관료에 의해 거짓으로 임꺽정을 잡았다고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두번이나 조정은 기만을 당하고서야

임꺽정은 수배령이 내려진지 3년만인 1562년 1월에 구월산 눈밭에서 한 시대의 영웅으로 산화한다

지배층에게는 흉악무도한 도적이라 불렸지만 수령의 가렴주구에 시달린 농민들에게 희망이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아침안개로 고요함을 주고 있는 고읍지구 방향

 

어머니 문정왕후와 외삼촌 윤원형에 휘둘려 제대로 왕권을 행사해 보지 못한 명종(明宗)이다 보니 중심이 흔들리고

거기에 을묘왜변까지...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시대에 백성들이 몸둘 곳이 어디겠는가?  

그렇게 임꺽정이 태어날 수 밖에 없었다. 탐관오리들에게 시달리던 백성들의 맘과 소원까지 담아서...

시대만 다를뿐 세월이 흘러 나라까지 잃고 일제의 식민지하에 백성들이 임꺽정 소설에 빠졌던 이유일 것이다

 

 

 

불곡산 상봉 방향

 

일제시대때 집필한 소설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으면 홍명희가 옥중에서도 집필을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비록 홍명희가 김구선생과 함께 북쪽으로 넘어갔다가 눌러앉는 바람에 월북작가가 되어 금서가 되었지만

90년대 초반 우연이 접한 임꺽정 소설에 96년말에 인기드라마로 다시 태어나니 몇번이고 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드라마 주제가의 가사도 좋지만 우리시대의 진정한 소리꾼 장사익님의 소리로 재탄생하니 가슴을 친다

 

 

 

임꺽정이 놀이터로 삼으며 앉았던 의자 바위라는데...

 

 

 

마지막으로 오늘 마지막으로 들르게 될 도봉산과 좌측의 수락산까지 담아 본다. 그런데 참으로 몰리 보인다

 

티끌같은 세상 이슬같은 인생   장  사익

 

이 나라 이 강산에 이 몸이 태어나 / 삼베옷 나물죽으로 이어온 목숨 / 기구하여라 고단한 세월 / 타고난 굴레는 벗을 길이 없어라
달은 기울고 별빛조차 희미한데 /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않는 세상 /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않는 세상
슬퍼말아라 티끌같은 세상  슬퍼말아라 이슬같은 인생 / 대장부 가는 길에 무슨 한이 있으리

 

 

 

다시 되돌아와 대교아파트 방향으로 내려오다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 군부대에 빼앗긴 마루금은 진행불가 좌틀

 

계곡과 눈을 맞추며 중간쯤 내려오면 제단이 있고 양주 불곡산 둘레길이 있는 김승골 쉼터를 지난다

 

대교아파크 앞 도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좌틀하면

 

 

백석삼거리(오산 삼거리)를 지나

오산 : 외딴 산이 있으므로 오미 또는 오산, 고산이라 하였는데 이는 뫼의 변화로 볼 수 있음.

홍복산의 큰 줄기에서 복지리를 거쳐 오산리까지 뻗은 둥근 산에서 나왔는데 이 산이 외롭게 떨어져 긴 꼬리를 늘어뜨리고 있어

마을 사람들에게 외로운 산이라는 뜻의 ‘고뫼’라고 불리다가 점차 변하여 ‘고미’와 ‘오미’를 거쳐 오산이 되었다.

 

 

 

여기에서 우틀하면 좌측으로 이정표가 보인다

원래 백석은 조선시대부터 사용되는 용어로써 전국 어디에나 존재하며, 백석이라는 땅이름이 존재하는 대부분의 지역을 보면

흰돌(白石)이라고 했다기 보다는 큰 들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ㅎ,ㄴㄷ,ㄹ이 변하여 흔돌▶흰돌▶백석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홍복산을 넘어서 오든 아니면 유양리에서 양주산성을 넘어서 오든 현재의 백석지역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넓은 들판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지역을 오갔던 옛사람들에게 잇어서는 산을 넘자 마자 눈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이 크게 인상에 남았을 것이므로

땅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 ㅎ,ㄴㄷ,ㄹ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자료 : 양주시 홈피

 

 

 

철물상 뒤로 보이는 산이 산성산

 

세심정 정자 직전 숲속으로 진행 - 잡목이 많아 처음부터 고라니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다 저도 놀라고 나도 놀라고...

 

산성산(212m)  우측으로 양주대모산성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정맥은 계속 직진

양주대모산성 楊州大母山城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 일대의 산성산(해발 212.9m)에 있는 산성.

사적 제526호.『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석축이고, 둘레가 906척이며, 높이가 5척이라 하였는데, 실제 둘레는 약 410m이다.

명문이 있는 기와를 비롯한 많은 종류의 기와편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로 보아 이 산성은 삼국시대 이래 사용되어 온 것으로,

현재의 석축은 통일신라와 고려기에 보수를 보아 오늘에 이르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제 정면으로 불곡산의 전체적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어 임꺽정봉과 불곡산 상봉을 잠시 담아 본다

 

이곳 어둔동에 어울리게 음침한 숲길이 이어진다. 철탑이 보이면서 앞에 호명산이 나타난다

 

도로가 나오면 작고개인데 마루금을 사유지인 농장이 점령하고 있어

작고개(어둔동 고개

대모산성 서쪽의 고개를 작고개(栢峴)라고 하는데, 여기서 ‘작’은 城(성)을 의미하는 순우리말 ‘잣’과 같은 것이다.

어둔동(於屯洞)이라는 땅 이름은 서쪽에 우뚝 솟아 있는 호명산(虎鳴山) 기슭에 위치하고 있어 해지는 시각이 빨라 쉽게 어두워지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임진왜란 당시 왜병들이 주둔했던 곳이라 하여 애둔지·왜둔치·왜벌이라고도 하며,

조선 시대 기와를 굽던 곳이라 하여 와평동(瓦坪洞)·와평·왓벌이 변한 것이라고도 한다.  

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도로를 건너 좌틀하여 적사함이 있는 곳에서 우틀

 

조금이라도 마루금에 충실하고자 농장쪽으로 접근해 보지만... 개짓는소리가 장난이 아니다

 

할 수없이 짐승들이 만들어 놓은 숲속길로 들어가 그나마 이정표역활을 하고 있는 철탑을 기준으로 진행

 

철탑에 다가와 마루금과 접속하는 순간 멧돼지의 거친 노랑털이 옆을 스치고 지나간다. 눈에는 두마리가 보임, ㅋ

 

길이 희미한데다 샛길도 많아 철탑가운데로 올라야 편하다. 마루금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호명산을 오르면서 어둔동이 태어난 사연을 알것 같다. 아파트에서 올라오는 길을 만나 이제 길이 좋아지고....

 

식후경 후 처음으로 호명산에서 사진 한장을 남긴다. 사진을 남겨 주신 산객님 감솨

 

 

이정표가 땅에 놓여 있는 안부사거리를 지나 홍복산 갈림봉에서 우틀한다

홍복산(弘福山463)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복지리와 의정부시 경계에 위치한 산

종루처럼 생겨서 온 겨레를 깨우쳐준다 하여 종루봉(鐘樓峰)이라고도 하고, 이 산이 보이는 곳에는 명필이 많다 하여 필봉(筆峰)이라고도 부른다.

양주시 남면 상수리에 사는 홍씨 선조들은 서울에서 이곳으로 낙향할 때 이 산마루에서 상수리가 제일 적지라고 판단되어 자리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그 후 자손도 번성하고 가문도 영화롭게 되어, 홍씨의 번영을 발견한 산이라 하여 홍복산(洪福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홍복산의 한자표기는 조선 성종대를 기점으로 홍복산(弘福山)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복산 [弘福山, Hongboksan]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2008. 12., 국토지리정보원)

 

 

 

헬기장을 지나

 

바로 삼거리가 나오는데 한강봉 입구 이정표는 우회하는 길인 우측을 가리키지만 마루금은 직진 - 결국 임도에서 다시 만난다

 

무덤이 나오면 우틀하여 바로 우측 숲속으로 희미한 길이 보인다

 

임도로 내려서서 바로 우측으로 트럭이 보이는 사잇길로 한강봉을 향해 직진한다

 

 

연리지를 지나 계속 오름길을 하면 한강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강봉(460m)  (漢江峯)   감악지맥 갈림길  양주시 백석읍 복지리·가업리, 장흥면 부곡리에 걸쳐 있는 산봉우리.

맑은 날 올라 남쪽을 내려다보면 한강이 보인다 하여 한강봉(漢江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봉우리에 비가 내려 빗물이 남쪽으로 한강, 북으로 신천과 덕계천을 흘러내려가 임진강이 된다 해서 한강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오랜 경험을 통해 전해졌으므로 믿을만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곳에서 봉화를 올렸다 해서 봉화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봉화는 장흥의 송추를 거쳐 한양으로 이어졌다.

자료 : 네이버지식  한강봉 [漢江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호명산에서 불곡산 그리고 태미산으로 이어지는 되돌아 본 한북정맥길... 많이 온 것 같다는 생각...

 

감악지맥이 분기한다

 

감악지맥(甘嶽支脈)- 한탄강 지류 산천 서쪽, 임진강 하류 동쪽 분수령

* 한강오두지맥 분기점인 한강봉에서 북쪽으로 은봉산-팔일봉-노아산-노고산-수레미고개-설미치고개-감악산-마차산-

아마니 고개를 거쳐 한탄강으로 맥을 다하는 39.6km의 산줄기이다

 

 

 

 

가야할 첼봉과 그 앞에 지도상 꾀꼬리봉으로 불리는 오두지맥 분기봉도 조망하고...

그리고 항공무선표시국봉 뒤로 멀리 도봉산까지 .. 오늘 거기까지 넘었다니...

 

우측으로 오두지맥로 들어가는 길이 보이는 갈림길 - 오두지맥은 초보산꾼이 한북정맥이 끝나면 진행예정. 그때 자세히...

 

 

오두지맥(烏頭支脈)..    현재 산경표를 따라가는 답사라 오두지맥이지만 신산경표에서는 한북정맥이라 하고 있다.

* 한북정맥/한강봉 -앵무봉 -개명산622 -월롱산229 -기간봉238 -보현산108 -오두산119으로 도상거리 약 40km

 

 

 

 

실제적인 정상인 환기구봉을 지나면 바로 첼봉 표지석이 있는 헬기장이 나온다

챌봉 채일봉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석현리, 백석읍 복지리에 걸쳐 있는 산봉우리

봉우리의 생김새가 마치 차일(遮日)을 친 것처럼 생겼다 해서 일부 기록에는 차일봉(遮日峰)으로 나와 있다.

산이 높아 해를 가리는 봉우리라는 의미에서 차일봉이라 부르다가 챌봉으로 변했다고 보는 설이 그럴듯하다.

그러나 원래 제일 높은 봉우리라 하여 제일봉이라고 불렀는데 미군이 챌봉으로 발음하면서 챌봉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제일봉은 신천, 중랑천, 공릉천 등 3개 지천의 발원지에서 유래한 명칭이며,

미군이 지도 제작시 영어로 표기한 것을 다시 한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라는 설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챌봉 [챌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좌측으로 보이는 항공무선표지국을 보면서 내림길

 

설치 시설물 예술작품이 계속 나오는데 설치된지 오래된듯...안부를 하나 지나 또 나오는 밤고개

 

지도상 425봉에서 되돌아 본 첼봉과 한강봉도 서서히 멀어져 가고

 

울타리가 나오면 좌틀

 

정문이 나오는데 좌틀하여 계속 포장도로를 따른다

 

도로에서 본 사패산과 도봉산 그리고 좌측으로 수락산 조망

 

좌측으로 보이는 숲길로 진행

 

삼각점봉도 지나고

 

좌측으로 묘지군이 나오면 묘지방향으로 우틀하여 사진의 묘지 끝부분에서 좌측으로 진입해야 한다

 

천주교 묘지군을 우측에 보면서 진행하다 시멘트 포장도로 직전 좌틀

 

도로가 나오면 우틀

 

울대고게에서 바라보는 오봉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당겨본다

 

울대고개 도착. 아직 시간이?  원래 계획은 여기까지 였는데...  도로를 건너 굴다리를 지나

울대고개  39번 도로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마을에서 의정부시 가능리로 넘어가는 길에 위치한 고개이다.

울때고개 · 울디고개 · 울티재 · 울치(鬱峙)라고도 한다. 고개가 매우 높고 험하여 넘을 때 매우 답답함을 느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울대고개 뒤에는 오봉산, 남쪽에는 삼각산, 서쪽에는 일영산맥이 있어 사방으로 꽉 막혀 있다.

울대고개는 『숙종실록』에 울치현(蔚峙峴)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도성 방위에 요충지로서 활용할 만하다고 적혀 있다.

땅이름은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일반적으로 한자로는 울치(鬱峙)라는 이름이 선호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울대고개 [蔚垈峴, Uldaegogae]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2008. 12., 국토지리정보원)

 

 

 

좌측으로 가면 수로에 밧줄이 메어져 있다. 물론 작업자들을 위한 것일 것이다

 

지금도 출입금지? 뒤로 이어진다

 

되돌아보니... 도로공사전에는 감시초소가 있었던 것을 기억되는데... 덕분에 감시없이 편하게 진행

 

철탑과 화생방봉

 

둘레길 직전 걷고 싶은 양주 숲길을 만난다. 도대체 이런 숲길은 되고 그 중요한 한반도의 축인 정맥은 출입금지로 묶어 놓고...

 

둘레길을 만나는데...  빨리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길로 다시 태어나길 바램을 가져 본다

 

출입금지 구간이 지나면 안골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게 된다

 

15:59  사패산 갈림길에서 시간상 사패산은 자주 왔으므로 오늘은 패스, 사패산 정상 방향

사패산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와 의정부시 호원동·가능동에 걸쳐 있는 북한산 국립공원 내의 산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원래 이름은 산의 전체적인 모양, 혹은 큰 봉우리의 바위 모양이 삿갓처럼 생겨서 갓바위산 또는 삿갓산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조개껍질처럼 생겼다 해서 일부에서 사패산이라 부르기 시작하였고 대부분의 지도가 이것을 따라 쓰는 바람에 사패산이 되었다고 한다.

혹은 조선 시대 선조(宣祖)가 딸 정휘옹주(貞徽翁主)에게 하사한 산이어서 사패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사패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면서 옛 이름을 밀어내 버렸지만 원래의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양주시 일대에서 갓바위산이라는 지명은 이외에 은현면 하패리에도 있다.

자료 : 네이버지식  사패산 [賜牌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6:02  송추방향 원각사 갈림길

 

16:07  범골입구 갈림길

 

 

16:10 삼각점

 

16:18 회룡갈림길 네거리

회룡사

첫째 설화는 왕자의 난 이후 태조와 태종의 사이가 멀어진 것이 배경이다. 끈질긴 함흥차사(咸興差使)들의 노력으로 태조가 돌아오게 되었다.

태조가 이 절을 찾았고, 무학이 회란용가(回鸞龍駕)를 기뻐하여 회룡사라 했다는 것이다.

둘째 설화는 이성계가 창업 전에 무학과 함께 이곳에 와서 3년 동안 창업성취를 위한 기도를 했다. 태조는 근처 석굴암에서, 무학은 무학굴에서 머물렀다.

그 뒤 이성계가 동북병마사가 되어 요동으로 출전하자, 무학은 홀로 남아 작은 절을 짓고 손수 만든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그의 영달을 축원했다.

왕위에 오른 이성계가 이곳으로 무학을 찾아와서 절 이름을 회룡사라 했다는 것이다.  

자료 : 경기일보 http://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idxno=625317

 

 

 

노고산 방향으로 보니 서서히 어둠은 몰려오고...

 

계속 걸어왔던 한북정맥길인 천보산과 고모산 죽엽산이 좌에서 우로 길게 눠워 있다. 앞에 회룡사와 석굴암도 보인다

 

16:47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원도봉

원도봉산721.3m 과 포대능선

도봉산역이 생기기 전 도봉산의 주 코스는 망월사 출발점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원도봉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도봉산 곳곳의 유래를 알려면 망월사를 기점으로 보아야 할 때가 많다고 한다.

망월사 뒤 능선을 보면 망월사를 안온하게 '감싸안고 있는 대(띠)' 같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어 감싸안을 포(包,抱) + 대(험준한 바위로 이루어진 곳,

 ex) 백운대, 문장대. 연주대)로 어원을 찾을 수 도 있다.      자료 :  http://www.re-rock.com/22

시중에 떠도는 포대능선의 유래는 대체로 두가지이다.
1. 능선이 포대처럼 생겨서.            2. 예전에 군대포대가 있어서

산 정상 부근에 많은 군부대들이 있지만 어느곳도 포대능선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16:51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8년(639년)에 해호스님이 여왕의 명에 의해 왕실의 융성을 기리고자 창건했다는 망월사 갈림길

 

포대정상과 그뒤로 자운봉이 어둠속으로 서서히 들어가고 있다

 

17:11  Y자계곡 우회 갈림길. 민초

민초民草샘

덕제샘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향하여 포대능선 조금 못 미친 곳의 해발 600여m 지점에 있는 샘으로,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지정하여 관리하는 시설이다.

명칭은 군사정권 시절에 민주화운동을 하던 민주산악회가 개발하여 붙인 것이라고 한다.

네이버지식 : 민초샘 [民草-] (두산백과)

 

 

 

17:27  Y자계곡 우회 갈림길 끝부분 - 안내문이 새로 생겼다

 

 

17:28 오늘도 오르지 못한 신선대

 

도봉산의 최고봉 자운봉. 일반 사람은 오를 수 없다

 

17:34  신선대를 오르지 않고 도봉산역으로 내려오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한북정맥이 서남진을 계속 하면서 이동시간이 짧아지고

거기에 동지가 지나며 조금은 더 산행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오랜만에 맘꺽 걸어본 하루로 기억될 것 같다.

임꺽정봉에서 한강봉을 보면서 무척 멀리만 느껴졌는데

한발한발 걷다보니 어느새 한강봉

또 다시 멀리만 보이는 사패산을 보면서 갈 수 있을까?

그래도 걷고 또 걷다보니 도봉산까지...

꾹 참고 가고 또 가다보면 언젠가는 오를수 있나니

오늘 자연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우리가 산길을 이어가다 보면 앞만 보고 갈 수 없기에 가끔 뒤돌아 볼 때가 있다

어떤 때는 의식적으로 돌아보기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잘 살아오고 있는지

아님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목적한데로 잘 오르고 있는지

그렇게 정상에 서면 이미 다녀온 길이 뒷덜미를 잡는 것도 아닌데

무의식적으로 나도 모르게 되돌아 보며 내가 걸어온 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우리는 언제나 정상에서 만나는 희열도 맛보며 기지개를 크게 켜고 세상을 품어 보기도 하지만

걸어오면서 내가 남긴 족적들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도 또한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뒤돌아 볼 때만이 희로애락으로 남겨진 모든 족적들을 한눈에 돌아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린 걷는 발걸음마다 남게 될 추억의 족적들을 후회 없도록 하기 위해

오름을 멈추지 않는 것이리라

큰 산을 오르면서 인생이라는 큰 바다를 건너오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봉우리들과 파도에

때론 부서지기도 하고 잠시 쉬기도 하면서 그렇게 오름과 항해를 멈추지 않는 것은

바로 내가 남긴 추억만큼 내가 걸어온 곳에 남겨졌을 켜켜이 쌓여있는 흔적들이 살아있어

맘속에 그리움으로 계속 남아 있고 또 추억의 사진첩에 그대로 담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늘도 멈추지 않는 열정을 남기려 애쓰면서 하루를 정리하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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